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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안갤러리 원문보기 글쓴이: 최영준
한국 추상 예술의 거목, 유영국론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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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가 유영국은 우리나라 추상예술의 선각자의 한 사람으로서 평생동안 고집스럽게 자기의 길을 걸어 온 사람이다. 80이 갓 넘은 나이, 생애의 마무리에 접어들면서 서사시적 장대함에서 서정적 아름다움의 세계로 전환하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물체의 근원에 대한 탐구를 계속한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Work, 38×45cm, Oil on Canvas, 1940
우리나라 추상예술의 선구자로서는 유일하게 오랜 기간동안 흔들림 없이 추상 양식을 지속시켜 왔기 때문에 유영국을 단순한 추상화가로 여기기 쉽지만 그의 예술은 어디까지나 자연에서 출발한다. 그가 바라보고 표현하는 자연은 다른 자연주의자처럼 묘사를 위한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거시적인 시야에서의 자연이다. 유영국이 추상화가로 불리우는 이유는 바로 자연의 근원이 형과 색으로 조형화되어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유영국이 이룩하고 있는 작품세계는 유영국이라는 예술가를 통해서 창조된 또 하나의 자연이기에 자연주의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재현보다는 실현을 성취하게 된다고 하겠다.
추상예술은 좁은 의미에서의 추상미술과 넓은 의미로서의 추상에 들어가는 비구상 영역으로 나뉘어질 수 있다. 좁은 의미로서의 추상미술이란 자연으로부터 추출된 이미지가 완전히 제거되어 철저하게 기하학적인 형태와 색채로 이루어진다. 이에 비해서 비구상 미술은 자연물을 대상으로 하여 그것을 양식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로써 작품 속에서 반드시 자연의 형태가 잔존하거나 그 흔적이 남게 된다. 이러한 견해를 참고로 할 때 유영국의 작품은 엄격히 말하면 비구상에 속한다고 하겠다. 초기 일본 유학 시절을 제외하고는 그 작품 표현에 있어 자연을 떠난 적이 없고 생활 주변에서 체험하는 산, 바다 등 자연 공간의 형상이 추상적 기호이면서도 동시에 자연의 흔적을 여전히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유영국은 1916년 4월 7일 강원도 울진에서 4남 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1933년 경성제 2고보를 4년간 다니다가 일본식의 규율에 얽매인 교육방식이 체질에 맞지 않아 마지막 1년을 마치지 않고 일본 유학을 결심하였다. 유영국은 경성제2고보 시절 미술반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의 진로를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면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한 결과, 문학보다는 미술이 맞는 것 같아 선택한 것이 결국 미술이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미술학교로서는 진보적인 미술교육을 시행하던 동경문화학원 서양화과를 선택하여 입학하였다. 형식을 싫어하고 자유를 향유하는 기질의 유영국이 보다 자유로운 학풍을 지닌 문화학원에 진학한 것은 단지 우연의 결과라기보다는 필연적인 선택이며 귀결이었다고 보인다. 서구 미술을 수용한 지 채 20년 남짓의 역사밖에 갖고 있지 않은 피식민국의 국민으로서 당시 일본에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전위미술에 경도하고, 그러한 학풍의 학교를 선택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유영국의 작가적 성향이 드러나는 대목이 될 것이다.
문화학원에는 한국인으로서 박일주, 이철이 먼저 다니고 있었고, 유영국, 김병기가 같은 학년으로 다녔다. 그보다 한 해 뒤에 문학수가 입학했으며, 그 뒤로 이중섭, 안기풍 등이 입학하였다. 구성주의적 경향의 유영국, 초현실주의적 작품을 하였던 문학수, 야수파에 경도한 이중섭 등 문화학원 졸업자들의 작품 경향은 대체로 일본 화단에서도 가장 전위적인 성향을 띤 것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독립전이나 이과전, 자유전 등 재야 미술단체전에 출품하였는데, 유영국은 주로 자유전을 통해서 작품활동을 하였다.
1930년대 일본 화단은 문부성에서 주관하는 문전이 1과는 동양화, 2과는 서양화, 3과는 조각으로 나뉘어 화단의 보수 세력을 형성하면서 아카데미즘의 아성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에 반문전파적 성향의 서양화가들이 문전을 떠나 이과전, 독립전 및 자유전을 창설하여 신예술의 터전을 만들었다. 포비즘과 초현실주의 성향이 강한 독립전의 출현으로 이과회의 재야성은 상실되었고, 파리에서 유학한 서양화가들을 중심으로 일본 최초의 전위미술 공모 단체인 자유미술협회가 창설되었다. 자유전은 추상미술이 주를 이루는 전위미술의 집합이었으며, 유영국은 일본에서 가장 전위적인 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전의 회우로서 추상작품을 출품하였고, 그밖에 한국작가로 김환기, 이중섭, 송혜수, 문학수, 안기풍, 조우식 등이 참여하였다.
▲Work, 74×90cm, Oil on Wood, 1940
일본 유학 시절 유영국의 작품이 국내에서 전시된 적은 없으나, 사진 자료를 통해서 소개가 되었기 때문에 대략 그의 작품성향을 짐작 할 수 있다. 해방 후 보리수 다방에서 있었던 전시회에 유영국의 작품이 사진자료로 전시된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간결한 직선에 의한 구성주의적 작품으로 매우 신선한 느낌을 받았었다. 나무판자를 사용한 기하학적 부조는 아마 일본에서도 보기 어려운 첨단적인 것이었으며, 유영국이 1943년에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좀 더 남아 있었다면 그의 작품 경향은 지금보다 더 전위적인 것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유영국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일본에서 나무를 재료로 사용한 사람은 없었고, 아르프의 나무 작품 정도가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나무를 비롯한 건축자재를 재료로 사용하게 된 것은 유학 시절 작품 재료를 구하려고 건축자재 상점을 기웃거리면서도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를 지켜보던 상점 주인이 유영국이 작가라는 사실을 알고 건축자재 부스러기를 선뜻 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전쟁의 기운이 짙은 시절에도 일본인의 작가에 대한 존경과 배려는 아주 놀라운 것이었다고 유영국은 말한다.
당시 유영국이 가장 존경하던 작가는 몬드리안이었다. 군더더기 없는 구성, 수직, 수평의 절제된 균형 감각의 몬드리안 작품이 "말이 없어서 좋았다"는 유영국의 말은 그의 과묵한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유영국의 자유전 참가는 1937년 1회전부터 1942년 6회전까지 계속되었으며, 2회 자유전에서는 약 40호 가량이나 되는 작품을 출품하여 최고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캔버스에 유화라는 기존 안료 및 기법을 탈피하여 나무판이나 호마이카 등을 사용하던 입체적 꼴라쥬 작품 외에도 자유전에 사진 작품을 출품하기도 하였다. 일본에서 오리엔탈 사진학교를 다니면서 습득한 기술로 경주 남산의 돌에 각인된 불상을 찍어서 몽타쥬한 작품으로 우리나라 사진미술의 선구적 시도로 기록될 수 있는 사건이지만, 현재 작품이나 그에 관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Work, 130×162cm, Oil on Canvas, 1965
자유전 외에 N.B.G 양화전이라는 동인전에 2회부터 7회까지 (1937-1941) 참가하는 등 일본 전위미술 운동에 적극적이던 유영국의 초기 추상예술 작업은 1940년대에 접어 들면서 군국주의적인 기운의 팽창과 전시체제의 강화라는 사회 상황 속에서 점차 그 기운을 상실해 갔고, 이는 일본의 모던아트 및 추상미술의 전반적인 쇠퇴와도 관련되었다. 일본에서의 전전모더니즘 미술은 1920년을 전후로 해서 소개된 미래파와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 1930년대의 초현실주의 및 추상미술의 전개로 이어지면서 해방 후 모던아트 운동에 직접적인 영향권을 형성하였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 모던아트 미술은 국내에서 전개된 것이라기보다는 일본에 유학한 몇몇 선구자들에 의한 일본 전위운동의 일부였기 때문에 이를 진정한 우리의 모던아트 운동으로 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피하기 어렵다.
물론 국내 화단에도 일본이나 서구 현대미술에 대한 소개가 지면을 통해 간헐적이나마 이루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1940년에 자유미술전 지방 순회전의 일환으로 자유미술경성전이 개최됨으로써 유영국, 김환기, 이규상, 이중섭, 안기풍 등 추상미술 위주의 작품이 처음 그룹전 형식으로 소개된 것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그러나, 추상미술의 국내 화단 정착은 해방 이후에 가서야 가능했고, 다만 해방 이전의 추상미술은 우리나라 모더니즘 운동의 전사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3.
9년 3개월 동안의 일본 활동 기간을 마치고 귀국한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약 3년 동안, 유영국은 미술보국이라는 전시체제의 문화행정을 피하게 위해 잠적하였다가 해방이 되자 곧 상경, 1947년 신사실파 창립에 가담하였다. 신사실파 창립 회원은 유영국, 김환기, 이규상 3인으로서 이들이 모두 추상미술 작가들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우리나라 최초의 추상미술그룹 성격이 강하게 부각된다. 그러나 2회전 개최시 장욱진이 새롭게 참가하였고, 3회전에는 백영수가 참여하여 그룹의 성격은 추상미술을 주축으로 한 넓은 의미에서의 모더니즘을 지향하는 듯 하였지만, 이후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고 부산 피난지에서 열린 3회전을 마지막으로 끝나고 말았다.
사실 당시의 화단 실정으로서는 추상미술을 전개하고 추진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유영국과 김환기가 일본에서 추상 작업을 시도했었고, 국내에도 이규상이라는 추상미술 작가가 있었지만, 추상미술 운동이 지속될 만한 기반이나 원동력이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유영국과 김환기의 작품 성향이 귀국 후에 이전의 완전추상에서 반추상적 경향으로 변하였던 저간의 사정도 추상미술을 실현시킬 만한 자극이나 힘이 부재했던 우리나라 화단의 빈곤함에서 비롯된 점이 클 것이다.
해방 이후 신사실파를 통해 발표된 유영국의 화면에는 산이나 바다 등 자연의 보편 형상이 화면 구성의 형식적 요인으로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1.4후퇴시 고향 울진으로 피난하여 생활하는 동안 자연과의 교감이 일어났으며, 이것이 작품 상에 새로운 변환을 일으키게 한 요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일본에 유학하던 시절에도 방학 때면 근처의 해변에 나가 하루종일 먼 산을 쳐다보거나 수영을 하는 것으로 소일하곤 하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자연 속에서의 생활과 체험이 유영국의 화풍을 전개시키는 자양분이 되었으리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어찌되었든 해방 이후 유영국의 작품은 명확하고 단순한 구성주의적 경향에서 자연에 대한 깊은 감동을 전하는 비구상적 경향으로 전환되었다.
▲Work, 130×162cm, Oil on Canvas, 1986-87
해방 직후인 신사실파 시절 유영국은 서울대학교 미술과 응용미술부에서 첫 교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장발 학장의 독주와 정치적 성향에 대한 반발로 2년 3개월 정도의 근무 생활을 과감하게 청산하고 자유인으로 돌아간다. 유영국의 교직 생활은 이후 1960년대 중반 홍익대학교에 3년 남짓 근무한 것이 전부이며, 역시 사표를 제출, 스스로 교직을 떠났다.
틀에 짜인 직장 생활이 성격에 맞지도 않았을 뿐더러 작품 제작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여기서도 유영국의 거침없는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주변 여건과 생활에 끌려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 행동하고, 타협이나 절충을 추호도 용인하지 않는 대쪽같은 성격은 결국 화단의 유행에 초연한 채 오로지 자기만의 양식에 몰입하게 하였고, 유영국이 우리 화단에서 독보적 위치를 점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성격에서 기인한 점이 컸을 것이다.
신사실파 이후 유영국의 활동은 잠시 휴지기를 맞다가 1957년 모던아트협회가 결성되면서 다시 재개되었다. 모던아트협회 멤버는 유영국, 황염수, 이규상, 정점식, 정규, 박고석, 한묵으로, 양식상의 확고한 이념을 주장하기보다는 반아카데미즘적인 성향을 가진 중견작가들의 모임이었으며, 넓은 의미에서의 모더니즘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4.
유영국은 조선일보사에서 주최한 현대작가 초대전에 1958년에서 1962년까지 참여하였다. 1957년부터 개최된 현대작가 초대전은 당시 뜨거운 열기로 확산되기 시작한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전개와 때를 맞춰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전개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유영국의 추상미술은 신진들에 의한 앵포르멜 미술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독자적인 길을 모색하고 자신의 양식을 다져 나갔다. 해방 직후 자연의 보편적인 형상을 기본 틀로 끌어 들여 전개시킨 유영국의 작품세계는 강렬한 색채 및 작열하는 섬광으로 표현성을 드러냈지만, 구성의 해체와 우연성의 강조라는 엥포르멜 미술과는 달리 견고한 구성과 구조를 항상 견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일정 시기마다 부분적인 구조의 해체와 회복이 반복되면서 미묘한 변화를 일으켰으며, 이것이 유영국 작품의 변천사를 살펴 볼 수 있는 근거가 되기는 하나, 커다란 맥락에서 볼 때 유영국 미술의 특징은 구성적인 패턴을 기본 구조로 하면서 강렬하고 순수한 색채적 표현이 큰 파장을 일으킨다는 점으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다.
유영국은 1962년 현대작가 초대전에 참가하던 작가들과 함께 신상회를 조직하였다. 신상회는 화단의 새로운 모색을 추구하면서 공모전을 개최하는 등 의욕적인 활동을 전개시켰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단체의 이합집산이 계속되었고, 이에 유영국은 1964년을 끝으로 모임을 떠난다. 이것으로 유영국의 단체 활동은 막을 내리고 그 후로는 주로 개인전을 통해 활동하면서 작품성의 심화에 주력하였다. 197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한 <유영국 초대전>은 작가 유영국에 대한 평가를 공고히 한 계기가 되었으며, 1996년 호암갤러리에서 개최한 <한국 추상화의 정신전>은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역사 속에서 유영국의 독자성을 다른 작가들과 견주어 평가하는 기회가 되었다. 유영국의 위상은 단지 우리나라 추상예술의 선구자였다는 한시적인 평가를 넘어서 오늘날 한국 추상미술의 특성을 드러내는 대표적 작가로서 그 의미의 지평을 넓힐 때 진면목이 드러날 것이다. 한국 추상예술의 거목, 그가 바로 유영국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