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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자귤(紫橘)
일반적인 논리대로라면, 외적이 쳐들어와 너의 친척과 동네사람들을 죽였다면, 너는 마땅히 그들과 불공대천의 원수가 될 것이고, 가장 강경하게 대항할 것이며,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최소한 그들의 편에 서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말기 이런 기이한 현상이 발생해버린다. 후금은 요동(遼東)에서 피비린내나는 도살을 감행했고, 요인(遼人)을 붙잡아 노예로 삼는다. 원래 후금과는 피의 원한이 있는 요인들은 나중에 후금의 중요한 맹우가 된다. 이건 또 어떻게 된 일일까?
- "요민수요토(遼民守遼土)의 시작
천계(天啓)시기, 요동의 국면은 혼란에 빠지고, 명나라는 약세에 처하게 된다. 당시의 요동독사(遼洞督師) 손승종(孫承宗)은 참모 모원의(茅元儀)의 건의를 받아 조정에 <요토요민소(遼土遼民疏)>를 올려, 정식으로 "요동의 백성으로 요동의 땅을 지키고, 요동의 땅으로 요동의 백성들을 기른다(因遼民以守遼土, 因遼土以養遼民)"의 전략을 내놓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요동지역 사람들의 편의에 따라 양위(兩衛), 삼소(三所), 이십칠보(二十七堡)에 소속시켜 병력으로 주둔시킨다. 이는 요동사람으로 요동땅을 지키게 하고, 요동땅으로 요동사람을 기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관외의 방어가 약간 충족되고, 관내의 방어수요는 약간 감소될 것입니다." 손승종의 후임자인 원숭환(袁崇煥)은 '요민수요토'의 전략을 계속 유지하면서, "남쪽병사들은 취약하고, 서쪽병사들은 잘 도망치니, 차라리 요동사람으로 요동을 지키게 하는 것이 좋다"라고 말한다.
요동진
손승종, 원숭환의 생각에 따르면, 요동의 땅은 요동사람들의 고향이고, 후금은 요동의 땅에서 온갖 나쁜 짓을 다 했다. 요동의 사람들은 그들과 불공대천의 피의 원한이 있다. 만일 당나라의 부병제(府兵制) 혹은 위소제(衛所制)를 회복하여 요동사람들에게 토지를 주고, 그들이 농사도 지으면서, 군인도 되게 하면, 경작도 하고 전투도 하는 것이다. 평소에는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후금이 일단 침략하면 무기를 들고 나서서 항거한다. 전쟁이 있을 때에도 임시로 동원할 수 있다. 후금과는 피의 원한이 있으므로 요동의 백성들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분명 죽음도 불사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요나라땅을 지키기 위한 군비도 줄일 수 있고, 전투력도 제고할 수 있다.
손승종, 원숭환 두 사람의 구상은 아주 좋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실제 집행과정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했고, 이 전략은 완전한 실패로 끝난다.
2. 요민수요지는 원래 사로(死路)이다.
손승종, 원숭환의 전략중에서, 요토(遼土)의 범위는 명확하다. 즉 명나라때 요동도사(遼東都司)가 관할하는 강역이다. 그러나 요민(遼民)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지 명확치가 않다. 만일 우리가 요민의 개념을 명확히 분석한다면 요민이 왜 명나라의 번리(藩篱, 울타리)가 되지 않고, 오히려 후금이 명을 침입할 때의 주요 가담자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요민의 범위에 대하여는 사학계에서 여전히 논쟁이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요민'은 '요지의 백성'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러나 문제는 요지의 백성들은 구성이 극히 복잡하다는 것이다. 요지는 중원, 강남처럼 민족이 비교적 단일하지 않다. 명나라의 요동의 구변(九邊)의 가장 동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인구구성에서, 이곳은 한족이외에 3대민족이 있다. 즉, 서북에서 온 몽골족, 동북에서 온 여진족, 동남에서 온 조선인이 그것이다.
시기로 구분해보면, 원나라때부터 살아온 토착민과 명나라때 귀부민(歸附民)으로 나눌 수 있다. 원나라유민은 통칭하여 몽골인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고구려인(혹은 조선인), 발해인, 거란인, 여진인과 몽골인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 민족의 존재는 요녕에서 출토된 관련문물과 고고학발굴, 고분발굴로 이미 확인되었다. 명나라때에도 외지에서 이주해온 외족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이성량(李成梁)가족이다. 맹삼(孟森)은 <청사연의(淸史演義)>에서 누르하치의 조상은 명나라초기 조선에서 동북으로 이주해 왔다고 적었다.
만일 부락혈연, 지연으로 따지면 다시 그룹을 나눌 수 있다. 예를 들어, 여진에도 해서(海西), 해동(海東), 건주(建州)의 삼대부족이 있다. 위의 3대부족 이외에 비주류민족도 있다. 예를 들어 회회(回回)같은 경우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요민의 체계는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민족구성이 복잡할수록 이익도 불일치하게 된다. 그리하여 분열이 일어나기 쉽다. 통일이 어려운 상황하에서 쉽게 후금에 의해 회유될 수 있는 것이다.
요민의 민족구성이 복잡하기때문에 "요민수요토"전략은 실패로 끝났다. 만일 민족구성이 단일했더라면 전략은 성공했을까?
답안은 여전히 부정적이다.
요동경략(遼東經略) 웅정필(熊廷弼)도 한때 '요민'으로 '후금'에 항거하는 방법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후 '요민수요토'전략에 명확히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가 현지를 살펴보고나서 요민은 급격히 감소했고, 요지는 이미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파괴는 후금의 도살과 약탈로 인한 것도 있지만, 기실 만력시기부터 이미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엄답칸(俺答汗)이 조공을 바친 이후, 선대(宣大, 선화, 대동)의 변경은 안정을 찾는다. 그러나 초원동부의 차하르(察哈爾) 토만부(土蠻部)가 명나라의 큰 골치거리가 된다. 만력시기, 토만부는 자주 장성을 돌파하여, 요동(遼東), 계진(薊鎭)으로 들어왔다. 게다가 임진왜란(정유재란)에 파병하고, 또한 만력제의 광감세사(鑛監稅使) 고준(高準)의 수탈로 천계시기에 요동은 이미 붕괴했고, 요민들은 편안하게 살아갈 수가 없어, 속속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요동이 단일민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하더라도, 요동의 땅에 사는 한족만으로 지키는 것은 역시 힘에 부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3. 요민수요토 전략의 실패에 대한 또 다른 해석.
주류견해외에, 요민의 범위에 대한 또 다른 견해도 있다. 요동경략 웅정필은 일찌기 소위 "요민"은 요동땅의 백성이 아니고, 요동땅의 호강지주(豪强地主)라고 했다. 그들은 요지의 지배계급을 구성하고, 그들의 세력은 군대에 깊이 파고 들었으며, 저명한 요동장문군벌(將門軍閥)을 형성했다고 보았다. 웅정필은 손승종의 '요민수요토'는 바로 요동의 지주를 키워주는 것이며, 이들 지주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혹은 보채(堡寨)를 결성하거나 혹은 부곡(部曲)을 편성하여 후금에 항거하는 주력이 될 수 있다. 다만 웅정필이 현지조사를 해본 결과 요동의 장수들은 겁이 많았고, 외적에 대하여 유약한 모습을 보였다. "장소겁전(將素怯戰, 장수들이 평소에 전쟁을 겁냈다)", "요병본외적(遼兵本畏賊, 요의 병사들은 본래 적을 두려워했다)" "요인들은 혼백이 여러번 달아났다. 개원이 함락되자 철원이 도망치고, 철원이 함락되자 심양이 도망쳤다. 지금 북관이 함락되자 요양이 다시 도망치고 있다." 다만, 그들이 백성들에게 끼치는 해는 엄청나다.
진정 싸울 수 있는 가정병(家丁兵)은 요인 지주의 심복이자 골간이다. 이들 가정은 완전히 지주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고, 지주의 지시만 듣는다. 요인지주들은 다시 밀접한 이익집단을 결성하여, 다른 사람들이 파고들 틈이 없어, 독립된 세력을 구축했다. 예를 들어, 이성량가족은 이성량이 죽은 후, 그의 가족 후손 심지어 이씨집안의 가정까지도 모조리 요지의 요직을 독차지하고 있다. 당나라때 절도사의 재연이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요동에는 이런 말까지 있다. "요동의 땅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우리 이씨가 아니면 안된다."
4. 명과 후금의 요인쟁탈전
기실, 손승종 원숭환이 말한 요민이 민중이건 지주이건, 명나라말기에 이미 명과 후금이외의 제3세력이 되어버렸다. 명과 후금 쌍방은 요민에 대한 쟁탈전을 벌인다. 웅정필은 '요인수요토'전략에 극력 반대하면서, 그가 요동을 장악하고 있을 때, 대거 외래장수를 기용한다. 예를 들어, 두송(杜松), 왕위(王威), 마귀(麻貴), 이광영(李光榮), 시국주(柴國柱), 하세현(賀世賢), 이회신(李懷信)등이다. 그러므로 그는 손승종등과 갈등을 빚는다. 이것은 웅정필이 피살된 원인중 하나이다. 웅정필이 피살된 후, 요인수요토전략은 여전히 시행된다. 그리고 요동의 장수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조정은 가장 멍청하면서도, 가장 잘못된 관용정책을 펴게 된다. 이를 통해 요인의 지지를 얻어내려 한 것이다.
손승종은 요동독사로서 요장들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리하여 조대수(祖大壽), 오삼계(吳三桂)등의 지위가 갈수록 중요해진다. 원숭환이 하옥된 후, 조대수는 자신이 그 전철을 밟을까 우려하여, 병력을 이끌고 홍타이시(청태종)에게 투항한다. "손승종이 이를 듣고, 급히 도사(都司) 가등과(賈登科)에게 편지를 들고가서 조대수를 달래게 하고, 유격 석주국(石柱國)으로 하여금 여러 병사들을 다독이게 한다." 명백한 반란행동에 대하여, 당당한 천계제의 스승인 손승종은 그저 다독이기만 할 뿐이고, 강경한 수단으로 진압하지 못했다. 이를 보면 요장이 얼마나 발호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명나라의 유약한 모습을 보고, 이들 요장들은 더욱 발호한다. 그들은 더욱 큰 이익을 얻어내기 위하여, 양구자중(養寇自重, 고의로 적을 놔두고 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높이려 하는 것)의 전략을 취하면서 명나라와 후금간을 오간다. 명사전문가 이순(李洵)선생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조대수는 여러번 후금에 체포된다. 그러나 후금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조씨집안은 요동의 장수집안이고, "그의 일족은 세력이 아주 강했기 때문"이다. 그를 죽이게 되면 영향이 너무 클 것이어서이다. 요동의 장수집안의 세력은 살인도 마다하지 않고, 병력이 강성했던 후금마저도 꺼릴 정도였다. 이를 보면 그 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결론
'요인수요토'의 전략은 명백하게 조정문관(文官)의 탁상공론으로 만들어낸 일방적인 아이디어이고, 실질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비록 '요민수요토'의 원래 뜻은 좋은 것이지만, 집행과정에서 심각하게 방향착오를 일으킨다. 심지어 명나라를 멸망시킨 중요원인이 된다. 이를 보면 현지조사를 하지 않으면 발언권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진정 현지조사를 하고 나서 의견을 낸 웅정필은 이단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다. 이것이 바로 명나라말기의 비극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