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가보 고 싶었던 성락원은 내가 기대한 것과 달리 문이 닫혀 있었다.
사람들에게 열려있지 않은 공간임을 힘들게 찾아가서야 알게된 것이다.
문이 닫혀 있는 성락원. 오래 전부터 사람들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굳게 닫힌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어떡하겠는가. 대중에게 허락하지 않겠다는 이곳의 의지를.
성락원城樂苑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있는 조선후기 별궁의 정원. 명승.
2020년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지정 면적 1만 4407㎡. 성락원은 뒤에 산등성이를 등지고 좌우에 청룡·백호의 산줄기가 벌려선 형국에 자리잡고 있다.
성락원 입구에 들어서면 두 줄기 계류가 하나로 모이는 산문(山門) 같은 계곡이 있으며, 여기에 ‘雙流洞天(쌍류동천)’이라는 글자가 계류 암벽에 새겨져 있다.
쌍류동천 안으로는 용두가산(龍頭假山)을 만들어 성락원이 밖에서 보이지 않는다. 이 용두가산은 성낙원 내원(內園)을 아늑하게 감싸서 깊이를 주기 위해 만든 인공조산(人工造山)으로 200∼300년 된 느티나무·음나무·참나무 숲이 울창하다.
내원에는 계류의 암벽 밑에 소(沼)를 조성하였다. 이 소는 장축이 16m, 단축이 약 12m이며, 물 깊이는 약 1.5m이다. 소의 주위는 자연암벽과 암반으로 이루어졌는데 물이 흘러내리는 북쪽 암벽에는 인공으로 수로를 파고 3단의 폭포를 조성하였다.
제일 위의 폭포는 낙차가 15㎝로, 직경 30㎝, 깊이 15㎝의 둥근 석구(石臼: 돌절구)에 떨어진다. 중간폭포는 낙차가 30cm로 역시 같은 크기의 석구에 떨어진다.
제일 밑단의 폭포는 낙차가 150㎝로 가장 큰데, 직경 80㎝, 깊이 20㎝의 석구에 떨어졌다가 소 속으로 넘쳐 흘러들어간다. 폭포로 떨어지는 3단의 물줄기는 생동감 있는 수경(水景)을 연출하고 고요한 계곡에 요란한 물소리를 낸다.
이 폭포 옆 바위에 ‘靑山壹條(청산일조)’라는 전서체 각자가 있으며, 소의 서쪽 암벽에는 행서체의 ‘檣氷家 阮堂(장빙가 완당)’이 새겨져 있는데, 장빙가란 겨울에 고드름이 매달린 집이란 뜻으로 김정희(金正喜)가 썼다.
이 장빙가 각자가 있는 암벽 위에 “影碧池 海生(영벽지 해생)”, “百泉會不流 爲沼碧闌頭 自吾得此水 少作江湖遊 癸卯五月 孫文鶴書(온갖 샘물을 모아 고이게 하니 푸른 난간머리에 소가 되었네. 내가 이 물을 얻은 뒤부터 약간의 강호놀이를 하네. 계묘 5월 손문학 씀).” 이라는 각자가 있다. 영벽지란 세 글자는 초서체로 썼으며, 해생이란 호를 가진 사람이 오언시를 해서체로 쓴 것이다. 계묘는 1843년(헌종 9)으로 추정된다. 이로써 성락원의 소의 명칭이 ‘영벽지’임을 알 수 있다.
이 영벽지 각자 위의 바위에 전서체로 내리쓴 또 하나의 각자가 있는데, 원문은 “明月松間照 靑泉石上流 靑山數疊 吾愛吾盧 (밝은 달은 소나무 사이에 비치고 맑은 샘물은 돌 위에 흐르며 푸른 산이 몇 겹 싸여 나는 내 농막을 사랑한다).” 이다.
영벽지 소 속에는 괴석 하나를 물 속에 배치하여 놓았으며, 이 영벽지 동쪽 언덕 위에 변형된 고가 한 채가 남아 있는데, 이 집은 원래 농막의 본채로 이강(李堈)이 살았다 한다.
이 집에서 숲 속의 돌계단을 오르면 또 하나의 못[池]이 영백지 위에 있다. 못 동쪽에는 근래 지은 ‘송석정(松石亭)’이란 누(樓)가 있으며, 못 북쪽 계류가에 ‘松石(송석)’이란 각자가 있어 원래 이 못가 바위 사이에 큰 소나무들이 울창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못으로 흘러내리는 계류는 중간중간에 작은 폭포를 이루기도 하며, 상류에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집수하는 기능의 못이 하나 더 있다. 성락원은 산의 계류를 이용하여 상·중·하에 세 개의 연못을 만든 곳으로 성락원 내에는 좋은 샘물도 있었으나 지금은 많이 오염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최순우옛집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15길 9 http://www.ntculture.or.kr/
예약
성락원 문 앞에서 아쉬움을 간직한 채 발걸음을 되돌려 찾은 곳은 최순우 가옥이다.
최순우 옛집에 대한 자세한 설명문이 문앞에 있다.
이 분이 쓰신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는 읽어보지 못했지만 가장 많이 찾았던 사찰 중에 한 곳이 부석사미므로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점은 분명하다. 다섯 점의 국보와 여덟 점의 보물이 있어 내 생각에는 불국사 다음으로 많은 국보를 보유하고 있는 사찰이
아닌가 한다.
특히 깊은 가을이 되면 부석사 입구 매표소에서 일주문까지 펼쳐지는 은행나무의 향연은 그 어떤 곳의 풍광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다.
최순우(崔淳雨, 최희순, 崔熙淳, 혜곡)
1916년 출생, 1984년 사망. 미술사학자·미술평론가. 한국미술의 탁월한 감식가로서 한국미술연구와 문화재보존에 크게 기여했다. 대표작으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가 있다.
최순우(崔淳雨)
최순우 국립박물관장(좌)과 이본 다젠스 샌프란시스코 아시아 박물관장이 오는 79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전시될 한국미술 5천년전에 관해 협의하고 있다
본명은 희순. 호는 혜곡. 개성 송도고등학교를 나와 개성박물관에 근무했으며 당시의 관장 고유섭의 감화로 한국미술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946년 국립개성박물관 참사를 지냈고 1948년 서울국립박물관으로 전근하여 보급과장·미술과장·수석학예연구관·학예연구실장을 거쳐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에 취임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을 구 중앙청 청사로 이전하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격무와 신병으로 순직했다. 문화재위원회 위원(1967~1984), 한국미술사학회 대표위원(1976~1980) 등을 역임했고 1984년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한국미술의 탁월한 감식가로서 한국미술연구와 문화재보존에 크게 기여했다.
주요논문에 〈겸재 정선론 謙齎鄭歚論〉·〈한국의 불화〉·〈혜원 신윤복론 蕙園申潤福論〉·〈이조의 화가들〉 등이 있고 저서에 〈한국미술사〉가 있다. - 다음백과 =
몇 달 전 이곳을 찾았을 때는 마침 쉬는 날이었다. 잠겨진 대문만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되돌아간 적이 있다. 내가 찾은 6월 중순의 어느 날도 문을 닫는 시간이 한 시간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부리나케 잰걸음으로 달려갔다.
안에는 작은 우물이 있었고 마당 가운데는 향나무와 모란 그리고 노란해당화 나무가 서로 살갑게 붙어있었다.
왼편 본채 현판에는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이라는 글귀도 적혀 있지만 분명하고 명백하게 알아보기 쉽지 않은 글씨였다. 그냥 넘어갔지만 집에 와서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니 ‘문을 닫으면 곧 깊은 산중’이란 뜻이었다. 지금이야 번듯한 건물과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번잡한 도시의 일부이지만 단지 몇 십년 전만 해도 산중을 느낄 만큼 적막하고 고요한 곳이었나
보다.
정말 내가 좋아하는 집의 구조이다. 마당이 넓던 작던 정겹게 자리하고 있고 그 앞으로 소담한 의자들이 자리해서 가족이나 친구들 아니면 정겨운 지인들과 차를 한 잔 마시며 정담을 나누기 좋은 구조이다. 꼭 차가 아니더라도 커피나 곡차(술)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순우 옛집은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서 매입하고 관리하는 곳이다. 국민이 자금을 모아 자국의 자연환경이나 사적 등을 비롯한 문화재나 유물 또는 주요한 대상을 사들여 보존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며 파손이나 사적 매매로 가치상실을 방지하는 훌륭한 제도로 인해 지금 우리는 그 모습을 볼 수가 있다.
↑↓ 옛집 안에 자리하고 있는 정겨운 우물과 일반 가정의 세숫대야만큼 큰 함지박.
함지박은 사람들이 자꾸 만지나 보다. 눈으로만 봐달라는 문구가 앞에 있는 것을 보니....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쓰신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께서 이분과 이곳을 언급한 글을 본 기억이 난다. 하지만 답사기 시리즈가 열권 정도 시골집 책장에 있는데 몇 권에 나오는지는 모르겠다. 그것 때문에 KTX를 타고 내려갔다 오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이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딱 내 수준이요 자리이다.
한 바퀴를 도는데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긴 옛집에다 규모도 그리 크지 않아서 주마간산走馬看山식으로 본다면 10분도 충분할 것같다.
오늘 하루도 성북동에서 배부른 여행을 즐기니 지나가는 하루가 감사하다
[출처] 드립커피의 명소 성북동의 카페 소마와 성락원 그리고 최순우 옛집|작성자 밝은달아래시원한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