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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다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안양은 어디에서 유래된 지명일까. 그간 무심했다는 생각도 든다. 양산의 통도사에서 안양암이란 암자를 본 적이 있다. 安養이란 한자가 똑 같아 혹여 불교에서 유래된 지명은 아닐까 싶었다. 요즘은 동네 인터넷에 접속하면 사는 동네에 대한 현황이 조근 조근 잘 설명되어 있다. 곳에서 발췌한 사항이다.
안양(安養)이란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창건된 안양사(安養寺)에서 유래되었다. 신라 효공왕 4년(900)에 궁예의 후예인 왕건이 금주(시흥)와 과주(과천)등의 지역을 징벌하기 위해 삼성산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산꼭대기의 구름이 5가지 빛으로 채색을 이룬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살피게 했다.
구름 밑에서 능정(能正)이란 노스님을 만났는데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왕건의 뜻과 같으므로 이곳 (만안구 석수1동 산 27,28번지 일대)에 안양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즉 안양사로 인해 안양이란 명칭이 탄생되었다고 소개 하고 있다. 안양이란 불교에서 마음을 편하게 하고 몸을 쉬게 하는 극락정토의 세계로 모든 일이 원만하여 즐거움만 있고 괴로움은 없는 자유롭고 아늑한 이상향의 세계를 의미한다.
과거 우리 동네는 고유 명칭이 있었다. 남부동 시대동 중앙동 석수동 양지동 장내동 교하동 냉천동 소골안 주접동 덕천마을 골안 명학동 능골 병목안 창박골 담배촌 구룡마을 삼막골 벌터 신촌 범고개 붓골 박달리 ... 지금 본가가 있는 평촌동네의 귀인동이 조선시대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갈 때 이 마을에 들러 머물다 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도 그렇고 대개는 부쳐진 이름의 연유가 있으며 그것이 아니라도 그 시절 불렀던 동네이름이라서 그러한지 친숙하며 정감이 간다. 동네 이름만 떠올려도 마치 내가 그 역사속에 존재하는 양 어느 시절이 오물오물 되살아난다.
동네 이름은 1973년 시로 승격되면서 멋없이 숫자로 일렬을 세워 획일화 되어 버렸다. 그 상실로 안양1동 2동 하면 어디쯤인지 상상도 아니 된다. 물론 일정시대 때 지어진 이름이 대부분이라 그 의미가 적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고유의 이름은 필요하다. 고유는 특별한 것이고 독특한 특색대로 풍기는 맛 또한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실제 안양이 발돋음을 한 것도 어쩔 수없는 왜정시대라 수치스런 면이 없지는 않으나 그것 자체로서의 오히려 의미를 더 갖기도 한다.
안양은 1949년 8월 15일 안양면에서 ‘안양읍’으로 승격됐다. 당시 인구는 3만도 채 못됐다. 60년대 당시 원씨성을 갖은 읍장이 돌아가셨는데 꽃상여 행렬에 안양읍민이 줄을 이어 가던 풍경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1973년 시로 승격할 당시 10만명 정도였던 인구가 현재는 64만명에 달하고 있다. 안양의 근현대는 크게 ‘안양면’이었던 일제시대와 안양읍 시절, 그리고 현재까지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안양은 철도가 들어서면서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그 시대 안양역세권을 중심으로 많은 일본인들이 거주했었다. 내가 살던 가축위생연구소 관사도 일본인들이 지은 사택이다. 지금의 안양3동 자리에 ‘조선직물(주)’가 들어섰고, 조선견직(주)가 현 석수1동 자리에 설립됐다. 이 공장들은 광목을 짜서 군복을 만들던 공장이었다. 수원 지지대고개와 삼성산, 관악산 등에서 흘려내려온 물이 모이는 암반지대인 박달동 일대는 용수가 필요한 광목을 짤 방직공장으로는 더 없이 좋은 곳이었다.
또 이때부터 안양에서 포도를 많이 재배하기 시작했다. 직물공장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대소변을 처리하기 위해 웅덩이를 팠고, 이를 거름으로 활용해 포도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인분을 거름으로 주면 열매가 달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안양포도가 유명해진 것도 여기서 유래했다. 안양은 일제에게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다. 2차 대전 때는 박달동에 탄약고 시설을 뒀다. 이곳에서 탄약을 갖고 가서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에서 고무나 기름을 가져와 다시 이곳에 저장했다.
뿐만 아니라 비행기 제작도 안양에서 이뤄졌다. 당시 조선직물 공장에서 비행기를 조립 중이었으나 2차 대전이 일본의 패배로 돌아가고 대한민국이 해방되면서 무산됐다고 한다. 6 25 때 전쟁의 아수라장 한 복판이었던 것이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안양유원지는 꽤 오래전 만들어진 위락지이다. 1920년대 일본은 출장을 만들고 안양 풀행(수영장행) 철도를 운영하기도 했다. 성인과 어린이용 풀 2개가 있던 안양수영장은 일본인들의 많이 찾았던 명소였다.
유래를 살펴보면 비록 허접한 동네라 할지라도 예사로 보이지도 않는다. 허허 벌판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벌터’라고 하였으며 비산동은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상서면 외비산리였다가 1941년 10월 1일 시흥군 안양면 비산리로 되었다가 이어 안양면에서 안양읍을 거쳐 1973년 안양시 비산동으로 개편된 것인데 별칭인 수푸루지라고 칭하는 것이 보다 정겹다. 수푸루지란 이름처럼 산림이 우거진 산간지대였다가 조선 중기에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이었던 심기원이 부친의 묘를 지금의 대림대학 뒤에 쓴 후 후손인 청송 심씨가 묘하에 정착하면서부터 취락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달안동은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상서면 외비산리였다가 1993년 경 시 조례에 따라 부흥동을 분동해 달안동이 되었다고 한다. 신도시 개발이전 이곳은 삿갓들, 달안이들, 만마지기들이라고 불리었던 지역으로 지금의 평촌신도시 개발지역내에서는 가장 큰 들이었다. 예전에는 비가 오면 가릴 것이 없어 삿갓을 쓰고 다녀야 비를 피할 수 있다고 해 삿갓들이라고 불렸으며 빨리 달아나야 한다고 하여 다라니 또는 달안이라고도 했다.
석수동은 관악산과 삼성산에 둘러 쌓여있어 석공이 많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石手洞이라 하였고 효성의 다리로 불리워지고 있는 만안교와 교비도 이 마을 석공들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그 옆으로 9.28 수복 후 당시 시흥군 에서 난민들을 정착 이주시킨 후부터 취락이 이루어진 구룡마을이 있는데 그 지명은 자리가 풍수로 보아 좌청룡이 완연한 명당지지라 하여 구룡목이라 칭한데서 연유하였다고 한다.
바위색이 유독 푸른 심청색이라 하여 창박골이라 불렀고 관악역서쪽으로, 만안교 노변 옆에 있는 마을은 농경지였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새로 주택이 들어서자 신촌(新村) 이라 칭했으며 충훈부 동북쪽에 꽃챙이란 마을은 꽃과 창고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꽃챙이 (花倉洞)라 칭하였으며 소년원과 구룡마을 사이에 위치 한 삼막골은 통일신라시대의 고승인 원효대사, 의상대사, 윤필거사의 세 성인이 삼성산에서 수도하며 각자 1막씩을 짓고 살았다 하여 삼막골(三幕洞)로 칭했다고 한다.
내 동네 이름은 주접동이라 했다. 이름이 어딘지 궁색하여 늘 감추어 두었었는데 알고 보니 전혀 그럴 곳이 아니다. 정조는 양주 배봉산(拜峯山)에 있던 부왕(사도세자)의 묘를 1789년 수원 화산으로 천묘한 후, 처음에는 서울-과 천-인덕원-사근(현의왕시)을 잇는 노정을 택했다가, 1795년에 안양에 만안교를 가설한 후부터 서울-시흥을 잇는 시흥노정으로 변경하고 아울러 안양 1동에 안양행궁을 짓고, 지금의 명학역부근에 정각을 세워 능행과 환궁 때 잠시 쉬어 갔다고 하여 그 후부터 佳接洞 이라 불렀다고 한다.
먼 옛 것들이 아니더라도 삼막골에는 진주 하씨의 집성촌 이라 하여 보통 하씨촌(河氏村) 으로 불리는데 구한말 지방 관리들의 탐학과 한국의 주권이 외세 (일본)에 의해 박탈되어 가자 분연히 일어서 농민운동을 주도한 하영홍이 태어난 곳으로 해마다 음력 7월 1일과 10월 1일에 성재이에 있는 느티나무와 웃말에 있는 향나무에서 나무제를 지냈다는 기록도 의미 있는 서증이다. 하 씨 성을 가진 친구가 왜 삼막골 출신이고 그 아이 집 정원에 향나무가 많았던 연유를 알 것도 같다.
이 기록 또한 재미가 솔솔 하다. 안양에 시장이 개시되기는 1926 년 1월 28일이었고, 거래되는 품목은 농산물을 위시하여 축산물, 포목, 일용잡화까지 다양했다. 개시한 1년 후의 년 간 매출액을 보면 농산물 이 15만 6천원, 잡화가 21만 2천원, 그밖에 직물, 축산물, 수산물 등 모두 50여 만 원에 달했다. 상인들은 개시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27년 6 월 4일 단오절을 기해 대대적으로 기념식을 거행키로 했는데, <동아일보> 1927년 6월 1일자에 안양시장 일주기념(安養市場 一週紀念) 이란 제하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은 군의 중앙일 뿐 아니라, 교통이 편리하고 따라서 산물도 상당함으로 동면에서는 작년 중에 안양시장을 설치한 후 유래 성적이 비상히 양호하던 바 더우기 안양번영의 일책으로 오는 6월 4일(단오일)을 기하여 전시장(全市場) 일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리라 하며 여흥으로 예기의 가무와 오산청년(烏山靑年)의 소인극(素人劇) 외 안양소년척후대 주최의 축구대회 및 동화 동요회 등이 있어서 많은 흥미가 있으리라더라"
市垈洞이란 마을 명칭은 안양시장이 있었다는 연유에 기인한 것으로 1929년에 안양에서는 최초로 전기가 송전된 곳이기도 하다. 일명 구시장이라 부르기도 한다. 장내동은 밤나무, 뽕나무 등이 많았던 곳인데, 밤나무 울타리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장내동 또는 담안 이라 부른다. 1961년 11월 6일 안양1동 소재 시대동에 있던 안양시장이 이전되면서 상권이 형성됨과 동시에 중앙로의 개통으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오늘날에는 안양최대의 번화가로 변모되었다.
안양역 앞에 용화사라는 절이 있엇던 것 까지는 기억하는 데 일제강점기 실업가 박흥식에 의해 비행장 건설이 계획된 바 있었고 1905년 을사조약이 조인된 지 5일 후 11월 22일 이등박문이 기고만장하여 수원지방에 유람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안양육교에서 안양출신 원태우지사에게 돌멩이 세례를 받아 치욕을 당했다는 것은 사실 자료를 찾아보기 전 까지는 금시초문이었다.어릴 적 안양읍장도 원씨 였는데 무슨 연관이라도 있나 호기심마저 든다. 동기동창이 바로 그 읍장의 아들이었다.
과거를 더듬다 보면 마치 내가 그 시절을 섬기듯 다듬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섬긴다는 의식의 가치는 단지 의례와 도덕적으로서만이 아닌 원래의 우리 자리를 확인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뿌리만한 강한 힘은 없다. 전통과 정통성은 근원의식과 정체성으로 부터다. 섬김은 생의 모든 고단함을 극복함과 동시에 여기 이 자리에 왜 서 있는지를 깨닫게 하는 필연으로서 나는 누구인가 하는 그 바탕이다. 본향을 기억해내는 마음자리의 여행, 명절이 그러하듯 곧 내 안으로의 여행이기 때문이다. |
자금성에 머문 조선사람들
연암이 북경에 머물며 많은 곳을 찾았지만 그중에 대표적인 곳이 자금성이 아닐까 싶다. 나 역시도 북경에 가자마자 제일 먼저 찾은 곳이 자금성이다. 북경하면 자금성이 떠오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자금성은 북경의 중심에 있는 명, 청 왕조의 궁궐로서 세계 최대의 규모이다. ‘자금(紫禁)’이란 북두성(北斗七星)의 북쪽에 위치한 자금성이 천자가 사는 곳이라는 데서 비롯되었다. 또한 황제의 허가 없이는 그 누구도 안으로 들어오거나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했다. 자금성에는 다섯 채의 전당과 열일곱 채의 궁전이 있었다. 남쪽 구역, 즉 ‘전조(前朝)’는 황제가 매일의 정무를 보는 곳이고, 황제와 그 가족이 거주하는 북쪽 구역은 ‘내정(內廷)’이었다. 건물의 소재로는 목재가 주로 쓰였다. 자금성 안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규모의 목재건물들이 모여 있으며, 지붕은 황제의 색깔인 노란색으로 칠해졌다. 자금성 바닥에는 걸을 때 경쾌한 발소리를 내는 특별한 벽돌이 깔려 있다. 이 벽돌의 효과는 음향만이 아니었다. 땅 밑에서 뚫고 올라올지 모를 침입자를 막기 위해 40여 장의 벽돌을 겹쳐 쌓았다. 성 안에는 후원(後園)을 제외하고는 나무가 전혀 없다. 자객이 나무에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역사상 만리장성 이후 최대의 역사인 자금성은 1406년 명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에 의해 건축이 시작되어 15년간 20만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영락제는 자금성이 완성된 1421년 북평(北平)을 오늘날의 이름인 북경(北京)으로 고쳐 수도로 삼고 자금성에 머물기 시작했다.
명, 청대에 걸친 500여 년간 자금성에서는 24명의 황제가 살았다. 가장 단명했던 황제는 즉위 29일 만에 사망한 명나라 광종 태창제이고, 가장 오래 재위한 황제는 청나라 고종 건륭제로 60년 동안 황제의 보위에 있었다. 궁궐은 국사가 결정되는 중요한 공간이자 그들의 집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들 황가에 봉사하는 수천 명의 궁녀와 내시들이 함께 살았다.1912년, 신해혁명에 뒤이어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푸이(溥儀)가 퇴위했고, 자금성은 결국 박물관이 되었으며 많은 보배와 진기한 물품들을 전시하게 되었다. 그 유물들의 일부는 국공내전 동안 대만으로 옮겨졌다.
1961년에 자금성은 중국 정부에 의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1987년 ‘명, 청 시대의 궁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오늘날 자금성은 고궁박물원(故宫博物院)으로서 일반에게 공개되어 해마다 중국인과 외국인 800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는 주요 명소가 되었다.연암 박지원은 자금성의 곳곳을 둘러보고 황도기략에 상세한 글을 남겼지만 이를 오늘에 이르러 세세히 살피기에는 조금 뒤떨어지고 기대감 또한 그다지 높지가 않다. 요즘 시대 북경, 그것도 자금성을 들려보지 않은 이가 거의 없을 정도이다.
설령 가보지 않았다하여도 다섯 채의 전당과 열일곱 채의 궁전을 낱낱이 훑어 보며 건축미를 논할 입장도 아니고 그렇게 할 큰 의미는 없지 싶다. 이미 세상은 많이 깨여 보고 맛 볼 너무 많은 산물들이 산재해 큰 충족물을 찾고 있다. 물론 자금성은 귀한 보물이지만 이제는 우리들 눈썰미로는 너무 흔해 그 가치가 반감해 버린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한 시대를 풍미한 사물보다는 사유나 역사를 이루는 내력이 가치로 쳐서도 더 큰 의미를 지니고 또 길이 남는다. 말 그대로 이제 자금성은 옛 명성일 뿐이다. 과거의 영욕은 어떨지언정 이제는 단순한 관광 목적물에 불과할뿐 천하를 말하는 그 위엄은 사라지고 말았다. 한 번 둘러보고 마는 그 정도, 오히려 그보다는 천안문 광장이 더 위세를 떨치며 이름이 드높다. 자금성이 우리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을 듯 보이지만 실은 그러하지 않다. 자금성에 머문 조선시대 사람들이 있었다. 자금성내에 문연각, 문화전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문연각은 청나라 건륭제 시절인 1776년 건립되어 매년 황제가 경연(經筵)을 베풀고, 궁중의 장서를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특히 1782년에는 건륭제의 명에 의해 완성된 중국 최대의 문헌인 사고전서(四庫全書)를 보관하기도 했다. 이 문연각은 한때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머물렀던 곳이다. 역사적으로 아픈 상처가 자금성에도 그대로 배어 있는 셈이다.
사람에게 시운이라는 게 있듯 나라에도 국운이라는 게 있다. 그래서 시운이 따르지 않으면 평생 되는 일이 없다고도 하고, 나라에도 국운이 미치지 못하면 불행한 일들이 일어난다. 역사를 읽으면서 가정(假定)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금물로 되어있지만, 그래도 아쉽고 답답한 일이 있다. 경종도 그러하고 광해군도 그렇지만 소현세자의 죽음 또한 그지없는 아쉬움이다.
청나라의 군사들과 함께 북경에 입성한 소현세자는 지금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문물과 만나게 된다. 조선과도 다르고 심양과도 다른 명나라의 문물과 풍속은 나라가 망한 후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다. 그 중에서도 서양에서 들어온 신문물이 소현세자를 눈뜨게 한다.
소현세자가 북경에 머문 것은 고작 70여일에 불과하였으나, 그에게는 실로 7년의 세월에 버금가는 일대 변혁의 시간이 된다.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다양한 사람과 접촉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서양 신부이자 과학자인 아담 샬(J. Adam Schall. 중국명 湯若望)과의 교유는 그의 사상을 바꾸어 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그는 아담 샬과 자주 만나면서 역법, 천문학, 천주교, 등과 같은 서양 문물에 거침없이 심취해 들어간다. 이에 부응하듯이 아담 샬은 친절하고 자상하게 소현세자의 의문을 풀어 준다.
그로서는 장차 조선의 임금이 될 소현세자에게 서양 문물의 깨우침과 더불어 천주교
아담 샬은 자신이 한역(漢譯)한 ‘천문역산서(天文曆算書)’와 지구의(地球儀), 천주상(天主像) 등과 같은 진귀한 서책과 물건들을 소현세자에게 선물한다. 이에 대한 소현세자의 답신은 참으로 지극하다.
<"귀하가 주신 천주상과 여지구와 과학에 관한 서책은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즉시 그 중 몇 권의 책을 읽어 보았는데, 그 속에서 정신 수양과 덕행을 실천하는 데 적합한 최상의 교리를 발견하였습니다. 천문학에 관한 책은 귀국하면 곧 간행하여 학자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그것들은 조선인이 서구 과학을 습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들이 이국땅에서 상봉하여 형제와 같이 서로 사랑해 왔으니, 하늘이 아마 우리를 이끌어 준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남아서 전하는 소현세자의 이 편지를 통해 서구 문물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얼마나 깊었던가를 알 수 있으며, 아담 샬과의 우의도 꽤나 깊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이 편지에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천주교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처럼 스물다섯 살에 청나라로 잡혀간 소현세자는 서른넷이 되던 해 9년간의 볼모살이를 마치고 조선으로 귀국한다. 고된 시간이었지만 얻은 것도 많았다.
무엇보다 조선이 그토록 섬겨온 명나라가 패망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인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앞으로 섬겨야할 청나라의 내정을 꿰뚫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언어도 능숙하게 구사할 수가 있다. 게다가 중국 땅에 들어와 있던 서양 문물까지 접했다면 일찍이 없었던 국제통이라해도 무방하다. 그런 그가 예정대로 보위에 올랐다면 조선의 역사는 또 다른 진보와 선진의 길을 가게 되었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뒤 두 번에 걸친 호란과 지독한 정쟁에 시달렸던 인조는 희망을 안고 귀국한 아들 소현세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뿐만이 아니라 신하들에게까지 소현세자에게 진하(進賀)조차도 못하게 하였다. 세자의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오랑캐에 넋을 판 파렴치로 낙인찍었기 때문이다. 인조는 소현세자에게 호인이라는 말까지 썼다.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두 달 뒤인 4월 23일 병상에 누웠다. 어의(御醫)는 학질이라고 진단하였으나, 인조는 엉뚱하게도 이름도 없는 어의 이형익을 시켜서 소현세자에게 시침만을 강요한다. 마침내 세자는 발병한 지 나흘만인 26일에 약 한 첩 써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다.이 이해할 수 없는 치료 과정 때문에 인조가 사실상 아들 소현세자를 죽였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로 궐 안은 흉흉해진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은 뒤 12일 만에 상복을 벗게 하는 한심한 작태까지 보인다. 이 어이없는 인조의 광태가 조선왕조에 서양문화가 접목되는 기회를 상실하게 한다. 소현세자가 인조의 뒤를 이어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면 천주교의 도입 등 조선왕조에 획기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 우리를 괴롭히고, 지도자의 덕망이 국가존망을 이끌어간다는 점도 새삼스럽게 깨우치게 한다. 이듬해 3월에는 세자빈 강빈이 인조를 독살하려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았고, 이어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두 아들이 제주도 유배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강빈의 친정 어머니도 처형되었다.
자금성을 지은 사람 영락제, 그 또한 우리와 인연이 있다. 영락제는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 홍무제의 넷째 아들로서, 1399년 ‘정난의 변(靖難之變)'을 일으켜 조카인 2대 황제 건문제(建文帝)를 죽이고 명나라 3대 황제에 올랐다. 이어 건국 당시의 명나라 수도인 남경(南京)을 떠날 목적으로 자신의 본거지인 북경(北京)에 자금성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1421년에 자금성이 완공되자 영락제는 남경을 버리고 북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명나라 건국 초기에는 원나라의 풍습이 많이 남아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조선에서 후궁이나 궁인들을 간택하는 것이었다.
조선 시대의 공녀 중에서 가장 극적인 삶을 산 경우는 명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 때 들어간 청주 한씨였다. 한씨는 한영정韓永寮의 큰딸이며 한확韓確의 여동생이었다. 당시 한씨는 황씨 처녀와 함께 공녀로 선발되었는데, 한씨는 고고한 아름다움이 있었고 황씨는 수려한 아름다움이 있었다고 한다.명나라 황제의 궁녀로 선발된 한씨와 황씨는 유모와 몸종을 데리고 갈 수 있었다. 이에 한씨는 유모 김흑金黑과 몸종 다섯을 데리고 태종 17년 1417년 8월 6일 한양을 떠나 명나라로 향했다. 이때 한씨의 오빠 한확도 여동생을 돌보기 위해 명나라까지 따라갔다.
한씨와 황씨를 궁녀로 들인 명나라 황제는 3대 영락제였다. 영락제는 한씨와 황씨 중에서 특히 한씨를 마음에 들어 했다. 조선으로 귀국하는 사신에게 “한씨 여아는 대단히 총명하고 영리하다”라는 말을 꼭 전하라고 했을 정도였다.반면에 황씨는 영 못마땅해했다. 무엇보다도 황씨가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했으리라. 황제인 자신에게 숫처녀가 아닌 공녀를 바쳤다며 태종에게 항의 문서까지 보내려고 했을 정도로 분개했다. 이것을 막은 사람이 한씨였다. 다음의 기록을 보자.
<황제가 왜 처녀가 아닌지 꾸짖으며 연유를 묻자, 황씨는 “형부 김덕장의 이웃에 있는 조례緯隷(남자 관노비)와 간통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황제가 성을 내어 우리나라를 문책하려고 칙서까지 작성했는데, 당시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던 양씨가 이 사실을 한씨에게 알렸다. 한씨가 울면서 황제에게 애걸하기를 “황씨는 집에 있는 사사 사람인데 우리 임금이 어떻게 그것을 알겠습니까?”라고 했다. 황제가 감동하여 한씨에게 벌을 주라고 명령하자, 한씨는 황씨의 뺨을 때렸다.『세종 실록』26, 6년 10월 무오조>
영락제는 한씨의 인품과 미모 모두에 반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으로 칙사를 보낼 때마다 한씨의 친정집에 각종 선물을 보내곤 할 정도였다. 심지어 한씨의 오빠 한확을 사위로 삼아 옆에 두려고까지 했다. 한확의 거절로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비록 고국을 떠나 명나라 황제의 궁녀가 되었지만 한씨는 나름대로 행복했다. 무엇보다 황제의 지극한 사랑이 있었다. 이런 후광으로 한씨의 친정 오빠 한확은 조선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훗날 한확은 수양대군을 도운 정난 공신으로서 당대를 주름잡는 거물이 되었다.
그러나 한씨의 행복은 잠깐이었다. 명나라에 간 지 7년 만에 한씨를 사랑하던 영락제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명나라로 갔으니 한씨는 아직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음이 분명하다. 불행하게도 이렇듯 꽃다운 나이에 영락제를 따라 순장殉葬을 당하고 말았다.믿어지지 않겠지만, 당시 명나라에서는 황제가 죽으면 황제를 가까이 모시던 궁녀들을 순장시켰다고 한다. 명나라 궁중엔 동양 각국에서 온 수많은 궁녀들이 있었는데, 비밀을 누설할까봐 이들을 순장시켰다는 것이다. 한씨도 이국땅 명나라의 자금성에서 순장을 당했다.
한씨가 자금성에서 순장 당할 당시의 모습을『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황제가 죽자 순장된 궁녀가 30여 명이었다. 죽기 전에 모두 뜰에 모아놓고 음식을 먹인 다음 함께 마루로 끌어 올리니 울음소리가 전각을 진동시켰다. 마루에 작은 나무 평상을 놓아 그 위에 세워 놓고 머리를 올가미에 넣은 다음 평상을 떼어 버리니 모두 목이 매여 죽었다. 한씨가 죽을 때 유모 김흑에게 말하기를 “낭娘아, 나는 갑니다. 낭아, 나는 갑니다”라고 했다. 그 말을 마치기 전에 곁에 있던 내시가 평상을 빼자 최씨와 함께 죽었다.─ 『세종 실록』26, 6년 10월 무오조>
이 기록은 한씨의 유모 김흑이 훗날 조선에 살아 돌아와서 세종에게 전한 내용이다. 한씨는 죽으면서 자신의 유모 김흑만은 꼭 살려달라고 간청하여 황제의 허락을 받았다. 이에 김흑은 간신히 살아남았다가 몇 년 후에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세종은 천신만고 끝에 살아 돌아온 김흑을 만나 그간의 사정을 자세히 들었다. 이로써 한씨 이야기가 『실록』에 자세하게 실릴 수 있었다. 한씨의 일생은 약소국 여성의 비애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좋은 양반 가문의 딸로 태어나 잘 살 수도 있었는데, 조국의 힘이 약해 공녀로 끌려갔다가 순장까지 당했던 것이다. 자신의 희생으로 조국이 편안하고 또 친정이 잘 되었다는 점이 청주 한씨에게 위안이라면 위안일 것이다.
내가 역사를 통 털어 제일 한심하다 여기는 것이 남존여비 의식이다. 영락제가 죽자 순장까지 했다고 하니 참 할 말이 없다. 이조시대 여인들의 박복함은 이루 말로 표현 못할 정도다. 열하일기와 연암집을 읽으며 나는 내내 그 생각을 했다. 열하일기의 출발지 의주에 통군정. 배웅을 하러 나온 행렬 중에는 기생들이 있었다. 그 여인들은 왜 거기에 서 있는 것일까. 나는 그 천박한 처지의 여인들이 두고두고 마음에 서렸다. 요즘으로서는 상상도 못하는 시대의 여인들, 그들로 우리는 지금 6천만을 이루며 현재에 이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넋이라도 위로하고픈 마음이 굴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