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오늘은 전국에서 행복시민 800여 명이 모여 법륜 스님과 함께 경주역사기행을 하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8시부터 정토담마스쿨 학생들과 온라인으로 즉문즉설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정토담마스쿨은 영어로 진행되는 정토불교대학 과정입니다. 북미 서부, 북미 동부, 캐나다, 영국, 독일, 키프로스,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홍콩, 한국에서 17명의 학생들이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몇몇 분들의 소감을 들어본 후 모두 스님에게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저는 튀르키예 에서 어제 돌아왔습니다. 작년에 튀르키예·시리아 지진으로 인해서 큰 피해가 생겼습니다. JTS에서는 이 지역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지진으로 부서진 학교를 새로 지었습니다. 4천 명이 다닐 수 있는 큰 학교를 새로 지어서 준공식을 했는데, 주민들과 학생들이 아주 기뻐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편안하게 생활하고 있으면 세계가 조용한 것 같지만,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이나 지진, 홍수 같은 자연재해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선진국에서는 자연재해가 일어나도 자체적으로 금방 복구를 할 수 있지만, 가난한 나라에서는 재해를 스스로 이겨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와 같은 나라 사람이나 일가친척이 아니더라도 조금씩 힘을 모아서 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특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중동 전쟁이 일어나면서 이런 자연재해가 발생한 곳에 지원하는 금액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선거나 전쟁 같은 이슈 보다 그 뒤에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가지고 도우려는 마음가짐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여러분들이 정토 담마스쿨을 다니고 공부하면서 어려운 점이나 모르는 것, 또는 자기 고민에 대해서 자유롭게 대화하는 자리입니다. 어떤 문제에도 정해진 답은 없습니다. 다만 비교적 진실에 가깝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1시간 30분 동안 네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원하는 것을 얻고자 노력하지만 막상 원하는 것을 얻고 나면 만족이 되지 않는다며 어떻게 관점을 갖고 수행을 해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왜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고도 만족하지 못할까요?
“Why is there always a contradiction in human behavior? First, We desire something, when we get it we can feel a temporary happiness, but after that we go back to the feeling of lack. For example, I want to achieve success or acquire a lot of money, but when I get it, the feeling of satisfaction is somehow lacking; it is not the same feeling of satisfaction that I had before when I only imagined getting it. Second, a desire arises in me to do something, but I find myself lazy or procrastinating about doing it. For example, I have a desire to read self-help books to improve myself, but after buying about 20 books, I don't read them at all. Why is that? Why did I want to do it in the first place if I am not going to do it later? Is the 'me' of yesterday, who has the desire to do something, and the 'me' of today, who feels lazy to do it, not the same person? These are some of the cases where I somehow feel that there is a contradiction in my behavior and I feel that there is no consistent 'me'.”
(왜 인간의 행동에는 항상 모순이 있을까요? 첫 번째, 우리는 무언가를 원하지만 그것을 얻고 나면 잠시 행복을 느낄 뿐 다시 결핍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 성공하거나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하지만, 막상 그것을 얻었을 때 느끼는 만족감은 무언가 부족해요. 이루기 전에 상상으로 느꼈던 만족감과 실제 느껴지는 만족감이 달라요. 두 번째, 무언가를 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서 그걸 하려고 하면 게을러지거나 미루게 돼요. 예를 들어, 자기 계발서를 읽고 저를 좋은 방향으로 개선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서 20권의 책을 샀지만, 사고 나서 전혀 읽지 않아요. 왜 그럴까요? 나중에 하지 않을 거면서 애초에 왜 그렇게 하고 싶어 했을까요? 어제의 '나'는 무언가를 하고 싶어 했으나, 지금의 '나'는 그것을 하기 싫어하는데, 이 둘이 같은 사람인가요? 위의 사례들을 통해 제 행동에 모순이 있다고 느껴졌고, 나아가 일관된 '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모순이라고도 할 수도 있지만 저는 그것을 모순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심리가 지닌 성질이라고 봅니다. 이런 성질이 나쁜 결과만 가져오는 건 아니에요. 이런 성질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사람이 약속을 하고 100% 다 지켜야 된다고 한다면, 그 약속의 올가미 때문에 살아갈 수 없을 겁니다. 약속을 지키기도 하고 약속을 못 지키기도 하니까 이렇게 살 수 있는 거예요. 또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슬픔이 영원할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르면 점점 그를 잊게 되고,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기도 하잖아요. 마음이 바뀌는 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바로 그 성질 때문에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 그런 성질을 ‘마음 작용의 본래 특징이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런 마음의 성질을 알아서 그 성질에 맞게끔 살아가면 됩니다. 예를 들어, 가난할 때는 ‘돈이 1만 달러만 있어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1만 달러를 갖게 되면 매우 기쁩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1만 달러는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100만 달러만 있으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겠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100만 달러를 갖게 되면 잠시 기뻤다가 그 기쁨도 어느 순간 사라집니다. 이번에는 10억 달러가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이런 현상을 꿰뚫어 보면, 돈을 많이 가진다고 해서 마음이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기나 건강도 마찬가지예요. 아플 때는 이것만 안 아프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안 아프면 또 다른 바람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원리를 알면, 지금 여기에서 만족할 줄 알게 됩니다. 아무 행동도 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필요하면 돈을 더 벌 수도 있고 지위를 더 높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더 행복해지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만약에 이런 성질이 없다면 지위가 높거나 돈이 많은 사람은 더 행복하고, 지위가 낮거나 가난한 사람은 불행해야 한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본래 마음작용의 성질이라고 이해하는 게 필요합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원래 늘 바뀝니다. 마음은 특히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지배를 받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결혼식에 가서 누가 멋있게 결혼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결혼하고 싶다’ 이런 마음이 듭니다. 또 스님이나 신부님을 만났는데 좋아 보이면 ‘나도 결혼하지 말고 신부나 스님이 되어야겠다’ 이런 마음도 듭니다. 또 누군가가 나라를 위해서 어떤 큰일을 하고 죽어서 많은 사람이 그를 존경하면 ‘나도 멋있게 죽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마음이 가는 대로 다 하고 살면 어떻게 되겠어요? 오늘은 결혼하고, 내일은 이혼해서 스님이 되고, 모레는 죽을 거예요? 오늘은 이런 마음이 들어도 내일은 또 다른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관심무상(觀心無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란 항상(恒常) 하지 않고 인연을 따라 늘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믿을 게 못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마음이 올라오면 ‘지금은 이런 마음이 드는구나’ 이렇게 봐야 합니다. ‘지금, 저 책을 읽고 싶어 하는구나!’ 이렇게요. 내일은 또 다른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읽기 싫어진 게 아니라 다른 마음이 들어서 그 책에 관심이 없어진 거예요.
요즘은 광고를 해도 이런 사람의 심리를 자극해서 상품을 팝니다.. 옛날에는 일을 하다 호미나 삽이 필요하면 철물점에 가서 그것을 샀어요. 즉, 필요해서 구매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꼭 필요하지 않아도 영상에서 눈이나 귀에 자극을 줍니다. 아주 효과적으로 쓰는 호미, 아주 효율적인 삽, 이런 영상을 보면 순간적으로 그것을 구매하고 싶어 집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구매를 합니다. 그렇게 주문을 해서 포장을 뜯지 않고 그대로 두는 물건도 있고, 포장을 뜯어서 한번 쓰고 버리는 물건들도 자꾸 늘어납니다. 물자를 계속 만들어 내서 물자는 풍부한데 사용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에요. 이런 현상은 갈수록 더 심해질 겁니다.
선거도 바뀌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그 사람의 능력보다 광고할 수 있는 돈을 얼마나 모으는지가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요즘은 인공지능을 이용해 그 사람에게 맞는 그런 맞춤형 광고를 냅니다. 그 광고를 보면 그 사람의 마음에 딱 들도록 자극하기 때문에 능력이나 다른 조건들을 따져보지 않고 투표를 하게 됩니다.
이런 감정이 일어날 때마다 ‘지금 이런 마음이 일어나는구나!’ 하고 잠깐 살펴보고 마음을 진정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이런 유혹을 피해 갈 수 있습니다. ‘지금 이런 마음이 일어나는구나!’ 이렇게 봐야 합니다.”
“I understand. Thank you.”
(잘 이해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어지는 질문에 답변을 한 후 9시 30분에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방송실을 나온 스님은 행복시민들과 경주역사기행을 하기 위해 곧바로 경주로 향했습니다.
오늘은 전국 각지에서 모인 행복시민 800여 명과 함께 무열왕릉, 김유신장군묘, 사천왕사지, 선덕여왕릉을 둘러보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고 활동을 해나가려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대화를 나누기로 했습니다.
이른 아침 태종무열왕릉에는 전국에서 아침 일찍 출발한 행복시민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습니다. 오전 10시 대중이 모두 도착하자 행복시민 경주역사기행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반갑게 인사를 한 후 이번 경주역사기행의 취지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이렇게 먼 곳까지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경상도식 반갑다는 인사는 ‘먼 데서 뭐 하러 왔노’입니다. (웃음)
우리가 이곳을 방문한 것은 신라가 어떤 이유로 우리 민족사의 중심이 되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민족사의 중심은 환인의 한 나라, 환웅의 배달나라, 단군의 조선, 해모수의 부여, 고주몽의 고구려, 대조영의 발해, 이렇게 형성되어 왔습니다. 신라는 민족사의 주류에 들어가 있지 않았습니다.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친 작은 나라인 신라가 민족사의 주류로 등장하면서 얻은 역사적 교훈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함께 공부를 해보고자 합니다.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아는 것은 부차적인 일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 현실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서 미래를 개척할 것인지를 알기 위해 역사 기행을 하는 것입니다.
신라와 가야의 합의 통일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가야와 신라는 평화적으로 통합했기 때문에 신라가 나중에 약해져도 후가야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는 무력으로 통일을 했기 때문에 나중에 신라가 힘이 약해지니까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평화적으로 통일하는 것은, 첫째, 현재의 피해를 줄이는 방법이고, 둘째, 통일의 상승효과를 가져올 수 있고, 셋째, 미래에도 분열을 막는 방법입니다. 무력으로 통일하는 것은 부작용이 많습니다. 신라와 가야의 통합에서 우리는 이런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추었다 사라졌다 하는 가운데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었습니다. 무열왕릉을 에워싼 나무도 더욱 푸르렀습니다. 햇살에 피로를 녹이며 대중은 스님의 이야기에 빠져들었습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는 한계도 있지만, 분명 오늘의 대한민국이 배울 점이 있었습니다. 한 시간 동안 설명을 듣고 일어나 무열왕릉을 한 바퀴 돌아 뒷문으로 나오니 선도산 아래에 서악 마을이 나타났습니다.
800여 명이 긴 행렬을 이루어서 서악 마을의 골목길을 지나며 마을을 둘러보았습니다. 길가에는 곳곳에 구절초가 예쁘게 피어 있었습니다.
서악동 삼층석탑을 지나 도봉서당을 지나니 황금빛 들판이 펼쳐졌습니다. 코스모스가 가을바람에 하늘거리는 도로를 따라 천천히 걸었습니다. 스님은 송수신기로 노래를 불러보자고 제안했습니다.
“가을이라 가을바람 노래 알아요? 그 노래를 누가 한번 불러 보세요.”
한 분이 달려 나와 노래를 불러보겠노라고 자원을 했습니다.
가을이라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니 ♬
푸른 잎은 붉은 치마 갈아입고서
남쪽 나라 찾아가는 제비 불러 모아
봄이 오면 다시 오라 부탁하누나
릴레이로 노래를 부르며 가을의 풍경을 만끽했습니다.
어느덧 선두는 김유신 장군묘에 도착했습니다. 태종무열왕릉에서 김유신장군묘까지 걸어서 1시간 15분이 걸렸습니다. 진행 스테프들이 반갑게 행복시민들을 맞이해 주었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김유신장군묘에 다시 800여 명의 행복시민들이 자리하자 스님이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김춘추는 왕이 되고, 김유신은 대장군이 되어 서로 협력을 해서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춘추의 아들인 문무대왕이 삼국통일을 완성시켰습니다. 그래서 태종무열왕, 김유신, 문무대왕, 이 세 사람을 삼국통일의 영웅이라고 얘기합니다. 중국에서는 무인이 신이 된 사람이 있는데 누구일까요? 바로 관운장입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어디든지 가면 관운장을 모셔놓은 곳이 많습니다. 그것처럼 우리나라에서 신의 경지로 표현이 된 사람이 김유신입니다. 그래서 ‘김유신은 33천의 별자리를 타고났다’, ‘김유신은 신의 보살핌을 받았다’ 하는 얘기가 나오게 됩니다. 또 우리 역사에서 신하로서 왕의 칭호를 받은 유일한 사람이 김유신입니다. 신라에서는 총리를 ‘각간’이라고 합니다. 나중에는 자꾸 지위가 부풀려지게 되어 대각간이라고 불렀어요. 김유신은 그 앞에다 ‘태’ 자를 붙여 태대각간이라고 불렀습니다. 김유신이 죽은 뒤 신라 후대에 가서는 더욱더 추대가 되어서 ‘무를 일으킨 왕이다’라고 해서 흥무대왕의 칭호를 붙였습니다. 그래서 무덤 옆에 있는 이 비석은 태대각간의 비석이고, 저 건너편 비석은 흥무대왕의 비석입니다.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해서 백제를 멸망시킬 때 김유신과 계백은 황산벌에서 대전투를 벌였습니다. 신라는 백제를 멸망시켰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당나라가 직접 백제 땅을 통치했기 때문입니다. 또 고구려가 멸망하자 그 땅도 안동도호부를 설치해서 당나라가 관리했습니다. 그러자 김유신 등 강경파가 결국 당나라 군대를 선제공격하게 되면서 나당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나당 연합이 나당 전쟁으로 바뀌게 되었고, 이 전쟁이 8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김유신은 처음에 나당 연합군을 형성하기도 했지만, 신라의 자주권이 위협을 받자 당나라와도 전쟁을 벌인 결단력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한류 열풍처럼 빛났던 신라의 문화
우리는 오늘 태종무열왕릉에서 김유신 장군 묘까지 걸어오면서 신라가 어떻게 나라를 부흥시키고 통일의 대업을 이루어서 결국은 동아시아의 중심국가로 일어설 수 있었느냐는 것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신라의 영토는 작았지만 문명은 아주 뛰어났습니다. 요즘 한류와 거의 비슷했습니다. 당시 신라는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국가였지만 신라의 문화가 워낙 발달해서 당나라 안에서 신라 문화가 유행했다고 해요. 그것을 ‘신라방’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미국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동시에 한류라고 하는 문화가 다시 미국으로 역수출이 되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요.”
이어서 스님은 김유신 장군의 업적과 후대의 평가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설명을 마치고 앉은자리에서 다 함께 행복학교 구호를 외치며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다 함께 행복하자! 다 함께 행복하자! 다 함께 행복하자!”
김유신장군묘를 출발하여 흥무공원으로 향했습니다. 흥무공원에 도착해 지역별로 모둠별로 삼삼오오 모여서 돗자리를 펴고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각자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을 서로 나눠먹으며 즐거운 점심시간을 보냈습니다.
스님도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한 후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겼다고 하는 낭산으로 향했습니다.
낭산 아래 사천왕사가 있던 터에 800여 명이 다시 모였습니다. 지금은 공터지만 절과 탑을 세웠던 흔적들은 일부 복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천왕사는 당나라의 20만 대군이 신라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막기 위해 정성을 기울여 기도를 했던 곳입니다. 스님은 신라가 어떻게 당나라를 물리쳤는지 재미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결국 신라는 당나라 군대를 공격하게 되고, 나당 간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당나라는 화가 나서 신라왕을 갈아치워 버렸어요. 문무대왕을 부정하고 문무대왕 동생인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임명해 신라 공격을 명령했습니다. 그렇게 20만 대군을 신라에 파병해서 신라를 정벌하려고 했습니다. 신라 안에서는 조정의 의견이 분분했어요. 항복하자, 싸우자 이렇게 의견이 분분했는데 문무대왕이 결국 끝까지 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신라의 군사력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싸움이었어요. 그래서 어떤 스님이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이길 수가 없다. 신들의 힘을 빌려야 된다’라고 말했어요. 당시에 신라는 불교를 믿었기 때문에 인도의 제석천, 사왕천, 그리고 팔부 신장, 이런 신들의 힘을 빌리고자 했습니다.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세운 호국 사찰
역사적으로 신라에는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전통적으로 일곱 군데의 성지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여기가 한 군데인데 바로 신유림이에요. 신유림은 ‘신들이 유희를 한다’ 하는 의미를 가진 성스러운 곳입니다. 이곳에 사찰을 지어 밀교 계통의 비법인 문두루 비법을 행하면 당나라 군대를 물리칠 수가 있다고 해서 문무대왕은 이곳에다가 문두루 비법을 행하는 절을 짓기를 명령했습니다. 이런 절을 호국사찰이라고 해요. 종교활동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절입니다. 불법을 전파하기 위한 절이 아니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절을 세운 겁니다. 그런데 절도 짓기 전에 벌써 당나라 군대가 출발을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급하게 짚으로 신상을 마련하고 비단으로 둘러 임시로 절을 지었습니다.
이렇게 절을 지은 뒤 유가승 12명이 모여서 문두루 비법을 행했더니 갑자기 서해 바다에 폭풍이 일어나서 당나라 20만 군대가 모두 바다에 수장이 돼버렸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아무튼 삼국유사에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제가 만든 얘기는 아니고요.
그리고 두 번째 침공했을 때 또 문두루 비법을 행했더니 다시 또 폭풍이 일어난 거예요. 한 번만 그랬으면 이상하다고 하지만 두 번 연달아 일어나면 신비주의가 발동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확실하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신라는 당나라의 침공을 막아냈습니다. 태풍이 일어나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은데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요.
이곳에서 우리가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는 혹시라도 남북통일을 이뤄가는 과정에서 일본, 미국, 중국 등 외세의 개입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몇 년 전에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면서 문두루 비법을 재현해서 이곳에서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정토회에서는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여기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스님을 따라 12명의 유가승이 문두루비법을 행했던 터를 둘러본 후 사천왕사지를 나와 산길을 걸어 선덕여왕릉에 도착했습니다. 시원한 숲길에서 산 바람을 맞으니 기분도 상쾌했습니다.
선덕여왕릉에 모두가 모여 앉는 동안 스님은 노래를 한번 불러보라고 제안했습니다. 몇 사람이 손을 번쩍 들고 신나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흥겨운 노래자랑을 뒤로하고 다시 스님이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저희들이 모인 이곳은 신라 제27대 선덕여왕릉입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이 왕위를 계승하신 분입니다. 선덕여왕 때의 치적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첨성대도 선덕여왕 때 만들어졌고, 분황사도 선덕여왕 때 지어진 절입니다. 선덕여왕 때 황룡사 9층탑을 세웠습니다. 여성이 왕위에 오르니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여자를 무시하고 깔보는 게 있어서 이웃 나라들이 자꾸 침공을 해요. 당나라 태종도 '너희 나라는 어떻게 왕이 될 남자도 하나 없나? 우리가 왕족 한 명 보내줄까?' 이렇게까지 놀렸다고 합니다. 그러다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나라가 늘 외세의 침공을 받고 어지러우니까 나라를 지킬 수 있도록 기도를 했다고 해요. 그때 어떤 신승이 나타나서 자장율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나라는 여성이 왕이 됐는데 지혜롭긴 하지만 여자라서 위엄이 없다. 그래서 각국이 함부로 침공을 한다. 그러니 황룡사에 9층탑을 높게 쌓아서 나라의 위엄을 보여야 한다’.
원래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게 탑임에도 불구하고 황룡사 9층탑도 사실은 국가를 위한 불사였습니다. 1층은 일본을 막기를 발원하고, 2층은 중국을 막기를 발원하고, 이런 식으로 해서 9층까지 쌓아 올려서 주변의 외적을 막기를 발원했어요. 그리고 삼한일통을 염원했습니다. 삼한이란 고구려, 백제, 신라를 말하는데, 그전에는 마한, 진한, 변한을 뜻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남북통일’이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쓰는데, 그 당시에는 삼한을 하나로 합친다는 뜻의 ‘삼한일통’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탑을 세우면서 외세의 침공만 막기를 발원하는 건 소극적인 자세잖아요. 보다 적극적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서 삼한일통을 이뤄버리면 항구적 평화가 주어지지 않습니까.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견주어 본다면, 북한의 침공을 막는다는 관점이 아닌 통일을 이룬다는 관점으로 전환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황룡사 9층탑을 세우고 발원 기도를 한 후 30년이 안 돼서 삼국통일이 이루어졌습니다. 한 세대 만에 원이 성취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렵고 암담한 시기일수록 더욱더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이유
우리는 결과만 보고 통일을 했다거나 평화를 이루었다는 얘기를 하는데, 그 결과가 있기까지 항상 원인이 있습니다. 지난 30년의 노력으로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된 것이죠. 더 길게는 150년 전에 신라와 가야가 평화적으로 합병한 그 상승효과로 결국은 신라가 삼국통일의 주역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만 좇아서는 안 됩니다. 항상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적어도 30년 후에는 우리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미래가 나빠질 것이라고 예측이 된다면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30년 후에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기를 원한다면 지금부터 준비해서 그렇게 되도록 하는 것이 지도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지도자들 보면 30년은 고사하고 3년도 못 쳐다보고 눈앞에 보이는 현안에만 급급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당장 망하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국가의 성장동력이 각 부문에서 점점 소진이 돼서 10년만 지나면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그때는 아무리 나서서 애를 써도 막아내기가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시기는 선덕여왕의 리더십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합니다. 자신의 당대에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원을 세우고 활동했던 때의 젊은 인재들이 자신의 사후에 나라의 주역이 되고 통일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김춘추, 김유신, 문무대왕이 삼국통일의 주역이 됐지만, 그 원인을 살펴보면 선덕여왕 때 삼한일통의 원을 세우고 황룡사 9층탑을 건립한 것이, 바로 삼국통일의 결과를 가져오는 중요한 시작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작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지금 암담한 현실만 보고 자꾸 불평불만만 할 게 아니라, 이런 어려울 때일수록 오히려 더 큰 원을 세워야 합니다. 국민 행복을 위해서도 노력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도 노력하는 우리들의 염원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입니다.”
한반도에서는 이미 1400년 전에 여성 리더십이 큰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에 행복시민들 모두가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이어서 그동안 행복시민 활동을 하면서 느꼈던 어려움이나 궁금한 점에 대해 스님과 대화를 나누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양한 질문들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후 마지막으로 스님이 마무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자꾸 각오하고 결심하고 참고 견디면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그러지 말고 그냥 편하게 해 봅니다. ‘행복학교를 저 사람한테 어떻게 소개하지?’ 이러지 말고요. 그냥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고 ‘행복학교 한번 해볼래요?’ 이렇게 얘기하면 됩니다. 본인이 싫다고 하면 ‘알았습니다’ 이러면 되잖아요. 본인이 좋다고 하면 다행이고요. 해보지도 않고 ‘저 사람이 좋아할까, 싫어할까’ 이렇게 고민하는 것은 번뇌만 될 뿐입니다. 그냥 ‘내가 해보니 좋은데 당신도 한번 해보시오’ 이렇게 얘기하면 됩니다. 그러나 강요를 하면 안 돼요. 본인이 좋다고 하면 다행이고, 본인이 싫다고 하면 ‘알았어요. 다음에 봅시다’ 이러면 됩니다. ‘저는 기독교입니다’ 하고 대답하면 ‘행복학교는 기독교나 불교 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이렇게 한마디 해주면 됩니다. 이런 식으로 가볍게 접근하는 방식을 취할 때 삶도 가벼워집니다.
인생을 가볍게 살아보면 어떨까요?
여러분들이 지금 독립운동하는 게 아니잖아요. 무엇 때문에 무거운 마음으로 이런 활동을 합니까. 세상 사람들이 다하는 밥을 하는 것이고, 세상 사람들이 다하는 청소를 하는 것이고, 세상 사람들이 다하는 자녀 양육을 하는 것이고, 세상 사람들이 다하는 직장 일을 하는 거잖아요. 따로 특별히 하는 일이 있어요? 그런데 죽겠다고 맨날 아우성입니다. 그러니 그건 다 심리적인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볍게 하세요. 청소하면 운동이 됩니다. 설거지를 해도 운동이 돼요. 세척기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괜찮아요. 여러분은 밥솥, 청소기, 세척기 전부 다 자동으로 해놓고는 또 실내에서 안 가는 자전거를 타면서 운동을 하고 있잖아요. 뭐 때문에 그래요? 그냥 방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어디 가야 하면 걸어가고, 그러면 저절로 운동이 되잖아요. 자연에 있는 동물들은 자기 먹이를 구하러 뛰어다니면서 운동을 해요? 따로 운동 시간을 가져요? 다람쥐가 헬스장을 다녀요? 그러니 여러분들도 인생을 조금 가볍게 받아들여 보면 좋겠습니다.
부부간에 갈등이 생겼을 때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네가 그럴 수가 있나!’ 이렇게 말하지 마세요. 할 말이 있으면, ‘여보, 좀 봐요’ 이러면서 밥상이나 술상을 차려놓고 대화를 나눠보면 됩니다. ‘내가 말이야, 이러이러한데’ 이렇게요.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내가 힘들다’ 하는 게 아니라 ‘네 말을 듣고 내가 좀 힘든데 나를 좀 도와줘’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야 상대가 협조를 해주게 됩니다. ‘네가 잘못했다’라고 하는데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어요? 본인이 어디에 걸려 넘어져 놓고 ‘법륜스님 때문에 넘어졌다!’라고 하면 기분이 좋겠어요? 자꾸 책임 전가를 하지 말고 ‘당신이 말을 이렇게 하니까 내 마음이 아프다’ 이렇게 설명을 해주어야 합니다. ‘네가 말을 그따위로 하니까!’, ‘네가 말을 안 하니까!’ 이러지 말고요. ‘여보, 당신이 말을 안 하니까 내가 너무 답답해서 죽겠어. 나를 좀 도와줘’ 이렇게 약간 위트 있게 접근을 하는 게 좋습니다. 그러다가 이래도 저래도 안되면 항상 길이 있습니다. 항상 마지막 방법은 ‘안녕히 계세요’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삼십육계라고 하잖아요. 삼십육계를 쓰기 전에는 온갖 방법을 다 해봐야 합니다. 그런데 이걸 왜 자꾸 빨리 쓰려고 해요?
그리고 상대가 화가 나서 '이렇게는 못 산다. 이혼하자' 이렇게 나오면 '그래, 하자' 이러면 안 돼요. 그럴 때는 막 싸우다가도 상대가 ‘이혼하자’ 이러면 무릎을 딱 꿇고 '여보, 이혼만은 안돼' 이렇게 딱 나가줘야 해요. 속으로 이혼을 하고 싶더라도 그렇게 딱 해야 해요. 그렇게 해야 나중에 우위를 점령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자녀들한테도 내가 떳떳할 수 있어요. 부처님처럼 살라는 게 아니라, 자기한테 손해 보는 짓을 그만하라는 겁니다. 머리를 써서 좀 지혜롭게 살라는 얘기입니다. 자기도 괴롭히지 말고, 남도 괴롭히지 말고요.
수많은 사람 중에 그 남자나 그 여자를 괜찮다고 판단해서 골랐잖아요. 물론 고르는 과정에서 좀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괜찮은 것을 골랐기 때문에 너무 한쪽 측면만 보고 팽개치면 안 됩니다. 괜찮은 걸 골랐기 때문에 버리고 나면 반드시 좋은 점이 보인다니까요. 그래서 나중에 후회를 하게 됩니다. 괜찮은 걸 골랐기 때문에 한 번 더 돌려보고 더 써먹을 수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도저히 안 되겠거든 그때 남에게 주라는 말이에요.
자녀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낳아서 키웠는데 나쁜 아이일 리가 없잖아요. 애가 나쁘다고 생각한다면 자기가 자기를 못 믿는 거예요. 무조건 두둔해도 안 되지만요. ‘왜 애가 이런 행동을 하지?’ 하고 잘 살펴보면서 ‘필요한 걸 어떻게 도와줄까?’ 이런 관점으로 아이들을 봐야 합니다. 내 말을 안 듣는다고 무조건 미워하니까 갈등이 자꾸 증폭되는 거예요.
목숨이 살아 있을 때는 사는 것이 쉽습니다. 그러니 죽는 것을 미리 걱정 안 해도 돼요. 나중에 때가 되면 저절로 죽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살 때는 내내 죽겠다고 하고, 죽을 때가 되면 또 살겠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래서 의료비만 많이 들어요. 죽을 때가 되거든 산소호흡기니 뭐니 다 떼어버리고 죽는 것이 좋습니다. 죽을 때가 되면 죽는 게 쉬워요? 사는 게 쉬워요? 죽는 게 쉽습니다. 살 때는 죽는 것보다 사는 게 쉬워요. 쉬운 대로 살자는 겁니다. 이런 관점을 갖고 여러분 모두 나날이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스님이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속에서 오늘날 행복시민의 역할이 무엇인지 가슴에 새겨보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역사기행을 안내해 준 스님에게 모두 큰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역사기행을 모두 마친 후 스님은 곧바로 차를 타고 두북 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오늘은 지난 6개월 동안 리모델링 공사를 진행한 수행자 처소를 오픈하는 날입니다. 동네에 폐가가 되어서 허물어져 가고 있는 집을 개보수하여 수행자들이 수행할 수 있는 공간을 작게 마련했습니다. 근처에 고인돌이 있어서 ‘고인돌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에 개보수 공사를 하느라 수고해 주신 거사님들을 모두 초청하여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오후 5시가 넘어 스님이 고인돌집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이 차에서 내리자 곧바로 삼귀의 반야심경을 하며 고인돌집 오픈식을 시작했습니다.
이어서 리본 커팅식을 하며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모두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리모델링을 하니 새집이 되었네요.”
스님은 거사님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 후 집 안 구석구석을 살펴보았습니다.
“깔끔하게 새 단장을 했네요.”
다음은 지난 6개월 동안 공사를 총괄한 이미은 님이 고인돌집을 오늘 오픈하기까지 경과보고를 해주었습니다.
“5월 20일 본채 정비를 시작으로 배관 작업, 전기 작업, 창문 새시 작업, 내외부 바닥 미장, 단열 작업, 도배, 바닥 난방 작업까지 모든 작업이 정토행자들의 손을 거쳐 8월 6일에 드디어 본채 개보수가 마무리되었습니다. 8월 15일부터는 사랑채 수리를 시작하였고, 기초 철재 작업과 패널 작업, 내부 도배, 바닥 난방까지 완료하여 현재 90퍼센트 이상 공정이 진행된 상태입니다. 10월 1일부터 3일 동안 창고를 개보수하였고, 10월 8일에 마당 전체 콘크리트 타설 작업까지 마친 후 오늘 오픈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작업들을 거사님들이 생업 외에 여유 시간을 내어서 해주었습니다. 거사님들 몇몇 분들의 소감을 들어보았습니다.
“모자이크 붓다가 무엇인지 이번 공사를 하면서 참 많이 느꼈습니다. 거사님들이 전부 십시일반 시간을 내어서 하나씩 작업이 마무리되어 나가는 과정을 보는 것 자체가 감동이었습니다.”
큰 박수로 수고한 거사님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이 거사님들을 위해 한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두북 수련원에 봉사를 하거나 수행을 하러 오는 분들이 점점 많아지니까 수행자들의 처소를 새로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는데, 코로나 팬데믹 이후 건축자재비가 많이 올라서 계속 연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시골마다 빈집이 계속 생겨나니까 그런 빈집을 수리해서 활용하면 되지 않느냐는 제안이 있어서 이렇게 리모델링 공사를 해보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습니다. 처음에는 사랑채만 수리하기로 했는데, 본채도 수리하게 되면서 일이 갑자기 많아졌습니다. 거사님들에게 부담을 준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도 듭니다.
폐가를 이대로 방치하면 정부가 집은 철거해 주고 3년간 공용 주차장으로 사용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올해 안에 정비를 하려고 좀 서두르게 되었습니다. 거사님들의 노고 덕분에 깔끔하게 정비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손으로 만든 집이니까 여러분들이 잘 사용을 해주십시오. 수고하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여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그동안의 노고에 대해 격려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스님은 요즘 부탄에서 하고 있는 마을 개발 사업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부탄에서도 거사님들이 해야 할 일들이 많아요. 집안 수리도 해야 하고, 도로 공사도 해야 하고, 농로도 만들어야 하고, 거사님들이 가면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빨리 은퇴하고 저랑 같이 부탄으로 갑시다.” (웃음)
식사를 마치고 스님은 거사님들 한 분 한 분에게 햅쌀과 장우산, 스님의 책을 선물했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스님에게 받은 선물을 하나씩 손에 들고 기념사진을 찍은 후 저녁 7시가 넘어서 고인돌집 오픈식을 마쳤습니다.
거사님들이 모두 돌아가고 스님은 실내에서 업무를 본 후 하루 일과를 마무리했습니다. 내일은 오전과 저녁에 정토회 발전을 위한 공청회와 정일사 입재식을 겸한 전법회원 법회를 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