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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탄(남경) - 4 - 선인, 재가화상, 자갈, 조의선인
실제 역사상의 기록에 남아 있는 선인, 재가화상, 자갈, 조의선인의 예를 통해서 조선(처섄)의 실상을 한번 파고 들어가 보자.
동방견문록의 仙人 부분을 인용해보자.
P216 '또 다른 부류의 종교인들이 있는데, 센신(SENSIN)이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기나름의 고유한 관습에 따라 매우 금욕적이어서, 다음과 같이 매우 고된 생활을 해나간다. 여러분은 그들이 밀기울만을 먹고 평생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이 밀기울을 뜨거운 물에 넣고 얼마간 그대로 놓아두었다가 먹는다. 그들은 1년에도 여러번 금식을 행하며 내가 말한 밀기울 이외에는 지상에서 나는 어떤 것도 먹지 않는다.
그들은 정말로 많은 우상들을 섬기며 때로는 불을 숭배하기도 한다. 다른 승려들은 이토록 극도의 금욕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 사람들에 대해 자기들 式으로 우상을 섬기지 않기 때문에 이단자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고 서로간 규율도 다르다. 이들은 세상에 무슨 일이 있어도 아내를 맞아들이지 않고, 머리는 삭발하지 않으나 수염은 깎는다.
그들은 삼베로 만든 검은 색과 청색의(감청색을 의미) 옷을 입고, 비단으로 된 옷이라고 해도 내가 말한 그러한 색으로 만들어서 입는다. 그들은 돗자리 위에서 잠을 자면서 이 세상 어떤 사람들보다 더 힘든 생활을 영위한다. 그들의 우상은 모두 여성이며 여성의 이름을 갖고 있다.'
- 이 문장 내의 자체 모순만 열거해 보자.
1. 다른 승려들은 이 선인들이 우상을 섬기지 않기 때문에 이단자나 마찬가지라고 했으면서, 그들은 정말로 많은 우상을 섬긴다고 한다.
2. 다른 승려들이 이 선인들을 이단자라고 했는데, 이 선인이 도교의 도사를 의미하는 선생이라면, 이단자라고 부를 수 없다. 같은 종교 안에서 다른 신조를 가지고 있는 그룹을 이단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3. 다른 승려들이 이 선인들을 이단자라고 부른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다음과 같은 함의를 가지고 있다. 즉 소위 다른 승려라면 마르코 폴로가 3페이지가 가득 차도록 묘사하고 있는 박시(박수무당)승려, 즉 테배트 또는 케시미르라는 이름의 승려들이 머리를 깎지 않는 재가화상(在家和尙-고려도경의 용어, 다음 절에서 분석할 것임.)이라는 대다수의 主流의 승려들을 이단자라고 부른다는 말이다.
4. 이 선인들은 1년에 여러번 단식수련을 할 때는 밀기울만 먹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바로 그 앞에서는 밀기울만을 먹고 평생을 살아간다고 한다.
5. 머리를 깎지 않고 집에 있는 재가화상이 '세상에 무슨 일이 있어도 아내를 맞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 자연스럽지 않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6. 센신(SENSIN) 주에 '선생을 옮긴 말로, 당시 도교의 도사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THE BOOK OF SER MARCO POLO 1권/LONDON JOHN MURRAY, HENRY YULE,1926 P321~326에 SIAN(仙) SHIN-SIAN(神仙) SHIEN-SIEN(神仙), SHIN-SIEN(神仙) SEN-SHING(先生), SIN-SANG(先生) SIEN-SENG(先生) SIEN SHING(先生) SIAN-JIN(선인)의 여러 경우를 분석해 놓고 결론은 SENSIN은 SIENSENG이라고 결론내리는데, 결단코 동의할 수 없다.
집사에서 JUIN(JURCHEN)은 遼人(혹은 여진)의 표기이고, JAUGUT는 소구트(소구르,송고르-송고려)의 표기이고 JUNGDO는 송도(송도, 개경 -현 카라샤르, 옌치)의 표기인데, J의 발음은 'ㅇ'으로도 나고, 'ㅅ'으로도 나는데, 그 역사적 발음은 훈민정음의 반치음(삼각형)이다. 그렇다면, SEN-SIN(선인)과 SIAN-JIN(섄인)은 정확하게 仙人을 표기한 것이 맞다. 본문의 의미상으로도 결단코 다른 종교인 도교의 선생으로는 볼 수 없다.
어떤 목적(선인이라는 용어를 숨기기 위한 목적)을 위한 억지의 견강부회가 아니라면 말이다. 왜 선인을 숨기려 했을까? 하나라의 神都(神市, 夏市)와 상나라의 天都(天毒)으로부터 태평천국의 地上神仙들의 수도인 天京(神市)까지의 주인공의 이름이, 이 神人 天人의 역사적 이름이 仙人이었기 때문이고, 이 선인이 밝혀지면, 조선의 진면목이 화-안히 드러나고, 原 佛敎의 정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 밀기울을 먹고 치성을 드리는 선인의 모습을 참전계경에서 직접 한번 보자. 참전계경 제 1조 성조 제 3장 不忘章의 제 20용 '自記/저절로 기억되는 것.' '自記者 不欲記而自記也 欲記者 是求之於心者也 自記者 不求之於心 而自在者也 修道之士 存誠於誠之之理己爲糝 腦洽精 故雖萬想交迭 斷斷一念 不外乎誠/自記란 기억할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기억되는 것이다. 기억할려고 하는 것은 마음에서 구하는 것이고, 저절로 기억하는 것은 마음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마음에 살아) 있는 것이다.
도를 닦는 처사(士, 처샌, 선인)는 정성을 들이는 이치에 딱 맞게 정성이 (마음에 살아) 있게 하면, 쌀가루(밀기울)만 먹고도 머릿골(두뇌)에 정기가 두루 미치는 것이다. 그러니 만가지 생각이 교대로 일어나더라도, 굳게 다져진 한가지 마음은 정성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
-참으로 아름답게 너무나 명명백백하게도 중심의 우주적 지혜가 문득 드러나 살아나서 자재하는 비결을 이리도 간단하고, 자상하게 보여 준다. 1년에 몇번씩 단식기간을 정해서 만가지를 텅 비워 맑고도 고요하게 지극정성을 들이는 선인들의 한결같은 지혜의 전통이여!
자라나는 아이들이 이런 전통을 계승한다면, 누구라도 자기 천재를 100%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선인을, 여성 우상이나 섬기면서 고된 금욕의 고행으로 평생토록 밀기울만 먹으면서, 연단술이나 연마하는 도사로 둔갑시켜 누명을 씌운단 말인가?
마르코 폴로보다 100여년 먼저 이 지역을 방문한 서긍이 남긴 기행문이 있다. 고려도경이다. 서긍은 이 선인을 어떻게 묘사했을까?
이 상나라가 망할 때, 주나라에 의해서 현 카라샤르 혹은 옌치에 봉해지는 은나라의 微子라는 사람이 있다. 史記의 宋微子世家의 주인공이다. 그 지역에서 제국을 이루는 사람이 있으니, 송고려를 건국하는 왕건이다. 당연히 송의 수도였으니 그 수도는 송도이다. 물론 거기서 새 천하를 열었으니 개경 혹은 개도라고 아직까지 그 이름이 남아 있기도 하다.(카라샤르- 高麗城 -, 즉 옌치 옆을 흐르는 강 이름이 지금도 開都河다.)
그런데 이 상나라의 역사와 전통과 그 정신을 이어 받은 송고려가 (원)불교국가가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 불교국을 방문한 고려도경의 이야기가 수상하고도 기이하고 재미있는 장면을 하나 남겨 주고 있다. 선화봉사 고려도경/움직이는 책,정용석 김종윤 공역 P194 '재가화상(在家和尙)은 승려옷을 입지 않고 계율을 지키지 않으며 흰모시로 만든 끼이는 옷에 검정색 비단 깁으로 허리를 묶고 맨발로 다니는데 간혹 신을 신은 자도 있다.
거처할 집을 자신이 짓고 장가도 가고 자식도 기른다. 그들은 관청에서 기물을 등에 져 나르고 도로를 쓸고 개천을 만들고 보수하는 등 성과 가옥을 세우고 수리하는 일에 종사한다. 나라 변방에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군인으로 신분을 바꾸어 군단을 구성하여 출정하는데 비록 말을 타고 달리는 데는 서투르나 거의 씩씩하고 용감하다. 군인으로 가게 되면 각자가 식량을 준비하여 가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경비를 들이지 않고서 전쟁을 할 수 있게 된다.
들은 바에 의하면 글안이 고려인에게 패전한 것도 바로 이들 무리(재가화상, 승병)들의 힘에 의한 것이라 한다. 그들은 실제로 형을 받은 복역자들인데 동방인들은 그들이 수염과 머리를 깎은 외형을 보고 화상이라고 한 것이다.' 볼드체의 '들은 바에 의하면...'는 조작이 확실하다. 거란 카타이가 바로 고려이고, 형을 받은 복역자는 지금도 아예 병역미필이 아닌가? 마르코 폴로도 머리를 기른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복역자라서 머리를 깎았다고 조작해 놓았다.
어느 제후국에서 조공사신단의 일원으로 카라샤르지방에 왔던 서긍의 중원(중국) 방문기를 송나라 중국에서 반도 고려국으로 使行나온 사신의 보고서로 조작된 것이다. 다행히 '들은 바에 의하면...' 이전의 글은 조작을 면한 것이 확실한데, '들은 바에 의하면...'과는 다르게 직접 보고 들은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재가화상조를 처음 보고 이들이 처샌(선인)인 줄을 모르고서도 조선사의 기본구조가 보이는 듯 했다.
어떤 환상적인 이미지가 그려졌는데, 가령 전쟁이 일어나 연락을 받으면, 자기가 교육을 받은 멀지 않은 ‘절’로 말 한마리에는 무기와 식량을 싣고 또 한마리의 말에는 자신이 타고 벅찬 가슴으로 달려가면, 함께 뒹굴고 교육받고 혹은 교육시키던 그-리-운 동문 사형 사제 사백님 사숙님들 스승님과 노스승님이 다들 너무나 설레고 반가운 마음으로 함께 기다리거나 속속 몰려들어 오고 있다.
내 인생의 가장 좋았던 그 모든 사람과 함께 달려가는 신나는 전장으로 가는 길, 각자가 맡은 곳에서 功業(公業이기도 하다)을 닦던 얘기도 나누고 잘 안되던 일을 여쭈어 보기도 하고, 또 다른 업종과 지역들의 얘기를 듣기도 하고, 정보와 지혜와 정을 나누면서, 중간 지점에 닿으면,
스승님의 스승님과 그 상급학교(절)로 진학해 갔던 동문과 사형 사제들이 다 모여 이제 연대를 이루고 최종 집결지에 모이면, 스승님의 스승님의 스승님이 사단장님이 되어 있어서 반갑게 인사드리고, 그 사단장급 큰 섄님들 중에서 가령 강감찬장군이 대장군으로 결정되어 전투에 나간다.
후방에 있는 내 식구 친지 이웃들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함께 달리고 있는 사형 사제 동문들과 스승님들을 위해, 또한 그 모든 이들은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들의 전쟁軍役의 이미지. 신선의 군대. 이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다름아닌 부도(신시, 천도-절)의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 시스템은 군대 시스템만은 아니다. 정치와 경제와 학문과 기술과 공업과 상업과 종교와 외교와 통역과 토목과 건설과 미술과 음악과 하천과 도로와 성곽과 역참과 등등등
그 모든 시스템이 보완되고 개선되고 폐지되고 신설되어가는 살아있는 아메바의 무궁 생성 진화 발전해가는 살아 있는 시스템, 균형과 쇄신이 흐트러지면 굳어서 막히기도 하고 혹은 곪아 터지기도 하는 시스템 -걸, 주, 진시황, 연개소문, 묘청을 죽이는 개경세력, 무신란 등등, 바로 조선(처샌-선인)의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근세조선이 들어서면서 역사의 중심이었던 이 조선(처샌-선인)을 사회의 외각 변두리로 내몰고, 그 존립기반인 寺院田을 회수해서 신흥사대부가 독차지했던 것이다.
5000년을 공적인 부문에서, 천하의 중심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지켜왔던 그 시스템이 완전 해체된 것이다. 외각으로(비공적 부문으로) 내몰린 이들 나머지 사람들이 남인과 실학파등의 처사(처샌, 선인)로 혹은 궁벽한 절집의 불목하니로 지관으로 예인으로 지조 높은 지방 선비로 민중불교로 민중유교로 도사로 상인으로 공인으로 떠돌게 되었다.
5000년을 지켜오던 이 기간基幹 핵심세력이 사라지자 임진왜란 때부터 서서히 동남아시아가 하나 하나 도미노같이 무너지고 남아시아가 무너지고 중앙아시아가 넘어가도 속수무책으로 서세동점으로 결국은 서구열강과 그 앞잡이 도이(왜, 만청)와 뒷잡이 일본에 의해 근세조선은 아무것도 그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고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 재가화상(선인)의 한 세포의 화석으로 천하의 역사와 그 구조를 해명할려고 하니, 無理 중의 上無理다.
사기본기/을유문화사,김원중 옮김의 은본기 중 P88 '탕은 하나라를 정벌하고 나서 하나라의 신사(神社)를 옮기려 하였으나 불가능하자 하사(夏社)를 지었다.'는 문장이 나온다. 왜 남의 집안의 사당을 옮기려 했을까? 왜 못 옮겼을까? 왜 상나라의 사직을 지킬 商社를 짓지 않고 夏社를 지었을까?
社字 대신에 市字를 넣어 보면, '신시를 옮기려 했으나 저항이 너무 심해서 불가능하자 하시를 지었다.'로 되면, 우리는 그 이유를 대강 짐작할 수도 있겠다.
그 신사 하사가 남의 집안의 사당이 아니라, 천하의 불도(처샌, 선인)의 쎈타인 부도(밝달 불터)였던 것이다. 바로 신시밝달이었던 것이다. 하시는 고유명사였고, 신시는 그 보통명사였던 것이다. 그렇게 새로 지은 하시는 점점 상도로 천부도로 천도 천축 진도 신도 신두로 한자의 발음기호로 지금껏 그 쪼가리나마 살아 남아 전해져서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그러나 또한 짐작할 수 있는 대로 실제 발음은 시앙도, 시엉도, 시엔도, 시앤도, 치앤도, 치엔두, 친두, 신두, 신도, 힌두, 백두 등의 이름으로 온 천하로 전해지고 불려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 시스템이야말로 온 천하를 하나로 묶는 중앙집권적인 성격의 중심고리였던 것이다. 그래서 神市 夏市는 천하에 퍼져 있는 처샌(조선,선인)들의 천도(朝鮮天毒 혹은 朝仙身毒 혹은 朝天信度 즉 朝鮮神都 혹은 朝鮮天都)였던 것이다.
이 중심고리 외의 부분은 너무나 느슨하게 연결된 혹은 상대적으로 독립된 제후국, 혹은 아예 완전 독립된 나라로서, 그래서 상호간에 손님으로 대접하는 것이 그 禮였던, 반만년 천하의 기본 구조였던 것이다.
몽골세력에게 밀려서 문명의 여명기의 쎈타였던 이 강화도(화도, 화전, 호탄, 남경)로 쫒겨 내려온 고려 조정이 그 반만년 쎈타 자리에 돌아 와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반만년 스키타이인의 신인합일, 천인합일, 지상신선의 처샌(조선, 단군칙어의 조천[불천님],선인[샌님])의 마지막 불꽃이었던 태평천국 동학천도군의 전대륙에 걸쳐서 불려졌던 군가(혁명가) 하나가 용담유사에 남아 있다. 제목은 劍歌(劍訣)다.
'時乎시호 이내시호/ 不再來之 시호로다/ 萬歲一之 장부로서/ 오만년지 시호로다/ 龍天劍 드는칼을/ 아니쓰고 무엇하리/ 舞袖長衫 떨쳐입고/ 이칼저칼 넌즛들어/ 浩浩茫茫 넓은천지/ 一身으로 비껴서서/ 칼노래 한곡조를/ 시호시호 불러내니/ 龍天劍 날랜칼은/ 日月을 희롱하고/ 게으른 무수장삼/ 우주에 덮여있네/ 만고명장 어디있나/ 丈夫當前無壯士라/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身命 좋을시고'
(시호; 때가 왔구나 / 부재래지; 다시 오지 않을 / 만세일지; 만년에 한명 나올 / 용천검; 용비어천(용이 날아 올라 하늘을 제압하는)의 검 / 무수장삼; 소매가 펄~럭펄~럭 춤추는 장삼 / 호호망망; 아득하게 넓고도 넓은 / 장부당전 무장사라; 이 장부 앞을 감당할 장사가 없구나 / 이내신명; 우리 몸의 운수(운명), 그리고 重意적 해석이 가능한데, 우리 운수가 이리 좋으니, 그래서 神明이 난다는 뜻도 있다.)
- 드디어 우리가 일어설 때가 왔구나. 다시 이리 좋은 때가 올 수가 없는 것은 오만년 큰흐름의 개벽세상을 여는 것이기 때문일세. 만년에 한번 날까말까한 장부들아! 우리의 '용이 날아 올라 하늘을 제압하는 칼'은 일월을 희롱하고, 감청색 仙人의 장삼 소매는 전 우주에 걸쳐 펄~렁펄~렁 춤을 추네.
오만년의 이 큰 운수를 받은 우리를 누가 감히 감당하리. 참으로 좋은 운수의 흐름을 타고 있어, 신명이 절로 나네. 얼~~쑤~ - 호연지기라면 이만한 호연지기를 보았는가? 내 새끼들이 이런 기세로, 이 기상으로 살았으면 좋겠네, 참- 좋겠네. 딱- 좋겠네.
- 자갈과 조의선인에 관해서는 글 말미의 인용문으로 대체한다.
펨으로 넘어 가기 전에, 호탄을 이야기할 때 늘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다. 스벤 헤딘이 1895년 호탄을 방문했을 때, 수도 호탄의 인구가 5500명정도(5000명의 무슬림과 500명의 중국인)라고 보고하고 있다. 1865년에 호탄을 방문한 W.H.JOHNSON은 호탄 인구가 약 4만명이라고 했다.-THE BOOK OF SER MARCO POLO 1권 P190~191- 그렇다면 그 사이에 약 35000명의 인구가 사라졌다는 말이다.
근대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사계절,김호동 P103 '혁명 직전 일치(호탄성의 다른 이름)는 낮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을 뿐이고, 시내와 근교에 약 6000호 정도가 거주했다.' 한 호당 7명정도면, 42000명이 되니 그럴 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고대사의 중심지로서 마르코 폴로가 이 지역에 왔을 때, 고려조정이 웅거하던 남경이라는 도시가 인구 40000명밖에 없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럴 수 있을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 인구와 그 인구를 먹여 살릴 생산력으로 최강의 몽골군을 막아 낼 수 있었을까, 200년도 넘게?
남경과 대비되는 서경이었던 쿠차의 경우를 한번 보자. 앞의 강호동의 책 P23~24 '그러나 청나라가 타림분지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쿠차성 내외가 크게 훼손되었고 주민들의 숫자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무슬림들의 호구가 3~5만 가구를 헤아리던 대성이 정복 직후에는 겨우 1000호정도만이 남게 되었다는 1777년의 기록(주1에 椿園, 西域總志,대북,해문출판사 영인,1966, 26r)이 있고,
1873~74년 이곳을 방문한 영국 사절단도 청측의 조사를 근거로 성내에 거주하는 호구수는 800호 정도이고, 그 근교의 호구수까지 합치면 2000호, 그리고 쿠차 관할하에 있는 촌장의 호구수까지 모두 합쳐야 6000호에 이르며, 호당 7인으로 계산하면 4만2000명의 인구가 되는 셈이라고 했다.
따라서 1870년대 성내와 근교의 호수만 계산해도 6000호의 호탄, 5000호의 야르칸드, 5000호의 카쉬가르등과 비교할 때 상당히 작은 규모(2800호-착오다. 윗문장에서는 '합해서 2000호'라고 했다.)임에 분명하다.'
- 청이 정복하지도 않았거니와(이운린의 祖宗의 基業을 상기하라.) 무슬림도 아니고, 쿠차성 내와 근교의 인구가 2000호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성내에 800호가 있는데, 성둘레가 17~18킬로미터(P 25)라는 것은 정말 어이가 없는 말이다. 최소로 잡아도 100만이 넘을 元의 수도 大都城의 둘레가 40킬로가 되지 않는데, 18킬로의 둘레에 그 안에 800호만 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P25의 주9)에는 '다만 과거 모굴 칸국의 수도였던 야르칸드만은 성벽이 상당히 길어서 48킬로미터에 달했다.'고 나온다. 정말 어이없는 수치에 넋을 잃을 뿐이지만, 근교의 인구까지 합해서 5000호가 살고 있는데, 대도성보다 더 규모가 크다는 것은 정말 상상이 안 간다.
대도성보다 더 큰 규모의 성이 이 신강지역에 최소한 두 개는 더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집사에 나오는 시긴성과 남경성이다. 집사 2권 칭키스칸기 P275에 나오는 SIGIN(시긴 -주 22)에 西京이라고 나와 있다. 평양 쿠차를 의미한다.) 부분을 인용하면, '시긴이라는 매우 큰 도시가 있다. 그곳에는 장려한 건물들이 많고, 70만호의 고장들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그 지방과 함께 주르체 종족에게 속해 있는데, 그것들을 모두 손에 넣었다.'
야르칸드성이 48킬로이고 근교까지 합해서 5000명이라는 거짓말 조작은 사실상 서경인 평양(마르코 폴로의 피양) 즉 쿠차의 규모를 숨기기 위해서 호탄에서부터 카쉬가르까지 다 조작을 해댄 것이었다. 야르칸트성이 48킬로미터의 길이였다면, 서경 평양의 쿠차성은 최소한 48킬로미터의 길이 이상일 것이다.
집사에 나오는 서경의 호수의 규모를 10만호 줄여서 60만호로 계산해서 1873~1874의 영국사절단의 비율로 배치해 보면, 성내에 거주하는 호구수는 80,000호 정도(1777년의 청측의 기록에 무슬림의 호구가 3~5만이라고 했으니, 무슬림이라는 수식어만 빼면 대강 비슷한 수치이니, 그 기록이 규모를 반 정도로 줄인 모양이다.)이고, 그 근교의 호구수까지 합치면 200,000호, 그리고 쿠차 관할하에 있는 村莊의 호구수까지 모두 합쳐야 600,000호에 이르며, 호당 7인으로 계산하면 420만명의 인구가 되는 셈이다.
너무나 큰 성이라서 칭키스칸도 우회해서 지나갔다가 개경을 정복하고 난 뒤에 정복하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으니까, 1860년대와 비교하면, 700년 이상의 차이가 나는 셈이다. 700년을 지난다면, 생산력과 교역과 위생의 발달로 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을 것이고, 인구는 당연히 더 불어났을 것이다. 사막화가 진행이 되어서 아무래도 사람이 많이 줄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물 공급 기술의 발전과 더욱 광범위한 논농사의 확장으로 사막화를 저지해 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사리에 맞다고 보여진다. 위키백과에 1990년 쿠차시의 인구가 74,632명이라고 나와 있는데, 정말 어이없는 현실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5000년 전부터 치수사업과 관개시설, 물 공급기술의 노하우가 집적되고 발전해오던 그 지역(중원 중의 중원)이 도대체 무슨 일로 이렇게 인구가 줄어들고 급속하게 사막으로 변하고 말았을까?
1877년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이 좌절되었을 때, 그 지역에서 쌀을 주식으로 하던, 그래서 논농사의 광범한 보급으로 사막을 저지하면서 옥토를 일구어 오던 - 무려 반만년 동안이나 - 스키타이인 즉 카레이스키 즉 고려인들이 모조리 살륙당하고, 물공급 시스템이 파괴되기만 하면, 그 지역은 삽시간에 사막화가 진행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 이해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5,000년이 넘게 중국 중원 신주 천조라고 불린 이 지역이 갑자기 이렇게 황폐화했다는 말인가?
더군다나 이 지역은 물이 너무 많아서 범람이 늘 문제가 되었던 것 아닌가? 역대 황제가 치수사업이 가장 중요하다고, 거기에 역점을 두었다고 우리가 배웠던 것 아닌가? 물론 증거를 찾을 수는 없지만, - 증거를 남겼을 리도 없지만- 상식적으로 볼 때 사리가 당연히 그렇지 아니한가?
한헌석칼럼 14호 ‘마르코 폴로의 실제 여행경로를 밝힌다 - 5 - 카슈미르에서 간다라를 거쳐 화림까지’에서 ‘자갈 조’를 인용한다.
대당서역기 P325 화리습미가국조에 풍속은 벌지국과 같다고 했고 벌지국조에는 풍속은 삽말건국과 같다고 했다. 삽말건국(사마르칸트)조에는 '병사와 말이 강성하여 대부분이 "자갈"들이다. 자갈들은 그 성품이 용맹하여 죽음 보기를 마치 귀향(歸鄕)하는 것과 같이 하므로 싸움에 임해서는 그들을 당해낼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 주 59)에는 '신당서 서역전 안국(BUKHARA) 항목에 “용감하고 강건한 자를 모아서 자갈을 이루었다. 자갈이란 중국에서 戰士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사람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전사 자갈을 묘사하고 있는 구절을 인용해 보자. P324~325 '그들의 관습에 따르면 남자들은 모두 전사로서 전쟁을 하고 사냥을 하거나 매사냥을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여자들이 모든 일을 하며, 약탈하거나 정복해서 노예로 삼은 다른 남자들을 부린다. 그들은 여자들과 함께 주어진 의무를 다해야 한다.
여자들이 아이를 낳게 되면 그 아이를 씻겨 천으로 둘러싸고, 여자의 남편은 침대에 누워서 갓난애를 돌본다. 그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이런 식으로 40일 동안 침대에서 꼼짝하지 않는데, 그의 친구와 친척들이 그를 찾아와 함께 머물면서 아주 즐겁게 해준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까닭은 그의 부인이 자궁으로 아이를 낳는 동안 (그들이) 너무나 애를 썼기 때문에, 그 40일 동안만이라도 더 고생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기 때문이다. 그의 부인은 아이를 낳자마자 침대에서 일어나 집안의 모든 일을 처리하고 침대에 누워 있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한다.'
- 이 자갈이 뭘까? 집사 2권 칭키스칸기 P273에서 ‘몽골인들은 그 지방들을(키타이 카라키타이 주르체 등의 지방) 자우쿠트(JAUQUT-SAUGUT는 소그드SOGD 소구르 우구르 위구르 송구르 송고르 송고려이다.)라고 부르고, 키타이 주민들의 용어로는 키타이를 한지(KHANZHI)라고 부른다.’ 이 인용문을 보면 이 자갈이 몽골인들이 중원인을 부르는 이름인 자굴(자우구트)을 의미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카타이 즉 고려를 이해할 수 있는 핵심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중원 한지의 비밀을 푸는 핵심 키(KEY)와 같은 말이다. 이 자우쿠트 즉 소그트는 소그드 즉 스키타이다. 장소적의 의미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또한 쓰인 것이다. (부도, 부다, 불타, 불터, 부터, 부처가 장소적 의미로 쓰이면서 동시에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이는 것과 100% 동일하다. 그 의미도 똑 같다. 스키타이를 가리키는 말인 釋 塞은 夏 佛과 100%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조의선인에 관해서는 한민족의 뿌리와 미래 / 早衣仙人라는 글에서 인용한다.(*표시의 주는 한헌석이 달았다)
조의선인(早衣仙人)이란 '검은 빛깔의 조복(早<검은 비단 조, 검을 조, 사실은 白밑에 十또는 七임>服) 을 입은 선인'이란 뜻으로 *선배 또는 선비라 불렀다. 선배는 고구려의 10월 제사에 모인 군중 앞에서 무예를 선보인 데서 비롯되었고 선인(先人 또는 仙人)은 선배의 이두(吏讀)식 표기이다. (*선배-仙輩로 음차를 한 듯함)
사냥과 가무, 무예 등의 여러 경기에서 승리한 사람을 선배라 불렀고 이들은 국가에서 급료를 받아 생활하면서 무예와 학문을 갈고 닦았다. 전시에는 이들이 자체부대를 조직하고 전장에 나가 정예군으로 활동했다. 선배는 머리를 박박 깍고 검은 옷을 입었으므로 전형적인 무사를 연상시킨다. 선배는 화랑보다도 훨씬 오래되었다.
화랑은 원화(源花)라는 여성에서 비롯되어 나중에 좋은 가문의 청년 중에 덕행 있는 자를 곱게 치장하여 화랑으로 만든 것에서 보듯이 외모와 몸치장을 중시하여 여성적인 반면 선배는 매우 남성적이다. 선배의 독특한 외양 때문에 고구려와 전쟁을 하였던 수, 당의 병사들은 이들을 승군(僧軍)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고구려를 숭상(崇尙)한 고려의 최영 장군조차 '당이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략하나 고구려는 승군(僧軍) 3만을 내어 이를 대파하였다.' 라고 선배를 찬양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 원명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송(宋)나라 휘종(徽宗)이 고려에 국신사(國信使)를 보낼 때 수행한 서긍(徐兢)이 송도에서 보고들은 것을 그림을 곁들여서 기록한 책>에 나오는 재가화상(在家和尙)은 선배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조의선인의 눈부신 활약이 기록으로 보이는 것이 안시성 전투였다. 당태종의 당군(唐軍)은 요동의 여러 성들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많은 공성기구(攻城機具)를 사용해 안시성을 맹렬히 공격했지만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했다.
그래서 당태종은 60일 동안 50만을 동원하여 성을 내려다보고 공격하기 위해 성의 동남쪽에 높은 토산을 쌓게 했는데 토산이 무너져 안시성 성벽을 치는 바람에 성벽 일부가 붕괴되어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다. 이때 고구려군 결사대가 일제히 돌격하여 당군을 물리치고 토산을 점령해 버리고 주변을 깎아 나무를 쌓아 불을 놓고 지키니 얼씬도 못했다고 한다.
기록은 이 장면을 '이때 성안에서 검은 옷을 입은 백 명의 용사가 뛰어나와 천장의 거미줄을 걷어내듯 당나라 2만 기병을 산 아래로 팽개치고는 오히려 토산을 차지해 버렸다' 라고 적고 있다. 이 검은 옷의 용사(勇士)들을 조의선인이라 부른다. 당시 고구려의 조의선인은 3만여 명에 달했고, 그 수장은 연개소문이었다고 한다..
조의선인은 선비제도라는 특별한 교육체계에 의해 양성되는 문무겸전의 인재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유년의 어린 나이에 선발되어 신체발달에 부응하는 매우 정교한 지적, 정서적, 신체적 훈련과 교양을 통하여 보다 완벽한 심신의 능력을 갖게 된다.
조의선인은 누구보다도 사물과 현상을 깊이 인식하고, 그것들이 부딪치는 문제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며, 이를 해결할 심리적, 물질적 능력을 갖도록 조련된다. 을파소나 명림답부, 을지문덕 등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도 모두 조의선인들이었고, 우리 문화전통에서 말하는 선비란 바로 이들이 가지고 있는 덕성과 실천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구려 제22대 안장왕(安臧王)때의 조의선인으로 선발되었던 을밀선인(乙密仙人) 문하에는 조의선도 3,000명이 다물방지가(多勿邦之歌)를 부르며 심신을 수련했다고 한다.
(다물:"되물린다"라는 뜻으로 단군조선시대의 태평성국으로 복고하겠다는 의지를 뜻함) 단군조선의 국자랑(國子郞) 혹은 천지화랑제도가 고구려에 와서는 조의선인 제도로, 백제에서는 무절(武節-일본의 사무라이(武士)로 이어짐)로 발전했으며, 신라에서는 화랑도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신라의 화랑제도가 시작되기 2,500여 년 전인 단군조선 시대에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며 심신을 단련하던 미혼의 자제들을 국자랑(國子郞) 이라 했으며(11대 단군인 도해단제 재위 57년 -단기 3891년, 서기 전 1891년), 그들이 출행할 때에는 머리에 천지화(天指花: 무궁화)를 꽂았기 때문에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고도 했다한다..(13대 홀달단제 20년- 단기 3763년, 서기 전 1763년).
조선상고사에서 단재 신채호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구려의 강성은 선배제도의 창설로 비롯된 것인데 그 창설한 연대는 전사에 전해지지 아니하였으나 조의의 이름이 태조왕 본기에 처음으로 보였으니 그 창설이 태조, 차대 두 대왕 때가 됨이 옳다.
'선배'는 이두자로 선인(先人), *선인(仙人)이라 쓴 것으로써 여기서의 선인(仙人)은 선배의 소리말 '선'이요 인은 '선배'의 배를 빌려 쓴 이두문이며, 백의 (帛衣), 조의(早衣)는 우두머리 <上首>의 옷과 빛깔, 예속은 무사 모의 깃 절풍(折風)에서 유래한 것이다. (*선인은 섄님의 이두식 표기로 보인다. 후대에 선인의 人이 사람들이라는 말에서 무리輩가 끼어 든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간의 선인(先人, 仙人)을 관직으로만 보는 견해가 있으나 발해사에 선인을 '사 정병(士正兵)'이라 하고, 삼국 사기에 '선비는 싸움에 당(當)하여 물러서지 아니한다'고 한 것을 보아도 선인이 '선배'라 부르던 무사단(武士團)에서 유래한 이름을 알 수 있다.
'선배'는 원래 *신수두(臣蘇塗) 교도의 보통 명칭이었는데 태조왕 때에 와서 해마다 3월과 10월 신수두《臣蘇塗: 신수두는 하느님(天帝,天神)을 모신 대신단(大神壇)이 있는 가장 신성한 숲(樹林)인데 하늘에 제사지내는 마니산 참성단이 이에 해당한다.(*신수두 - 천부도 천수도 신부도 신소도[부도 소도 천부 천도 신부 신도]의 장난성 조작으로 보인다.)
수두(蘇塗)는 신수두(臣蘇塗)의 대신단(大神壇) 을 본받아 각지방에 만든 신단(神壇)으로 마을마다 남아있던 당산(堂山)의 당집,신목(神木)등은 그 유물들이다.》 대제에 모든 사람을 모아 혹은 칼로 춤을 추고 혹은 활도 쏘며, 혹은 깨금질도 하고, 혹은 택권(택견)이도 하며, 혹은 강의 얼음을 깨고 물 속으로 들어가 물싸움도 하고 혹은 가무(歌舞)를 연(演)하여 아름다움과 추함<美惡>을 보며, 대수렵을 행하여 그 잡은 양<射獲>의 많고 적음을 보아 그 내기에서 승리한 사람<一者>를 ' 선배'라 칭하고 선배된 사람에게는 국가에서 녹(祿)을 주어 그 처자를 먹이어 가실(家室)에 누(累)가 없게 하였다.
(온달과 평강공주에 보면 온달은 3월3일 낙랑언덕에서의 사냥대회에서 1등을 함으로써 선배로 뽑힌다.) '선배'가 된 사람은 각기 편대를 나누어 한 집에서 먹고 자며, 앉으면 고사(故事)를 외우고<講> 학예를 익히며 나가면 산수를 탐험하거나 성곽을 쌓거나 도로를 닦고 군중을 위하여 강습(講習)하거나 일신(一身)을 국가와 사회에 바쳐 모든 어려움<困苦>을 사양치 않았다.'
선배중에서 선행과 학문과 기술이 가장 뛰어난 자를 뽑아서 스승으로 섬긴다. 일반 선배들은 머리를 깎고 조백(早帛)을 허리에 두르고 그 스승은 조백으로 옷을 지어 입으며 스승 중의 제일 우두머리는 *'신크마리'-두대형 혹은 태대형-이라 일컫고, 그 다음은 '마리'-대형-이라 일컫고, 맨 아래는 소형이라 일컬었다.(*신크마리 - 首座 큰 섄님 / 마리 큰 섄님)
전쟁이 일어나면 '신크마리'가 모든 '선배'들을 모아 스스로 한 단체를 조직하여 싸움터에 나아가서 싸움에 이기지 못하면 싸우다가 죽기를 작정하여 죽어서 돌아오는 사람은 인민들이 이를 개선하는 사람과 같이 영광스런 일로 보고, 패하여 물러나오면 이를 업신여기므로 '선배'들이 전장에서 가장 용감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여러 가지 지위는 거의 골품(명문)으로 얻어 미천한 사람들이 높은 지위에 오르지는 못하였지만 오직 '선배'의 단체는 귀천이 없이 학문과 기술로 자기의 지위를 획득하므로, 이 가운데서 인물이 가장 많이 나왔다.
해상잡록(海上雜錄)에서도 '명립답부(明臨答夫), 연개소문( 淵蓋蘇文)은 조의 선인 출신이다.' 라고 하였고 또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男生)이 '총명하여 9세에 선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하였으니 그 사실로도 선인(先人)이 단순한 관직명이 아니고 무사단 '선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금 *함경북도 재가화상(在家和尙)이라는 것이 곧 고구려의 선배의 유종(遺種)이니 고려도경에 "재가화상은 화상(和尙:중)이 아니라 형(刑:형벌)을 받고 난 사람으로 중과 같이 머리를 깎았으므로 화상이라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실제와 맞는 말이다.(*함경북도 재가화상은 아랄해 주변 지역이므로 마르코 폴로가 이야기한 ‘자갈’을 정확하게 지칭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형벌을 받은 사람이라고 한 것은 서긍(徐兢)이 다만 지나(支那 china:중국) 한대(漢代)의 죄인을 머리를 깎고 노(奴:노비)라 일컫는 글로 인하여 드디어 재가화상을 형벌 받은 사람이라 억지 판단을 한 것이다.
대개 고구려가 망한 뒤에 선배의 남은 무리들이 오히려 구 유풍(遺風)을 유지하여 마을에 숨어서 그 의무를 수행하여 왔는데 선배란 명칭은 유교도(儒敎徒 -글읽는 사대부를 선비라함)들에게 빼앗기고 그 머리를 깎은 까닭으로 재가화상이라는 가짜 명칭을 가지게 된 것이고 후손이 가난해서 학문을 배우지 못하여 조상의 옛 일을 갈수록 잊어 자기네의 내력을 스스로 증명하지 못한 것이다.
송도(고려수도 개경)의 수박(手搏)이 곧 선배 경기의 하나이니, 수박이 지나(支那)에 들어가서 권법(拳法)이 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유도(柔道)가 되고 조선에서는 이조에서 무풍(武風)을 천히 여긴 이래로 그 자취가 거의 전멸하였다.
고구려의 선배제도는 조선의 선비정신으로 이어져 나라에 국난이 일어날 때마다 분연히 일어서 외적을 물리쳤다. 임진왜란 때의 이순신, 권율, 김시민, 곽재우, 김덕령 등 여러 장군들과 그 외 크고 작은 의병들을 이끌고 왜병을 공격했던 의병장들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은 평소에 학문과 무예를 부지런히 갈고 닦아 국난에 대비했던 것이다. 흔히 권율 장군은 문과에 급제했으니 문관으로만 알고 있지만 그는 항상 병법을 연구하고 나라안의 여러 지역들을 두루 유람하며 지형과 지세를 면밀히 살폈으며 검술에도 아주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행주대첩에 앞서 1592년 남원에서 1천여 명의 전라도 의병(義兵)들을 모집하여 금산에서 무주로 넘어가는 배고개(梨峙)에서 금산에서 전주로 들어오려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왜군 정예부대를 맞아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1진을 용감하게 지휘하던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이 격전 중에 적탄을 맞아 중상을 입고 쓰러져 사기가 떨어지고 1진의 전열이 무너지자 2진에 있던 권율장군이 벽력같이 호령하며 도망치던 군사들을 베면서 독전(督戰)을 계속하여 왜군을 크게 격파하고 호남을 보존하였다.
권율장군의 군영(軍營)은 군기(軍紀)가 매우 엄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전투 중에는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군사들을 독려하는 한편, 제대로 싸우지 않는 비겁한 병사들은 벙거지에 칼끝으로 표시해 두었다가 전투가 소강상태에 이르면 즉시 끌어내 즉결처형을 했다 한다.
선비정신은 일제하의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사살한 안중근 의사는 말타기와 사격을 잘 했는데 뛰어난 명사수였다고 한다. 청산리대첩으로 유명한 김좌진장군은 어려서부터 병법서를 즐겨 읽고 말타기와 칼쓰기를 부지런히 익혔는데 나라가 망해가자 15세에 종들을 해방시키고 재산을 모두 나누어 준 뒤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만주에서 그를 만나본 독립운동가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동서양의 군사학에 통달해 있었다고 한다. 청산리 야간전투 때 독립군이 산정에 먼저 올라가서 양쪽으로 포위해 들어오는 일본군에게 맹렬한 공격을 가한 후 일본군이 거의 올라왔을 때 살짝 빠져나감으로써 일본군들끼리 싸워 많은 사상자가 났는데 이를 두고 이범석 장군은 회고록에서 김좌진 장군의 뛰어난 전술이라고 찬양하고 있다.
고구려는 망했지만 그들의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나라를 구했다. 이제는 이 정신을 계승하여 국가를 발전시키고 강대국들을 누르고 또한 잃었던 옛 땅도 되찾아 다시는 중국인들의 망언이 없도록 해야할 것이다. 더 나아가 단군 할아버지의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 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을 구현시켜 모든 나라들이 더불어 잘 살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내용출처 : [기타] 인터넷 : 한단고기(桓檀古記)- 임승국 역(譯) 조선상고사- 신채호 상식 밖의 한국사- 남경태, 새길(1995)
출처 :한민족의 뿌리와 미래 원문보기 글쓴이 : 早衣仙人
첫댓글 선인들이 단전호흡(내공) 을 닦아 양기 (불) 를 완성하며 그 힘으로 외공을 닦는다는 말은 없어서 아쉽습니다 좋은 글 입니다 이 부분을 알지 못하면 역사가 보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