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9일 봉사와 헌신의 기회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참으로 열정적인 사람이었던 거 같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바르게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을 처벌하는 게 하느님을 위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그들이 하느님의 율법을 왜곡하고, 성전을 중심으로 살지 않고 그래서 하느님을 모독하는 집단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심한 후에도 그는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을 위해서 그렇게 헌신했다. 환난과 투옥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에 에페소 교회 원로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사도 20,24)
일반적으로 우리가 존경하고 또 우리를 괜히 부끄럽게 만드는 사람들은 봉사와 헌신한 사람들이다. 때로는 그 봉사와 헌신이 옳지 않은 곳을 향하고 있어서 자살 테러와 같은 끔찍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선하든 악하든 사람은 이기적이면서도 하나뿐인 자기 생명을 내놓을 수 있다. 많은 순교자와 성인은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위하여 일생 헌신하고 봉헌한 사람들이다. 특히 순교는 봉사와 헌신의 명백한 표지이다. 그래서 백색 순교, 살아있는 순교자라는 말도 생겨났을 거다.
신학교 1학년 영성 신학 시간에 교수 신부님이 기도 중에 몸에 피가 끓어오르면 그건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라고 했다. 성령님은 너무 수줍어하셔서 내가 나서면 바로 뒤로 물러나신다고 한다. 천지의 창조주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은 불어오는 산들바람처럼 말씀하시고, 아침 안개처럼 소리 없이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목자들의 마음도 그렇게 평화로워야 한다. 바오로와 실라스는 죽기 전까지 매를 맞고도 정신을 차린 후에는 하느님께 찬미가를 불렀다. 그러자 온 땅이 흔들리며 감옥 문이 다 열렸다.(사도 16,25-26) 그들의 흔들리지 않는 봉사와 헌신이 세상을 흔들었다. 천사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을 감옥에서 빼내 줬을 때도 그들은 도망가지 않고 하던 대로 여전히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쳤다.(사도 5,25)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다. 자살 테러 등과 같이 이웃을 아프게 하는 헌신과 달리 사도들은 자신을 불살라 이웃을 살게 했다. 그들이 지녔던 봉사와 헌신은 하느님 사랑과 예수님과의 복음적 우정에서 비롯했다. 예수님처럼 죽을 수 있는 걸 최고의 영광이라고 여겼다. 후손이나 친구에게 복수를 기대하며 당하는 죽임과는 완전히 다른 죽음이다.
예수님은 당신과 동고동락한 제자들과 미래에 그들을 통해서 당신을 믿게 될 우리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요한 17,9.20)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신 게 아니다. 바오로와 실라스가 고통 중에 부른 찬미가로 세상에 지진이 일어났던 거처럼, 그리스도인의 봉사와 헌신으로 사람들이 참 하느님을 알게 되기를 바라시는 거다. 내게 주어진 인생은 나를 위한 시간이 아니라 남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은혜로운 기회다. 봉사와 헌신으로 우리는 답답한 자신에게서 탈출하고 해방된다. 예수님이 그것을 십자가 희생을 통해서 완전하게 드러내 보여주셨다. 십자가는 형벌이 아니라 당신 인생을 요약하는 완전한 표징이다. 종처럼 사람들을 섬겼던 당신 인생이 곧 아버지 하느님 사랑이고 섬김이었다. 죽음은 우리에게 인생이 자기 게 아니라는 걸 분명하게 알려준다. 남에게 나를 넘겨줄 때 나는 완성된다. 봉사와 헌신은 겉으로는 이웃을 위한 것이 분명하지만, 그 속마음과 지향은 하느님 사랑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점점 하느님 소유물이 돼 가고,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되기를 바란다.
예수님, 매일 수시로, 십자고상을 바라보는데 여전히 주님의 영광은 보이지 않습니다. 수도 서원과 사제품으로 세상에서 봉사하고 헌신할 수 있는 완벽한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아직도 우물쭈물하고 있습니다. 이러다 아까운 시간 다 흘러가겠습니다. 하느님 사랑이 상상이나 환상이 아니라 실천이고 실재라는 걸 더 깊이 깨닫게 도와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녀 마리아님, 하느님이 제게 바라시는 걸 이룰 있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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