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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계기삼락(榮啓期三樂)
영계기의 세 가지 즐거움이라는 뜻으로, 자족하며 살아가는 인생의 즐거움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榮 : 영화 영(木/10)
啓 : 열 계(口/8)
期 : 기약할 기(月/8)
三 : 석 삼(一/2)
樂 : 즐길 락(木/11)
어떤 사람이 행복할까.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자만이 또한 행복을 얻는다고 서양 철인은 말한다.
동양에선 서경(書經)에 나오는 대로 오복(五福)을 갖춘 사람이 행복할 것이다. 장수, 부귀, 건강을 뜻하는 수(壽), 부(富), 강녕(康寧)에다 덕을 좋아하고 행하는 유호덕(攸好德), 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눈을 감는 고종명(考終命)이다.
이런 것을 갖춰 남이 볼 때 더없이 행복할 사람도 자기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으면 불행하다.
오복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모자란 듯 자족(自足)하는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영계기(榮啓期)가 가장 행복을 누린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공자(孔子)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은둔 현자로 음률에 정통하고 박학다식했으며 사상이 자유분방했다. 그는 사슴가죽 옷에 새끼줄로 허리를 두른 초라한 행색이었지만 언제나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공자가 어느 때 태산(泰山)에서 노닐다가 이런 영계기를 보고 무슨 일로 그렇게 즐거워하는지 물어보았다. 도가(道家)의 전설적인 사상가 열어구(列禦寇)가 서술했다는 열자(列子)의 천서(天瑞)에 대답이 나온다.
영계기는 즐거움이 아주 많지만 사람으로 태어난 것(吾得爲人)이 일락, 남자로 태어난 것(吾既得爲男)이 이락, 이미 90세가 되었으니(吾既已行年九十) 이것이 삼락이라 했다.
그러면서 가난이란 선비에게 늘 있는 일이고, 죽음은 마지막인데 그것을 기다리는데 무슨 근심이 있겠느냐고 말했다. 공자는 참으로 여유로운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삼국시대 위(魏)나라 왕숙(王肅)이 편찬한 공자가어(孔子家語)에는 영성기(榮聲期)로 되어 있다.
동진(東晉)의 전원시인 도연명(陶淵明)은 유명한 음주(飮酒) 2수에서 그를 부러워한다. ‘구십 노인 허리띠 줄이며 가난하게 살았거늘, 젊은 내가 어찌 이를 못 참겠는가(九十行帶索 飢寒況當年).’
영계기가 남자로 태어난 것을 이락으로 치면서 남존여비(男尊女卑)란 말이 나온다. 오늘날 평등한 사회에서 보면 90노인이 무슨 망발인가 하는 페미니스트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차별로 보지 않고 태어난 그대로 받아들이고 즐거움을 찾았던 영계기로서는 여자로 태어났어도 즐거웠을 것이 틀림없다.
남자와 여자는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고 잘 하는 일이 다르게 태어났을 뿐이다. 남자가 큰일을 이뤘어도 그 남자를 움직이는 것은 여자다. 남녀 조화를 잘 이뤄야 진정 행복할 수 있다.
⏹ 영계기삼락(榮啓期三樂)
영계기의 세 가지 즐거움
흔히 다른 문화나 사회, 집단의 경계에 있으면서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을 '경계인(境界人)'이라 하는데, 노자가 보기에는 모든 사람이 경계인이다.
삶과 죽음, 만남과 헤어짐, 나아감과 물러남, 이것과 저것 따위 '경계'에서 살며 그 경계에서 늘 판단과 선택, 결정의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경계인이 아니고 무엇이랴.
생물학적으로 보더라도 사람은 동물이면서 동물이 아닌, 애매(曖昧)하고 모호(模糊)한 존재 아닌가?
열자(列子) 천서(天瑞)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공자(孔子)가 태산(太山)에 놀러 갔다가 영계기(榮啓期)라는 인물이 성(郕) 땅의 들에서 놀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사슴 갖옷을 입고 새끼로 띠를 두르고서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고 있었다.
공자가 물었다. "선생께서 즐거워하시는 까닭이 무엇입니까(先生所以樂, 何也)?"
영계기가 대답했다. "내게는 즐거움이 꽤 많소. 하늘이 온갖 것을 낳음에 오로지 사람이 가장 귀한데, 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니, 이것이 첫째 즐거움이오(吾樂甚多. 天生萬物, 唯人爲貴, 而吾得爲人, 是一樂也).
남자와 여자는 달라서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므로 남자가 귀한데, 나는 이미 남자가 되었으니, 이것이 둘째 즐거움이오(男女之別, 男尊女卑, 故以男爲貴, 吾旣得爲男矣, 是二樂也)."
'개 팔자가 상팔자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첫째 즐거움을 누리고 사는 사람도 드물다. 그렇다면 남자로 태어나 살면서 참으로 즐거워하는 이는 더 드물 터.
물론 여성의 삶에 빗대 '그래도 남자로 태어난 내가 더 행복하다'고 말할 사내도 있겠지만, 좀스러울 따름이다.
왜 영계기가 즐거움으로 삼은 것을 다른 이들은 즐거움으로 삼지 못하는 것일까?
무엇으로 누구로 태어난들 삶은 고정되거나 결정된 것이 아니라 경계 위에서 진동(振動)하고 유동(流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인생의 즐거움
살다보면 때때로 삶의 즐거움이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한다. 삶의 즐거움이란 무엇인가?
칠십이 넘은 나이에 부모님이 살아 계실리 없고 누님 마저 사경을 헤매고 계시니 군자유삼락(君子有三樂)에서 일락(一樂)부터 이미 어긋나 있다.
요즈음 내 생활에 즐거움이란 있는 것인가? 인생의 즐거움에 대해 생각해 본다.
춘추 시대 때 은사(隱士) 영겨기(榮啓期)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공자(孔子)가 태산(泰山)을 지날 때 그는 사슴 가죽 옷에다가 노끈으로 허리를 묶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鹿裘帶索 鼓琴而歌).
그 모양을 보고 이상해서 공자가 물었다. “선생님 무엇이 그렇게 즐거우십니까?”
그랬더니 “내 즐거움 참 많지. 하늘이 만물을 냈는데, 오직 사람이 귀한 것인데 내가 사람이 됐으니 이것이 첫째 즐거움이요,
吾樂甚多, 天生萬物, 唯人爲貴, 吾得爲人, 是一樂也.
사내 계집 사이에 사내가 높고 계집이 낮은데 그래서 사내를 귀하다는 것인데, 내가 이미 사내로 태어 났으니 이것이 둘째 즐거움이요,
男女之別, 男尊女卑, 故以男爲貴, 吾旣得爲男矣 是二樂也.
사람이 났어도 해, 달을 볼 새도 없이 기저귀에서 죽어 버리는 것도 있는데, 나는 벌써 아흔을 살아왔으니 이것이 셋째 즐거움이지.
人生有不見日月, 不免襁褓者, 吾旣已行年九十矣, 是三樂也.
가난은 선비에게 늘 있는 일이고, 죽음은 사람살이의 끝이 아닌가. 늘 있는 일에 머물면서 그 끝을 기다리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라고 했다.
貧者, 士之常, 死者, 人之終. 處常待終, 何不樂.”
그는 욕심을 부리지 말고 자연과 하나 되어 살자는 사람이다. 이것을 영계기삼락(榮啓期三樂)이라 한다. 공자가 그의 여유 있는 성품을 칭송했다.
또 증자(曾子)의 삼락(三樂)이란 것이 있다.
有親可畏, 有君可事, 有子可遺, 此一樂也.
어버이 있어 두려워할 수 있고, 임금 있어 섬길 수 있고, 아들 있어 남겨 놓을 수 있으면 첫째 즐거움이요.
有親可諫, 有君可去, 有子可怒, 此二樂也.
어버이 있어 잘못이 있을 때 말해 드릴 수 있고, 임금 있어 뜻 맞지 않을 때 버리고 갈 수 있고, 아들 있어 잘못할 때 노해줄 수 있으면 둘째 즐거움이요.
有君可喩, 有友可助此三樂也.
임금 있어 잘못 있을 때 바른 길을 일러줄 수 있고, 벗 있어 도와줄 수 있으면 셋째 즐거움이다.
증자는 인간관계를 존중하여 의리에 살자는 생각이다. 그러기 때문에 저쪽에 잘못이 있어 말이라도 해주고, 노하고, 항의라도 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 의무요 따라서 오히려 즐거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맹자(孟子)의 군자유삼락(君子有三樂)이다.
孟子曰 : 君子有三樂, 而王天下不與在焉.
맹자가 말하기를,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는데, 통일된 천하의 임금이 되는 것은 여기에 끼지 못한다.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부모가 살아 계시며 형제들이 아무런 탈이 없는 것이 첫번째 즐거움이요,
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 二樂也.
우러러봐도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봐도 땅에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의 즐거움이요,
得天下英才, 而敎育之, 三樂也.
천하의 뛰어난 인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이 세번째의 즐거움이다.
(孟子 盡心上篇)
맹자는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이 인생의 즐거움에 들어 있지 않다고 했다. 그러기 때문에 말을 이어서 더 설명한다.
廣土衆民, 君子欲之, 所樂不存焉.
땅을 넓히고 사람을 많게 하는 것을 군자가 원하지만 군자가 즐거워하는 것은 거기에 있지 않다.
中天下而立, 定四海之民, 君子樂之, 所性不存焉.
천하의 가운데 서서 온 사방의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을 군자는 즐거워 하지만 군자의 본성에는 들지 않는다.
君子所性, 雖大行不加焉. 雖窮居不損焉, 分定故也.
군자의 본성이 비록 크게 행해진다 해도 더 보태지 않고 살기가 궁하다 해도 덜어내지 않는다. 마땅히 할 바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君子所性, 仁義禮智根於心.
군자의 본성에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가 마음에 뿌리 내리고 있다.
장자(莊子)는, “지금 세속에서 하는 일이나 즐기는 것을 볼 때, 나는 그 즐거움이 과연 즐거움인지 즐거움이 아닌지 잘 모르겠다.
今俗之所爲與其所樂, 吾又未知樂之果樂邪, 果不樂邪.
내가 세속 사람들이 즐기는 것을 관찰해 볼 때, 떼거리로 몰려가면서 죽더라도 그만둘 순 없다며 모두가 즐거운 일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나는 그것이 즐거운 일인지 즐겁지 않은 일인지 잘 모르겠다.
吾觀夫俗之所樂, 舉群趣者, 誙誙然如將不得已, 而皆曰樂者, 吾未之樂也, 亦未之不樂也.
과연 즐거움이란 있는걸까, 없는걸까? 나는 무위(無爲)야말로 참된 즐거움이라 여기고 있지만, 세속 사람들은 그것을 큰 고통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果有樂無有哉? 吾以無爲誠樂矣, 又俗之所大苦也.
그러므로 말하길, '지극한 즐거움은 세속의 즐거움을 초월하는데 있고, 지극한 명예는 세속의 명예를 초월하는데 있다' 라고 한다."
故曰; 至樂無樂, 至譽無譽.
(莊子 外篇 第18 至樂 1-2)
상촌(象村) 신흠(申欽)은 인생삼락을 이렇게 꼽았다.
閉門閱會心書, 開門迎會心客, 出門尋會心境, 此乃人間三樂.
문 닫고 마음에 드는 책을 읽는 것, 문 열고 마음에 맞는 손님을 맞는 것, 문을 나서 마음에 드는 경치를 찾아가는 것, 이것이 인간의 세 가지 즐거움이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은 '유수종사기(游水鐘寺記)'에서 세 가지 즐거움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어렸을 때 뛰놀던 곳에 어른이 되어 오는 것, 가난하고 궁색할 때 지나던 곳을 출세해 오는 것, 나 혼자 외롭게 찾던 곳을 마음 맞는 좋은 벗들과 어울려 오는 것.”
이때 다산은 세 가지를 다 갖추고 있었다. 진사가 된 21세 때의 글이다.
추사 김정희는, 일독(一讀) 이호색(二好色) 삼음주(三飮酒)를 세 가지 즐거움이라고 했다. 책 읽고 글 쓰며 항상 배우는 선비정신, 사랑하는 이와의 변함없는 애정, 벗과 함께 어울리는 풍류를 말한 것이리라.
2,500여년 전에 이 세상을 살고 간 공자는 사람으로 태어남 자체에 비중을 두었고 그보다 200여 년 후에 태어난 맹자는 벌써 자신보다 부모형제의 생존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또 남을 가르친다는 일에 의미를 부여했다. 일에서 삶의 보람과 즐거움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맹자로부터 또 2천여 년이 흐른 지금, 삼락은 어떻게 변했을까. 20세기를 지칭하는 한자(漢字)는 '바쁠 망(忙)' 자였는데 21세기 한자는 '즐거울 락(樂)’자란다. 20세기는 모두들 바쁘게 살았다면 21세기는 즐거움을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 같다.
주 5일제가 시작된지도 몇년이 지났으니... 식도락을 위시하여 오감을 자극하고 만족시키는 여러가지 락(樂)이 생겨났다.
공자의 '가난해도 즐거워한다(貧而樂)'는 말에서 온 안빈락도(安貧樂道)를 지금에 얘기하면 세상물정 모르는 딱한 사람 취급을 받기 십상이지만 정녕 가난해도 즐거울 수 있다면 그 즐거움이야말로 참된 즐거움이 아닐까.
인공지능이니 AlphaGo니 하는 세상이라지만 분명 장자(莊子)는 '지극한 즐거움은 세속의 즐거움을 초월하는데 있고, 지극한 명예는 세속의 명예를 초월하는데 있다'라고 했으니
퇴계가 "산은 더욱 깊어지고 물은 더욱 멀어진다"고 한 외진 산골에서
공자 이르시기를,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멀리서 마침 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닌가(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하며 살아가는 것도 인생의 즐거움이라고 아니할 수는 없을 진대...
맹자(孟子)는 '천하에 왕 노릇하는 것이 인생의 즐거움에 들어 있지 않다'고 분명히 말했거늘 금뱃지를 달려고, 권력을 잡으려고, 놓지 않으려고 벌어지는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역겨운 공천 추태를 보면서 인생의 즐거움을 다시 생각해 본다.
▶️ 榮(영화 영/꽃 영)은 ❶형성문자로 栄(영)의 본자(本字), 荣(영)은 통자(通字), 荣(영)은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나무 목(木; 나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영(熒에서 아래火를 뺀 글자, 등불의 둘레, 무엇이든지 둥글게 에워싸는 모양)으로 이루어졌다. 나무(木)에 꽃이 무성(茂盛)하게 피어 아름답다는 뜻이 합하여 영화(榮華)를 뜻한다. 꽃이 만발한 벽오동, 또 옛날엔 식물을 나무와 풀로 나누어 나무에 꽃이 많이 피는 것을 榮(영)이라 하고, 풀에 피는 것을 華(화)라 하였다. ❷회의문자로 榮자는 '영예'나 '영광'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榮자는 木(나무 목)자와 冖(덮을 멱)자, 火(불 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금문에 나온 榮자에는 두 개의 횃불만이 그려져 있었다. 금문에서는 이렇게 여러 개의 횃불을 그려 '밝다'라는 뜻을 표현했었다. 소전에서는 여기에 木자와 冖자가 더해지면서 횃불의 재질과 불빛이 온몸을 감싼다는 뜻을 표현하게 되었다. 다만 지금의 榮자는 단순히 '밝다'라는 뜻보다는 사람의 '영예'나 '명예'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榮(영)은 ①영화(榮華) ②영예(榮譽) ③영광(榮光) ④명예(名譽) ⑤피, 혈액 ⑥꽃 ⑦영광(榮光)스럽다 ⑧영예(榮譽)롭다 ⑨성(盛)하다(기운이나 세력이 한창 왕성하다) ⑩무성(茂盛)하다 ⑪싱싱하다 ⑫피다 ⑬나타나다 ⑭성(姓)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빛날 화(華),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마를 고(枯), 욕될 욕(辱)이다. 용례로는 더 좋거나 높은 직위로 옮아감을 영전(榮轉), 경쟁에서 이기거나 남이 하지 못한 어려운 일을 해냈을 때의 빛나는 영예를 영광(榮光), 빛나는 명예를 영예(榮譽), 권력과 부귀를 마음껏 누리는 일을 영화(榮華), 영화와 치욕을 영욕(榮辱), 남을 칭찬하고 흠모함을 영모(榮募), 지체가 높고 귀함을 영귀(榮貴), 지위가 높고 귀하게 됨을 영달(榮達), 영화의 즐거움을 영락(榮樂), 초목의 무성함과 말라죽음을 사물의 번영과 쇠락에 비유하는 말을 영락(榮落), 영화롭게 대우함을 영우(榮遇), 벼슬이나 지위가 높아짐을 영진(榮進), 신분이 귀하고 재물이 넉넉함을 영윤(榮潤), 번성하고 영화롭게 됨을 번영(繁榮), 필요 이상의 겉치레를 허영(虛榮), 서로 같이 번영함을 공영(共榮), 덧없는 세상의 헛된 영화를 부영(浮榮), 평안하고 영화로움을 안영(安榮), 영화롭고 마르고 성하고 쇠함이란 뜻으로 개인이나 사회의 성하고 쇠함이 서로 뒤바뀌는 현상을 이르는 말을 영고성쇠(榮枯盛衰), 인생이 꽃피고 시드는 것은 한번 밥짓는 순간같이 덧없고 부질없음을 이르는 말을 영고일취(榮枯一炊), 마귀와 세속과 육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올라간 곳이라는 뜻으로 천당을 일컫는 말을 영승지회(榮勝之會), 권력이나 부를 얻어서 번성한다는 뜻으로 사치를 다함이나 호화롭고 화려함을 일컫는 말을 영요영화(榮耀榮華), 고목에서 꽃이 핌으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남의 비유를 이르는 말을 고목발영(枯木發榮), 비단 옷을 입고 고향에 돌아가는 영광이라는 뜻으로 입신 출세하여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이르는 말을 의금지영(衣錦之榮), 여러 대를 누리는 부귀와 공명을 이르는 말을 만대영화(萬代榮華), 노력 없이는 영광도 없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을 불로무영(不勞無榮) 등에 쓰인다.
▶️ 啓(열 계)는 ❶형성문자로 启(계)는 통자(通字), 啟(계)는 본자(本字), 启(계)는 간자(簡字), 唘(계)는 고자(古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입 구(口; 입, 먹다,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문을 손으로 연다는 뜻을 나타내는 글자 (계)로 이루어졌다. 입으로 사람을 가르쳐 깨우침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啓자는 '열다'나 '일깨워주다', '여쭈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啓자는 启(열 개)자와 攵(칠 복)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런데 갑골문에서는 戶(지게 호)자와 又(또 우)자, 口(입 구)자가 결합한 형태였다. 戶자는 외닫이 문을 뜻하고 又자는 손을 그린 것이니 이것은 문을 열어젖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 口자까지 더해진 것은 문을 열어 누군가를 깨운다는 뜻이다. 그래서 갑골문에서의 啓자는 '열다'나 '일깨워 주다'라는 뜻을 표현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전에서는 又자가 攵자로 바뀌게 되면서 마치 몽둥이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듯한 모습이 되었다. 그래서 啓(열 계)는 (1)공식적인 기도문(祈禱文)이나 성가(聖歌)를 두 사람 이상이 서로 교송(交誦) 또는 교창(交唱)할 때의 그 첫 부분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열다 ②열리다 ③일깨워 주다 ④여쭈다 ⑤보도(報道)하다 ⑥사뢰다(웃어른에게 말씀을 올리다) ⑦책상다리를 하다 ⑧안내(案內)하다 ⑨인도(引導)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열 개(開), 열 벽(闢),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닫을 폐(閉)이다. 용례로는 무식한 사람이나 어린아이를 깨우쳐 가르침을 계몽(啓蒙), 슬기와 재능을 열어 깨우쳐 줌을 계발(啓發), 동면하던 벌레가 봄철을 맞아 나와서 움직이게 됨을 계칩(啓蟄), 계발하여 지도함 또는 깨우쳐 이끌어 지도함을 계도(啓導), 나아갈 길을 지적하여 가리켜 줌을 계시(啓示), 가르쳐 길을 열어줌을 계적(啓迪), 일에 대한 경위나 의견을 윗사람에게 말이나 글로 여쭘을 계고(啓告), 윗사람에게 말씀을 올림을 계상(啓上), 황무지를 일구어 농사 지을 땅을 넓힘을 계토(啓土), 여닫음을 계폐(啓閉), 앞장서서 인도함을 계행(啓行), 계발하여 기름을 계배(啓培), 깨우쳐 이끎을 계유(啓誘), 갑자기 일어남을 발계(勃啓), 도와서 계발함을 우계(佑啓), 공경하여 답장함이란 뜻으로 회답 편지의 첫머리에 쓰는 말을 복계(復啓), 편지에 첫머리에 쓰는 말로써 삼가 사뢴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을 경계(敬啓), 절하고 아뢴다는 뜻으로 한문 편지 첫머리에 의례적으로 쓰는 말을 배계(拜啓), 편지의 서두에 쓰는 말로 삼가 아룁니다의 뜻을 근계(謹啓), 편지의 사연을 다 적은 뒤에 또 적어야 할 일이 생겼을 경우에 다시 이야기한다는 뜻으로 쓰는 말을 재계(再啓), 삼가 아뢴다는 뜻으로 편지의 첫 머리에 쓰는 말을 숙계(肅啓), 편지 겉봉에 받는 이의 이름 밑에 앞이란 뜻으로 쓰는 말을 승계(升啓), 정해진 절차를 밟지 않고 먼저 임금에게 아뢰어 재가를 받음을 일컫는 말을 경선계하(徑先啓下), 병사丙舍 곁에 통로를 열어 궁전 내를 출입하는 사람들의 편리를 도모함을 일컫는 말을 병사방계(丙舍傍啓), 군율을 어긴 사람을 먼저 처형하고 나중에 임금에게 보고함을 일컫는 말을 선참후계(先斬後啓),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성질을 일깨워 줌을 일컫는 말을 소질계발(素質啓發) 등에 쓰인다.
▶️ 期(기약할 기)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달 월(月; 초승달)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其(기)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기(其; 구분하거나 골라서 꺼내는 일)와 달(月; 달이 한바퀴 도는 기간으로 한 달, 또 일 년, 나중에 일정한 시간을 말함)이 한바퀴 돌아오는 것처럼 때를 기다린다는 뜻이 합(合)하여 '기약하다'를 뜻한다. ❷형성문자로 期자는 '기약하다'나 '약속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期자는 其(그 기)자와 月(달 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其자는 '그'나 '그것'이라는 뜻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달은 주기적으로 모양이 변하기 때문에 옛사람들은 달이 변하는 것을 보고 시간의 흐름을 알았다고 한다. 그러니 期자에 쓰인 月자는 시간의 흐름을 뜻하기 위해 쓰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期(기)는 (1)일정한 기간씩 반복되는 일의 하나하나의 과정(科程) (2)어떤 시기를 몇으로 나눈 그 하나 (3)지질(地質) 시대의 구분의 하나. 세(世)를 다시 잘게 나눈 것 등의 뜻으로 ①기약(期約)하다, 약속(約束)하다 ②기다리다 ③바라다, 기대(期待)하다 ④모이다 ⑤정(定)하다, 결정(決定)하다 ⑥적합(適合)하다, 알맞다 ⑦가르치다 ⑧더듬거리다 ⑨기간(期間) ⑩기한(期限) ⑪기일(期日), 예정(豫定)된 날짜 ⑫돌, 1주년(周年) ⑬때, 기회(機會) ⑭기복(朞服), 기년복(朞年服: 일 년 동안 입는 상복) ⑮백 살 ⑯한정(限定)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희망을 가지고 기약한 것을 기다림을 기대(期待), 어느 일정한 시기에서 어떤 다른 일정한 시기까지의 사이를 기간(期間), 미리 어느 때까지라고 정함 또는 그 시기를 기한(期限), 시간을 정하고 약속함을 기약(期約), 어느 기간의 첫머리를 기초(期初), 기간이나 학기 따위의 끝을 기말(期末), 성취되기를 바람을 기망(期望), 꼭 이루기를 기약함을 기필(期必), 작정한 날짜를 기일(期日), 정해 놓은 기한이 다 참을 기만(期滿), 기약하여 꾀함을 기도(期圖), 어떤 기한이 빨리 옴 또는 빠른 시기를 조기(早期), 임무를 맡아보는 일정한 기한을 임기(任期), 정한 때를 뒤로 물림을 연기(延期), 처음 시기를 초기(初期), 오랜 기간을 장기(長期), 짧은 기간을 단기(短期), 한 해를 석 달씩 넷으로 나눈 각 기간을 분기(分期), 한 학년 동안을 규정에 따라 나눈 수업 기간을 학기(學期), 같은 시기나 같은 무렵을 동기(同期), 끝장의 때나 시기를 말기(末期), 다음의 시기를 차기(次期), 뒤의 시기 또는 뒤의 기간을 후기(後期), 정한 기한 또는 기간을 정기(定期), 기한이 다 참 또는 그 기한을 만기(滿期), 집회나 회의 따위가 열리는 시기를 회기(會期), 알맞은 시기를 적기(適期), 느즈막한 시기를 만기(晩期), 남편과 아내가 되어 한평생 같이 지내자는 아름다운 언약을 이르는 말을 백년가기(百年佳期), 뜻하지 아니한 때에 우연히 서로 만남을 이르는 말을 불기이회(不期而會), 평생에 단 한 번 만남 또는 그 일이 생애에 단 한 번 뿐인 일 이라는 말을 일기일회(一期一會), 형벌의 목적은 형벌이 없게 하는 것을 이상으로 한다는 말을 형기무형(刑期無刑) 등에 쓰인다.
▶️ 三(석 삼)은 ❶지사문자로 弎(삼)은 고자(古字)이다. 세 손가락을 옆으로 펴거나 나무 젓가락 셋을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나타내어 셋을 뜻한다. 옛 모양은 같은 길이의 선을 셋 썼지만 나중에 모양을 갖추어서 각각의 길이나 뻗은 모양으로 바꾸었다. ❷상형문자로 三자는 '셋'이나 '세 번', '거듭'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三자는 나무막대기 3개를 늘어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대나무나 나무막대기를 늘어놓은 방식으로 숫자를 표기했다. 이렇게 수를 세는 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三자는 막대기 3개를 늘어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숫자 3을 뜻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호의를 덥석 받는 것은 중국식 예법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최소한 3번은 거절한 후에 상대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문화가 있다. 三자가 '자주'나 '거듭'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도 이러한 문화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三(삼)은 셋의 뜻으로 ①석, 셋 ②자주 ③거듭 ④세 번 ⑤재삼, 여러 번, 몇 번이고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석 삼(叁)이다. 용례로는 세 해의 가을 즉 삼년의 세월을 일컫는 삼추(三秋), 세 개의 바퀴를 삼륜(三輪), 세 번 옮김을 삼천(三遷), 아버지와 아들과 손자의 세 대를 삼대(三代), 한 해 가운데 셋째 되는 달을 삼월(三月), 스물한 살을 달리 일컫는 말을 삼칠(三七), 세 째 아들을 삼남(三男), 삼사인이나 오륙인이 떼를 지은 모양 또는 여기저기 몇몇씩 흩어져 있는 모양을 일컫는 말을 삼삼오오(三三五五), 삼순 곧 한 달에 아홉 번 밥을 먹는다는 뜻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다는 말을 삼순구식(三旬九食), 오직 한가지 일에만 마음을 집중시키는 경지를 일컫는 말을 삼매경(三昧境), 유교 도덕의 바탕이 되는 세 가지 강령과 다섯 가지의 인륜을 일컫는 말을 삼강오륜(三綱五倫), 날마다 세 번씩 내 몸을 살핀다는 뜻으로 하루에 세 번씩 자신의 행동을 반성함을 일컫는 말을 삼성오신(三省吾身), 서른 살이 되어 자립한다는 뜻으로 학문이나 견식이 일가를 이루어 도덕 상으로 흔들리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삼십이립(三十而立), 사흘 간의 천하라는 뜻으로 권세의 허무를 일컫는 말을 삼일천하(三日天下), 세 사람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든다는 뜻으로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말하면 남이 참말로 믿기 쉽다는 말을 삼인성호(三人成虎), 형편이 불리할 때 달아나는 일을 속되게 이르는 말을 삼십육계(三十六計), 하루가 삼 년 같은 생각이라는 뜻으로 몹시 사모하여 기다리는 마음을 이르는 말을 삼추지사(三秋之思), 이러하든 저러하든 모두 옳다고 함을 이르는 말을 삼가재상(三可宰相), 삼 년 간이나 한 번도 날지 않는다는 뜻으로 뒷날에 웅비할 기회를 기다림을 이르는 말을 삼년불비(三年不蜚), 세 칸짜리 초가라는 뜻으로 아주 보잘것 없는 초가를 이르는 말을 삼간초가(三間草家), 봉건시대에 여자가 따라야 했던 세 가지 도리로 어려서는 어버이를 시집가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을 좇아야 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삼종의탁(三從依托), 키가 석 자밖에 되지 않는 어린아이라는 뜻으로 철모르는 어린아이를 이르는 말을 삼척동자(三尺童子), 세 사람이 마치 솥의 발처럼 마주 늘어선 형상이나 상태를 이르는 말을 삼자정립(三者鼎立), 세 칸에 한 말들이 밖에 안 되는 집이라는 뜻으로 몇 칸 안 되는 오막살이집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삼간두옥(三間斗屋), 가난한 사람은 농사 짓느라고 여가가 없어 다만 삼동에 학문을 닦는다는 뜻으로 자기를 겸손히 이르는 말을 삼동문사(三冬文史), 삼생을 두고 끊어지지 않을 아름다운 언약 곧 약혼을 이르는 말을 삼생가약(三生佳約), 세 마리의 말을 타고 오는 수령이라는 뜻으로 재물에 욕심이 없는 깨끗한 관리 즉 청백리를 이르는 말을 삼마태수(三馬太守), 세 치의 혀라는 뜻으로 뛰어난 말재주를 이르는 말을 삼촌지설(三寸之舌), 얼굴이 셋 팔이 여섯이라는 뜻으로 혼자서 여러 사람 몫의 일을 함을 이르는 말을 삼면육비(三面六臂), 사귀어 이로운 세 부류의 벗으로서 정직한 사람과 성실한 사람과 견문이 넓은 사람을 이르는 말을 삼익지우(三益之友), 세 가지 아래의 예라는 뜻으로 지극한 효성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삼지지례(三枝之禮), 머리가 셋이요 팔이 여섯이라 함이니 괴상할 정도로 힘이 엄청나게 센 사람을 이르는 말을 삼두육비(三頭六臂), 세 번 신중히 생각하고 한 번 조심히 말하는 것을 뜻하는 말을 삼사일언(三思一言) 등에 쓰인다.
▶️ 樂(노래 악, 즐길 락/낙, 좋아할 요)은 ❶상형문자로 楽(락)의 본자(本字), 乐(락)은 간자(簡字)이다. 현악기를 본뜬 글자, 신을 모시는 춤을 출 때 손에 가지는 방울을 본뜬 글자, 북 따위의 타악기를 본뜬 글자 등의 유래가 존재한다.기본 음가는 악이고, 전주된 음가로 락과 요가 있다. 락은 주로 형용사로 사용될 때, 요는 좋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락이 두음법칙이 적용되면 낙으로 표기된다. ❷상형문자로 樂자는 '음악'이나 '즐겁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樂자는 본래 악기의 일종을 뜻했던 글자였다. 갑골문에 처음 등장한 樂자를 보면 木(나무 목)자에 絲(실 사)자가 결합한 모습이었다. 이것은 거문고처럼 실을 튕겨 소리를 내는 악기와 줄을 표현한 것이다. 금문에서는 여기에 白(흰 백)자가 더해지게 되는데, 이것은 줄을 튕길 때 사용하는 피크를 뜻하기 위해서였다. 또 음악을 들으면 즐거우므로 '즐겁다'라는 뜻도 파생되었다. 그래서 樂(악)의 경우는 ①노래, 음악(音樂) ②악기(樂器) ③연주하다 ④아뢰다(말씀드려 알리다) 등의 뜻이 있고, 樂(락/낙)의 경우는 ⓐ즐기다(락) ⓑ즐거워하다(락) ⓒ편안하다(락) ⓓ풍년(豐年)(락) ⓔ즐거움(락) 등의 뜻이 있고, 樂(요)의 경우는 ⓕ좋아하다(요) ⓖ바라다(요)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노래 가(歌), 노래 요(謠), 노래 구(謳)이다. 용례로는 인생을 즐겁게 여기거나 세상을 밝고 좋게 생각함을 낙관(樂觀), 아무런 걱정이나 부족함이 없이 살 수 있는 즐거운 곳을 낙원(樂園), 늘 즐겁게 살 수 있는 곳을 낙토(樂土), 재미 붙일 만한 일을 낙사(樂事), 경기 등에서 힘들이지 않고 쉽게 이기는 것을 낙승(樂勝), 세상이나 인생을 즐겁게 생각함을 낙천(樂天), 노래의 곡조를 악곡(樂曲), 음악 기구를 악기(樂器), 작곡에 관한 착상이나 구상을 악상(樂想), 음악에서 연주되는 음의 배열을 악보(樂譜), 노랫소리 또는 가락스런 소리를 악음(樂音), 음악을 연주하는 단체를 악단(樂團), 물을 좋아함을 요수(樂水), 산을 좋아함을 요산(樂山), 즐기기는 하나 음탕하지는 않게 한다는 뜻으로 즐거움의 도를 지나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낙이불음(樂而不淫), 즐거움도 극에 달하면 슬픔이 생긴다는 말을 낙극애생(樂極哀生), 타향의 생활이 즐거워 고향 생각을 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낙이사촉(樂而思蜀), 즐거움은 언제나 걱정하는데서 나온다는 말을 낙생어우(樂生於憂), 안락은 고통의 원인이라는 말을 낙시고인(樂是苦因), 천명을 깨달아 즐기면서 이에 순응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낙천지명(樂天知命), 즐겨서 시름을 잊는다는 뜻으로 도를 행하기를 즐거워하여 가난 따위의 근심을 잊는다는 말을 낙이망우(樂而忘憂), 즐거움에 젖어 촉 땅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쾌락 또는 향락에 빠져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는 어리석음을 비유하는 말을 낙불사촉(樂不思蜀), 즐거움 속에 삶이 있다는 뜻을 나타냄을 일컫는 말을 낙중지생(樂中之生), 좋아서 하는 일은 아무리 해도 지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요차불피(樂此不疲),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한다는 뜻으로 산수 경치를 좋아함을 이르는 말을 요산요수(樂山樂水)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