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3일 사랑하나?
신앙은 개인적이다. 공동체로 그 신앙을 표현할 때 참으로 아름답고 강해 보이지만, 실제 생활하는 삶의 자리는 개인적인 곳이다. 그래서 미사 성찬례 끝에 파견한다고 선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함께 살던 이들, 신앙의 형제자매들, 심지어 사랑하는 이들도 내가 하느님 앞에 갈 때는 함께 가지 못한다. 거기서는 나와 하느님 단 둘뿐이다. 물론 공심판(公審判), 최후의 심판 때에는 ‘진리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각 사람이 하느님과 맺은 관계의 진상이 결정적으로 밝혀질 것이다. 최후의 심판 때에 각 사람이 지상 생활 동안 선을 행하였거나 이를 소홀히 한 일의 궁극적 결과까지도 드러날 것이다.’(가톨릭 교리서 1039)
공동체 안에 있을 때는 자기 신앙이 얼마나 굳고, 깊고, 순수한지 모를 수 있다. 분위기에 휩쓸려 또는 잘 모르면서 남들이 ‘아멘!’하니 자기도 그런 줄 알고 그들을 따라 한다. 게다가 교회는 죄인들이 모인 곳이니 교우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다 보면 신앙의 가르침보다는 저절로 세속적 가치를 따르게 되곤 한다. 신앙보다는 세속이 더 가깝고 익숙하니까.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고 신앙이 자라는 게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니라 나를 부르시고 나와 만나시며 나에게 직접적으로 당신 말씀과 사랑을 전하신다.
예수님은 사람을 치료하거나 퇴마하실 때도 그에게 직접 말씀하시거나 그를 군중에서 따로 불러내 단둘이만 만나곤 하셨다. 그에게 신앙 고백을 요구하셨다. ‘너는 나를 믿느냐?’ 제자들에게도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얘기들 하냐고 물으신 뒤에, 제자들에게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했다.(마르 8,29) 또 부활하신 뒤에 베드로를 다시 만나셨을 때는 더 직접적으로, 그가 무안해할 정도로 이렇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이에 베드로는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했다.(요한 21,15) 오늘 복음에서는 베드로가 그 제자의 미래를 물으니 다시 그를 무안하게 만드셨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그러면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와 네가 무슨 상관이냐?’ 나는 예수님의 이 개인적이고 직설적인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아니 계속 대답해 가야 한다고 해야 옳겠다. 내 신앙은 더 굳고, 깊고, 순수해져야 할 테니까. 영성 생활의 큰 스승인 아빌라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과 깊은 친밀감, 하느님과 하나 됨을 체험하면서 주님을 사랑한 것 외에 다른 거는 아무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다. 이와 비슷한 다른 성인들의 체험이나 일화를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성녀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보다 하느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 견딜 수 없다. 그것은 일종의 거룩한 질투다. 내가 그 사람보다 하느님을 덜 사랑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니 나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 무엇, 그 누구보다, 세상 모든 것에 앞서서 그리고 오직 하느님만 사랑해야 한다. 사실 하느님은 그보다 나를 더 사랑하신다. 이웃사랑은 그 사랑의 표현이다.
예수님, 오늘도 제 믿음과 사랑이 한 뼘 더 자라기를 원합니다. 하느님만 사랑함이 이웃과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이웃을 더 그리고 잘 사랑하게 합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제 믿음과 사랑이 더 순수해지게 도와주소서. 아멘.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