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절반은 어머니 것이다
시골집에 다녀왔다.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그곳, 50년은 족히 넘었을 그 낡은 집을 다시 다녀왔다. 저 멀리 시골집이 눈에 들어오자 아직도 가슴이 설레었다. 마당 한편의 텃밭에서는 상추와 쑥갓이 평화롭게 자라고 있었다.
어머니는 양철 지붕의 그 집을 떠나지 않고 계신다. 올해 91세.
부쩍 관절이 불편하여 오래 서 있지는 못하지만 고령이 나이와 견주면 정정하시다. 지금껏 그 집을 찾는 것은 오로지 노모 때문이다. 만약 어머니의 부재 시절이 온 다면 아주 갈 일이 없을테다.
출가 후, 오랫동안 시골집을 찾지 않았다. 풋내기 햇중 시절에는 속가를 찾아가는 것은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일종의 금지 구역으로 여겼었다. 수행이 무르익지 않았을 때 세속과의 잦은 왕래는 그 결심을 흔들리게 할 수 있는 까닭이다. 실제로 내 주변에는 초심 시절에 집안 왕래를 하다가 환속하게 된 도반이 많다.
그러나 출가인의 금족은 어디까지나 집착과 인정을 경계하기 위한 수단일 뿐 목적은 아니다. 세속에 출입하여도 시류에 물들거나 탐착하지 않을 수 있다면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다. 이른바 고기를 잡은 후에는 통발을 버리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수행자라고 해서 무조건 부모님을 외면한다면 이는 강을 건넌 뒤에 뗏목을 어깨에 짊어지고 다니는 어리석음과 같을 것이다.
나는 출가 10년을 넘긴 후에야 그 경계에서 자유로워졌다. 사실 출가한 입장에서는 가족은 방해되는 인연이라고 생각할 테지만, 가족의 입장에서는 부모 봉양의 책임을 회피하는 선택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화해한다는 것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조화로운 인연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쯤에서는 출가자로서 가족들을 만나고 소통할 수 있어야 옳다.
5년 전 이맘때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내가 살고 있던 절에서 며칠 지냈다. 그때 모친은 순진한 아이처럼 밝게 웃으셨다. 그해 봄에 어머니를 모시고 제주도 여행을 하고 왔다. 이 일은 아주 오래전부처 마음먹은 일이라서 무슨 숙제라도 마친 것처럼 마음이 가볍다. 기나긴 모정의 세월을 짧은 나들이로 보상할 수는 없지만 손을 잡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고 싶었다. 그즈음 어머니는 막내아들의 청을 받아들여 평생 고집해 오시던 쪽머리의 비녀를 빼고 긴 머리를 잘랐다. 다른 할머니들처럼 뽀글뽀글 파마를 하시고는 또 아이처럼 웃으셨다. 어색한 단발을 좋아하지 않을 성격이지만 출가한 아들의 관심이 고마워서 덥석 머리는 자르는데 동의하셨을 것이다. 어머니 마음은 그렇다.
내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을 떠올려 본다. 그때는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였다. 어쩐 일인지 어머니가 그리워서 마지막 버스를 타고 시골집을 찾아갔던 적이 있다. 날이 저문 시각에 손전등도 없이 10리 길을 걸어서 마을 어귀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온통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그때 내 무서움을 위로해 준 것은 저 멀리 보이는 시골집의 불빛이었다. 어머니가 불을 밝히고 계시다는 그 자체가 이미 수호자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대문에 이르렀을 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와서 그랬던 걸까, 아니면 낯선 객지 생활에 대한 설움 때문에 그랬던 걸까. 와륵 문을 열고 나오는 어머니를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눈물을 서럽게 쏟아 내었다. 달려나온 어머니는 나를 말없이 다독이며 안아 주었다. 어머니의 품에서는 방문의 목적이 궁금하기보다는 밤길을 걸어온 자식에 대한 걱정이 먼저 묻어났다.
다음날은 어머니와 함께 있었고 학교는 결석, 그렇지만 어머니는 혼내거나 따지지 않고 끼니때마다 정성스럽게 밥상을 차려 주었다. 누나 경험했겠지만 객지 생활이 밥을 굶어서 배가 고프겠는가. 때로는 어머니의 따스한 정이 그리워 허기질 때가 있는 법이다. 그 시절에는 내가 그랬던가 보다. 어머니의 그 말 없는 사랑과 손길은 그 어떤 약초보다 뛰어난 보약이었다고 믿는다. 그 후로는 학업 중에 어머니를 불쑥 찾아가거나 걱정을 끼친 일은 없었다.
어머니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 힘이며 신앙이다. 옛말에 “벼는 주인 발소리를 들으며 자라고 자식은 부모의 치성으로 자란다.”고 했다. 이 세상이 아무리 각박할지라도 모성적인 사랑이 우리들을 구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내 인생의 절반은 어머니의 정성과 염려 덕분이다.
충북 청주의 공찰 주지 소임을 마치고 나면 고향 근처의 절에서 어머니를 모실 것을 약속했는데 그 인연도 주어지지 않았다. 청주 인근의 사찰로 거처를 옮긴 후 어머니가 초파일에 오셔서 하룻밤을 머무셨는데 시골집보다 불편하다고 하셨다. 그나마 큰형님 내외와 함께 지내고 계셔서 마음이 놓이긴 하지만 어머니를 생각하면 이래저래 송구한 마음만 앞선다. 천세를 더해 만세를 사신다 해도 자식의 마음은 부족하다.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기원한다.
출처 : 현진 스님 / 산 아래 작은 암자에는 작은 스님이 산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