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슬산 대견사에 오르다
몇 년 전 쯤이었는지 기억에도 흐릿한 아주 오래 전이다. 하여간에 젊은 날이었다. 교실의 동문들이 산행 모임을 만들어서 산에 다녔다. 참꽃이 만개하면 온산을 뒤덮는 꽃밭이 일품이라는 비슬산에 올랐다. 청도 각북면의 용천사에서 출발하여 대견사가 있는 곳까지가 그날의 산행 길이었다.
해발 1000미터 쯤인 가파른 산길을 힘들게 걸어서 능선에 오르니 눈앞에 펼쳐진 참꽃 밭이 겹겹이 쌓어 있던 피로를 싹 가시게 했다. 참꽃 밭을 지나면 대견사 터가 있었다. 길도 완만하여 꽃을 즐기면서 쉬엄쉬엄 걸어갔던 기억이 생생하여, 집사람 더러 이번 주에는 비슬산 대견사를 다녀오자고 했다. 덧붙여서 참꽃밭의 장관을 말해주었다.
나는 비슬산 대견사라고 하면 또 다른 기억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절집 답사팀과 방문이 아니었나 싶지만, 역시 너무 오래된 일이어서 누구와, 언제 갔는지조차 삼삼하다. 그러나 바위 절벽 위에 있는 석탑은 기억에서 생생하다. 탑이 있는 바위 아래는 수십 길의 낭떠러지이다. 저 멀리로는 현풍읍의 아파트들이 햇볕 속에서 성냥곽마냥 윤곽을 드러내고, 절벽 위의 탑은 하늘을 배경으로 신비하고, 신성한 느낌을 일으켜 주었다.
탑의 앞은 넓은 빈 터였다. 이곳에는 예전에 절집이 있었고, 대견사라고 했단다. 내가 갔을 때는 빈터만이 횡댕그레 했고, 뒤편에는 병풍처럼 바위 절벽이 둘러쌌다. 그 바위 절벽에 굴이 있었다. 판자에 거적을 붙인 듯한 문이 있었다. 도를 닫는 사람이 저 굴에서 지낸다고 했다.
스님은 아닌 듯했다. 스님은 흔히 수련한다고 한다. 도를 닦는다고 하면 토속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아마도 대신동 큰 시장의 뒷골목에 있는 용하다는 총각도사가 바로 이렇게 도를 닦지 않았나 싶다. ‘어느 산의 굴에서 10년 동안 도를 닦은 도사’라는 말은 서민들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말이다. 그만큼 우리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말이다.
산과 바위와 탑, 김시습이 경주 남산의 용장사에 머물면서 금오신화를 썼다. 지금은 절터로만 남아 있다. 그 뒤의 바위 위에 세운 탑이 대견사터 탑과 닮았다. 탑의 기단을 따로 만들지 않고 산의 바위를 기단으로 하여 쌓은 탑이다. 자연의, 산의, 바위의, 그리고 탑의 신령한 힘이 하나로 묶여 있다. 그 탑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두손을 모우고 머리를 숙여 소망을 빌었다. 나는 이곳의 빈터가 예전의 대견사라는 절의 터라기보다는 비슬산 아래 마을 사람들을 지켜주고,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토속신앙의 기도처라는 생각이다.
지금은 조계종에서 사찰 건물을 지어 대견사를 중건했다. 주불전의 현판이 대견(大見)보궁이다. 절집에 이런 이름으로 현판을 단 것은 처음 보았다. 불교 조계종에서 2012년에 동화사 말사로 개창공사를 했다고 하니, 내가 이곳을 다년 간 일은 그 이전이었었나 보다.
이 절은 창건설화도, 창건자의 이름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만큼 절로서의 위상은 낮다는 것일 게다. 전하기로는 신라 흥덕왕 때(800년 대)라고 하나, 그 이외의 역사적 사실은 전해오는 것이 없다. 세월을 껑충 뛰어서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이 절에서 20여년을 머물렀다고 하나, 무슨 근거인지는 모르겠다. 바로 이웃해 있는 유가사에서 일연이 머문 흔적이 있으니, 아마도 유가사에 주재하신 것이 맞을 듯하다. 탑의 모양이 고려탑 양식이고, 전해오는 이런저런 말들을 종합해보면 고려시대에 창건한 절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대구 근교인 팔공산과 비슬산의 사찰을 다녀보면, 팔공산은 거의가 원효대사의 전설이 스며 있다. 비슬산은 골골마다. 절마다 일연스님이 머문 곳이라고 한다. 아마도 태어나신 곳이라든지, 그 어떤 연고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조선시대인 태종 16년과 세종 5년에 이 절이 장육관음상이 땀을 흘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관음보살도 민초들이 가장 사랑한 보살님이다. 고승이 주재한 불교적 신앙지라기보다는 절 아래 마을 사람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마음을 달래주던 토속신앙의 기도처가 아니었을까 싶다.
조선시대에 폐사가 되었다. 빈대가 많아서 스님이 떠나버려 폐사가 되었다는 것은 조선의 관에서 그만큼 핍박이 심해서 스님이 도망갔다는 것이 진실이다. 광해군과 인조 때 절을 재건했다는 말도 전해오나,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900년에 영친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서 이재민이 절을 중창했으나 일제 강점기인 1917년에 일본에 해롭다 하여 폐사가 되었다. 아마도 이것은 맞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절이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아래 마을 사람들이 수 백 년, 아니 수 천 년을 지켜온 신성한 기도처라는 것이다.
지금은 달성군이 관광사업으로 이 절과 산을 치장하고 꾸며서 사람을 불러 모은다. 오늘도 이곳은 시골의 5일 장날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관광지라고 모여들었을까. 아니라고 본다. 탑에게, 바위에 손을 모아 기도하려는 마음 때문이리라.
지난 주말에 여주의 신륵사에 들리니 길가의 잔달래가 활짝 피어 있었다. 비슬산의 참꽃 밭이 생각나서, 집사람 더러 다음 주말에는 비슬산 대견사에 가자고 했다. 산 꼭대기이니까 다음 주말 쯤이면 만개하리는 계산을 했다. 그래서 오늘 찾았던 것이다.
지하철 1호선의 종점인 설화-명곡 역에 내렸다. 여기서 600번 버스를 타면 비슬산 휴양림 정류소까지 데려다 준다며, 할머니 한 분이 손짓을 하며 친절하게 버스 정류장을 아르켜 주었다. 우리는 인터넷에서 얻은 지식으로 현풍까지 버스로 가서 택시를 타려 했는데, 고마웠다. 600번 버스는 봄맞이 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송해 공원을 지났고, 용연사도 거치면서 달성군의 구석구석을 누볐다. 이름도 모르는 시골 마을은 꽃으로 덮여 있고, 산자락은 싹이 막 돋아나는 나무로 연한 초록과 갈색이 뒤엉켜 봄의 향취를 뿜어낸다. 비슬산 휴양림 정류소에 닿는데 한 시간도 더 걸렸다. 여기서 비슬산 꼭대기에 있는 대견사까지 데려다 주는 셔틀 버스와 전기차가 있었다. 한 시간을 또 기다렸다.
가파른 길을 오르는 버스의 차창너머로 아직은 여름 옷을 입지 못한 숲의 바닥에 강렬한 노란 색의 작은 꽃이 떼지어 피어서 눈길을 끈다. 꽃들도 저마다 자연 속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 절벽의 바위 위에 서 있는 석탑은 신령한 힘을 내뿜고 있어, 옛 모습 그대로이다. 탑 앞의 빈터에는 절집이 자리 잡았고, 주불전은 대견보궁(大見)이란 현판을 달고 있다. 주불전이 처음 보는 이름이라 낯설다. 설명을 보니 크게 보고, 크게 느끼고, 크게 깨우친다. 라는 뜻이란다. 글쎄다. 이곳을 찾는 수많은 민초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요구인 듯하다 예전의 바위굴은 열려 있다. 기도처로 절집이 들어섰으니 이제는 굴의 의미가 없어져서 일까.
집사람에게 대견사에 가자고 한 이유라면 비슬산에 참꽃이 확짝 피어서 이루는 꽃밭의 장관을 보기 위함이었다. 절 뒤의 능선을 오르면 참꽃 밭이 펼쳐진다. 용천사 쪽에서 올라오는 길이 있는 저쪽 능선까지 꽃의 바다를 이룬다.
아뿔사, 아직은 봉우리만 맺고 있을 뿐 꽃은 피지 않았다. 산의 꼭대기는 해발 1000미터 쯤이라니, 산 아래 보다는 늦게 피는 것을 계산할 줄 몰랐다. 그냥 내려오기는 미련이 남아서, 참꽃나무 군락지를 지나 저쪽 산 능선까지 다녀오기로 했다. 산 아래에 가면 또 600번 버스를 타야 하니, 걷기를 할 수 없다면서 운동삼아 갔다 오기로 했다. 산길이지만 경사가 심하지 않아서 힘들지는 않았다. 한 시간 쯤 소요되었다. 젊은이들이야 삼십 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셔틀 버스를 타고 휴양림 정류소에 왔다. 600번 버스를 기다리는 분이 여럿이었다. 차가 오지 않아서 관광안내소에 문의하니 정기적이지 않으므로 오지 않을 때가 많다고 하였다. 다른 분들은 콜 택시를 불렀다. 우리 부부는 현풍까지 걷기로 했다. 절집을 찾아다니면서 걷기에 자신감이 조금 생겼다. 산 아래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아파트 촌을 목표로 계속하여 걸었다. 한 시간은 훌쩍 넘었고, 아파트가 멀지 않는 곳까지 왔다. 집사람과 여기까지 왔으니 이왕이면 현풍읍내에 들려 할매 곰탕으로 저녁을 먹자고 했다. 길가는 사람에게 할매 곰탕집 가는 길을 물었는데, 할매 곰탕집요? 이 길 따라 조금만 더 가면 박근혜 대통령 사저인데요. 한다. 그럼 여기가 유가면입니까? 유가면 상계리라고 했다.
오늘은 계획에 없었는데, 길을 몰랐던 탓에 박근혜 대통령의 사저 앞은 지나쳤다. 지난번과 달리 집 앞의 빈터는 말할 것도 없고, 길을 따라 저 멀리까지 화환의 숲을 이루고 있다. 탄핵을 떠나 박대통령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이제 어둠이 찾아온다. 할매 곰탕으로 저녁 요기를 하려던 것을 포기하고 급행 80번 버스를 탔다. 급행답게 15분도 걸리지 않아서 지하철 1호선 진천역까지 데려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