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석이 수줍게 웃으며 잠바를 벗었다.
그에 맞춰 짐승같은 인간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그 환호에 답하며 녀석은 티셔츠, 신발, 바지를 차례차례 벗었다. 이제 남은 건 속옷 한 개가 전부.
아슬아슬한 그 모습에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녀석의 손이 마지막 천쪼가리에 닿았다. 그리고, 설마했던 대로 그마저 벗어던진 녀석은 야시럽게 웃으며 음악에 맞춰 천천히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친구 미친놈의 스트립 댄싱쇼가 시작되었다.
# 미친 놈 [짧은 이야기] #
"햐, 오늘은 유난히 별이 많은 것 같지 않냐?"
미친놈은 방금전의 열기는 완전히 가라앉은 얼굴로 하늘을 가리켰다.
"알게 뭐야."
"대체 왜 삐진건데. 이유나 좀 들어보자."
이게 바로 적반하장이란거겠지.
"왜 그런짓을 하는거야? 딴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게 좋아?"
"나 오늘 세아한테 차였다. 그래서 스트레스 좀 풀어본거야."
어버버,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어느 누가 여자친구한테 차였다고 그런짓을 하냐!
내가 이 미친놈을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입학하던 날이었다. 같은 반에다 출석번호도 나란히 였기에 가장 먼저 말을 나눈 사이였던 것이다. 이 때부터 내 인생은 급속도로 꼬이기 시작했다.
같이 복도를 걷고 있던 때였다. 반대편에서 학주가 걸어오고 있었는 데 최근에 지각에 걸려 운동장을 허벌나게 뛰었던 미친 놈은 평소부터 학주에게 꽤나 앙심을 품고 있었다. 어쩐지 조마조마한 기분이 들어서 눈치를 보고 있는 데 아니나 다를까,
"학주쌤! 뻑*!"
그러곤 벙찐 채 얼어있는 날 버리고 도망친 놈 덕에 나만 반성문에, 설교에, 운동장 뺑뺑이까지. 아주 죽을 고생을 했다.
또 어느 날엔 지하철 역 안에서 분명 미리 준비했을 호루라기를 힘껏 불어대며 '불이야'를 외쳐 역내의 모든 사람들을 패닉상태로 몰아넣기도 했다. 정말 환장하겠는 건,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녀석은 사라진 지 오래였단거다.
그래서 본의아니게 공범으로 몰린 난 녀석대신 경찰서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날 여기저기 치이고, 변명조차 하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갈리고, 눈에 불똥이 튄다.
뭣보다 미친 놈이 가장 미칠 때는 그 얄미운 주둥아리에서 '심심하다'라는 불경한 단어가 튀나올때다.
갑자기 운동장으로 뛰어나가 '이 몸이 바로 임금님이다!'를 외치는 건 아주 가벼운 예였고, 옥상에서 번지점프한다고 난리를 쳐대 수위아저씨가 옥상문을 막아두기까지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화려했던 건 역시 작년 일이었다.
미친 놈은 수업 와중에 심심하다는 말을 중얼거리고 그 다음 날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연락을 받은 건 녀석이 병원에 입원한 뒤였다.
지나가던 경찰서 앞에 붙어있는 현상수배범을 발견, 열심히 쫓아다닌 건 좋았는 데 중간에 들켰댄다. 그래서 쇠꼬챙이 들고 설치는 수배범한테 배를 뚫려 과다출혈로 죽기 딱 일보직전에 병원에 실려왔다는 게 녀석의 설명이었다.
황당하지만 어쩐지 안 믿을 수는 없는 그 말에
"왜 경찰에 연락을 안했어!"
라고 윽박질렀지만 돌아오는 답은,
"심심한데 마침 잘 됐다 싶었던거지, 뭐."
그러면서 곧 죽어도 입은 살아갖고, 좀만 더 있으면 잡을 수 있었는 데 따위를 중얼거렸다.
이후로 미친놈은 선생들 사이에서도 미친놈으로 통했으며 우리학교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언제 어떤식의 행동을 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으며, 그 누구도 이 미친놈을 말리지 못했다. 하지만 우수한 성적, 사교적인 성격, 훌륭한 교우관계탓인지 다들 녀석을 열렬히 지지했을 뿐 딱히 뒤돌아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동경하는 멍청이들만 늘어갔을 뿐이다.
그런 와중에 김세아라는 이쁘장하게 생긴 여자애가 미친놈에게 사귀자며 고백을 해왔다. 내가 보기엔 그 여자애도 제정신은 아니었던거라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고야 미친놈과 사귈 생각을 어찌 한단 말인가. 뭣보다 어딜봐도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내가 바로 옆에 딱 붙어있었는데! 정말 여자들의 취향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거절하리라 생각했던 미친놈은 그 다음날부터 자랑스레 등하교를 여친과 함께했다. 놀랍게도 미친놈이 점차 안정되더니 어제까지는 보통의 평범한 녀석이 되었던 것이다. 친구로서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딨겠는가마는, 결국 오늘 미친놈이 부활해버렸다.
"어딘가에서 우리 형도 저 별을 보고 있을까."
녀석의 중얼거림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런데 형이라니. 내가알기로는 녀석은 외동아들이었는데.
"너한테 형도 있었어?"
놀라움에 녀석에게 물음을 던지니, 녀석의 얼굴에 생소한 표정이 떠오른다. 지독하게 씁쓸한, 그리고 쓸쓸한.
"예전에 울 아부지가 한참 어린 여자랑 바람을 피웠던 적이 있거든. 집이 아주 발칵 뒤집어졌었어. 엄마는 냉큼 서류 준비해서 당장 이혼하자고 난리였고, 아부지는 위자료 줄 돈 없다고 이혼 못해준다고 난리였지. 근데 더 난리였던 건, 아부지 애인이랑 우리 형이랑 사귀고 있었던거야. 난 울 아부지가 졸도하는 걸 그 날 첨 봤어."
"그래서 어떻게 됐어?"
"흠, 형은 절연당했고, 아부지랑 엄마는 시침 뚝 떼고 잘 먹고 잘 살고 있지."
이 놈의 정신세계가 엉킨 건 아무래도 그 때일이 충격이 됐으리라 혼자 조심히 추측해봤다.
"난 형 엄청 좋아했어. 어릴 때부터 같이 슈퍼맨 놀이도 하고, 스파이더맨 놀이도 하고, 배트맨 놀이도 하고."
...취소다. 이 놈은 어릴 때부터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랑 놀아주는 건 형밖에 없었거든. 근데 이렇게 될지 누가 알았겠냐고."
그리고 녀석은 입을 다물었다. 한 동안 서로 침묵을 지키며 걷다가 공원에 도착했다.
"근데 세아랑은 왜 헤어진거야?"
계속 묻고 싶었던 거다. 그렇게 잘 지내놓고 왜 헤어진 거니?
"도저히 나같은 외계인이랑은 더는 못 사귄대. 근데 거기서 뭐라고 해. 아, 그래. 미안했다. 잘 먹고 잘 살아라, 이랬지 뭐."
녀석에겐 미안하지만 어쩐지 납득이 되는 이유였다.
"너도 내가 외계인으로 보이냐? 내가 하늘에 떠 있는 저 별들 중 하나에서 온 거 같아?"
"지구인으로는 안 보이긴 해."
솔직한 심정을 얘기했다. 난 절대 이 미친놈을 나와 같은 지구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
"지구는 자전을 하고 있어."
갑자기 뜬금없는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 속에서 사는 우리도 함께 돌고 있지. 그래서 우리가 지금 돌고 있는 지 서있는지도 몰라. 그리고 세상도 돌고있지. 아주 확실하게 돌아버렸어. 하지만 사람들도 함께 돌아버리고 있어. 그러니까 자기들이 미쳐가고 있단 걸 잘 몰라. 그래서 난 일부러 흐름을 벗어났어. 처음엔 가만히 정지해 있었어. 그랬더니 다들 나보고 지진아래. 왜 공부도 못하고, 운동도 못하냐고 구박해댔어. 그래서 결심한거야. 어차피 다들 돌아버렸으니까 난 더 돌아버리겠다고. 그랬더니,"
"그랬더니?"
아차, 녀석의 이야기에 휘말렸다.
"킥. 세상이 너무 즐겁더라. 다 이뻐보이고, 다 재밌어. 하지만 가끔은 지루해지기도 해. 그러면 새로운 재미난 걸 찾고, 때때로 안 좋은 일을 겪기도 하지만 어쨌든 재밌으니까 그거면 됐어."
녀석이 작년에 칼침 맞은 자국을 슬슬 문지르며 음흉하게 웃었다.
분명 제정신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가기는 너무 험난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들 서로 눈치를 봐가며 조금씩 조금씩 서로에게 맞춰 미쳐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도 때로는 내 친구 미친놈이 부러울 때가 있다. 생각하는 건 그 자리에서 주저없이 하고, 절대 후회하지 않고, 모든 일에 자신만만하며, 마냥 매일매일이 즐겁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하지만, 오늘의 스트립 댄싱쇼는 너무 심했다고 생각해, 미친놈아. 내 정신적 피해보상은 두고두고 받아낼테니 제대로 각오해둬.
첫댓글 어머,제목보고 놀랐었지만;;저 미친분[-_-;;]사람들이 해보고 싶을만한 짓을 해보는군요^-^ㅋㅋ
궁금한거 있는데요.... 혹시 장편소설쓰실생각은 없으신지...
없습니다.
스트립쇼 쪼아 [<-] 왠지 사람들이 왜 담배를 피고 술을 마시는지 이해가 가네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