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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20년 3월 15일 주일오전
성경낭독 : 출17:1-7; 요4:5-42
본문 : 창2:1-3; 신26:1-11; 요4:20-26
제목 : “예배란 무엇인가 3 : 하나님과의 언약적 사귐”
주일오전찬송
경배찬송 – 시47편 1,2,4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147편 5,6,7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138편 1,2
성경낭독 후 찬송 – 시52편 5,6(고정)
설교 후 찬송 - 시95편 1,2,3
성찬식 찬송 - 시63편 2(고정)
폐회찬송 - 시92편 4,6(고정)
예배란 무엇인가 3 : 하나님과의 언약적 사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가 중요하다, 그리고 예배에서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말로만 하고’ 실제로 그것을 ‘체감하지 못할 때’, 예배는 사람들의 감각을 자극하는 것이 되기 쉽습니다. 마이클 호튼이 예배학 책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예배에서 드라마나 다른 연극적 기교들을 사용하는 교회가 크게 늘어난 가장 중요한 이유를 꼽으라면, 나는 설교와 더 포괄적인 예배의 환경이 하나님 앞에 모이는 지금 여기서 무언가 중요하고 극적인 일이 우리에게 발생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무언가 중요하고 극적인 일이 발생하고 있음을 우리가 전혀 감지하지 못할 때, 하나님과 사람의 행동은 문화에 의해 ‘연출되기’ 쉽다.”
저는 성도들에게 단순히 어떤 행동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단순한 내용만을 전달하고(예를 들면 “봉사하라”와 같은 명령을 위해)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 계획 같은 것을 전달해 주지 않는 설교들을 볼 때 여기에 묘한 공통점이 있는 것을 발견하곤 합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성도들에게 적용이 잘 되는’ 설교를 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가 무엇인가 하면, 결국에는 성도들이 유치하고 작은 문제에만 치중하는 사람들이 되어 가더라는 것이지요. 아주 유치한 방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여자친구와 헤어지거나 아끼던 강아지가 죽어도 하나님을 배신할 이유가 얼마든지 되는 것입니다. 반면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해 듣는 성도들은 자잘한 재미가 없을런지는 몰라도,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무언가 하나님의 크신 일들을 경험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신앙이란 것이 삶의 소소한 것들에 쉽게 정복당하지 않는 것이지요.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호튼이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가 자신이 대단한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에게는 자잘한 흥밋거리는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배가 놀라운 것을 제공하지 않을 때, 그 때 예배 기획자는 예배의 연출과 자잘한 흥밋거리들에 사활을 걸게 됩니다.
제가 신학공부를 할 때 이미 ‘예배를 연출하는 것’에 대해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미국의 교회들 중에는 목사가 천사 날개를 달고 와이어를 타고 예배당 중앙으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을 기획한 교회들도 있었고, 예배당에 사이키 조명을 달거나, 오르락 내리락 하는 무대를 만들거나 하는 것을 설치한 교회들도 있었습니다. 성가대가 어느 순간에 노래를 시작하고, 언제 어디에다 조명을 쏘고, 또 스크린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수많은 기법들이 연구되었습니다.
예배라는 것이 위대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 거기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여길 텐데, 예배가 위대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자꾸 거기에 인생이 바라는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해 기획하고, 각색하고, 연출을 가하고, 사람의 관심을 사로잡을 만한 것들을 집어 넣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누구나 ‘중요한 것’을 갖고 있다면, ‘부수적인 것’은 상관 없다고 여기게 되는데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에 ‘부수적인 것’이 핵심에 오게 됩니다.
즉 예배를 연출하고 쇼로 만들고, 또 설교의 시작부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겠노라고 유머로 시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딱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배가 자신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오전과 오후 두 시간을 들여서, 예배가 ‘하나님과의 언약적 교제’라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둥 번개를 치시면서 실제로 등장하여, 사람들에게 우레와 같은 음성으로 직접 말씀하시지 않을 뿐, 예배는 우주의 전능자이신 하나님과 일개 인간에 불과한 내가 한 테이블에 앉아서 언약적 교제를 나누는 위대한 시간입니다. 하지만 이 위대한 일을 허락받아 놓고서도 교회와 성도가 주로 하는 일이란, 자기 감정을 치유하겠다고 하거나, 병을 고치겠다고 하거나, 아이스 브레이킹 같은 것을 통해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들어맞아야 사람들이 잘 듣는다......따위를 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위대함을 깨닫는 것! 그것만 되면, 사실 그것으로 끝입니다. 위대한 일에는 수식이 필요 없습니다. 예배가 참으로 위대하다면, 그것이 위대하다는 변사를 옆에 잔뜩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진귀한 보석이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면, 그것을 보는 사람들 옆에서 이게 왜 진귀한 것인지 애써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존재 자체로 끝나는 것이지요. 예배가 자꾸 귀중하다고 말을 하거나, 예배가 귀중해 보이도록 자꾸 사람의 편법을 쓰는 것은 결국 예배가 귀하지 않다고 생각하니 하는 아첨일 뿐입니다.
예배는 그 자체로 놀랍습니다. 하지만 이 가치는 ‘배운 사람만’ 알 수 있고, 아는 사람만 압니다. 제가 앞서 읽었던 호튼의 책에 보면 호튼은 구도자 예배를 지향하는 교회와 반대하는 전통적 예배를 지지하는 성도들 역시도 예배에 대한 이해가 매우 낮기 때문에 구도자 예배를 지향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배에 대한 자부심이 적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이것은 배워야 합니다. 예배가 하나님과의 언약적 교제라는 사실은, 여러분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예배에 참석만 한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주에 제가 설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영적 진리들은 ‘생득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배워야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가 말씀을 안 가르치면 이것은 안 알아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예배가 하나님과의 언약적 교제라는 사실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따라 오전과 오후에 이 사실을 살펴보시고, 우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입장에서 서 있는지를 깨달아, 주일에 드리는 두 번의 예배가 ‘내가 신자로 소속이 되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의무’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광스러운 특권’임을 깨닫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 : 첫 예배자들
먼저 우리가 지난 주일에 배웠던 장면에서 시작해 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지난 주일, 주의 경건한 백성들은 ‘언제나’ 예배해왔다는 사실에 대해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살아가고 있을 때부터 이미 진리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배의 성격에 대해 배우려고 할 때, 역시 여기 처음 부분, 곧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지으시고 그 사람에게 예배를 받으시려 했을 때, 어떤 것을 의도하셨는지를 살피는 것은 합당할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성전 에덴에서 예배하려 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 예배를 통해서 무엇을 의도하셨는지에 대하여는 두 가지 정도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예배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셨던 것들
1)
첫째, ‘장소적 문제’에서 생각해 봅시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예배를 위하여 ‘성전 에덴’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위하여 이 장소를 선택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예배하는 일을 통해서 예배자인 아담과 하와가 무엇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그들을 만났다는 점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아주 단순한 대답일지 몰라도, 우리는 에덴이 ‘풍요로운 장소’였다는 성경의 힌트들을 발견합니다. 창세기 2장 8절과 9절을 보시면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셨다”(8절) 했을 때, 바로 그 다음 언급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셨다”(9절)는 말씀입니다. 에덴에 있었던 동산은 풍요로운 과실들이 가득한, 풍요의 장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 곧바로 다시 이어지는 말씀들은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다”(10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 세계사 시간에 문명의 발상지에 대해 배웠는데, 모두 큰 강들 유역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큰 강의 근처가 사람들이 살기에 좋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은 세상에 처음 있었던 가장 풍요로운 네 강 모두의 수원지가 되는, 근원이 되는 동산이었습니다. 즉 에덴은 ‘풍요의 근간’이었습니다.
그러면 역시 다시 쉬운 질문을 해 보도록 합시다.
“왜 에덴이 풍요로운 동산이었습니까?”
우리는 어렵지 않게 대답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창세기 3장 8절 말씀 같은 곳이 힌트가 될 것입니다.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풍요가 하나님 그분으로부터 왔음을 어렵지 않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창조 세계의 풍요로움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면 에덴이 풍요로웠던 이유, 물론 당시는 온 세상이 다 풍요로웠겠지만, 에덴이 특별히 더 풍요로웠고 풍요를 나눠주는 네 강의 근원, 발원지가 되었던 이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에덴이 다른 어떤 곳들보다 더욱 풍요로웠으며 다른 풍요들의 뿌리가 되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이 에덴이야말로 ‘하나님의 집’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의 여러 곳들 중 가장 좋고 아름다운 곳으로 자신의 정원을 삼으셨습니다. 즉 에덴의 풍요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의 장소인 에덴에 대해서 생각할 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의 처소를 인류에게 주셨을 때에는 그 예배의 처소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이들이 맛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고, 아담과 하와는 한 주 동안 열심히 세상에 나아가 일을 하다가 예배 처소로 돌아왔을 때, 거기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만났으리라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다 하나님을 발산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예배에서 더욱 특별히 하나님을 만났겠다는 것이지요. 풍요를 만난다고 해서 풍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풍요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뵙는 곳이 바로 이 ‘성전 에덴’이었던 것입니다.
즉 우리는 아담의 이야기에서 장소, 처소에 대해서 한 가지를 깨닫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처음부터 예배를 명하셨을 때, 그 때 그 예배라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과 만나는 곳’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첫 원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예배가 무엇인가? 예배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2)
그리고 둘째, 이제 ‘시간적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아담과 하와는 ‘언제’ 하나님을 예배했겠습니까?
지난주부터 계속 말씀드리고 있지만, 당연히 아담과 하와는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발산하고 있는 공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난 주일에 배운 대로,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로 특별한 예배의 시간과 장소를’ 만드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그 예배의 시간은 언제겠느냐는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일을 다 마치고 성전 에덴으로 돌아와 쉬면서 하나님을 예배한 날은 언제겠냐는 것이지요.
이런 문제는 성경에 나오지는 않지만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모든 지으시던 일을 마치시고 쉬신 것은 아담과 하와가 아마도 첫번째 예배를 드리기 전이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안식일 규례는 모세 시대에 비로소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세상이 처음 창조될 때부터 있었습니다. 체계화된 법이 된 것이 모세 시대 때 되었을 뿐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라는 예배의 날에 대한 규정이 생겼다고 해서, 그 이전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거꾸로 하나님의 경건한 백성들은 창세기의 제일 처음에 나오는 대로 안식일을 특별한 날로 여겨 그 날 예배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 역시 한 주간의 일을 마치고 성전 에덴에 돌아와 언제 예배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까? 아마 안식일이었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처음 인류에게 예배를 명하셨을 때의 두 번째 원리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안식일에 대한 성경의 첫 언급을 제가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2:3)
하나님께서 예배의 날인 안식일에 주시마 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무엇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셨습니까? 네!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사람들에게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예배의 날에 사람들에게 “복과 거룩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종합하면
그러면 이제 정리를 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첫 인류 아담과 하와에게 예배를 주셨을 때, 이들이 예배를 통하여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아담과 하와는 예배를 통해서 무엇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첫째, 아담과 하와는 예배를 통해 무엇보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배의 날, 예배의 장소에서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담과 하와는 예배를 통해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까? 네! 아담과 하와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과 거룩’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성전 에덴에 나와서 특별한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통해 이들이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은 안식일에 하나님께서 주시마 약속하신 “복과 거룩”이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서, 곧 첫 인류에게 주어졌던 첫 예배에서 하나님께서 주셨던 사실을 통해서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말하자면, 예배가 무엇이며, 우리는 예배에서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어떤 것들을 얻고 가지려고 해야 하는가? 적어도 아담과 하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예배에 대한 이해는 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그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과 거룩’입니다. 우리는 예배에서 이 둘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요, 그분을 만남으로 인하여 그분께서 주시는 ‘복과 거룩’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배야말로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과의 사귐’이요, 그분과의 만남으로 인하여 인생이 모든 복과 거룩함을 얻을 수 있는 통로였습니다.
언약적 사귐으로서의 예배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과의 사귐’이 ‘언약적’ 사귐이라는 점을 생각해 봅시다.
사실은 이것은 별반 다룰 필요가 없는 ‘아주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이 명제는 실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만남이 기본적으로 언약적이다’라는 사실을 알면,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어지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나시는 방법을 다른 것으로 정하지 아니하시고 ‘언약으로’ 정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창조 명령을 주셨을 때, 그리고 그들로부터 예배를 받으셨을 때, 또 그들이 범죄하여 구속의 약속을 주실 때......항상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실 때, ‘그들과 약속하는 방식으로’, 즉 ‘언약하시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교제하시는 기본적인 방법이 ‘언약’이었다는 것을 알고, 그래서 이 ‘언약적 관계’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나시는 모든 곳에 일률적으로 등장합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시는 모든 방식이 언약을 통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제=언약’이라고 등식을 세워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특히 예배와 관련하여 조금 더 명시적으로 볼 수 있는 장면이 있으면 크게 유익하리라 생각합니다. 이것을 잘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이 우리가 오늘 본문으로 읽었던 신명기 26장 말씀입니다. 함께 이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신명기 26장의 시작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시는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 거할 때에......” 즉 신명기 26장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주신 말씀으로서, 너희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거들랑 이러저러해야 한다......라는 말씀을 주시는 부분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5절부터 시작되는 회고 부분입니다. 이 신명기 26장을 처음부터 찬찬히 읽어보면 이 5절부터의 회고 부분은 그 앞 2절과 3절, 4절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한 것인데, 2절에서 그 땅에 들어가거든 하나님께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두면 하나님께 그것을 바쳐라”라고 하고, 그 제물들을 하나님 앞에 바칠 때 이렇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즉 5절부터 나오는 회고 부분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이 “하나님! 우리가 이러저러하여 하나님께 이 토지 소산의 맏물을 바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5절부터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무엇을 회고하고 있는지를 봅시다.
- 5절은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애굽으로 내려가서 거기서 크고 강한 민족이 되었다”고 합니다.
- 6절은 “애굽이 중역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래서 7절에서는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 그리고 8절과 9절은 이러한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게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다”라고 고백합니다.
- 10절을 보시면 앞에 제가 설명드린 정황이 나옵니다. “이러저러하기 때문에 이제 제가 여기에서 얻은 토지 소산의 맏물을 드립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신명기 26장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지금 이스라엘이 과거를 회고하며 말하고 있는 이 사실들이 모두 ‘그들이 얻은 구속’의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아뢰고 있는 내용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건져내어 구속하시고, 또 이 약속의 땅을 주셨는가’ 하는, 하나님의 구속과 은혜에 대한 술회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지금 하나님께 토지 소산의 맏물을 드리는 것은 ‘단순히 산물을 얻은 것에 대한 추수 감사’가 아니라, ‘구속에 대한 감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속하신 것에 대한 감사가 여기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구속에 대해 감사의 제물을 드릴 때, 이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그 다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10절과 11절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 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10-11절)
아멘!
우리가 여기에서 “경배할 것이며”라는 히브리 단어가(솨하) 굳이 ‘예배’에 사용되는 말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더라도, 이 장면은 구약 성경에 자주 나오는, 하나님께 공적으로 드리는 이스라엘의 절기 예배 같은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예배, 이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소산으로 얻은 것을 예물을 드리면서 하나님께 경배할 때, 또 이렇게 경배를 하면서 ‘즐거워 하는 것’, 즉 축제로서의 예배를 자신들 뿐 아니라 레위인과 객들과도 함께 즐거워하게 될 때, 그 때 이들의 예배와 환희가 무엇과 관련이 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신명기 26장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구속’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무엇에 대하여’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푸신 이 구속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면서 경배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 거기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었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모든 역사들을 통해서 볼 때, 이 때 하나님과 자기 백성들과의 사귐은 무엇에 관한 것이 됩니까? 신명기 26장을 통해서 우리의 예배는 ‘무엇에 대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됩니까? 우리는 이 예배의 배경이 언제나 ‘그분께서 우리들을 향하여 베푸신 구속’임을 알게 되고,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미하는 것은 언제나 ‘그분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행하신 일’이 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귐을 ‘언약적 사귐’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실 때 언약을 주시고 성취하셨으며, 우리는 그것을 받은 자로서, 구속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분을 찬미하고, 그분께서 주신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과 시편에서
요한복음에서
이것을 예배에 관한 유명한 말씀인 요한복음 4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물 가에서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 예배에 대해 질문하는 여인에게 우리들에게 매우 잘 알려져 있는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23-24절)
아멘!
예수님께서는 “참된 예배란 영과 진리의 예배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한다는 것은 “영의 예배”, 그리고 “진리의 예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개역 한글판에는 이 번역이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잘못 번역되어 있지만, 개역 개정판에는 준수하게 고쳐졌습니다. 이 문구는 헬라어로는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라고 되어 있는데, 개역 개정판은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라고 올바르게 고친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정확하게 직역을 하자면 “성령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여기 “성령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까?
한 주석가는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고 말씀하셨을 때, 단순히 앞으로 그의 백성들 가운데서 좀 더 진지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배가 있게 될 것을 예언한 것만은 아니다. 그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시기로 준비하고 계신 새로운 것들을 말씀하셨다. ‘진리’란 단어는 복음의 진리, 곧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의 좋은 소식을 가리킨다. ‘영’이란 ‘진리의 성령님’ 곧 그 복음을 능력있게 증거하시기 위해 오시는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따라서, 삼위일체적 예배,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행하신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님의 독특한 사역을 인지하는 예배를 말한다.”
아멘!
이 문구에 대한 수많은 주석들 중 이 설명만큼 좋은 것을 찾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하나님께 “성령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성자의 구속을 우리들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심으로 성령님께 사로잡힌다면 다른 어떤 것보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더욱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성령님 안에서 예배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제대로 바라보는 가운데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 또한 어떤 의미입니까? 신약 성경에서 ‘진리’에 대한 가장 통찰력 있고, 가장 보편적인 해석과 이해는, 여러분들도 다들 잘 알고 계신 대로 ‘복음’입니다. 복음이야말로 성경이 제시하는 가장 정확하고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 땅에서 어떻게 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한 사실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성경이 ‘진리’라고 말하는 것들입니다.
이 주석가의 다른 표현도 한 번 들어보십시오.
“그러므로 참된 예배란 하나님의 언약적 주 되심을 알려주는 일들로 가득 차게 된다. 우리는 그의 능하신 행동에 영광 돌리며, 그의 권위 있는 말씀을 듣고, 그리고 우리를 그의 백성 삼으신 그 분과 인격적으로 교제하기 위하여 예배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초점을 우리의 언약적 주로부터 멀리할 때, 그리고 우리 자신의 기쁨과 위안들에 사로잡히게 될 때, 우리의 예배는 심각히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게 되는 것이다. 나의 이전 목사님이셨던 분은, 우리가 예배를 떠나게 될 때 ‘내가 예배로부터 무엇을 얻었는가’를 묻지 말고, ‘주님을 경배하는 일에서 나는 무엇을 하였는가’에 대해서 먼저 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가 진실로 ‘하나님과의 교제’라고 한다면, 그 교제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우리가 오늘 설교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이 교제는 ‘언약 교제’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가 ‘언약 교제’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배가 하나님과의 ‘언약적’ 교제라는 말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어진 ‘언약’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는 것을 말하는 표현입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사실! 그것을 알고! 노래하며! 칭송하고! 찬미하면서! 그분께 나아와서 그분께 드리는 제사! 이것이 예배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언약적 예배’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과의 사귐’이 된다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우리의 하나님 사귐은 언제나 ‘언약적’인데, 그 말의 뜻은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서 언제나 이 하나님의 구속의 복음을 갖고 찬미하면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예배에 나아와서 무엇을 하십니까? “여러분을 행하여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듣고, 그 하나님을 찬미하십시오!” 이것이 예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언약적 사귐’입니다!
시편이 알려주는 이 사실
시편은 교회의 찬송가로서, 시편의 모든 곳에서 이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1)
가장 간단하게 시편 19편 말씀에서 이 내용을 한 번 보십시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19:1-4)
성도가 모여 교회로 하나님께 예배할 때 시편을 찬송함으로써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가 예배하는 일은 ‘이 능하신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발견하고 찬미하는 것입니다. 시편 19편에서 시인은 발견합니다. 하늘이 온통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고, 궁창이 온통 그분의 손으로 하신 일을 발산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비록 해와 달이 말로 하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언어가 온통 소리치고 있어서, 하나님의 이 능하신 일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외치는 것이 예배이며, 이 하나님의 능하신 일을 칭송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19:7-8)
시인은 이 하늘과 땅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일을, 시선을 돌려서 율법을 찬미하는 것으로 바꿉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찬미!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러분이 예배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러분은 예배 때, 여호와의 영광을 높이기 위하여 무엇을 합니까? 노래를 부름으로써 찬송을 합니까? 그러면 그 내용이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행하신 능하신 일’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예배에 울려퍼짐으로써 그분의 능하신 행동이 찬송됨을 시편 19편은 여실하게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 19편을 통해서 “예배는 삼위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행동들을 찬미하는 일이다”라는 것을 정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2)
한 편만 더 볼까요? 시편 95편을 함께 읽어봅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오.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시로다. 땅의 깊은 곳이 그 위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것도 그의 것이로라.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시95:1-7)
아멘!
교회의 찬송가인 시편은 예배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어야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우리는 오늘 예배가 하나님 그분과의 언약적 교제라고 배웠는데, 하나님과의 언약 교제에서 언약의 이쪽 편인 우리가 하나님을 교제하는 방식은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복과 거룩을 주시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귈 때에는 태도가 여러 가지일 수 있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만나는 방식은 한 가지입니다. ‘그분의 능하심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은 온통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찬양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편 95편도 그 한 예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방금 읽은 부분은 그분이 어떻게 이 세계를 조성하셨는지를 장엄하게 노래한 후에, 그것을 바라본 이들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취하는 행동은 한 가지입니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까 제가 인용하여 읽어드렸던 주석가가 말했듯이, 예배라는 것이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것만 있고, 그 하나님과의 교제가 ‘감성적인 영적 만남’이 되어버리면 이것은 신비주의가 될 따름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것이 아까 그 저자의 말처럼 “우리의 초점을 언약의 주로부터 멀리하고, 우리 자신의 기쁨들과 위안에 사로잡히게” 할 때, 그 때 우리의 예배는 예배로부터 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과의 언약적 교제’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가?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베푸신 구속의 은덕을 분명하게 깨달으면서, 그 사실을 높이고 찬송하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할 때, 그 때의 교제는 어떤 성격의 교제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신 구속의 일들, 그분의 행하신 이 놀라운 일들을 찬송하면서, 삼위 하나님의 구속을 칭송하는 일! 이것이 예배이고, 이것이 예배가 하나님과의 언약적 교제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를 따라 예배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