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도는 순간, 결정적인 실책이 나온다. 관중석에서는 탄식이 쏟아지고, 인터넷에서는 욕설이 쏟아진다. 리그 10년차 베테랑 선수라고 해도 위축이 될 만한 상황이다. 그러나 이 2년차 선수는 그렇지 않다. 다시는 그러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오히려 악을 쓴다. 그러자 놀라운 광경이 벌어진다. 신인다운 패기에, 다시 관중석의 분위기는 누그러든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이 선수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한다. 한 마디로 경기장 분위기를 들었다 놨다한다. 인기 농구만화 <슬램덩크>의 강백호를 현실 속으로 옮겨놓은 듯하다. 근래의 2년차 선수 중 이런 캐릭터는 없었다. 그만큼 특별하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LG의 미래로 불리는 오지환이 그 특별한 주인공이다.
프로 1년차 '풋내기' 오지환을 잘 살펴보라. 만화 속 주인공 강백호를 닮지 않았는가? (사진=표명중 기자)
한 어린 야구선수에게는 꿈이 있었다. 첫째는 LG에 입단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유격수로서 성공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가 합쳐지다 보니 ‘LG의 주전 유격수’라는 꿈이 생겼다. 야구를 시작할 때부터 이 꿈은 근사한 동기부여였다. 오직 이 목표를 위해 달려왔고, 잠실벌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힘든 훈련도 버텼다. 그렇게 세월이 흐른 지금. 그 당시 꼬마는 이제 어엿한 LG의 주전 유격수가 됐다. LG의 2년차 내야수 오지환의 20년 인생을 요약하면 이렇다.
어찌 보면 젊은 나이에 꿈을 이룬 성공 스토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꿈을 이뤘다는 달콤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 선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수한 실책과 실패, 그리고 얼음장처럼 냉정한 평가였다. 칭찬 이상의 비난도 감수해야 했다. 항상 최고를 달리던, 그래서 항상 당당하던 오지환도 약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잡는다. “오늘 경기에서는 제가 할 수 있는 것만 다하게 해주세요”라며 하늘에 빌고 또 빈다. 오지환의 요즘 일상은 이렇다. 그 절박함 속에서 오지환은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최고의 유망주
“그냥 야구가 재밌었어요.”
부모님의 손에 끌려서, 친구의 손에 끌려서, 아니면 특출한 운동신경을 눈여겨 본 학교 선생님에게 끌려서. 선수들마다 야구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다 제각각이다. 오지환에게도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 외로 싱겁다. 그냥 재밌어서 하게 됐단다. 하긴, 재밌어서 시작한 것만큼이나 간단명료한 이유는 없을 터다. 보통 초등학교 3학년생의 마음을 뺏을 만한 것은 책상 너머의 여자짝꿍이나 최신 기종의 게임기다. 하지만 오지환의 마음을 뺏은 것은 다름 아닌 야구였다. 축구도 곧잘 했지만, 오지환의 최종선택은 야구였다.
주위의 권유로 시작하게 됐다면 금방 흥미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굳이 이 힘든 길을 걷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의로 야구를 시작한 오지환은 달랐다. 야구로 성공하겠다는 생각이 너무 확고했다. 때문에 어린 나이에 유학도 마다하지 않았다. 군산 출신인 오지환은 중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전학했다. 부모 입장이나, 학생 입장이나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보살펴 줄 어른도 없었고, 고민을 공유할 친구들도 없었다. 매일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자양중 3학년 시절에는 손도 바꿨다. 오지환은 오른손잡이다. 그러나 타격은 왼손으로 한다. 소위 말하는 우투좌타다. 당시 자양중 감독이었던 신경식 현 두산 타격코치의 권유에 따랐다. 좀 더 나은 선수가 되기 위한 결정이었다. 당연히 어려웠다. 왼쪽 타석에 적응하는 데만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신경식 코치는 당시 오지환을 두고 “1년 동안 정말 열심히 했다. 집중력이 뛰어났던 선수였다”라고 칭찬한다. 프로무대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신 코치가 극찬할 정도니, 오지환의 악바리 근성은 당시부터 빛을 발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 후로는 모든 것이 수월했다. 야구명문 경기고에서 유격수와 투수, 그리고 4번 타자를 겸했다. 웬만한 야구센스로는 엄두를 못 낼 일이다. 청소년 대표팀에서도 주축이었다. 안치홍(KIA), 김상수(삼성), 이학주(시카고 컵스), 허경민(경찰청), 성영훈, 정수빈(이상 두산) 등 쟁쟁한 선수들이 모인 집단에서 주장겸 4번 타자를 맡았다. 2009년 신인드래프트에서는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LG의 1차 지명도 받았다. 프로에 데뷔하면서 이렇게 첫 단추를 잘 꿴 경우도 드물다.
사실 투수로서도 성공 가능성이 있었다. 오지환은 경기고 2학년 때 140km 후반대의 강속구를 뿌렸다. 예나 지금이나, 에이스급 투수들은 더 높은 대우를 받기 마련이다. 주위에서도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그러나 오지환은 미련 없이 야수를 선택했다. 오지환은 “아무래도 키가 크지 않다보니 공을 던지는 타점이 낮았어요. 아무리 150km를 던져도 배트 중심에 맞고 멀리 나가는 투구 궤적이었거든요. 그리고 야수가 더 재밌어요. 특히 유격수라는 자리가 탐났죠. 다른 포지션보다 매력이 있거든요”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유격수 오지환은 그렇게 프로에 입성했다.
LG의 내년이 기대되는 이유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오지환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진=연합)
2군 선수 오지환
오지환은 일찌감치 LG의 1차 지명자로 내정되어 있었다. LG 역시 투수 오지환보다는 유격수 오지환의 가능성을 더 높게 점쳤다. 약했던 내야도 오지환을 눈여겨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기대가 컸다. 입단 직후부터 코칭스태프들이 달라붙어 관리하기 시작했다. 당시 LG 김재박 감독은 오지환에게 “수비부터 다듬어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유격수로 뛰려면 수비부터 보완해야 했다. 오지환은 고교시절 투수로도 활약했기 때문에 전문 유격수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오지환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이겨낼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그 벽을 뛰어넘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오지환은 지난해 5경기 출장에 그쳤다. 그마저도 9월에나 1군에 올라왔다. 이미 시즌의 성패는 다 결정된 이후였다. 당돌하게 프로에 입단했지만, 자신의 당돌함을 보여줄 기회조차 없었던 것 같아 속이 상했다. 스스로 “욕심이 많은 편”이라고 말하는 오지환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동기들의 활약도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뒤처지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2군 생활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렇게 힘들었다.
“사실 프로에 입단할 때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1군은 잘하는 선수들이 모이는 곳이고, 2군은 못하는 선수들이 모이는 곳이라고요. 지금이야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하지만, 당시 생각은 그렇지 않았죠. 솔직히 욕심이 많은 편이에요. 제가 왜 1군에 못 갈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었던 게 사실이에요. 치홍이나 상수같은 동기들이 1군에서 활약하는 것이 부러웠어요. 특히 치홍이는 한국시리즈에서까지 활약했잖아요”라고 당시를 돌이켜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도 1군에 올라와서야 2군 생활의 중요성을 알았다고 말하는 오지환이다. 오지환은 “지금은 ‘작년에 2군에 있었던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라고 생각해요. 지금도 이 정도인데, 작년에 1군에서 뛰었다면 지금보다 더 못했을 테니까요”라고 웃으며 말한다. 또 “일단 2군에서는 경기에 나갈 수 있었잖아요. 경기에 뛰면서 많은 투수들을 만날 수 있었고, 다양한 스타일이나 볼 배합도 익힐 수 있었던 것 같아요”라며 2군 생활이 지금의 자양분이 됐음을 말한다.
오지환은 그렇게 강해졌다. 그리고 박종훈 감독의 전폭적인 신임 하에 올해는 꾸준히 1군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다.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너무 힘들어요. 특히 여름을 보내면서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죠”라고 말하지만, 빙그레 웃는 얼굴빛까지 숨길 수는 없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의 꿈을 향해 전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오지환은 팬들의 환호가 큰 힘이 된다고 말한다. 오지환은 “작년까지 야구를 하면서 이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관중석에서 제 이름을 연호하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기도 해요”라며 고마워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자신을 외치는 관중들에게 더 큰 희열을 선물하겠다고 말이다.
LG의 주전 유격수
오지환은 신인급 선수답지 않게 차분하고 생각이 깊다. 말도 조리 있게 잘한다. 또 신세대답게 당당할 때는 당당하다. “범타 후 왜 그렇게 벤치로 급하게 뛰어 들어가나?”라는 질문에 “팬들이 보기에 처져 보이는 모습일 수도 있잖아요. 이왕 삼진을 먹는 거, 팬들 앞에서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이기는 싫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또 “사람들이 보기에는 타석에서 너무 욕심이 많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타격은 자신이 있어요. 그런데 잘 안 맞네요”라고 호탕하게 웃기도 한다. 이런 패기 때문일까? 올 시즌 LG 홈 팬들의 유니폼 뒤에는 ‘7번 오지환’의 이름이 부쩍 늘었다. 봉중근, 이대형 못지않은 인기다.
오지환은 LG 주전 유격수로 계속 나섰지만 잦은 실책으로 팀 패배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사진=연합)
그런데 올 시즌 수비 이야기가 나오자 목소리가 조금씩 죽어 들어간다. 이유는 모두가 알고 있다. 오지환을 올 시즌 실책 1위를 다투고 있다. “신인이 다 그렇지”라고 말하기에는 결정적인 순간에서의 실책이 너무 잦다. 내야수비의 핵이라는 유격수 포지션이기에 용납될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실책으로 경기를 지배한다”라는 비아냥거림도 많이 들었다. 오지환도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자책도 심하다. 팀이나 팬들에게 미안하기도 하지만, 정작 참을 수 없는 것은 자책감이라고 고백한다.
“욕심이 많다보니 최소한의 플레이도 못할 때는 ‘이것밖에 안 되나’라는 생각에 스스로 화를 내기도 해요. 특히 저 때문에 경기에서 지거나 중요할 때 제 몫을 못하면 더 그렇죠. 잠을 설치는 경우도 많고, 다음날까지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맴돌기도 해요. 경기에 들어서기 전 항상 똑같은 기도를 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끝까지 잘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런데도 그래요.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데, 이것밖에 안 되다보니 정신적으로 나약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러면서 오지환은 “저 때문에 진 경기를 다 이겼으면 지금 4강 경쟁이 한결 더 수월했을 텐데…”라고 말꼬리를 흐린다. 하지만 본인이 이겨내야 할 문제다. 외부적 환경도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LG는 시즌 중 SK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베테랑 내야수 권용관을 보냈다. 권용관은 오지환의 ‘돌출행동’에 대한 최고의 보험이었다. 그럼에도 LG는 권용관을 포기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오지환을 믿고 가겠다는 의지의 피력이다. 오지환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안다. 오히려 전의를 불태울 좋은 기회로 삼겠다는 게 오지환의 각오다.
“주전으로 뛰는 이상 제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겠죠. 요즘에는 ‘나 없으면 아무도 없다’라는 생각을 하려고 노력해요. 항상 ‘내가 LG의 주전 유격수다’라는 자부심을 가지려고도 하고요. 실책이 너무 많아서 이것저것 신경이 쓰이기는 하지만, 빨리 잊으려고 하는 성격이에요. 항상 ‘편안하게 수비하자. 제발 좀 천천히 하자’라는 자기암시를 걸고 나가요. 방망이로 잊으려고 할 때도 있어요.”
코칭스태프나 팀 선배들도 오지환을 전폭적으로 밀어주고 있다. 오지환은 “감독님께서는 실책이 나도 ‘괜찮으니까 편안하고 차분하게만 해라’라고 말씀하세요. 1루를 보는 이진영 선배의 경우는 원바운드 송구가 나더라도 ‘투 바운드로 와도 잡아줄 테니까 걱정 말고 던져라’라고 조언해주시기도 하고요”라며 팀 분위기를 설명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오지환은 조금씩 안정감을 찾고 있다. 박종훈 감독이나 코칭스태프는 오지환의 수비가 시간이 갈수록 안정되고 있다고 평가한다. 본인도 “조금씩 경기의 흐름이 보여요. 수비는 부담감을 느끼면 안 될 것 같더라고요. ‘나한테 와라’라고 덤벼야 된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렇지 않고 움츠려들면 항상 저한테 공이 오더라고요”라며 깨달음을 털어놓는다.
수비에 대한 부담감을 타석에서 방망이로 화풀이하고 있는 오지환. 그의 씩씩한 모습에 LG 팬들은 즐겁기만 하다. (사진=연합)
인터뷰 말미, 으레 형식적으로 올 시즌 목표를 물었다. 사실 기자의 겨냥은 신인왕이었음을 부정하지 않겠다. 그런데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인정받고 싶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인정? 그 기준이 도대체 헷갈려 어느 부분에서 인정받고 싶으냐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열심히 하는 거요. 팬들에게 ‘저 선수 참 열심히 하는구나’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는 것 같아 펜을 내려놨다. 맞다. 신인은 완성된 선수가 아니다. 열심히 하는 모습 하나만으로도 용서가 될 수 있는 위치다. 팬들도 그러한 패기를 바란다. 그러다보면 신인왕은 자연스레 따라올 것이다.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는 풋내기다. 유격수 오지환도 지금은 풋내기다. 오지환은 “이기든 지든 튀는 경기가 많아요”라고 쑥스러워 한다. 강백호와 똑같다. 오지환은 아직 럭비공 같은 선수다. 그렇지만 기억하자. 럭비공은 어디로든 튄다. 어디로 튈지 모르기에 더 재밌다. 우리가 오지환을 조마조마하면서도 흥미롭게 지켜보는 이유도, 그의 미래를 궁금해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강백호는 최고의 농구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한계에 도전했다. 오지환도 마찬가지다. 최고의 유격수가 되겠다는 꿈을 가슴 한구석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또한 근성과 패기라면 강백호에 뒤지지 않는다. 슬램덩크는 강백호가 최고의 선수가 됐는지 그 결말을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지환의 성장 드라마는 이제 막 집필을 시작했다. 또 아는가. 그 성장 드라마의 대단원에 대한민국 최고의 유격수 오지환이라는 이름이 있을지 말이다.
첫댓글 야구센스는 타고난것 같아요, 수비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안정되고 부드러워지는 느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선수...볼 때마다 성장하는 것이 보이는 선수...그렇기에 우리의 미래는 밝습니다..^^
잘해라~ 리그를 지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