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다 교수는 5월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을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의미에서 또 다른 3·1운동으로 평가했다. 김 교수는 한일 역사 화해는 두 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을 동아시아의 공동체에 적극 참여토록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역사 문제 해결에는 정치인이나 관료가 먼저 나설 수 없는 만큼 더 많은 지식인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양국 지식인 공동선언은 한국에서 반향이 컸다. 일본은 어땠나.
▽와다 하루키 교수=한국과 일본의 지식인들이 공동성명 형태로 병합의 원천무효를 선언한 것은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 한국과 비교했을 때 일본에서는 언론의 주목을 크게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변화의 움직임은 있다. 반응 자체의 크기보다 일본 사회 저변에 흐르고 있는 변화에 의미를 두고 싶다. 시민의 영역에서 먼저 일어난 변화가 정부 영역으로 확산돼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한다.
▽김영호 총장=어떤 의미에서는 100년의 숙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한다. 한일 양국의 역사학자들이 모여 양국 역사를 정립하려는 두 차례의 한일역사공동연구회 활동에서는 큰 진전이 없었다. 일본과 중국 학자 간의 공동역사연구회 활동도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난징문제(대학살)에 대해 양국 학자들의 인식차는 컸다. 이런 상황에서 한일 양국 지식인들이 한일강제병합 과정에 나타난 불법부당과 그에 따른 효력의 원천 무효를 합의했기 때문에 의미가 크다.▽와다=한국을 지배한 뒤 일본은 식민지 문제를 반성할 기회가 3차례 있었다. 조선이 독립한 시점이 첫 기회였고, 1965년의 한일조약이 두 번째였다. 1995년 무라야마 총리 담화에는 식민지 지배가 조선인들에게 고통을 주고, 피해를 끼쳤다는 내용이 있었지만, 식민지 지배가 언제부터, 무엇을 통해 일어났는가를 설명하지 않았다. 이번 공동선언에서 한일강제병합 과정을 합의해 정립한 것은 이런 면에서 의미가 있다. 한일강제병합 100년이라는 이번 기회를 일본은 움켜잡아야 한다.
―최근 국제사회에서는 전쟁범죄와 식민지 범죄를 구별해, 식민지 범죄에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김=제2차 세계대전 후 열린 도쿄 전범 재판이나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승전국들은 일본에 전쟁 책임과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만 물었다. 식민지 문제는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그 뒤 일본은 경제와 민주주의가 발전했고 시민사회도 성숙했다. 한국도 발전을 이뤘다. 시민사회가 성숙해지면 인권과 민주의식을 기반으로 식민지 지배 문제를 돌아보는 자립성을 갖추게 된다. 강만길 이태진 교수와 같은 한국 역사학자들의 연구 결과도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묻는 데 바탕이 되고 있다.▽와다=일본 지식인 사이에서 전쟁과 군대에 대한 반성이 있었지만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은 없었다. 그러나 역사가 중에는 식민지 지배를 반성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진 이들이 많다. 관련 책도 많이 나왔다. 문제는 이런 인식이 정부나 여론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 시민들 중 일부는 ‘제국주의 문제는 정면으로 맞서 해결해야 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 이게 중요하다. 여기서 출발해 사회로 퍼지고 정부가 바뀌는 것이다. 변화는 거기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번 공동선언에는 지식인들만 나섰다는 한계가 있는데….
▽김=관료는 힘은 있지만 역사 문제 해결에 직접 나서기 힘들다. 정치인도 양심이나 인식과 달리, 입장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못할 수 있다. 지식인이 나서는 것은 역사적 임무다. 이번 공동선언을 독립기념관이나 백범기념관에서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공동선언은 자국민 중심주의를 넘어서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곳을) 일부러 피했다.
▽와다=공동선언에 일본의 역사가들이 많이 참여했다는 사실에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일본 사회의 역사를 보는 눈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행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시대로 진입한다는 의미에서 이번 공동선언을 ‘3·1 독립운동’과 비슷한 ‘5·10선언’이라고 말하고 싶다. 역사적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측면에서 양국이 함께한 ‘또 다른 3·1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양국 지식인은 자기비판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동아시아의 진정한 역사 화해는 어떤 의미인가.
▽와다=동아시아의 유교와 한자를 정체성의 요소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중요한 공통분모이기는 하지만 역사 대립과 침략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궁극에 한일 문제가 있다. 심각한 역사 문제를 극복하고 관계를 개선하지 않으면 다른 어떤 관계도 성립할 수 없다. 공동체의 번영은 요원한 것이다. 한일 간의 역사 화해가 가능해진다면 동아시아 지역이 갖고 있는 다른 문제도 해결될 것으로 본다. 진정한 의미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김=중국을 ‘중화사상’이라는 큰 우물에서 빼내는 것이 가능할지에 관심이 많다. 중국 대학에서 강연할 기회가 가끔 있는데, (현지인들이) 중화민족주의에 너무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이 중국의 우물을 좀 깨부숴 주길 바란다. 일본이 아시아의 친구로 다가와 그런 일을 해주기 바란다.
―미래를 위해 한일 양국 정부에 기대하는 것은….
▽와다=이번 공동선언이 바탕이 돼 일본에서 무라야마 담화를 뛰어넘는 새로운 무언가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거기에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의 정신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 한국 정부는 한일조약과 관련해 정권 차원에서 받은 돈을 강제징용으로 고생한 노동자들에게 지원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본다.
▽김=1965년에 맺은 한일조약의 해석을 올바르게 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조약 자체를 개정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실천 가능한 것부터 고치는 데 지식인의 역할이 중요하다. 정부 차원의 공동성명이 나온다면 ‘인도에 반하는 범죄’ ‘식민지 범죄’ 개념이 들어가야 한다. 하와이 식민지배에 대한 미국의 반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는 세계적인 흐름이다.
김 총장은 대담을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일왕이 강제병합의 원천 무효를 인정하고 방한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와다 교수는 “그렇게 방문한다면 고종과 민비(명성황후)의 묘소에 일왕이 사죄를 하는 게 마땅하다”고 말했다.
와다 하루키 교수△1938년 일본 오사카 출생 △1960년 도쿄대 문학부 서양사학과 졸업 △1966∼1984년 도쿄대 사회과학연구소 강사·조교수 △1985년 도쿄대 사회과학연구소 교수 △1996년 도쿄대 사회과학연구소 소장 △1998년 도쿄대 명예교수 △2001년 도호쿠대 도호쿠아시아연구센터 객원교수 △저서: ‘역사로서의 사회주의’ ‘한국전쟁’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
김영호 총장△1971∼2003년 경북대 경제학과 교수 △1995년 일본 아사히신문 포럼21 위원 △1997년 경북대 경상대학장, 1998년 경영대학원장 △2000년 1∼8월 산업자원부 장관 △2001년 중국 연변대 석좌교수 △2005년 대구대 경영대학 석좌교수 △2007년 유한대 총장 △저서 ‘동아시아 공업화와 세계 자본주의’ ‘한국경제의 분석’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공동선언, 전 세계로 지식인 1000명 모으자”▼
와다 하루키 교수와 김영호 총장은 이날 대담에서 5월 10일 발표한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문에 추가로 참여할 지식인을 미국 유럽 등 세계 학자 1000여 명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역사 화해 문제를 궁극적으로 세계 시민 전체의 문제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김 총장은 “지금까지 공동선언에 서명한 지식인은 한국과 일본에서 109명, 104명이다. 앞으로 한일 양국을 포함해 세계에서 1000명의 지식인을 모으고자 한다”며 지식인의 확대 참여를 제안했다. 그는 미국 하버드대의 한 교수로부터 서명에 참여하겠다는 제안을 받았다고 밝혔다.
와다 교수도 “일본에 역사학회가 있는데 그 회원을 비롯해 일본 지식인들이 더 참여토록 할 것이다. 시민단체와 재일교포 지식인도 많이 참여시켜야 한다. 영화감독 등 문화예술인들도 더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일본 국민 전체가 선언문의 내용을 읽었으면 한다”며 “포스터로라도 만들어 일본 국민에게 보여주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와다 교수는 “동참 지식인을 모을 때 한국 대표가 일본에 와서 강연회나 토론회를 열고, 정부 대표들을 직접 만나 성명의 뜻을 밝히면 좋을 것 같다”며 양국에서 교차 토론회를 여는 방안도 내놨다.
두 사람은 공동선언에 서명을 받기 위해 자국의 지식인들을 설득할 때 겪은 어려움을 서로 털어놓기도 했다. 김 총장은 “공동선언을 위해 지난해 12월 18일 처음 일본에 갔는데 (서명을 받는 일이)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어려웠을 것”이라며 “한국에서도 진보와 보수층을 한자리에 앉히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양국 지식인들이 서로 존경과 신뢰를 지닌 덕분에 모든 것이 이뤄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와다 교수도 “한국과 함께한다는 사실 때문에 반대하는 학자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일본과 한국이 함께한 선언이어서 의미가 컸다”며 “일본인 중에는 병합조약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이런 환경에서 (공동선언을 통해) 반성하는 모습이 더욱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내부에서 나온 것은 하나의 성과”라고 말했다.
김 총장은 “최근 한국의 17개 역사학회가 한일강제병합에 대한 공동성명을 냈는데 한일 지식인 공동선언과 같은 내용은 아니지만 큰 흐름은 나온 것 같다”며 “일본의 새 총리가 누가 될지 모르지만 그 결과가 나오면 일본 지식인 대표와 한국 지식인 대표가 공동으로 방문했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