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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孫文, 1866년~1925년)
쑨원은 정심(正心), 성의껏 모두 앞에서 선서한다. 지금부터 구(舊)를 없애고 신(新)으로 바꾸고 자립하여 국민이 된다. 성의를 다하고 전력을 당하여 중화민국을 옹호하고, 삼민주의(三民主義, 민족주의, 민생주의, 민권주의)를 실행하고, 오권헌법(五權憲法)을 채용한다. 정치를 공명하게 하며, 인민을 안락하게 하고, 국가의 기초를 영원히 강고하게 하며, 세계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1919년(민국 8년) 1월 12일, 중화혁명당 모임에서.
청나라의 정치사상가 겸 의사이자 중화민국의 국부. 중화민국의 초대 임시 대총통을 지냈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진시황 이래 2천 년간 이어져 온 천자 제도를 최초로 전복시킨 혁명의 선행자(先行者)로서 존경받고 있다. 객가인(客家人)으로 알려져 있고, 광둥성 중산시(中山市) 출생이기 때문에, 흔히 생각하는 표준중국어를 쓰던 사람은 아니고, 홍콩 영화에 자주 나온 광동어 구사자였다. 소위 삼민주의로 통칭되는 현대 중국의 이념적 뼈대를 세운 사람으로, 작금의 중화권에서 여러모로 가장 중요하게 취급받는 근현대 시기 인물 중 한 명이다.
본명은 쑨더밍(광동어로는 Syūn Dāk-mìhng)인데 이후 스스로 문(文)이라 이름을 바꿨다. 공자가 존경한 고대 문명국 주나라의 초대 왕이 무왕(武王)이고 그의 아버지가 문왕(文王)이며, 중국은 옛날부터 암암리 중국문화의 계통을 상징적으로 문왕 -》 주공 -》 공자로 이어진다 생각하였다. 문(文)이란 글자는 아무한테나 올리지 않는, 중국에서 최고의 시호였다. 따라서 이름을 문으로 바꿨을 때부터 자신이 새로운 공화국 문명의 시조가 되겠다는 남다른 포부를 가진 것으로 추측된다.
관화 병음으로는 쑨원(Sūn Wén), 쑨원의 모어인 광동어로는 ‘쉰만’ 호(號)는 중산으로 일본에 있을 때 사용한 가명인 나카야마(中山)에서 유래하였다. 그리고 광둥성의 중산시는 여기서 따서 붙인 지명이다.
1866년 빈곤한 농가에서 5남 3녀 중 쑨다청(손달성,孫達成)의 다섯째로 태어난 쑨원은 6세 때부터 소작농이던 부친을 돕던 빈곤한 삶을 살았다. 부친이 1812년 출생. 연령차이로 보면 예나 지금이나 엄청 늦둥이다.
그러다가 9세가 되던 해 동네 서당에 들어가 전통적인 교육을 받던 도중 1879년 장남 쑨메이(孫眉, 손미, 1854년~1915년)가 거주하던 하와이로 건너간다. 하와이에서 영국 성공회 미션스쿨인 이올라니 학교(Iolani School, 지금도 하와이의 명문학교)에서 서구식 교육을 받게 되지만 하와이 원주민 출신 아이들과 싸우고 중국 전통 문장을 낭독하는 등의 생활로 적응을 잘 하지 못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쑨원은 서구 문물에 대한 익숙함과 중국 전통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동시에 가지게 된 듯하다. 이후 1882년 이올라니 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해 하와이 왕국의 칼라카우아 왕(1836년~1891년)으로부터 기념품을 받는 등 뛰어난 성적을 보였고 그가 처음으로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시기 역시 이때였다.
그러나 기독교에 입문하고 싶다는 쑨원에 형인 쑨메이가 반대하며 다음 해 쑨원을 고향으로 돌려보냈으나 서양식 생활에 익숙해진 쑨원은 고향의 신상을 부숴버리는 등 현지에서 마찰을 일으킨다. 결국 쑨원은 반년이 채 가기 전에 홍콩으로 도피하고 만다.
홍콩에서 역시 영국 성공회 계열의 발췌서원(拔萃書院)에서 의술을 공부하고 스위스의 선교사 찰스 로버트 하거(Charles Robert Hager, 1851년~1927년)에게서 세례를 받고 형 쑨메이의 소개로 루무전(盧慕貞, 노모정, 1867년~1952년)과 결혼하게 된다. 한편으로 쑨메이는 쑨원에게 자신의 사업을 잇게 할 것을 권유했지만 쑨원은 이 제의를 거부하고 홍콩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이후 1884년 청불전쟁이 발발하고 여기서 청나라가 전투에서 이기고도 협상에서 손해를 본 패배에 가까운 졸전을 벌이자 전통 체제에 불만을 품게 된다. 이후 1886년 광저우에서 박제의원(博濟醫院)에서 동서양 의술을 공부하는 동안 청나라 체제에 불만을 품는 정스량(鄭士良, 정사량 1863년~1901년) 등의 사람들과 교류하며 본격적으로 민족주의적 혁명의 발상을 구축하게 된다.
의술을 몇 년 동안 공부한 쑨원은 1892년 서의서원(西醫書院) 1기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며 의사 면허를 취득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1893년 마카오에서 중서약국을 여나 마카오 면허가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광저우에서 약국을 열며 만주족 타도를 결의하는 모임을 활성화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그의 혁명사상은 구체적인 무언가가 있다기보다는 단순히 체제 변혁을 꿈꾸는 것이었고 그것을 성공시킬 수만 있다면 방법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등 원론적인 방법에 그쳤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1924년 국민당을 개조시키기 이전까지 쑨원은 중국 혁명을 성공시킬 수만 있다면 군주제 복고나 영토할양도 상관없다는 극단적인 방안도 간혹 검토했었다.
1894년 6월 쑨원은 이홍장에게 농상업의 개편과 인재등용방법 등 혁신 방안을 담은 상소문을 올린다. 쑨원은 이 상소에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하는 등 나름의 공을 들였지만 결국 상하이의 영자신문에 실리는 것에 불과한 초라한 성과물을 거두게 된다.
한편 직후 청일전쟁에서 청이 밀리자 마침내 쑨원은 정상적인 방법의 개혁을 포기하고 공화제를 통한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을 결심하게 된다. 1895년 11월 쑨원은 호놀룰루로 건너가 현지 화교와 연합해 “달로(撻虜, 만주족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국을 회복하여 합중정부를 창립하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정치단체인 흥중회(興中會)를 결성하게 된다. 이때 흥중회의 선언문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당당한 중화가 인접국에 대항하지 못하고 문물, 예절이 이민족에게 경멸당하고 있다. (중략) 어리석은 노예가 국가를 잘못 통치하여 백성을 해함으로서 한번 넘어지니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극단적인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이제 힘센 이웃나라가 구워삶아 (중략) 과분의 위기가 목전에 이르렀다.
이후 홍콩으로 돌아간 쑨원은 3월부터 반년 간 광저우에서의 무장봉기를 준비하나 실행직전 당국에게 들키면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쑨원은 간신히 도망쳤지만 쑨원의 절친인 루하오둥은 결국 체포하여 사망하고 만다. 루하오동이 역사속에서 남긴 족적은 짧았지만 그의 흔적은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다. 예를 들어 국민당의 당기이자 현 중화민국의 국장인 청천백일기(青天白日旗)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이후 일본을 거쳐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흥중회 분회를 설립했고 1896년 런던을 체류하였다가 청 영사관에서 구금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쑨원 본인은 납치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청조는 그가 스스로 들어와 그를 가두었다고 언급했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사건을 계기로 쑨원은 서양인에게도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
이후 량치차오와 교류하며 그와 합작할 계획을 꾸미기도 했지만 그의 스승인 캉유웨이(康有爲, 1858년~1927년)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1900년에는 후이저우에서 봉기를 일으켜 20,000명의 세력을 확보했지만 일본의 타이완 총독부가 당초의 지원계획을 철회하면서 보급부족으로 11일 만에 어이없이 자진해산하고 말았다.
1901년경부터 쑨원은 후일 국민당의 혁명론인 삼서론(三序論)을 최초로 구상시키는 등 자신의 사상을 점차 체계화시켰다. 이후 도쿄와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다시 세력을 규합한 쑨원은 1905년 7월 도쿄에서 흥중회와 다른 세력들을 규합시켜 중국동맹회를 창설시킨다. 이후 후일 삼민주의라고 불리는 삼대주의의 사상을 확립시키고 삼서론의 필요성을 강론하고 혁명언론 민보를 창설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1907년 청 정부의 압력을 받은 일본 정부가 쑨원을 내쫓으면서 문제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다. 일본 정부는 쑨원을 출국시키는 대신 어느 정도의 활동금을 지불했는데 민간의 지원까지 합쳐 15,000엔에 달하는 전별금을 겨우 2,000엔만 민보 유지를 위해 내놓고 나머지는 무력봉기를 위해 가져가버린 것이다. 이로 인하여 중국동맹회 내에서 다시 갈등이 펼쳐지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그해 9월 광둥성 서부에서 일으킨 봉기마저도 탄약부족으로 17일 만에 자진 해산시키고 12월 진남관 일대에서 다시 일으킨 봉기마저도 탄약부족으로 다시 실패로 끝내고 만다. 이후 청조의 압력으로 쑨원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체재마저 금지 당한다. 이와 별개로 황싱이나 다른 동맹회 회원이 다시 1908년 3월과 5월 광둥, 원난 일대에서 봉기를 일으키지만 모두 실패로 끝난다. 그는 다시 광둥성 일대에서 혁명 활동을 일으키지만 1910년 2월의 광저우 봉기도 당국의 사전차단으로 실패로 끝난다.
이 시점에서 이미 동맹회 내부는 쑨원의 혁명노선에 회의를 품는 장빙린, 쑹자오런의 비판으로 실질적으로 분열된 상태였다. 이후 쑨원은 각지의 화교를 찾으면서 구걸에 가까운 연설로 다시 자금을 모아 1911년 4월 광저우에서의 봉기를 준비하지만 이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로서 쑨원의 정치시대는 완전히 끝나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신해혁명(辛亥革命)이라는 대사건이 터지면서 쑨원의 정치인생은 완전히 변모(變貌)하게 된다.
쑨원이 일반적으론 신해혁명의 주동자로 여겨지지만, 사실 그는 1911년 말 신해혁명이 일어날 당시 미국에 있었다. 게다가 막상 봉기가 일어나던 타이밍에는 너무 피곤해 그 다음날이 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혁명에 대한 대응에 나섰다. 아마 본격적인 상황을 잘 몰랐기에 이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하지 못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여하튼 그는 이후 미국과 유럽을 순방하면서 혁명군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고 본격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청조에 대한 차관지원을 중단시키는 데는 성공하였다.
이후 12월 25일 대중의 환호 속에서 상하이에 상륙한다. 이때 혁명군은 쑨원이 대량의 차관이나 해군력을 가지고 올 것이라 기대했지만 쑨원 본인은 “혁명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왔다.”라고 답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쑨원은 1911년 12월 27일 중화민국 초대임시총통에 선출된 뒤 태음력을 폐기하고 태양력을 사용할 것을 결의한다. 중국 전통사상에서 역법에 대한 관장은 군주의 고유권한이다. 즉, 달력을 개정한다는 의미는 청조 체제에 대한 공개적인 부정을 의미한다. 1912년 1월 1일 쑨원은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선포하고 공식적으로 초대 임시 대총통에 취임한다. 그 당시에 중화민국 연호, 서력기원도 덤으로 도입했었다.
그러나 그는 지방 유력자들이 선출한 얼굴마담 이상의 의미는 없었고, 전국 각지로 번져가던 혁명도 청조의 뒤늦은 조치로 점차 소강되어가고 있었다. 결국 쑨원은 북방에서 혁명군과 대치중이던 위안스카이와 타협한다. 이미 쑨원이 중국에 오기 전부터 혁명군 관련자들이 협상을 시작하고 있었다. 혁명군 입장에선 북양군(北洋軍)과 맞서 싸우는 것이 부담스러운 일이었고, 위안스카이 역시 청 황실의 진압명령을 받긴 했지만 황실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아 진압초기부터 주중 영국 공사를 통해 혁명군과 타협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쑨원은 청을 무너뜨리지만 기존 황실을 대우해주고, 임시 대총통은 위안스카이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그해 4월 대총통직을 사임하고 만다.
이 협상은 결국 청을 무너뜨리는 것까진 성공시키지만, 중화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완전히 실권을 장악한 위안스카이가 독재자로 돌변해 사사건건 의회와 부딪혔고, 내각책임제를 유지하려는 국무총리 탕사오이를 축출하고 내무총장 자오빙쥔을 내세워 쑹자오런 암살사건, 선후대차관사건(善後大借款事件, 1913년) 등을 기획하며 독재를 강화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쑨원은 계축전쟁(癸丑戰爭, 1913년)으로 맞섰으나 진압당하고 만다. 이후 쑨원은 쑹자오런의 국민당의 후신을 자처하는 중화혁명당을 구성하나 지나치게 쑨원 개인에게 의존하는 체제로 인하여 오히려 구 동맹회 회원에게도 외면당하는 결과를 낳는다.
한편, 위안스카이는 1914년 중화민국 국회 해산을 단행하고 초급총통제를 실시해 황제적 총통제를 구축한 다음,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洪憲帝制)를 통해 중화제국을 세우고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하는 호국전쟁이 전국 각지에서 발발하면서 굴욕적으로 퇴위하고 몇 개월 안가 결국 병이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리위안훙(黎元洪, 1864년~1928년)은 국회와 구약법의 회복을 선언했다.
위안스카이의 사후 대리총통 리위안훙이 국회와 약법을 회복시키면서 중화민국은 일시적으로 안정을 찾는 듯 했지만, 정부 안에서는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 돤치루이와 대총통 리위안훙 사이의 부원지쟁이, 국회 내부에서는 연구계, 교통계, 헌정상각회가 헌법제정 문제로 격렬히 대립했다. 결국 장훈복벽(張勲復辟, 1917년) 이후 국회가 해산되면서 중앙에서는 북양군벌 내의 파벌들이 돌아가며 베이징을 장악, 정치적인 실권을 행사했다. 주로 돤치루이(段祺瑞, 1865년~1936년), 쉬수창(徐世昌, 1855년~1939년)의 안휘군벌(安徽軍閥)과 펑궈장(馮國璋, 1859년~1919년), 차오쿤(曹錕, 1862년~938년), 우페이푸(吳佩孚, 1874년~1939년) 등의 직예군벌(直隸軍閥) 간의 파벌싸움이었다.
호법전쟁(護法戰爭, 1917년) 시점에는 장쭤린(張作霖, 1875년~1928년)의 봉천군벌(奉天軍閥)도 가담하면서 헬게이트(Hell Gate)가 열렸다. 지방에서는 북양군벌과 충돌하던 광둥, 광시, 윈난 등 지방군벌들이 독자적인 길을 모색했다. 그 와중에 쑨원은 1차 호법운동을 벌여 광동, 광서, 운남의 탕지야오(唐繼堯, 1883년~1927년), 루룽팅(루야송(陸亞宋), 1856년~1928년) 등 계계군벌(桂系軍閥), 전계군벌(滇系軍閥)들과 협력해 1917년 광둥 지역에 호법군 정부를 창설, 호법전쟁을 통해 북양군벌을 토벌하고 중화민국을 되찾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애초에 지방군벌들은 쑨원이 가진 중화민국의 정통성을 이용해 자신들의 세력을 보존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쑨원의 북벌론에 큰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1918년에는 그를 실각시키기까지 했다. 이에 실망한 쑨원은 모든 직위를 포기하고 상하이로 이동한다.
이후 쑨원은 상하이에서 자신의 사상을 담은 쑨원학설을 저술하는 등의 활동을 했으나 1919년 2월 열린 남북화의가 5월에 결렬되고 1919년 5.4 운동 발발로 북양정부의 힘이 쇠퇴하는 등 쑨원은 다시 재기의 기회를 잡게 된다. 이에 1919년 10월에 중화혁명당을 개조해 국민당을 창설한다. 1920년 탕사오이(唐紹儀, 1860년~1938년) 등 익우사 정객들의 광저우 군정부 부정 이후의 합류로 다시 정통성을 회복한 쑨원은 광동군벌(廣東軍閥) 천중밍(陳炯明, 1878년~1933년)의 협력으로 광저우로 복귀해 1921년 4월 27일 2차 군정부의 비상대총통에 취임한다. 국회의원이 전원 참석하지 않아 완전한 정통성이 없어 비상대총통이라고 했다. 이후 5월에는 군정부를 취소하고 정식 대총통에 취임하여 2차 호법운동을 전개했으나, 1922년 영풍함사건(永豊艦事件)으로 축출당하면서 또다시 쫓겨나게 된다. 이때 거의 죽을 번한 쑨원을 살려낸 인물이 바로 그 유명한 장제스다. 이 일을 계기로 장제스는 쑨원의 주요 심복 중 하나가 되었고, 쑨원 사후 중산함 사건으로 국민당의 당권을 장악하여 국민혁명을 이끌게 된다. 이때의 중산함(中山艦)이 바로 천중밍으로부터 쑨원을 구해낸 그 영풍함이었다.
두 번이나 군벌들에게 쫓겨나 도피생활을 하면서 쑨원은 군사력이 없는 자신들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한 가지 계기가 있었으니, 러시아 혁명의 발발과 연이은 소련의 해외 기득권 포기 및 약소민족 지원 선언이었다. 물론 당시 공산주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한 소련의 노림수가 있었다. 소련의 특사 마링(Maring)은 중국 안에 공산당 세력을 키우기 위한 파트너를 찾고 있었는데, 그 대상으로 국민당과 쑨원을 선택한 것이다.
이후 1923년 북벌군을 재조직해 광저우를 회복한 이후 쑨원은 육해군 대원수로 취임해 임시적인 정부로 삼았다. 이후 소련과의 논의 끝에 제1차 국공합작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공산당원들의 국민당 입당이 허가되었고, 쑨원은 국민당의 자체적인 군사력 강화에도 착수했다. 하지만 여전히 광둥성에 남아있는 몇몇 군벌들과의 싸움은 지속되었고, 쑨원 본인은 2년 안에 베이징을 공격할 수 있다고 했지만 현실성은 아무래도 떨어졌다.
이런 와중에 펑위샹(馮玉祥, 1882년~1948년)이 정변을 일으켜 돤치루이(段祺瑞, 1865년~1936년)를 축출하고 전후 처리를 위해 쑨원을 초빙하자 대원수 직위를 후한민에게 맡기고 북상하였다. 도중에 일본에 들러, 대아시아주의에 대해서 연설한 것이 나름 유명하다. 다만 해당 연설에서 제일 유명한 ‘일본은 세계 문화의 미래를 위해 서양 패도의 번견(番犬)이 될 것인가, 동양왕도의 아성(亞聖)이 될 것인가’를 물은 것은 해당 연설이 아니라 해당 연설의 기록 말미에 추가한 것이다. 그러나 베이징에 도착하기 직전 병으로 쓰러진 쑨원은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곧바로 입원하였다. 당연히 전후 협상은 쑨원을 사실상 배제 한 채 이루어지고 말았다.
1925년 1월, 사실상 그의 죽음을 예감한 수행원들이 유언을 남길 것을 권유했지만 쑨원 본인은 “유언을 남기면 뒷사람들이 그것을 악용할 것이기 때문에 안 남기는 것이 좋다.”라고 거절했다. 실제로 그가 죽은 후 왕징웨이, 후한민, 쉬충즈, 다이지타오, 랴오중카이 등이 그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다투었다.
그러다가 1925년 2월이 되자 왕징웨이가 쓴 총리유촉(總理遺囑)을 공식 유언으로 승인하게 된다. 이후 한 달간을 더 앓던 쑨원은 3월 11일 마지막 유언을 남기게 된다.
“내가 이번에 베이징에 온 것은 기반(基盤)을 포기함으로서 평화통일을 꾀하고, 국민회의에 의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여 삼민주의와 오권헌법을 실행하기 위해서였다. (중략) 십수년에 거쳐 국가를 위해 분주히 뛰어다니면서 품어온 주의를 결국 완전히는 실행하지 못하였다. 동지 제군이 고군분투(孤軍奮鬪)하여 국민회의를 하루라도 빨리 성립케 하여 삼민과 오권의 주장을 달성하기 바란다. 그렇게 하면 나는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자신의 유해를 난징 쯔진산에 묻고 그것을 영구보존해달라고 당부한 뒤 그 다음날인 3월 12일 오전 9시 30분 쑨원은 사망한다.
쑨원은 그의 행적이나 사상, 상징성 등으로 인해 여러 측면에서 평가되어, 오늘날 중화민국이나 중화인민공화국 양안뿐만 아니라 홍콩, 마카오 더 나아가 동남아 등의 중화권 화교 지역에서도 대체로 존경받고 있다.
중화민국이야 사실상 쑨원이 건국자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중화인민공화국이 지배하는 작금의 대륙에서조차 쑨원의 묘를 중산묘가 아닌 중산릉(中山陵)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그가 현대 중국사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중국에서 묘지명으로 능(陵)은 천자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중산릉 부근에 명나라를 세운 홍무제의 효릉(孝陵)이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쑨원을 기념하는 건물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싱가포르 세 곳에 모두 존재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광저우의 중산기념당, 중화민국은 타이베이의 국부기념관, 싱가포르에도 중산기념당이라는 이름으로 존재. 영어로는 모두 Sun Yat-sen Memorial Hall로 불리고 위치해 있는 도시만 구분한다.
한마디로 어느 진영에서도 적극적 안티를 찾아보기 힘든 위인. 그나마 개인 단위가 아닌 집단 단위로 뽑자면 대만 독립파 중 강경파들 정도가 있는데, 이들도 쑨원을 자기들과는 무관한 인물이니 다른 중화권처럼 국부로 대접하지 않을 뿐이지 딱히 그의 행적을 까는 건 아니다. 연장선상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일부 학자들도 쑨원하면 떠오르는 신해혁명이 부르주아들의 왕조전복 운동이었지 무산계급들의 계급 타파 운동은 아니었다며 평가절하(平價切下)하는 측면이 있는데 즉 일부 중공 학자들 입장에선 신해혁명(辛亥革命)도 평가는 할 만하지만, 공산혁명이 더 위대했다는 것이다.
중화민국 헌법 전문
중화민국 국민대회는 전체 국민의 위탁으로 손중산(孫中山) 선생의 중화민국 건국이념에 근거하고 국권을 공고히 하며 민권을 보장하고 사회안녕을 수호하며 인민의 복지를 증진하기 위하여 이 헌법을 제정하며 전국에 공포 시행하고 영원히 준수한다.
1946년 12월 25일 제정된 중화민국 헌법은 아예 헌법 전문에 중화민국은 쑨원의 삼민주의에 근거했다고 못박아뒀다.
중화민국 정부는 ‘국부(國父)’로 그를 추앙하고 있다. 주요 관공서마다 그의 초상화가 걸려있고, 장제스를 비롯한 역대 총통들은 정당 관계없이 모두 그의 초상화 앞에서 취임선서를 거행하고 있다. 다만 쑨원의 위상과 별개로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된 21세기 들어서도 이런 신격화에 가까운 정치인 숭배현상이 이뤄지고 있다는 건 비판의 여지가 있는 대목이긴 하다.
정치 지도자로서 쑨원의 이미지가 그나마 긍정적이니 망정이지, 사실상 작금의 북한이나 과거 한국의 군사독재 시절 대통령 사진 걸어놓은 것처럼 개인숭배라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 없는 대목이다. 쑨원 본인부터가 기독교 신자로 우상숭배를 배척했던 인물이란 걸 생각하면 더더욱 아이러니하다.
범록연맹(泛綠聯盟)을 비롯한 대만 독립진영 일부에서는 쑨원이 대륙에서 활동하다가(대만을 몇 차례 방문한 적은 있었다) 사망했기에 국부천대 이후 국민당 정권의 대만 탄압에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지만, 그럼에도 장제스가 추종한 인물이라 그런지 은근히 부정적 인식을 받기도 한다. 천수이볜 정부 시절 역사 교과서에서 쑨원을 기존의 ‘국부’가 아닌 ‘외래인’으로 규정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고, 2010년대 타이난시에서는 쑨원 동상이 일부 독립파 대만인들에게 파괴되기도 하였다. 그 외 쑨원의 동상에 “중화민국은 떠나라, 국민당은 물러나라”고 글을 남긴 사례도 있다.
물론 독립주의자 중에서도 온건파들은 국부까진 아니라도 아시아의 민주주의 지도자 정도로 쑨원을 평가한다. 다만 과격한 독립파에게는 그냥 대만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개 중국인일 뿐이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 이들은 쑨원을 추종하는 것 역시 국민당 시절 중국화 교육의 유산이라고 규정한다. 중화민국의 국민의례에는 국기와 국기 앞에 거는 쑨원 사진에 3차례 허리를 숙여 절하는 것이 있는데, 일부 독립파들은 이것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정난룽은 쑨원을 국부로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대학 시절 교양 필수과목인 ‘국부사상’을 이수하지 않아서 졸업을 못 했다.
20세기에 들어와 중국에는 천지개벽(天地開闢)의 위대한 역사적 변혁이 일어났다. 1911년 손중산 선생이 지도한 신해혁명은 봉건적 군주제를 폐지하고 중화민국을 창건하였다. 그러나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중국인민의 역사적 임무는 아직 달성되지 않았다. 모택동 주석을 수령으로 하는 중국공산당이 이끌었던 중국의 여러 민족 인민은 오랜 기간에 걸친 곤란하고 곡절 많은 무장투쟁 및 그 밖의 형태의 투쟁을 거쳐 1949년에 드디어 제국주의, 봉건주의 및 관료자본주의의 지배를 물리치고 신민주주의 혁명의 위대한 승리를 전취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하였다. 이때부터 중국 인민은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의 주인이 되었다.
-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서언 중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쑨원을 마오쩌둥에 앞선 ‘혁명 선행자’정도로 평가한다. 사실 몇몇 지식인의 동아리로 출발한 중국 공산당이 대폭적으로 세를 확장할 수 있던 것도 쑨원이 국공합작을 받아들임으로서 가능했다. 게다가 쑨원은 국민당 우파의 반발에도 공산당을 품고 가려고 했다. 이는 1차 대전 이후 독일이 가지고 있던 이권을 중국에 반환하는 것에 인색하고 서로 나눠가지려던 영미일 열강의 거동에 쑨원이 실망한 탓도 있었다. 때문에 쑨원은 당시까지만 해도 그나마 약소국을 돕겠다는 소련의 레닌을 환영하게 되고, 이들의 지원을 받아 황포군관학교와 국민혁명군을 창건하게 된다. 또 쑨원의 마지막 부인인 쑹칭링 역시 동생의 남편이었던 장제스와 계속 대립하다 장제스가 대만으로 쫓겨 갈 때도 같이 가지 않고 대륙에 남아 중공 정권에 참여했고 쑨원 사후에 공산당에 대한 탄압으로 일관하던 장제스와 달리 생전에도 공산당에게 유화적이었기 때문에, 중국 공산당은 전 중화민국 정권의 창시자이긴 해도 쑨원을 딱히 격하할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국경절이나 전승절과 같은 주요 기념일에는 마오쩌둥의 초상에 앞서 쑨원의 초상화가 등장한다. 상술했듯이 묘지를 능으로 칭한다거나 주요 도시(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칭다오 등)에 중산이라는 도로명이나 지명이 거의 반드시 존재할 만큼 공식적으로 중국의 위인 대우는 확실히 받고 있다. 오히려 중국에서는 지명에 공산당 지도자의 이름이 붙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 대만에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는 만큼, 대만독립파의 지지를 받는 범록연맹이 집권하는 시기에는 양안화해를 강조하기 위해 쑨원을 양안의 공통 국부로서 강조하는 경향도 있다. 대만독립파들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장제스에 대한 평가가 대륙에서 과거보다 나아진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다보니 쑨원 탄생 150주년 기념식에 본토에서는 시진핑 주석이 참가하였으나, 정작 이때 대만은 조용한 편이었다. 당시는 차이잉원(蔡英文, 1956년~ ) 행정부 1기가 막 출범하고 연초에 쯔위 사태로 인해 대만 내 반중감정이 고조된 상태였다. 쉽게 말해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려고 쑨원을 띄우는 중공의 속내가 뻔히 보이기에 오히려 대만은 차분했다는 것이다. 차이잉원 정권이 대만 독립파를 지지층으로 두고 있는 정권이니 더 그랬다.
홍콩이나 마카오의 경우 쑨원 본인부터가 홍콩과 인연이 깊었고 홍콩 사람들과 똑같은 언어인 광동어를 쓴 점 등 때문인지, 국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작금의 민주파 홍콩인, 마카오인들에게도 민주주의를 추구한 선구자로서 나름 존경받고 있다. 이는 홍콩 독립운동 지지자들도 마찬가지라, 쑨원을 외부에서 온 사람 취급하는 대만 독립파들과 비교해보면 재미있는 부분이다.
홍콩 본토파들은 쑨원의 혁명정신처럼 우리도 홍콩을 중국으로부터 독립시키자고 하고, 민주파들은 중공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중국 내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동기부여를 하기 위해 쑨원의 이미지를 이용하는 측면이 있다.
또 홍콩, 마카오뿐만 아니라 인접한 광둥성은 중국에서 기독교 교세가 상대적으로 강한 만큼, 기독교 신자였던 쑨원을 더 취급하기도 한다. 여담으로 홍콩인 기독교 신자들이 꼽는 이름난 중화 기독교인으로 쑨원 외 중국 최초의 목사 량파(梁发, 1789년∼1855년), 이후 중화민국 총통을 지낸 장제스 등이 있다.
이런 상황을 보면 중화권의 다양한 진영에서 서로서로 쑨원의 필요한 점을 평가하고 이용한다고 볼 수 있다. 서구권에선 쑨원을 민주사회주의자로 분류하고 있고 실제 그런 성향이 있지만, 쑨원의 사상인 삼민주의(민족주의, 민생주의, 민권주의)는 오늘날 진영적으로 보면 좌우파적 사상의 성격도 모두 가지고 있기에, 각 진영에선 자기들한테 필요한 부분만 강조하는 식이다.
즉, 삼민주의에서 민족주의는 하나의 중국, 민생주의는 경제적 평등, 민권주의는 서방식 민주주의와 통하는 바가 있으며, 쑨원의 계승을 표방하는 각 정치세력들은 이들 중에서 자기에 맞는 부분만 강조하면서 쑨원의 이름을 빌리는 모양새다. 덕분에 살아생전엔 실권이 부족해 여러모로 고생했던 쑨원의 삶과 사상이, 오히려 죽고 나서 더 대접받는 측면도 있다.
인민복의 기원격인 중산복(中山服)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흔히 인민복은 중국 본토에서만 입는다고 알려져 있는데, 쑨원이 유럽의 사냥복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설과, 일본에 거주할 당시 가쿠란에 영향을 받아서 ‘우리도 저런 실용적인 옷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만들어 낸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