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부는 19일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재개발지구내 유적발굴을 전담할 `풍납지구 긴급발굴조사단'을 구성했다.
한병삼 '97 문화유산의 해 집행위원장을 단장으로 한 조사단은 21 일 오전 11시 풍납동 발굴현장에서 개토제를 실시하고 발굴조사작업에 착 수한다.
문화재 전문가와 송파구 관계자로 구성된 조사단은 지도위원 7명의 감독 아래 9명의 운영위원이 발굴조사단 운영전반에 대한 결정과 실무를 총괄해 시급한 지역부터 발굴조사에 들어가게 된다.
풍납토성은 백제초기 한성시대의 생활상을 밝혀줄 대표적인 유적으 로 평가되고 있으나 최근 토성내부 주거지역의 재개발사업이 진행됨에 따 라 지하에 매장된 당시 생활유적에 대한 보호조치가 시급한 실정이다
1997/07/19
[서울 풍납동] 40평대 임대아파트 들어선다 (풍납토성 파괴의 전주)
서울 풍납동에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40평형대의 선진국형 영구 임 대아파트가 만들어진다.
그동안 임대아파트는 비교적 저소득층을 겨냥한 25평 이하의 작은 평수가 주종을 이뤘으나, 풍납동 임대아파트는 주택의 소유보다는 넓은 주택의 이용을 원하는 수요층에 맞춰 40평형대 이상으로 건설한다.
임대료는 평당 3백50만원으로 40평의 경우 1억4천만원이다.
매2년마다 법정 임대료 인상폭인 5% 이내에서 결정되는 임대료 인 상분을 내면 원하는 기간 만큼 거주할 수 있으며, 입주 5년 이후는 분양 을 원할 경우 입주자에게 우선분양권을 줄 계획이다.
이 임대아파트는 강원산업 계열 동남상운이 풍납동 극동아파트 뒤 편과 한강 사이 풍납토성 주변에 소유하고 있는 2만여평의 땅을 분양 또 는 임대아파트로 개발하는 계획의 1단계로, 5층짜리 19가구를 지어 11월 초 분양할 예정이다.
1997/09/29
1999/01/05
[풍납토성 아파트공사] 백제 유물이 사라진다
현장 흙더미속 토기조각 발견 "문화재 안나왔다" 공사 계속
대표적 백제 초기 유적인 서울 풍납토성(사적 제11호) 안에 현대건설 이 신축중인 아파트공사 현장에서 토기조각을 비롯한 백제 초기 유물이 여러개출토되는 데도 공사를 계속해 많은 유물들이 파손될 위기에 놓였다.
4일 오후 송파구 풍납2동 231의3 아파트 공사현장. 포크레인으로 땅 5백여평을 깊이 4m쯤으로 파낸 곳의 바닥 흙더미 곳곳에서 백제 초기 토 기조각들이 발견됐다. 수직으로 판 땅의 절단면중 깊이 2m 이하 지점에 서도 토기조각과 탄화된 숯 등을 어렵잖게 찾아낼 수 있다. 현대건설은 지난해 10월23일부터 송정건설에 하청을 줘서 이 지역 터파기공사를 시작했다.
4일 공사현장에서 이 유물들을 처음 발견한 이형구 선문대 교수는 『건설에 앞서 문화재 조사가 없었을 뿐 아니라, 문화재가 나오는 데도 공사를 진행하는 것은 상식밖 행동』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대건설 전민희 현장관리과장은 4일 오후 『공사중 문화재가 발견되면 송파구청 주택과에 보고하도록 돼있지만, 현재까지 문화재가 발견되지 않았다』며 『신정 연휴 때문에 지난 12월30일부터는 터파기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문화재 출토 유무를 어떻게 확인하고 있는가』 라고 묻자 전과장은 『토목기사 등이 현장을 때때로 확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화재관리국 관계자도 『토성 내부는 사적지로 지정되지 않았으므로 문화재 조사를 반드시 해야 한다는 법적 근거는 없다』고 밝혔다.
고고학계는 그러나 토성 내부가 사적지로 묶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강유역을 기반으로 삼았던 백제 초기의 귀중한 문화유적지에 사전조사도 없이 개발허가를 내줬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 문화행정의 낙후성을 드러 낸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고고학자는 『65년 고 김 원룡박사가 풍납토성 일대를 발굴한 이후 몇차례 계속된 이 지역발굴조 사를 통해 토기를 비롯한 문화재 매장 가능성을 확인한 만큼, 사적지가 아니어도 문화재 사전조사는 반드시 필요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풍납토성은 높이 7∼8m, 총둘레 3.5㎞로 백제가 1세기 초를 전후해 건설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주변에 있는 몽촌토성과 함께 5세기 말까 지 백제가 수도 방어용 성곽으로 썼다. 백제 초기를 연구할만한 문헌이 거의 없는 실정이어서 학계는 풍납토성을 이 시기 생활사연구 등에 더 없이 귀중한 사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94년에도 신형식( 이화여대 ) 최몽 룡( 서울대 ) 김병모( 한양대 )교수 등을 중심으로 결성한 「서울백제수도 유 적보존회」가 풍납토성 일대를 복원해 사적공원으로 꾸며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이형구교수는 『문화재관리국 을 비롯한 국가기관이 시급히 아파트공사현장을 정식 발굴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 신형준기자 >
[문화재관리국] 풍납토성유물 졸속발굴 우려
## 아파트 부지내 작업 서둘러 끝내기로...백제거주지등 훼손위협 ##.
아파트 공사를 빨리 하기 위한 무리한 문화재발굴이 또다시 자행돼 백제 초기의 귀중한 유물과 유구(집터 등의 흔적)가 훼손될 위험에 처했 다. 고고학계에서 이같은 위험성을 이미 지적했는데도 문화재당국과 건설 회사는 조급하게 발굴을 서두르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문화재보다 아파 트공사를 우선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일고있다.
서울 풍납토성(사적 11호) 내 현대건설 주택조합아파트 공사현장 (송파구 풍납2동 231-3). 이 지역은 시굴조사(매장문화재가 있는지를 시 험적으로 조사하는 것)도 없이 지난해 10월부터 터파기공사가 진행됐다 가 백제토기 등 문화재가 훼손된 채 출토돼 물의를 빚자, 1월 초 뒤늦게 공사중지명령이 내려진 뒤 1월16일부터 1천9백평에 대한 발굴조사에 들어 갔었다.
백제초기의 수도로까지 추정되는 풍납토성 내 발굴 현장에서는 서 기 1∼4세기 토기가 무더기로 출토되고 주거지 4곳이 발굴되는 등 백제 초기의 생활사를 살필 수 있는 문화재가 쏟아져 나왔다.
이 지역은 지하 2.5∼4m가 유적층이어서 발굴 단원들도 『정식으로 하면 1년은 걸릴 곳』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는 곳. 그러나 문화재관리국 은 2월28일까지 이 지역을 시굴키로 하고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맡기는 등 당초부터 발굴을 빨리 마치려고만 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발굴을 맡은 국립문화재연구소측도 지난 2월26일 현대건설과 송파구 청에 「3월15일까지발굴을 마칠 것이며, 그 이전에라도 완료된 구역은 터파기공사를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구두로 약속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때문에 현대건설 현장사무소는 『3월3일부터 터파기에 들어갈 것』 이라고 공사 강행의지를 보였으나, 아직 공사에는 착수하지 않은 상태다.
발굴허가 마지막날인 2월28일까지도 발굴기간연장을 위한 어떤 공식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문화재관리국 은 3월4일에야 「3월22일까지 발굴을 연장하겠다」는 공문을 서울시와 송파구에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고고학계는 『서민을 위해 발굴을 빨리 마치겠다는 의도는 이해하지 만, 발굴시한을 조급하게 잡는 것은 상식 밖의 행동』이라며 혀를 찼다.
<신형준기자> 1999/03/06
[권오영교수 기고] 백제유적 풍납토성 보존돼야
## 한성백제사 밝혀줄 1급문화유산..성벽만 지정,내부보호책 없어 ##.
서울 풍납토성내 백제 초기유적에 대한 보존대책이 전혀 없다는 목소리가 학계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동아대 권오영교수(한국사)가 현 장을 답사한 뒤 풍납토성의 보존을 촉구하는 글을 조선일보 에 보내왔다.
서울의 전신인 한양은 조선왕조의 도읍이었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전에 이미 서울 에 도읍을 정한 왕조가 있었던 사실을 우리는 잊고있다.
흔히들 백제라면 공주와 부여를 떠올리지만 공주, 부여에 도읍을 정한 기간을 모두 합한 것 보다도 더 오랫동안 백제의 도성이 서울 에 있었다. 백제사는 그 실마리를 풀어줄 문헌자료가 너무나 빈약하여 초기 역사가 짙은 장막에 가려 있다.
해결방법은 백제인들이 남긴 유적, 유물로 하여금 그들의 역사를 말하게 하는 것이지만 시민과 관계당국의 지금까지의 자세는 무관심과 적당주의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다.
백제 초기사를 밝혀 줄 중요 유적을 3개만 꼽으라면 필자는 주저없이 석촌동 고분군, 몽촌토성, 그리고 풍납토성을 꼽는다.
석촌동고분군과 몽촌토성은 88 서울 올림픽을 겨냥한 볼거리 제공 차원에서 80년대 중반 이후 불충분하나마 몇 차례의 발굴조사를 거쳐 현재 백제고분공원과 올림픽공원이란 이름으로 관리되고 있다.
풍납토성은 그 위치와 규모, 내부에서 발견되는 유물의 중요성에 의해 백제의 토성 후보 1순위에 올라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차례의 정식 조사도 받지 못한 채, 1994년 성 내부에 들어선 대규모 고층 아파트군에 의해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역설적이게도 그 해는 조선왕조의 서울 정도 600주년이었다.
이렇듯 귀중한 문화유산이 무참하게 파괴된 이유는 성벽만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반해, 성 내부는 지정이 되어 있지 않아 성 내부는 행정적으로 전혀 보호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성벽이란 성 내부를 지키기 위한 것에 불과하고 궁궐, 관청, 사원, 창고 등의 온갖 중요시설이 위치하는 성 내부가 핵심이란 것은 기본상식이다. 필자는 풍납토성이 유린되는 모습을 보면서 백제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듯이 백제의 역사도 허망하게 사라지고 있음을 통감하였다.
그런데 최근 풍납토성 내부에 위치하던 연립주택을 철거하고 고층 아파트를 짓는 공사 과정에서 현 지표면의 4∼5m 아래에 백제의 유적, 유물이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음이 확인되었다.
급히 현장을 확인하고 성 내부를 샅샅이 답사한 필자는 유적이 워낙 지하 깊숙이 남아 있어 저층 주택에 의한 파괴의 정도는 다행히 아직 미미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따라서 성 내부 곳곳에 유적이 살아 있을 개연성이 높아진 것이다.
하지만 유적을 완벽하게 인멸시킬 아파트 터파기 공사가 곳곳에서 진행될 예정임을 알고 낙담하였다.
유적의 보존과 조사가 주민들의 재산권 행사와 상충될 것임은 분명하고, 연말에 있을 대선으로 인해 정치권과 행정당국의 행보가 어떠할지 미루어 짐작되었기에 상황은 더욱 비관적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유적을 위한 최선의 방안은 성 내부 전체를 사적으로 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토지매수에 따른 엄청난 재원과 지역 주민들에게 돌아갈 피해를 고려할 때 이는 현실적이지 못하다.
그렇다면 차선으로 무슨방안을 생각할 수 있을까? 개발은 허가하되 사전 발굴조사를 의무화하고 철저히 감독하는 길이다. 소요되는 비용은 시공업체나 지역주민이 아니라, 국가에서 전액 부담하여 선의의 피해자를 보호해야 한다.
아쉬우나마 이 정도라면 몇 장의 사진과 기록만이라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70년대에 마구잡이로 진행된 강남개발로 인해 전국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밀집된 중요 유적들을 조사 한번 못 해보고 무참히 밀어 버린 어리석은 전철을 또다시 밟을 수는 없다.
서울에 정도하였던 최초의 왕조가 남긴 토성이며, 1천5백년 이상을 버텨온 이 일급 문화유산을 천박한 개발논리에 휘감겨 변변한 기록마저 못 남기고 숨통을 끊어놓을 수는 없다. 정부가 선정한 소위 「문화유산의 해」인 올해, 다른 곳도 아닌 수도 서울에서….
< 동아대 교수·한국사> 1999/03/13
[5개 역사단체] "풍납토성 내부 사적 지정해야"
역사학회(회장 민현구· 고려대 교수) 등 국내 5개 역사학연구단체 는 최근 시굴조사(매장문화재가 있는지 시험적으로 조사하는 것)도 없이 아파트터파기 공사에 들어갔다가 백제 초기의 유적과 유물이 대규모로 발굴돼 물의를 빚은 풍납토성 내부의 보존과 관련해 성명을 발표, 토성 내부도 사적으로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5개 역사학단체들은 성명에 서 『토성 안쪽 곳곳에 백제 초기의 역사를 밝혀줄 1급 유적이 남아있음 에도 토성 자체만 사적으로 지정(제11호)함으로써 유적이 파괴될 위험에 처했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이들은 ▲지하의 유적을 보존하기 위해 앞으로 토성 내부에 고층아 파트가 들어서는 것을 금지할 것 ▲토성 내부의 건축공사 전에 국가가 부담하는 사전발굴조사를 반드시 거칠 것 ▲현재 발굴이 진행중인 풍납 2동231-3 지역은 충분한 시간과 인력을 갖춰 체계적으로 진행할 것 등을 주장했다.
성명에 참여한 단체는 역사학회 외에 한국사연구회(회장 김정배 ), 한국고대사학회(회장 한규철), 한국역사연구회(회장 박종기), 한국고대 학회(회장 최무장) 등이다.
한편 문화재관리국 유형문화재2과는 21일 『3월22일까지로 잡혔던 풍납2동아파트건설현장의 발굴기간을 4월 하순까지 한차례 더 연장할것』 이라고 밝혔다.
서울시 송파구청 주택과 문홍범 과장도 『앞으로 풍납토성 내 건 축공사 때는 꼭 시굴과 발굴을 거친 뒤 공사에 들어갈 방침』이라고 말 했다.
1999/03/22
[풍납토성] 집터7기-기와 등 백여점 발굴
서울 송파구 풍납2동 풍납토성(사적 11호) 내 현대연합주택조합아파 트 신축부지 발굴현장에서 백제 초기의 생활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집 터 7기와 오족토기, 기와, 어망추 등 1백여점의 유물이 발굴돼, 국립문 화재연구소(소장 김동현)가 11일 공개했다.
이 지역은 유물이나 유적이 있는지를 시험적으로 발굴해보지도 않고 아파트 공사에 들어갔다가 유물이 출토돼 물의를 일으켰던 곳이다.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두었던 백제 초기의 집터가 완형으로 대규모 발굴된 것은 이번이 처음. 학계에서 하남 위례성으로 유력하게 비정하는 풍납토성이 정식 발굴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서기 3∼4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집터는 모두 평면에 6각형 구조로 이뤄졌으며, 이중 가장 규모가 큰 집터는 남북 11m, 동서폭 7m(23평)였 다. 서남향인 이 집터에서는 기둥과 지붕, 벽체를 구성했던 건축목재들 이 불에 타 쓰러진 채 있었으며 길이 2m, 폭 50㎝짜리 아궁이식 화덕과 토기 등도 남아있었다. 집터 주변에는 방어를 위해 토성과 나란하게 만 든도랑을 3중으로 팠는데, 긴 것은 길이가 30m 정도. 저장 또는 쓰레기를 버릴 목적으로 만든 원형의 구덩이 20여기, 토기를 굽던 가마터 1기 등도 발굴됐다.
11일 현장을 찾은 한 고고학자는 『백제 초기의 가옥구조를 이번 발 굴로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풍납토성은 지난 63년 사적 11호로 됐다. 그러나 토성 내부는 문화 재보호구역으로 보호받지 못해 최근 고층아파트가 들어서는 등 유적이 심하게 훼손되고 있다. 때문에 역사학회(회장 민현구) 등 5개 역사학단 체는 최근 풍납토성 내부도 사적으로 지정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냈다.
<신형준기자> 1999/04/11
[문화유적이 사라진다] 풍납토성
백제 초기(한성백제)의 수도로 학계가 유력하게 꼽고 있는 서울 송 파구의 풍납토성(사적 11호)에 쓰레기와 고철더미가 쌓이고 있다. 「훼손 하면 처벌한다」는 내용의 경고판만 10여개지만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경고판 바로뒤로도 쓰레기가 쌓였다.
관리를 맡은 송파구청은 『쓰레기종량제가 실시되면서 쓰레기를 마 구 버리는 것같다』는 엉뚱한 변명을 한다.
문화재관리국 관계자들은 『관리를 위임받은 단체에서 이 문제는 해 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풍납토성은 고운 모래를 한층씩 다져 쌓은 토성으로, 서기 1세기 쯤 세운것으로 추정된다. 풍납 1-2동에 걸쳐 있는데, 1925년 대홍수때 서북쪽 토성이 유실돼, 현재 남은 부분은 2천5백여m. 원래의 길이는 4천 5백m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성백제의 수도(하남 위례성)로 풍납토성에서 2∼3㎞ 떨어진 몽촌 토성도 꼽힌다. 몽촌토성은 지난 80년대 중반 발굴에서 수도로 꼽을 만한 이렇다할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최근 풍납토성을 한성백제의 수도로 꼽는 의견이 강하다.
학술적으로 이같은 중요성을 지녔음에도 풍납토성은 그동안 「푸대 접」을 받았다. 토성만이 사적으로 됐을 뿐, 토성 내부는 문화재보호구 역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때문에 대규모 건설 사업 때 시굴조사(유적이 있는가를 시험적으로 하는 발굴)도 없이 공사가 진행돼 왔다. 역사학회(회장 민현구) 등 역사 학 5개 단체는 최근 토성 내부도 사적으로 지정해야 하며, 그게 힘들다면 유적이 지하 4m쯤에 있는 만큼 깊게 터파기를 하는 아파트가 들어서는 것만이라도 막아야 한다는 성명서를 낸 바 있다.
토성 내부는 그만두고라도 사적으로 지정된 토성 자체는 제대로 보존되고 있을까?.
지난 8일 풍납2동지역의 토성. 성 내-외부를 연결하는 토성관통도 로에서 바로 보이는 곳은 석축을 쌓은 뒤 그럴듯한 보호책을 둘렀지만, 골목 안쪽으로 몇발자국만 들어가면 녹슨 철조망과 양철판을 얼기설기 엮어 사적임을 표시했을 뿐이다.
철조망 바로 뒤쪽으로는 곳곳에 쓰레기더미가 쌓였다. 생활쓰레기 에서부터 버려진 유모차, 소파, 폐가전제품, 자동차범퍼…. 쓰레기를 태운 재가 널린 곳도 많다. 쓰레기장인지 사적인지 구분이 안된다. 전체 적인 경관도 훼손됐다. 토성과 맞닿은 고물상만도 3군데. 이들은 고철 과 빈병, 포장지 등을 토성에 쌓아 놓았다. 보호구역 내 사유지에는 비닐하우스와 밭도 있다. 토성 경사진 곳에 기대 세운 가건물도 많다. 세차장이나 이삿짐센터 등에서는 짐이나 폐기물을 보호구역 안에 부려놓기도 했다.
송파구청 문화공보실 관계자는『매일 4명의 취로사업자가 토성주변 의 미화작업을 벌이고 있다』며『방치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적으로 지정된 곳도 이 모양이니, 토성 내부를 보존하자는 학계의 주장 은「사치스런」 것인지도 모른다.
<신형준기자> 1997/04/14
"풍납토성은 초기백제 왕성"
[문화재연구소 발굴설명회]
사적 11호 풍납토성(서울시 송파구 소재)이 비류와 온조의 건국 사화가 담긴 백제 초기 한성백제(서기 전후∼서기 5세기 후반) 시대 왕성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조유전)는 12일 토성 현장에서 발굴설명회를 갖고 "풍납토성은 바닥면의 폭 40m, 높이 9m에 이르는 거대한 성"이라며 "성벽 내 토층에서 원삼국기(서기 전후∼3세기)의 토기들이 나오고 있으며, 지난 97년 성벽 내부 조사에서 서기 전후한 시기의 집자리들이 나온 것으로 미뤄 볼 때 늦어도 서기 3세기 중엽에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날 참석한 고고학계 원로-중진들은 "지금까지 한성백제 중심지로 논란돼 온 몽촌토성은 축조 시기가 풍납토성보다 분명히 늦다"며 "인력을 동원한 규모로 보아도 한성백제의 왕성은 풍납토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백제 초기 역사의 실체가 드러났다." 12일 풍납토성 발굴 현장에 모인 고고학계의 한결같은 얘기였다. 그동안 한성 백제기(서기 전후∼5세기 후반) 왕성이 어떤 것이냐에 대해 학계에서는 풍납토성설과 몽촌토성설로 엇갈려 왔다.
80년대 중반 발굴된 몽촌토성의 중심 연대는 서기 4세기. 여기서는 군사 유물이 주로 발굴돼 군사 요충지임이 드러났다. 백제 초기 왕성 비정에 풍납토성의 무게가 더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97년 풍납토성 내부 집자리가 발굴되면서. 서기 전후한 시기의 환호를 갖춘 집자리 등이 발굴되면서 풍납토성이 초기 백제시대의 주요 거점이었음이 드러났던 것.
여기다 이번의 문화재연구소 발굴 결과 성벽 규모 등 축조할 당시의 사회 규모가 엄청났음이 밝혀지면서 풍납토성이 초기 한성 백제 왕성일 가능성이 더한층 강력해졌다. 고고학계는 "몽촌토성이 자연 지형을 이용해 일부 지형을 깎고 쌓은 것임에 반해, 풍납토성은 평지에 바닥 폭 40m, 높이 9m되는 토성을 4㎞ 가까이 쌓은 것"이라며 축조에 들인 노동력에서의 차이를 지적했다. 그 점이 바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비중의 차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토성 내부 발굴 결과 등을 종합해 볼 때도 풍납토성의 축조가 몽촌토성보다 빠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성벽 중심부에서 원삼국 시기의 토기가 나오는 것으로 볼 때 풍납토성이 처음 축조된 시기는 늦어도 서기 3세기 중엽일 것으로 학계는 추정했다.
학계는 "이 정도 토성의 축조는 연인원 수십만명이 동원돼야 가능하다"며 "당시 백제가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이뤘음을 방증한다"고 말했다.
발굴단은 그러나 "이 토성이 한 번에 쌓인 것은 아니다"며 "몇 차례 보수 축조됐는지 등은 토성 벽 발굴을 앞으로 더 진행해야 알 수 있다"고 밝혔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12일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개최한 서울 송파구 풍납동 풍납토성 발굴현장 설명회는 고고학 뿐만 아니라 한국 고대사학계에 일대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올 전망이다.
이날 모습을 드러낸 풍납토성은 일단 그 규모면에서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한강을 북쪽으로 끼고 반타원형 모양으로 3.5㎞를 빙두른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풍납토성은 현재 남쪽을 중심으로 2.2㎞ 가량만 남아있다.
그런데 문화재연구소가 현존 성벽 2곳 부분을 절개한 결과 현재까지 확인된 것만 해도 성벽 아래쪽 폭이 40m, 높이가 9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다.
문제는 이 풍납토성의 조성시기가 과연 언제냐는 것. 이날 발굴설명회에 참가한 이형구 선문대 교수와 최몽룡 서울대 교수, 심정보 대전산업대 교수 등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여기서 출토된 경질무문토기와 심발형토 기,연질타날문토기를 비롯한 출토유물들을 근거로 적어도 이 성벽 축조시기가 기원 을 전후한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늦어도 3세기를 전후한 시기에는 공사가 끝난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박순발 충남대 교수 같은 일부 고고학자는 이들 유물이 길게 잡아도 3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없으며 따라서 풍납토성도 3세기 초,중엽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지난 97년 발굴된 풍납토성안 주거지에서 발굴된 유적의 방사선탄소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으로 나온 점을 미뤄볼 때 이날 공개된 풍납토성도 적어도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축조에 들어간 것만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와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 일본학자들과 이병도에서 비롯된 대부분의 한국고대사학자들이 그 신빙성을 의심하고 있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기록이 맞아떨어지고 있음을 입증하는 더없이 좋은 증거가 된다.
지금까지 한국고대사학자 대부분은 건국이 기원전 18년이며 이미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강력한 절대왕권을 갖춘 것으로 기록한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기록을 허구라고 비판하면서 이병도를 따라 대체로 3세기 중반 고이왕 이후부터 역사기록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날 모습을 드러낸 풍납토성은 그 축조시기가 「삼국사기」가 백제 건국연대로 기록한 기원전 18년을 즈음한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뿐만 아니라 늦어도 기원후 200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축조가 완료된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이날 일부 고고학자들은 풍납토성이 한강을 끼고 있는 점을 들어 초기수도인 하남위례성의 성벽이 아니라 제방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는 신중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재의 풍납토성이 백제초기 수도라는 하남위례성이든 혹은 제방이든 현재 남아있는 거대한 풍납토성을 축성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인력동원이 있어야 하며 또 이를 위해서는 절대왕권이 성립돼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늦어도 기원후 200년 무렵에는 축조가 끝난 풍납토성을 축조했던 주인공 은 누구인가? 백제 밖에 없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한국고대사학자들처럼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기록 을 믿지 않고서는 연인원 수십만명이 동원돼도 완성에는 적어도 수십년 이상일 걸릴 것으로 보이는 풍납토성 축조를 도대체 설명할 수는 없다.
설사 박순발 교수의 설명처럼 풍납토성이 기원후 3세기 중엽쯤에 만들어졌다고 해도 대규모 공사와 이를 위해 필요한 대규모 인력동원이 3세기 중엽 어느 때 순간적으로 이뤄질 수는 없는 만큼 이미 그 이전부터 백제는 현재의 풍납토성 일대를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이룩했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됐다.
따라서 풍납토성은 지난 1세기 동안 한국고대사학계를 주름잡았던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기록에 대한 불신이 잘못됐음을 입증하는 단적인 증거가 된다.
(서울=연합뉴스) 김영섭기자= 백제 초기 왕성터로 알려진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내에 내년초 `풍납토성 역사전시관'이 들어선다.
송파구는 풍납토성이 최근 발굴조사 결과 기원전 3세기경 축조된 국내 최대의 판축토성임이 밝혀지고 이 일대에서 각종 유물이 출토되는 등 역사적으로 보존.보호 할 가치가 크다는 판단에 따라 내년초 `풍납토성 발굴지 보호각 및 전시관'을 건립키로 했다고 28일 밝혔다. 풍납동 235의 2 일대 풍납토성 문화재보호구역 미복원지역에 건립되는 전시관은 25억원을 투입,연면적 630평 규모에 초가 지붕과 토벽 형태로 지어진다.
전시관에는 경질 무문토기, 타날 무문토기, 장관형 토기 등의 각종 유물을 비롯, 토성 판축기법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토성을 절개한 발굴조사 현장의 원형이 들어서게 된다.
구 관계자는 "역사전시관이 건립되면 인근 몽촌토성,석촌동 백제 초기 적석총, 방이동 백제고분군, 삼전도비 등과 함께 문화유산의 산 교육장으로 각광받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백제초기 한성백제 시대의 왕성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은 성벽 내.외의 폭이 40m, 높이 9m, 총길이 2천526m로 지난 63년 국가사적 제11호로 지정됐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서울 송파구 풍납동 풍납토성 안쪽 경당연립재건축아파트 예정지 지하 4m 바닥층에서 확인된 대형건물터는 백제왕궁 혹은 그 부속 건물 중 하나임이 유력해졌다.
평평하고 납작한 돌을 줄을 지어 여(呂)자형으로 쌓은 이 건물터는 현재까지 동서축 16m가 최종 확인된 반면 남북축은 지금까지 14m가 드러났으나 조사대상 구역을 벗어난 인근 주거지 밑쪽으로 계속 확대되고 있어 현재로서는 얼마나 더 연장될 지 알 수 없다.
이러한 건물 규모는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해도 황룡사나 익산미륵사지 같은 대형 절터를 제외하고는 삼국시대 이전 건물로는 최대인 것으로 드러나 이곳이 백제왕궁의 일부이거나 적어도 그 부속 건물 중 하나임은 거의 확실해졌다.
지난해 9월 이후 이곳을 발굴 중인 한신대박물관은 25일 오후 발굴현장에서 제3차 지도위원회를 갖고 이같은 내용을 담은 발굴성과를 발표했다.
발굴단은 지금까지 확인된 발굴대상 지역안 190여기의 크고 작은 유적지 중 하나인 이 건물터에서는 지난 1월12일 제2차 지도위원회 개최때까는 확인되지 않은 기둥구멍과 벽을 판자로 댔던 흔적까지 발견돼 이곳이 백제왕궁의 일부이거나 적어도 그 부속 건물 중 하나일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발굴단은 건물터 바깥을 빙 둘러 폭 1.5m, 깊이 1.2m의 도랑 비슷한 시설을 만들고 그 밑바닥과 그 양쪽 조금 높은 곳에다가 넓적한 돌과 고운 숯을 깔았으며 건물의 바깥과 안쪽을 이 도랑으로 분리시킨 점 등을 고려할 때 이 건물터가 모종의 제사와 관련될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이곳이 곧 백제 왕실이 조상이나 천지 등에 제사지내던 사당터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하지만 일찌감치 풍납토성을 백제왕성으로 지목했던 선문대 이형구 교수는 '이것이 사당터라고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며 왕궁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고 조심스런 반응을 보였다.
그는 '적어도 서기 3세기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건물터가 기와와 전돌이 함께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일반 주거지라고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고 왕성에서만 가능한 일'이라면서 '설사 이것이 사당터라 해도 그것도 왕궁 부속건물인 것 또한 분명한 만큼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임은 이미 결판났다'고 말했다.
이와함께 이 건물터 근처에서는 직(直.곧을 직)자를 새긴 수수께끼 같은 전돌(일종의 벽돌)과 암키와도 함께 출토돼 이 건물이 나무기둥에다가 나무판자로 벽을 삼은 목조 기와건물이었음이 확인됐다.
또한 이 건물터와 바로 인접한 대형 구덩이(길이 13m,폭 5.2m,깊이 2.41m)에서는 장신구로 사용됐음이 분명한 홍색,황색,청색의 각종 유리구슬이 다량으로 나온 것을 비롯해 조그마한 원형 금판 1점, 동물 몸통으로 추정되는 소형 토우 1점, 과실의 씨앗, 작은 골편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찌꺼기 및 제사 같은 신성한 의식에 희생물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말 머리뼈 두 개체분이 추가 확인됐다.
이밖에 다른 유구에서도 소형의 황색 유리구슬과 청색의 관옥 각각 1점을 비롯해 대추모양의 구슬, 한나라 무제 때 만들어 사용한 화폐인 오수전으로 추정되는 유물 1점이 나왔다.
발굴단 관계자는 한성백제 유적층이 고도로 밀집돼 있고 이미 백제 당시에 기존의 터를 헐어버리고 그 위에다 새로운 공사를 여러 차례 했기 때문인 듯 유적이 심하게 교란돼 있어 조사에 애를 먹고 있다면서 '이처럼 많은 유적과 유물이 2천평 가량되는 좁은 곳에서 쏟아져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taeshik@yonhapnews.co.kr
■ 경향신문
최종 편집 : 2000/04/25 19:20:30
“풍납토성은 백제초기 밝힐 열쇠” 〈최몽룡 서울대교수〉
백제 왕성의 가능성 및 보존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는 서울 풍납토성 경당주택유적 현장에서 25일 발굴결과 설명회가 열렸다. 그간 발굴조사 지도위원으로 수차례 유적을 방문했던 서울대 최몽룡 교수의 유적 성격에 대한 기고문을 싣는다. /편집자주
지난해 9월부터 최근까지 실시된 한신대 박물관의 풍납토성 경당연립주택부지 발굴에서는 대형건물터, 기와, 건물의 바닥에 까는 전(塡)돌, ‘대부’(大夫) 및 우물 ‘정’(井)자가 새겨진 문자토기를 비롯, 대량의 백제 초기 유물들이 쏟아지고 있다.
이 가운데 눈여겨볼 것은 대형 건물터다. 동서축 16m, 남북축 14m의 여(呂)자형 집으로 지상 가옥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백제의 종묘와 관련된 제사유적일 가능성이 크다. 바로 인근 유구의 구덩이에서는 말의 하악골(턱뼈) 7개체 분이 나온 사실은 말뼈가 제사 희생물로 쓰였음을 뒷받침한다. 이 구덩이는 말하자면 제사 후 폐기된 도구와 음식을 버리는 폐기처인 것이다. 중국의 상나라(기원전 1750년∼기원전 1100년)의 마지막 수도인 은허(殷虛) 대사공촌(大司空村) 175호분 등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말은 국가, 즉 왕이 주도하는 제사의 희생물이다.
또한 건물지의 형태가 여(呂)자인 것은 이 건물의 연대가 올라갈 수 있음을 시사해준다. 중부지역, 특히 강원도의 철기시대 전기(기원전 300년∼기원전후)에는 장방형-방형-요철자형-여(呂)자형 집자리로 발전하는데, 제사터의 평면이 여(呂)자형인 점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곳 경당지구의 제사터, 기와와 전돌이 사용된 것은 궁궐과 같은 건물터, 제사 희생물로서의 말뼈, 문자가 새겨진 토기 조각은 이곳이 왕도일 가능성이 한층 높다는 것을 말해준다.
만일 그렇다면 이곳 제사터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편에 “원년(기원전 18년) 여름 5월에 동명왕의 사당을 세우다”와 “17년 여름 4월에 사당을 세우고 왕의 어머니에게 제사지냈다”는 기록과 관련이 있음을 추측케 한다.
덧붙여 1997년 현대아파트 건립을 위한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 결과 기원전후∼4세기에 이르는 문화층이 확인된 바 있으며, 지난해 성벽 발굴조사에서는 높이 9m, 폭 40m의 거대한 성벽 축조과정이 밝혀진 바 있다. 결론적으로 풍납토성은 외벽의 성곽을 비롯해 국가의 상징기념물인 제사터와 궁궐을 모두 갖추고 있을 가능성이 많은 백제 초기 역사의 비밀을 풀 열쇠라고 할 수 있겠다.
풍납토성의 발굴조사가 중요하고, 그 유적을 보존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풍납토성의 축조시기와 성격
1997년 이래 최근까지 발굴조사된 내용을 종합해보면 풍납토성의 축조시기와 성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풍납토성의 축조시기와 관련하여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은 1997년도 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조사된 지점에서 확인된 3중환호 및 그와 관련된 취락유적들이다. 환호는 흙을 쌓아 만든 성벽과 달리 땅을 도랑형태로 파서 일정한 공간을 외부와 차단하는 구조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 이래 등장하고 있는데, 풍납동에서 드러난 환호는 토성축조 이전에 이미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 시기는 환호내부에서 출토된 토기의 연대로 보아 3세기 전반-중엽경으로 비정된다.그러므로 이 환호취락 이후에 축조되었음이 분명한 토성은 그 상한연대가 3세기 중엽경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1999년도 토성 성벽 절개조사시에도 확인된다. 토성 축조 이전의 기반토층에 주거지 또는 저장공으로 추정되는 유구의 단면이 노출되었으며 그곳에서 역시 환호취락시기의 토기와 동일한 토기가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풍납토성의 축조연대 비정과 관련하여 최근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가 기원전 50-기원후 200년경으로 나온 것을 근거로 한 반론이 있다. 여기서 우선 방사성탄소연대의 성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방사성탄소연대는 유물이나 유적을 제작 또는 축조한 인간 행위의 시기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러한 행위와 밀접한 관계에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한때 살았던 생명체가 죽은 시점을 말해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숯을 시료로 한 연대측정 결과는 숯이 되었던 나무가 죽은 시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사성탄소연대를 근거로 유적이나 유물의 연대를 추정하기 위해서는 해당 시료와 우리가 알고자 하는 유적이나 유물의 제작 또는 사용시기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신중한 전제적 판단이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기원전후한 시기부터 기원후 300-400년 사이에는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결과가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므로 이를 근거로 적어도 풍납토성의 축조시기를 기원전으로 올려보는 것은 위험하다.
다음, 풍납토성의 성격은 한성시기 백제의 도성 가운데 하나라고 요약할 수 있다.당시 도성제도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라는 2개의 성곽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가운데 풍납토성은 '대성' 또는 '북성'으로 , 몽촌토성은 '남성' 또는 '왕성'으로 불리워 지고 있었음은 삼국사기나 일본서기 웅략기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따라서 풍납토성이 왕성이고 몽촌토성은 그렇지 않다거나 한성시대의 도성은 풍납토성이라는 주장은 무의미하다.
풍납토성은 전체의 길이가 약 3.5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토성이다. 이러한 규모의 성곽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은 곧 국가의 성립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성곽의 출현과 국가의 등장이 가지는 밀접한 관련성은 이미 황하문명으로 대표되는 중국에서의 국가성립과정에 대한 자세한 연구가 있다.
끝으로, 1999부터 최근까지 조사가 계속되고 있는 경당연립부지에서 드러난 유적의 성격과 관련해서 이다. 그 가운데 주목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대부'명 토기편이 출토된 유구 및 그것과 인접하고 있는 대형 건물지이다. '대부'명이 있는 토기편은 한성기 백제양식을 대표하는 토기의 파편으로서 백제고고학에서는 직구단경호(곧은 목 항아리)로 부르는 것이다. 이 토기는 대략 3세기 중엽 또는 후반경에 출현하여 이후 백제 지배층들의 위세품으로 사용된 것이다. 여기 토기의 제작시기는 4세기 후반경 또는 늦어도 5세기 초를 넘지 않을 것으로 비정된다. 이러한 정황에 비추어 이 토기가 출토된 유구의 성격은 적어도 일상적인 용도의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특히 고대 제사에서 희생으로 사용되는 예가 많은 말뼈가 함께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더욱 그러하다. 한편, 이 유구와 바로 인접한 대형건물지는 이와는 시기를 달리하는 것이다. 이 건물지의 시기는 앞서 본 1997년도에 확인된 3중환호 마을과 동일한 것으로 3세기 중엽경을 하한으로 한다. 다시 말하면 아직 백제가 국가단계의 사회로 진입하기 이전의 구조물이다. 그 형태로 보아 신에 대한 제의가 이루어지던 특수한 용도의 건물로 파악한 발굴조사단의 의견에 공감되는 바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