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검침원
- 김윤배
그는 거침없이 들어와
전기계량기 부스를 열고 소비전력을 읽는다
내가 써버린 시간들, 써버린 소리들, 써버린 영혼들
써버린 강철근육을 그가 다 읽는 것이다
그는 계량기에서 읽어낸 숫자를 기록하는 것으로
늑탈이 끝난 것은 아니다
그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내 몸의 수많은 감시카메라 렌즈가 파괴되었다
강의 발원지는 말라버리고 봉인된 기록은 소멸되었다
내 몸의 지층은 연대기가 사라지고
몸의 지형을 감싸고 있던
부드러운 어둠이 빠져나가는 것이다
이제는
어둠 깃들지 못할 나의 대지, 퇴화의 순명 앞에 놓인다
―시집『바람의 등을 보았다』(창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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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는다는 것은 공유할 수 있는 기억들이 많다는 뜻임을 알았습니다
안동교육대학 영주동창회에서 만난, 선후배들에게서 지나간 교직 40년을 보았습니다
내 나이보다 많은 역사 속에 만여 명 졸업생을 배출한 학교를 추억하는 일에
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인연들이 나를 검침했습니다
사용량이 얼마나 많았던지... 인제 퇴화의 순명만 남았습니다
대선배께서는 사는 날까지 보람과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그저 건강하자고 당부하셨습니다
경품으로 압력밥솥 하나 받아들고 돌아오는 길이 흔들렸습니다
등줄기로 땀이 흘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