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범한 악인’ 아이히만과 악의 평범성 / 박강수
알려진 것처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에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표현이 한 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 책의 대단원, 유대인 ‘최종 해결책’(절멸)의 실무 책임자로 기소되어 처형대에 오른 전직 나치 친위대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의 유언을 인용하며 덧붙인 본문의 마지막 문장이다.
“그(아이히만)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잠시 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 나라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장례 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 냈다. 교수대 아래에서 그의 기억력은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다. 그는 ‘의기양양’해져,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이 마지막 순간에, 아이히만은 인간의 사악함 가운데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을 요약하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생각을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을.”(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역, 한길사, 470쪽)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최후의 순간까지 어떤 일관성을 견지하는 아이히만의 모습에 기가 찼던 모양이다. 우리네 상투어로 번역하자면, ‘하다 하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가버릴 수가 있구나’ 정도의 정동일 것이다. 한국말로 ‘평범’이라고 번역된 ‘banality’는 그 밖에도 ‘진부함’, ‘시시함’, ‘따분함’의 의미를 갖는다. 홀로코스트는 유럽 내 유대 민족의 3할을 멸한 파괴적인 스케일의 참극이었으나, 이를 집행한 인간은 마지막 형장에서마저 자책하거나 뉘우치는 기색 없이 추도사를 읊으며 의연함을 가장하고 있으니, 이 대비 안에 악(惡)의 역설적인 한 단면이 함축되어 있다고 아렌트는 보았던 것 같다. 악행은 참혹하지만 악인은 진부하고 시시하다는.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라는 부제가 채택되면서 이 말은 책의 문제의식을 아우르는 슬로건으로 크게 흥하였고, 그에 못지않게 거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뇌관은 아이히만에 대한 아렌트의 최종 판단, 즉 나치당의 유대인 절멸책의 실무를 총괄한 관료는 패륜적인 악마나 반유대주의에 절여진 광신도가 아니라 그저 판단력을 결여한 하나의 인간에 지나지 않더라는 결론이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의 여러 논점 가운데 피고인의 실체에 관해서는 꽤 확신을 갖고 기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이히만의 변론, ‘나는 결코 유대인 혐오자가 아니며, 어떠한 살의도 품은 적이 없다. 죄가 있다면 나치에 복종했다는 점, 다시 말해 히틀러에게 이용당했을 뿐이다’라는 주장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는 한편 정치사상가로서 그 나름의 해석을 보탠 결과물이었다. 홀로코스트라는 결과의 참상과 그 실무자의 캐릭터 사이 간극은 허탈하리만치 깊었고, 아렌트는 이를 횡단하기 위한 언어와 논리를 강구해야 했으니, 그것은 중대한 죄악이란 그에 준하는 존재감을 가진 비범한 악인의 의지가 아니라 제 행위의 귀결과 본의에 관해 사고하고 판별할 능력을 포기한 범상한 개인들의 근면성실함과 예종을 통해서 수행되고 완성된다는 깨달음이었다.
유대인 커뮤니티는 아렌트가 ‘평범성’이라는 표현을 통해 홀로코스트의 비극성을 호도하고 아이히만을 편들어주었다며 그를 민족의 배신자―아렌트는 유대인이다―로 몰았다. 여기에는 이 보고서의 또 다른 축인 ‘재판에 대한 평가’ 역시 불쏘시개 노릇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이히만 재판은 정의를 실현하였는가’라는 질문에 관해, 예루살렘 재판부는 몇 가지 중대한 한계를 노정하였다고 아렌트는 보았다.
자, 체포 과정에서의 위법성 논란을 보자. 1960년 5월23일, 이스라엘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은 아르헨티나에서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 아래 잠적하였던 아이히만을 붙잡아 이스라엘로 압송하였으며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게 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이스라엘의 정보 경찰 모사드가 타국에서 아이히만을 납치했다는 얘기였는데, 이것은 적법한 영장 없는 인신 구속이자 아르헨티나의 주권을 침해한 국제법 위반 행위였다. 합법적인 절차를 밟았다 한들 아르헨티나가 순순히 범죄인 인도에 응하였을지는 회의적이라고 하지만, 사법 집행의 착수 지점부터 위법으로 얼룩졌다는 사실은 간단치 않다. 아렌트는 나치 집권기 게슈타포가 유대인 언론인을 납치했던 사건에 이스라엘의 행태를 견주면서, 이 재판의 절차적 정당성을 강하게 추궁하였다.
절차를 향한 질타는 심판자의 태도와 관점에 관한 우려로 이어진다. 무리한 체포 절차에 더해 유죄의 예단을 숨기지 않으면서 이스라엘 당국은 아이히만 재판의 의미를 ‘유대인 학살자에 대한 유대인의 응징’으로 한정하고자 했고, 그로 인해 집단학살 범죄의 본질을 희석하고 말았다고 아렌트는 지적한다. 홀로코스트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자행되었으나, 그 사태의 본성은 인간성을 유린한 ‘인류에 대한 범죄’인바, 이때 정의 회복의 마땅한 주체는 비단 유대인 희생자뿐 아니라 인류 공동체 자체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렇다면 아이히만에 대한 심판의 권리는 예루살렘 지방법원이 아닌 국제재판소에 있을 것이며, 하다못해 판결에서나마 ‘인류에 대한 범죄’라는 사건의 의미 규정이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나 예루살렘 재판부는 홀로코스트를 오직 유대인의 문제로 축소하였고, 이는 아이히만 재판을 전세계 유대 민족을 의식화하고 결속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던 이스라엘의 의중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홀로코스트의 의미가 이스라엘에 의해 특권화되는 징후를 경고한 아렌트의 통찰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이에 반해 저자와 저작에 대중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피고에 관한 해설, ‘악의 평범성’ 테제는 세월의 풍파 속에 갖은 도전을 받게 된다. 그 요지는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오독했으며 교활한 나치주의자의 재판정 연기에 속아 넘어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2010년대에 이르러서 사실상 정설로 받아들여진 듯한데, 그것은 정치적 파워 게임의 결과 같은 것이 아니고 아렌트의 시대에는 접할 수 없었던 무수한 사료가 재발견되면서 아이히만에 관한 역사적 이해의 해상도가 대폭 개선된 덕분이었다.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2011)의 저자 베티나 슈탕네트는 이렇게 설명한다.
“1960년 홀로코스트 연구는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했다…(중략)…아렌트는 (아이히만에 대한) 수사 및 재판 기록을 가장 꼼꼼하게 읽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아렌트는 계략에 빠졌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거의 가면을 쓴 존재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그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만 기대와는 달리 그 현상을 여전히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렌트는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중략)…1979년 이후 소위 ‘사선 인터뷰’의 대부분이 열람 가능해졌다. 그것은 한나 아렌트를 비롯한 1961년의 재판 참관인들이 갖기 어려웠던 시각을 제공했다.”(베티나 슈탕네트,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이동기, 글항아리, 36∼37쪽)
‘사선 인터뷰’란 아르헨티나 망명 시절 아이히만이 비슷한 처지의 나치 잔당, 추종자들과 함께 교류했던 사적 모임의 토론 녹취록을 가리킨다. 토론회는 나치 친위대 출신의 네덜란드 언론인 빌렘 사선의 주도로 진행되었고, 현재 1000여쪽의 녹취록과 29시간 분량의 녹음테이프가 남아 있다고 한다. 아이히만 재판에서도 요약본이 증거로 제출되었고 당시 미국의 ‘라이프’, 독일의 ‘슈테른’에 일부 내용이 게재되기도 했지만, 오랜 세월 누구도 전문에 접근할 수는 없었다. 후대 연구자의 특권을 살린 슈탕네트는 각종 문서고에 흩어져 있던 문건과 녹음본을 취합, 대조, 복구하여 아이히만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중요한 퍼즐 조각을 맞춰냈다. 그가 복원한 아르헨티나의 아이히만은 사뭇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당내 ‘유대인 전문가’로 입지를 다지고 출세 가도를 걸었던 아이히만은 인종청소의 중책을 맡았던 제 업력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결코 독일 민족을 향한 사명감과 민족사회주의자로서의 신념을 굽힌 적이 없었다. 특히 1957년 가을에 녹음되었다는 사선 인터뷰 67번 테이프에서의 짤막한 연설에서는 격한 어조로 ‘우리’의 적인 유대인을 전부 말살할 수 있었더라면 만족스러웠을 것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앞의 책, 514∼518쪽) 이것은 “아이히만은 광적인 유대인 증오나 광신적 반유대주의, 또는 그 어떤 유형의 사상 주입과도 관련이 없었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한나 아렌트, 125쪽)라는 아렌트의 결론, “나는 나치 지배 집단의 일원이 아니었고, 희생자였으며, 오직 지도자들만 처벌받아야 한다”(앞의 책, 463쪽)라는 아이히만의 항변과 배치된다. 체포 직전까지 그의 내면에 자리한 진면목은 나치즘의 꿈에 취하여 더 많은 죽음을 성사하지 못한 데 안타까움을 느끼는 확신범에 가까운 것이었다.
슈탕네트는 이를 ‘악의 평범성’에 관한 문제의식으로 확장한다. 나치와 같은 극단적인 악은 단순히 사유 능력을 망실한 평범한 사람들의 순응만으로는 실행력을 얻기 어렵고, 능동적으로 범행의 방법론을 창안하고 실험하는 비범한 정신에 의해 조직된다는 것이다. 슈탕네트의 저작과 홀로코스트 가해자 연구의 동향을 국내에 소개해 온 이동기는 이를 ‘악의 비범성’이라는 말로 요약했다.
물론 이것은 아이히만 논쟁―슈탕네트의 표현에 따르면 ‘한나 아렌트와의 대화’―에서 결론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예컨대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야기하는 원리로 제시한 ‘무사유’란 말 그대로의 생각 없음이 아니라 타자에 감수성을 이입하는 도덕적 판단력·상상력의 상실을 뜻한다. 슈탕네트의 주장대로 아이히만을 뒤틀린 신념을 내재화한 ‘악한 사유’의 주체라고 본다면, 그것은 동시에, 책임 윤리에 관한 감각을 상실했다는 의미에서 여전히 무사유의 일례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윤리적 무사유의 출현은, 정치적 권리의 주체로서 인간의 개별성과 자율성을 말살하고 획일적인 가치 규범 아래 포획하려는 전체주의적 기획의 산물이므로, 아렌트는 여전히 악에 대한 탐구에 중요한 참고서를 제공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악은 언제나 평범성과 비범성의 공모를 통해 실천되는 것이고, 그 흐릿한 경계선을 분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이 몸소 보여줬듯 말이다.
박강수 <한겨레> 기자 turner@hani.co.kr
수정 2026-04-01 09:09 등록 2026-04-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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