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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옥의 말과 글] [397] 초연결 시대의 단절
출처 조선일보 :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5/03/15/TOAJFT2EQFEHPPHAYMOLIFXLVE/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아파트 단지를 걷다 보면 아이보다 지켜보는 어른이 많은 놀이터를 쉽게 발견한다. 아이가 싸우거나 다칠 때를 대비해 만반의 준비 중인 어른들이다. 미국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의 ‘불안 세대’를 읽으며 나는 이 흔한 동네 풍경을 떠올렸다. ‘불안 세대’는 현실 세계의 ‘과잉 보호’와 온라인 세계의 ‘과소 보호’가 어떻게 아이들을 병들게 하는지 분석한다.
놀이터에서 그네를 먼저 타고 싶었던 아이가 순서를 뺏기자 울면서 아빠를 바라본다. 아빠가 달려간다. 갈등을 봉합하고 놀이 순서를 다시 정하고 화해하는 데 걸린 시간은 5분. 언뜻 문제없어 보이는 이 장면에 집중 육아의 병폐가 숨어 있다. 자율적인 놀이를 통해 호기심과 독립심을 키우고, 또래와 겪는 갈등을 해결하는 법을 배우는 아이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하이트는 “어린 나무가 제대로 자라려면 반드시 바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바람은 나무를 휘게 만들지만 그 속에서 나무의 세포들은 압력을 견디느라 더 단단해지고, 뿌리는 더 깊어진다. 약간의 스트레스가 면역력을 높이는 안티프래질 이론을 양육에 적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실 내가 놀이터에서 가장 문제라고 본 장면은, 놀이터의 모든 어른이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것이 온라인 과소 보호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망가진 건 어른의 뇌도 마찬가지다.
미국 13주에서 아동의 소셜미디어 사용을 제한하는 법률이 통과됐다. 프랑스는 13세 미만 스마트폰 사용 금지 법안 입법을 검토 중이고 호주는 16세 미만 소셜미디어 가입 금지법을 추진 중이다. 과거보다 나빠진 아이들의 정신 건강 때문이다. 모든 것이 연결된 과도한 ‘소통의 시대’는 ‘고통의 시대’로 치환되었다. 상대 마음을 읽는 ‘낭독의 시대’는 가고 ‘난독의 시대’가 왔다. 스마트폰은 이제 아이들의 여섯째 손가락이다. 이들에게 시급한 건 과도한 IT 기기를 분리하는 일이다. 초연결 시대의 단절은 이제 건강한 양육의 핵심이 될 듯하다.
백영옥 소설가
빛명상
동심은 최고의 창조력
미래를 열어갈 부모와 아이들에게 보내는 빛의 메시지
집에 있는 아이들 생각에 광력수 한 모급이라도 아껴 집으로 가져가는 부모님들을 흔히 보게 된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세상에 있는 모든 좋은 것, 귀한 것을 다 가져다주고 싶은 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이 아닐까.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부모의 마음이 정작 자식에게는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는 사실이다. 자식에게 진정한 사랑을 주는 방법을 잘 모르기 때문일 수도, 혹은 경쟁하듯 눈에 보이는 것만 부추기는 사회 풍조 때문일 수도 있다. 특히 아이들 교육과 관련하여 대학입시 중심의 교육제도 전반에 대한 비판은 이미 오랜 논쟁거리가 되어버렸고,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일진회와 같은 대규모 불량 청소년 모임에서 드러난 탈선행위는 그 규모와 정도에서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해맑고 순수하게 자라주어야 할 우리의 아이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고 생각해보면 그 이면에는 비뚤어진 어른들의 마음이 깔려있음을 알게 된다. 아이들은 깨끗한 도화지와 같은 순수, 무(無)이기 때문에 이끄는 대로 따라오고 만드는 대로 모양을 갖추게 된다. 그 순수함을 보호하고 아름답게 꽃피워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들 부모, 어른들의 몫이다.
지나친 학업 강박증으로 정신 착란 증세까지 갔던 한 여자아이를 만났던 기억이 있다. 국내 유명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여러 차례 입상할 만큼 뛰어난 재능으로 미래가 촉망되던 이 아이는 어느 날부터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주변 사람에게 공격적으로 난동을 부리는 등 이상한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병원 치료로도 쉬 낫지 않아 다른 곳에 가보니 귀신이 붙었다 하기에 굿이나 제사도 많이 지내보았다고 했다. 그러나 아이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처음 그 아이를 만났을 때 아이의 가느다란 몸은 온통 침대에 꽁꽁 묶여 있었다. 마치 온몸을 꽁꽁 묶어 철창에 가둬놓은 작은 새 한 마리를 보는 것 같았다. 아이의 병은 귀신이 아닌 지나친 압박감과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뒷면에 사랑의 이름으로 가장한 부모의 무서운 집착과 독단도 볼 수 있었다.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단지 아이 혼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 아이와의 관계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에 부모도 함께 빛명상을 하며 관조하고 성숙한 사랑을 베푸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아이가 탈선하고 어긋나는 것은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일진회와 같은 청소년 모임이 그만큼 큰 규모로 번져나갔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지닌 부정적 에너지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한 단적인 예일 수도 있다. 따라서 그만큼 더 큰 사랑과 보살핌으로, 즉 긍정적인 에너지로 우리 아이들을 덮고 있는 어두운 에너지를 상쇄시켜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결과물, 성취물, 경쟁만을 부추길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재능을 살펴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성숙한 사람들로 키워내기 위하여 어른들이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참으로 무지한 발상이다. 또한 교육제도 전반에 걸쳐 기존 관행을 위한 개혁이 아닌 진정으로 아이들을 위한 실질적이고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새장에 갇힌 새처럼 하루종일 빽빽이 짜인 스케줄에 의해 움직이는 아이들에게서 해맑고 천진한 모습은 거의 찾기 힘들고 그저 부모의 부속품 정도로 전락해버린 듯한 느낌을 받는다. 무조건 남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만 강조하다 보니 더불어 살아가는 마음, 남을 배려하고 보살피는 마음은 아예 뒷전이다. 세상을 향해 호기심과 꿈을 키워가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기 힘든 일상의 무게를 벗어나기 위해 순간의 즐거움과 무절제함에 빠져버린 아이들도 많다.
우리의 미래를 짊어질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이 이렇게 멍들고 상처받는 것을 보면서 나 또한 자식을 가진 부모의 입장에서 과연 진정으로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진실로 아이들을 위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옛날 도경께서 미래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시며 들려주셨던 동화를 떠올리게 된다. 아이들에게 들려주어도 좋은 옛날 이야기지만 부모님들도 한 번쯤 잘 듣고 마음속에 되새겨 보면 어떨까 한다. 152-155
● 마음으로 읽는 동화 : 지암이와 지옥이
지암이와 지옥이는 닭이 올 때 만나기 시작해 별이 지면 헤어질 정도로 세상에 둘도 없이 친한 동갑내기 단짝 친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이 여섯 살 나던 해, 지나가던 한 이름 모를 노인이 지암이와 지옥이가 사이좋게 놀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안타깝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총명하고 영특한 아이들이건만, 두 아이 모두 일곱 살을 넘기기 힘들겠구나."
이 말을 들은 지암이와 지옥이는 곧 엄마에게 뛰어가 이 말을 전하였고, 깜짝 놀란 아이의 어머니들은 곧 그 이름 모를 노인의 행방을 물어 찾아가기에 이르렀다.
노인은 비록 행색은 남루하였으나 세상의 도를 깨친 큰 어른이었다. 지암이와 지옥이의 어머니는 이 노인에게 매달려 부디 아이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며 간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인은 자신이 아무리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사람의 명을 늘이는 재주는 없다며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러자 지옥이의 어미는
"당신이 진정 도인이라면 무조건 살려주셔야죠. 정말 너무하십니다. 강물에 돌 하나 던지듯 아이의 명이 짧다고 말만 하고는 아이의 명을 늘이는 방편은 알려주지 않다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세상천지에 도인이 어디 당신 하나뿐입니까?"
하고 불쾌한 마음을 도인에게 쏟아낸 채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반면 지암이의 어머니는 그런 지옥 어미의 반응에 미동도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식만을 생각하며 간절함과 애타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빌고 또 빌었다.
"도인님, 하늘의 도를 깨치셨다는 분이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좋습니다. 아이를 살려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아이가 그렇게 일찍 죽을 운명이라면, 스승님 밑에서 공부라도 하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영혼이라도 깨쳐서 좋은 곳이라도 가지 않겠습니까? 제발 이 청이라도 들어주십시오.“
간곡한 지암이 어머니의 정성에 도인은 결국 그 청을 거둬들이고 말했다.
"알겠소. 당신의 그 간절한 마음이 나의 마음을 움직였소, 그렇다면 이제 이 시간부터 이 아이를 내게 맡기시오. 내 재주는 없으나 최선을 다해서 잘 가르치고 하늘에도 그 방법을 빌어보리다."
그 날 이후부터 지암이는 움막 산사에서 스승을 따라 허드렛일을 하며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 공부는 세상에 태어나 삶의 진정한 목적과 생명의 법에 대한 내용으로서 즉, 모든 풀벌레, 풀 한 포기 등 생명의 존재를 통해 사랑과 자비, 더 나아가 순수를 배우는 것이었다. 그 어느 곳에서도 배울 수 없는 하늘의 큰 공부를 배우며 어느덧 지암이의 몸과 마음은 하루하루 닦여져 갔다.
한편 지암이의 어머니는 집 마당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빌고 또 빌었다. 단순히 아이를 '살려 달라' 는 기도가 아닌 아이의 영혼에 깃든 생명을 살려달라는 정성어린 기도였다.
"모든 만물의 높은 곳에 존재하는 큰마음이시여, 제발 우리 아이를 살려주십시오. 허나 죽는 것도 당신의 뜻임을 알고 따르고자 하니, 부디 아이의 영혼만은 깨쳐 좋은 곳에 갈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저녁으로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이어진지도 일 년이 흘렀다. 그 사이의 지암이 또한 산사의 도인으로부터 열심히 마음의 가르침을 얻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인은 지암이를 부르더니 모든 노력을 다한 끝에 하늘의 뜻만을 기다리는 자가 내쉴 수 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암아, 그동안 잘 참고 견뎌내었구나. 어린 몸으로 이 스승을 따라 고생도 많이 하였겠느니, 오늘은 특별히 어머니와 하룻밤을 지내고 오너라. 단 내일 미시(未時, 낮 1~3시)를 넘지 말고 이곳에 와야 하느니라. 알았느냐?"
"예, 스승님 감사합니다. 내일 꼭 미시까지 돌아오겠어요."
사실 지암이가 맞이하게 되어있는 운명의 시간이 바로 미시였다. 그 운명의 시간 전에 어머니를 만나게 해주고자 한 것이 도인의 마지막 배려였다.
아이는 스승이 왜 자신에게 이런 시간을 주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어머니를 본다는 설렘에 재를 넘고 또 넘으면서도 힘든 줄을 모르고 달음박질을 하였다. 그렇게 달려 드디어 어머니가 계시는 마당에 들어섰다.
'엄마!' 하는 아이의 외침 소리를 듣고 버선발로 뛰어나온 지암이의 어미는 아이를 부둥켜안고 한없이 울었다. 그리고 그리움과 애절함은 하룻밤이 다 지나도록 풀릴 줄을 몰랐다.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슬픔만이 커져갔다. 만난다는 기쁨도 잠시 내일이면 다시 또 헤어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다음날이 되어, 닭이 울고 해가 떴다. 지암이는 서둘러 집을 나서 스승이 계신 움막 산사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서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갑자기 억수 같은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쏟아붓던 소나기가 그치자, 불어난 물도 순식간에 빠져나가고 햇볕이 쨍쨍 나기 시작했다. 스승님이 말씀하신 미시까지 가기 위해 서둘러 길을 가던 지암은 큰물이 빠지고 난 계곡 돌틈 사이에 물고기들이 파닥파닥 뛰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아이, 애처로워라. 내가 살려 줄게."
지암이는 스승과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차마 죽어가는 물고기를 못 본 체하며 갈 수 없었다.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물고기를 개울로 옮겨주다 보니 어느새 스승이 말한 미시가 가까워졌다. 그 시간은 곧 지암이의 마지막 운명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이때, 지암이를 데려가기 위해 찾아온 저승사자는 죽어가는 물고기를 땀을 뻘뻘 흘려가며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옮기는 모습에 차마 저승으로 데려갈 수 없어 가만히 아이가 하는 대로 지켜보다 그만 데려갈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그렇게 하늘나라로 돌아간 저승사자는 아이가 물고기를 살려주는 아름다운 모습 때문에 차마 아이를 데려올 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자 하늘에서도 생명의 고귀함을 알고 행하는 지암이의 갸륵한 모습에 감동하여 7살이던 아이의 명에 7자 하나를 덧붙여 77세까지 장수할 수 있는 명을 주었다.
반면 지옥의 어미는 도사로부터 불쾌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와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세간에 유명하다는 도인은 모두 다 찾아가 보았다. 그러나 모두들 아이가 일곱 살을 넘길 수 있는 방편은 어디서도 구하지를 못하였다. 다만 지옥이가 물에 빠져 죽을 운명이라는 더욱 해괴한 말만 듣게 되었다.
지옥의 어미는 어떻게든 자신이 아들의 명을 바꿀 것이라며 이를 악물었다. 물에 빠져 죽는다 하였으니 어떻게든 물만 피하면 아들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후로는 절대 물이 있는 곳에 아이를 데려가지 않았다. 하다못해 접시물 하나도 아이 옆에 두지 않았다. 그렇게 늘 노심초사 아이 옆을 지키며 물을 조심시키면서 일 년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옥이의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게 되었다. 하필 그날 지옥의 어미는 다급한 볼일이 생겨 집안을 비워야 했다. 마을 건너 개울을 건너야 했기에 아이를 데려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아이를 혼자 내버려 두고 가자니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물만 없으면 아이가 죽을 일 또한 없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고 집안의 우물을 모두 메우는 것은 물론 항아리며 물을 담는 작은 그릇조차 모두 없애 버렸다. 그것도 부족하여 자신이 없으면 혹시 아이 혼자 밖으로 다니다 물가에라도 가서 빠질까 하는 걱정에 방문을 굳게 잠그며
"절대 엄마가 없을 때는 물도 마시지 말거라."
신신당부를 한 후 집을 나섰다. 서둘러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지옥 어미는 아이가 걱정이 되어 집에 돌아오자마자 급하게 아이부터 찾았다. 방문을 열어보니 아이가 책을 보다 말고 엎드려 있는 것이었다.
"지옥아, 지옥아!“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어 아들을 다시 불렀지만 지옥이는 대답이 없었다. 지옥의 어미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이는 천자문을 보고 있엇던 듯 책을 펴놓고 엎드려 있었는데 그 손가락이 '水' 자를 가리고 있었다. 아이가 물 때문에 죽는다고 하여 물그릇조차 치우고 방문까지 잠갔지만 천자문 속 글자가 아이를 데려갈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지옥 어미는 지난 일년 간 자신의 정성을 순식간에 앗아가 버린 하늘을 원망하며 울고 또 울었다. 155-160
● 동심은 최고의 창조력
이 이야기의 내용이 다소 극단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한 아이에게 있어 무엇이 진정 소중한 것인지, 무엇이 그 아이를 진정으로 위하는 길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그리고 그 길을 바로 알면 지암이의 어미처럼 아이의 피할 수 없는 숙명조차 바꿀 수 있다.
운명이란 피하면 피할수록 더욱 거세게 몰아치는 폭풍과 같기 때문에 지옥이처럼 단순히 머리를 써서 그것을 피해 보겠다는 발상은 어리석은 일이다. 오히려 자신의 운명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생명의 귀중함과 감사함, 자연의 순리를 알아 복을 쌓는 것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에너지를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이다.
모든 아이들이 일등을 하는 사회는 있을 수 없고 하나의 잣대만을 놓고 하는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은 정해진 소수일 뿐이다. 한 명의 승리자를 만들기 위해 나머지 아홉 명은 패자로 만들어 버리는 교육은 결국 사회 전체를 패배자의 집단으로 만들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것에 전능한 능력자가 아니라 한 사회의 훌륭한 시민으로서 성실하고 진솔하게 삶을 꾸려나가는 한 사람의 인간이다.
아이들의 밝고 투명한 마음속에 자꾸만 어른들의 관념을 애써 주입한다면 아이는 새로운 발상과 창조를 하지 못하고 점점 어둡고 무겁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틀에 박힌 지식위주의 교육보다 더 앞서 행해져야 하는 것은 아이들로 하여금 자연의 소중함과 마음의 순수함을 먼저 알게 하는 일이다. 지식만을 최우선으로 삼는 교육은 결국 아이들의 감성과 사고를 메마르게 하고 자연과 동떨어진 기계 인간을 양성할 뿐이다.
넓은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우리 자신들은 물론 아이들의 운명은 벌써 거대한 우주의 스케줄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돌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아무리 부정하고 거부하려고 해도 사과나무는 사과나무로, 감나무는 감나무로 성장하여 열매를 맺게 되어있는 것이다. 사과나무의 주인이 그 나무에 다른 과일 나무의 가지를 접붙이기를 하듯 근본적으로 해결책이 없는 한 기존의 그릇을 거스르거나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여 아이의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갖지 않고 방관하거나 완전 방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같은 사과나무라 하더라도 향기로운 꽃을 피우고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튼튼한 뿌리와 비옥한 거름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이 타고난 틀 안에서도 최상의 열매를 맺어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는 선조와 아이들의 중간에 서 있는 우리들이 그 매개자로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부모란 바로 이 매개자의 입장에서 아이들이 타고난 본연의 순수함이 상처받지 않고 잘 자라 향기로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아이들의 삶을 비옥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원천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에서 온다. 교만함 없이 세상과 더불어 나누고, 자연에 순응하는 마음이 아이들을 키우는 더없이 좋은 양분이 될 것이다. 이러한 근본 바탕이 충실히 지켜지는 상태에서 현실적인 노력과 교육이 행해져야 하는 것이며, 이것이 아이들을 올바르고 창조적인 미래의 일꾼으로 성장시키는 최선의 방법이다.
이제 답답한 과외 공부를 하기 전에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아이들에게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보고 안정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 어떨까. 적어도 하루 수업,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3분만이라도 빛명상을 하게 하면 긍정적인 에너지와 활력을 접하고 학교 전체가 활력에 넘치게 될 것은 물론 우리나라 미래가 달라질 것이다.
진정한 창조, 인류를 구원으로 이끄는 발상은 자유로움에서 나온다. 마음이 갇혀 있지 않고 자유로운 순간, 그 순수한 마음에 지혜가 깃드는 것이다. 더 이상 하나의 잣대로 아이들을 옭아매려하지 말고 한 아이, 한 아이의 마음에 깃든 그 고유의 색깔, 반짝거리는 빛VIIT 알갱이를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 중요하다.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이야 말로 최고의 창조력을 낳는 기본 바탕이다. 160-164
출처 : 물음표(?) 2005/07/05 초판 1쇄 발행
2005/07/20 초판 3쇄 P. 152-164
첫댓글 아이들의삶을 비옥하고 풍요롭게 만드는생명 원천의 빛과함께 ~~
감사합니다.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을 잃지 않도록 부모로서 그 길을 열어주어야 함을,
모두가 깨치고 빛과 함께 아이들이 동심으로 성장하기를 기원합니다 .
감사합니다 .
무한의 빛명상 빛과 함께 해주심의 특은의 무궁한 공경과 감사마음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이들의 동심을 회복시켜주는 빛VIIT의 힘, 감사합니다.
아이들의 삶을 비옥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원천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에서 온다.
귀한 빛글 <동심은 최고의 창조력>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순수한 동심에 깃드는 지혜에서 창조의 발상이 나옴을 가르침주는 소중한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경쟁보다 아이들 본연의 순수한 빛마음을 일깨워주는 부모가 많아지기를 기원합니다.
귀한문장 차분하게 살펴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운영진님 빛과함께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감사 합니다.
순수의 의미를 되새깁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이야기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빛이야기 감사합니다.
빛의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빛 의 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