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댓바람부터 초인종이 무섭게 울린다.
어제 큰 건이 끝난기념으로 거하게 뒷풀이를 한덕에 아직도 골이 울리지만 무시하기엔 벌써 20분째 무섭게 울리는 초인종의 압박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어떤 놈인지 그대로 패대기 쳐주겠어, 라는 일견 무시무시한 각오와 함께 현관문을 여니 말쑥한 교복차림의 핏덩이가 씽긋 웃고 있다.
"...무슨 일?"
갖은 짜증을 포함하여 으르렁 거리듯 내뱉었다. 하지만 이 핏덩이는 조금도 기죽지를 않는다.
"안녕, 아빠! 17년 만이네요"
아무래도 아직 술이 덜 깬 모양이군.
조용히 현관문을 닫으려는데 핏덩이가 냉큼 얼굴을 들이밀고 외친다.
"아빠가 17살 때 사고쳐서 생긴 아들이 바로 나라구요! 아빠랑 완전 붕어빵인데 모른 척 할거에요?"
......
오. 마이. 갓.
# 삼 개월만 [짧은 이야기] #
그게 녀석과의 첫만남이었어.
내가 얼마나 황당했을지 짐작이나 돼?
당신이랑 내가 함께 찍었던 옛날 사진 한장에, 커다란 가방. 아직 덜자란 키에 하얀 얼굴이 눈에 콱하고 박혔지. 한눈에 알아봤어. 내 핏줄이구나, 하얀얼굴과 검은 머리가 당신을 많이 닮았구나라고 생각했지.
녀석은 당신이 어느 종합병원 원장한테 시집을 가서 신혼을 즐기게 해주고 싶다고 했어. 그리고 딱 삼개월만 있다가 돌아가겠다고 했지.
애가 생겼으면 연락을 했어야지. 어떻게 그걸 18년이 지난 지금까지 감쪽같이 숨길 수가 있어...아니, 화를 내는 건 아니야. 그땐 나도 당신도 어렸으니까. 17살짜리 어린 애들이 뭘 할 수 있었겠어. 이해는 해. 하지만 역시 배신당한 기분이야.
우현이 잘 키웠더라.
조르는 것도 없고, 당차고, 자기관리도 철저하고, 잘 웃고, 속 깊고. 내가 키웠더라면 절대 그런 멋진 놈이 되지 못했을거야.
처음에는 쫓아낼 생각이었어. 나랑 지독하게 닮은 얼굴만 아니었다면 정말 그 자리에서 쫓아냈을지도 몰라. 하지만 정말 닮았더라. 우리 어머니가 씨도둑은 못하는 거랬는 데 정말 그래. 그래서 한 동안 내가 데리고 있기로 했어. 수틀리면 그 때 쫓아내도 되겠다 싶었거든.
말이 좀 험하고, 시끄럽긴 했지만 청소도 잘하고 요리도 잘했어. 오해는 하지마. 부려먹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녀석은 밥을 놀랄만큼 적게 먹고 화장실에 자주 가긴 했지만 처음엔 별로 걱정하지 않았어. 당신도 알잖아. 내가 다른 사람한테 쉽게 관심두지 않는 거.
근데 녀석의 팔에서 주사자국을 봤어. 허옇고 비실비실 하니까 링겔이라도 맞고 다니는 건가 싶었는 데, 시퍼렇게 멍들고 주변살이 시꺼멓게 죽기도 한 걸 보면 절대 링겔 자국은 아니었지. 그건 마약을 투여한 자국이었어.
고작 17살 밖에 안 먹은 핏덩이 주제에 마약에 손을 대다니. 머리 끝까지 화가 났어. 오래 전에 알던 놈이 호기심으로 마약에 손을 대고 뒈진 이후로 그런 걸 병적으로 싫어했거든. 이성을 잃고 그 비실한 놈을 마구 팼지. 이 새끼야, 지금 니가 건드린 게 얼마나 위험한건지는 아냐! 뒈질라면 곱게 뒈져! 이렇게 소리지르면서 말야, 하하.
그리고 녀석이 갖고 있던 약과 주사기를 전부 압수했어. 많기도 하더라. 아마 나랑 지내는 동안 사용할 양이었겠지. 대체 어디서 구한건지, 재주도 좋다고 생각했어.
우현인 약을 압수당한 이후 첫날은 무난히 지나갔지만, 그 다음 날 부터 금단 증상이 나타났어. 그건 담배나 술을 끊을 때 느끼는 것과는 격이 틀려. 그걸 그 어린 놈이 감당하기엔 역시 역부족이었어. 이틀 간 혼절하고 깨는 걸 반복했지. 그 쯤 되니까 내가 진짜 못할 짓을 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
"...제발 돌려주세요..돌려..줘요..잘못했어요..돌려주세요.."
녀석은 이틀간 조금이라도 정신이 들면 울면서 약을 돌려달라고 사정했어. 열과 온몸을 관통하는 통증 속에서도 잘못했다고 빌면서 제발 돌려달라고 했지.
더는 그걸 볼 수 없어서 삼일 째 되는 날 내 손으로 직접 약을 주사했어. 녀석은 훌쩍대고 조금 울더니 간만에 편안한 얼굴로 잠들었어. 약을 끊게 하고 싶었지만 편히 잠드는 그 모습에 오히려 안심했어. 어차피 녀석 인생인데 내가 껴들어서 어린 놈 괴롭힐 필요는 없었던 거였단 생각도 들었고.
하지만 병원에는 데려가 봐야 겠더라. 그렇다고 병원에 데리고가서 소동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어. 그래서 잘아는 의사선생을 불렀지. 내가 좀 위험한 일을 하고 있어서 나나 부하직원들이 자주 다치기 때문에 우리 회사에서 고용한 의사야. 주치의같은거지. 여자지만 실력은 확실해.
그런데 그런 의사선생이 얘기했어. 우현이 지금 죽어간다고. 지금도 숨쉬는 게 용한거라면서 말야. 머리에 혈종이 있는 데 위치가 나빠서 수술을 해도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상황이래. 게다가 진행도 상당히 빨라서 혈종자체도 상당히 커졌다고 하더군. 진짜 아프고 힘들었을텐데 어린 게 잘 견뎠다고 칭찬까지 하더라.
뭐야, 당신도 몰랐던거야?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당신 아들이라고. 지금까지 우현이한테는 당신 밖에 없었는 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약은 진통제였던 모양이야. 제길, 어지간한 진통제는 듣지도 않으니까 아예 몰핀을 처방받았던거지. 그런데 난 녀석이 왜 약을 하는지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무조건 뺏었어. 내가 옳다고만 생각하고 녀석의 생명줄을 빼앗아 버렸어. 의사선생한테 우현이 상태에 대해 듣고선 정말 벽에 머리박고 죽고 싶었어. 난 그 어린 놈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건가 싶었지.
우현이가 어릴 때 교통사고를 당했다더군. 2년인가 혼수상태였다면서. 자기 생일날 교통사고를 당하다니 정말 오지게도 운이 없다고 웃는데, 해줄말이 없었어.
당신은 우현이 생일 때만 되면 술 먹고 운다고 들었어. 역시 그건 내가 원인이었겠지. 우현인 14살 생일 때 자기 엄마가 또 술을 먹고 울다가 급성 알콜 중독으로 병원에 실려가는 걸 보면서 가출을 결심했다더군. 그러다 교통사고를 당한거래. 겨우 2년 뒤에 기적적으로 눈을 떳는데 그로부터 1년 후엔 사형선고라니. 어린 놈한테 정말 가혹한 일이야.
내게 처음부터 삼개월만 지내겠다고 한 이유는 의사말로 삼개월 정도가 한계라고 들었대. 그래서 당신한테는 유학가겠다고 말하고 집을 나온거랬어. 내 앞에 여권을 흔들면서 부럽냐고 장난을 거는 녀석이 왜 그렇게 아파보였는지 몰라.
집을 나와서 날 찾아온 이유는 죽기 전에 내 얼굴을 보고 싶었다더군. 그리고 자기 얼굴도 보여주고 싶었대. 자기가 얼마나 행복하게 자랐는지, 얼마나 사랑받으며 살아왔는지 말해주고 싶었댔어.
이후엔 난 휴가를 내고 녀석과 가평에 있는 별장에서 지냈어. 뭐든 녀석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어졌거든. 내가 고작 그런 핏덩이 때문에 이렇게까지 변할거라고는 아무도 예상못했을거야. 하지만 진심으로 녀석의 마지막이 행복하길 바라고 있어. 그래서 녀석의 표현대로 '미련지우기'에 동참했지.
우현이 덕택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놀이동산에 가봤어. 머쓱하더군. 해수욕장에도 가봤지. 둘 다 물 근처는 커녕 살만 열심히 태우다 왔지만. 녀석하고 둘이서 매일매일 많은 곳을 다녔어, 한달반동안. 그렇게 하고 싶은 게 많아서 어떻게 하늘나라 갈 생각이냐고 우스갯 소리를 했을 정도로 우현인 하고 싶은 게 많은 놈이었지. 하늘나라에 보내기가 싫을만큼.
어제는 함께 사진을 찍었어.
혹시 영정사진을 찍을 생각인건가 했는 데 내게 증명사진을 내미면서 영정사진은 그거면 충분하다고 하더라.
어제 둘이서 함께 찍은 사진은 내게 주는 선물이라고 우현인 말했어. 자신에겐 필요없으니까 내 거실에 액자로 만들어서 걸어두라면서 웃었지. 사진을 찍는 내내 도저히 웃을수가 없어서, 우현인 그렇게 해맑게 웃는 데 난 도저히 웃을 수가 없어서 사진 속의 내 얼굴은 잔뜩 찡그려진 채야. 그래도 좋다면 당신에게도 그 사진을 주고 싶어.
돌아오는 길에 녀석이 울더라. 죽기 싫다고, 무섭다고.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을 두고 떠나기가 싫다면서 그 강하던 아이가 펑펑 울었어. 너무나도 태연하게 웃고, 태연하게 죽음을 준비하고 있어서 잊고 있었어. 그 어린놈에게 죽음이 얼마나 두려울지 난 잊고 있었어. 그 핏덩이한테 외롭게 살았던 지난 세월을 위로받으면서도 막상 우현이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어. 그게 또 너무 아파서 가슴만 쳐댔어.
말이 길어졌지만 오늘 보자고 했던 용건은, 일주일뒤가 우현이가 말했던 삼개월째가 되는 날이야.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어. 끝까지 당신한테는 비밀로 해달랬지만 그래도 일주일뒤에는 우현이를 보러 와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고마워. 우현이를 낳아줘서, 멋지게 길러줘서. 우현이가 죽기 전에 내가 그 놈을 알 수 있게 해줘서. 우현이와 함께 했던 지난 삼개월이 내겐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이었어.
당신에게 이 말을 하고 싶었어.
난 다음 주에 울꺼야. 그 동안 녀석앞에서 강한 척 무리해서 계속 웃고 있었으니까 다음 주에는 울 생각이야. 하지만 당신은 웃어줘. 힘들어도 웃어줬으면 좋겠어.
첫댓글 슬퍼요.나한테는 지루했던 오늘이,죽은사람한테는 정말 살고싶었던 내일이라는 말이,,조금은 이해되는것 같아요^-^,,
감동적인 내용입니다 ㅠ 하랄없이 하루하루를 대충 때워가며 사는 제가 한없이 부끄러워 지내요..;
슬프네요. 가시고기 같은 느낌. 건필하시길.
아아...슬퍼여...ㅠㅠ
가시고기에 동감입니다. 슬퍼요.너무 슬프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