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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뜻 길 62주년 회고(回顧)
1. 출생과 성장과정
요람에서부터 무덤까지를 일생이라고 한다. 나의 출생지는 충남 아산군 염티면 염성리 216번지다. 윤창희 부친과 강순분 모친의 슬하에서 2남7녀 중 6녀로 태어났다.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유교적 가문에서 양육이 되어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자랐다. 모든 자녀가 부모님 의중을 잘 파악함으로 7남매 모두가 순종하여 주변사람들의 칭송과 관심 속에서 셋째 딸까지는 혼사가 무난하게 이루어진 셈이다. 그 중에 둘째 윤기숙 언니는 당시 이웃 마을의 박씨 가문의 박보희 대위와 혼인도 집안의 어른들께서 결정함으로 1953년 11월에 원만하게 성사가 되었다. 그 후 언니는 결혼 이후 남편 박보희 장교의 통일교 입교는 서서히 아버지의 마음을 변화시켰다. 자연스럽게 서울의 딸집을 방문하게 되었고 형부께서 낮에는 군인으로 근무하고 퇴근 후에는 집으로 돌아오시면 원리강의를 사위로부터 자동적으로 듣게 되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예산농업학교를 졸업하고 국가 공무원으로 아산군청을 거처 염티면장을 지내시며 각종 지역활동에 경험이 풍부하신 분이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에서 전도 나오신 두 분(송기주 선생 외)이 우리 집 사랑채에 어른들을 모아놓고 원리강의를 하곤 하였다. 그런 이후 아버지는 뜻을 놓고 당신 거취문제를 고심하시며 새로운 삶의 변화를 시도하신 것 같았다. 고향의 모든 농지와 집을 정리하여 온양으로 이사를 하였고 그 후 1962년 봄에는 급기야 서울로 이사를 하였다. 그 당시 나는 온양여중에서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면서 아버지의 따뜻한 보호하심으로 처음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서울입성으로 아버지는 어떠한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여러 차례 서울 딸집 방문 중에 당시 문선명 선생님을 뵙게 되었고 모시고 식사도 하시고 정겨운 말씀도 나누시게 되었다. 그 후 1960년도 참부모님의 성혼식에도 참석을 하셨다.
2.원리교육으로 다시 태어남
내가 통일교회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아버지의 사망이었다. 1962년 7월 어느날 건강하신 아버지께서 당시 52세로 저녁을 잘 드시고 동네 산책을 다녀오신 후 주무시다가 뇌출혈(腦出血)로 돌아가신 것이 내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버지에게 내일새벽에 일찍 깨워달라고 부탁을 드렸는데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가 되었으니 착잡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당시 아버지의 성화는 우리 집안을 뜻 앞에 인도하기위한 제물의 희생이심을 차츰 알게 되었다. 아버지 49제를 지난 후 나의 꿈에 아버지는 편치 아니한 모습으로 나에게 뭔가를 예시하듯이 나타나셨다. 아버지의 성화에 대한 궁금증이 있어서 아버지가 다녔던 교회를 가보기로 작정하고 1962년 9월 첫 일요일 당시 교사인 넷째 언니가 청파동교회 가는데 따라 나섰다. 다음날 학생들을 위한 낙원동 통화당 2층 강의소에서 최창림 당시 성화학생부장의 원리강의를 월요일 서론으로부터 토요일 재림론까지 경청하면서 하나님의 실존과 인간의 관계, 불완전한 역사 속에서 내가 살아가야할 방향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시절 학생회에서는 매일 새벽 남산팔각정 정상에 올라 기도회를 하고 등하교를 하였다. 하교 후에는 청파동의 본부교회에 모여와 말씀을 듣고 저녁 늦게 귀가하며 다음날 새벽에 또 다시 남산에 오르내리는 성화학생들의 열정에 합류하였다. 원리를 알게 되어 나는 확고한 신념으로 변화가 되어 두려움 없이 전진하게 되었다. 이것은 분명히 영계에 계시는 아버지가 인도하고 협조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3. 축복식 성수요원과 참부모님 모심의 생활
입교 다음해 고등학교 2학년 1963년 7월24일 124가정 축복결혼식이 시민회관에서 거행되던 날 놀랍게도 나는 주례이신 참부모님의 성수를 들고 뒤따라 아버님의 옆에 서서 성수로 성별하시도록 도와드리는 역할을 하였다. 참어머님의 성수는 동급생인 강인순 친구가 담당하였다. 역사적인 축복식에서 참부모님을 모실 수 있는 영광을 갖게 되었다. 성화학생 9회 수료 후 진학과 전도활동 현장으로 가느냐를 놓고 갈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급한 뜻을 놓고 그 당시는 진학보다 전도일선으로 나가기를 바라는 분위기였다. 나는 고1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성한 아들도 없고, 넷째 언니가 초등학교 교사로 가장이 되었고 다섯째 윤문혜(777가정, 석준호 전 협회장 사모) 언니는 고3을 졸업하고 미국의 박보희 총재 문화재단을 돕기 위해 63년 봄에 도미(渡美)를 하였고 다음인 내가 고민을 하다가 집안의 경제문제를 생각하며 취업을 하게 되었다. 65년 졸업 전 1월에 신한제분주식회사에 입사를 하였다. 그러나 원리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 무미건조한 회사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이 괴롭고 고민스러웠다. 그러던 중 그해 가을 9월에 반가운 소식을 접하고 강원도 장성출신인 박경원 도지사가 통일교회 젊은 청년들을 강원도에 파견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회사에 사표를 내고 집에 어머니께 허락을 받는다는 것이 어려워서 아무 말도 없이 간단한 옷가지를 챙겨 수련회에 참석하였다. 그 당시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던 것이지 하늘의 역사임에 틀림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매우 단호하게 교회출석을 반대하셨다. 개종으로 인한 편지풍파를 염려시고 집안의 변고가 걱정스러웠던 것 같았다. 하나 뿐인 아들마저 잘 못 될까봐 반대하며 마음고생을 많이 하고 있을 때였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원생금 순회사의 정성으로 교회도 나오시고 독신축복도 받으셨다. 유일한 아들인 윤기병과 막내 윤기항 동생 모두가 뜻 안에서 축복을 받게 된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도움심이 크신 것 같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1965년 9월 청파동 본부에서 수련교육이 시작되었다. 수련 3일이 지날 무렵 성화학생 최창림부장님이 참어머님께서 보자고 하신다는 전갈을 주시어 어머님을 뵙고 하시는 말씀이 “이제부터 네가 효진이를 돌보아줘야겠다”고 하시어 순종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며 경배를 올렸다. 앞으로 일주일 후면 강원도로 가겠다 다짐하고 나섰는데 하늘은 귀하게 보시고 보다 중요한 임무를 주심에 감사드렸다. 당시 아버님은 세계 순회노정에 계시어 후에 뵙게 되었다. 부족하지만 하늘이 소명하시었으니 정성과 순종의 도리를 다할 것을 기도드리고 모심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효진님을 모시는 기간은 나의 생애에 가장 잊을 수가 없는 값진 순간들이었다. 참부모님께서 효진님에게 주시는 사랑이 모시는 나에게까지 그 사랑을 온전히 체휼할 수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육신의 부모에게서 다 받지 못한 사랑과 교육을 참부모님께서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다.
참부모님께서는 대학 4년간의 교육도 시켜주셔서 1970년부터 74년까지 수도여자사범대학을 무난히 졸업하게 되었다. 대학 재학 중에는 원리연구회활동도 열심히 하였다. 1972년 9월부터 98년 10월까지 박보희 총재님을 모시고 선화동산에서 일어나는 문화교육 모든 사업과 행사업무를 수행하면서 한편으로는 참부모님의 직접 지시를 받는 별정직 직무를 이행하였다. 그러는 동안 참부모님 가정에서의 만7년 문화재단 소속 26년 도합 33년을 공직할 수 있었음에 감사를 드린다.
참부모님께서는 65년 제1차 세계 순회노정을 마치시고 1966년 봄 이후 수택리 통일산업 건설현장을 거의 매일 가시면서 본격적인 경제기반에 박차를 가하시는 때였다. 그곳에 가실 때에는 참부모님께서 효진님과 동행을 많이 하셨다. 그 당시 747번호를 단 지프차로 청파동에서 수택리까지 다니시고 지방 순회를 하시곤 하셨다. 66년 후반에서야 세단승용차가 준비되어 비로써 편안히 뒷 자석에 앉으시게 되었다. 아마도 효진님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참부모님 승용차를 효진님과 참 많이 타게 되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효진님과 끊임없이 차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이야기와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그 당신 맹호부대, 백마부대 군가가 효진님의 기상을 북돋아주는 최고의 놀이 노래였다. 철모를 쓰고 장난감 총을 어깨에 메고 차렷 자세로 앞장서 걸으면서 호각을 불며 대장 노릇을 하곤 하셨다. 부모님 모시고 수택리를 가고 오는 차안에서 효진님과 함께 부른 “엄마야 누나야”는 그 후 이 노래는 아버님이 즐겨 부르시게 되고 여흥시간이면 단골노래가 되기도 했다.
수택리 공장에 가시게 되면 근처의 장자연못에서 낚시를 시작하셨다. 참부모님의 낚시섭리의 시발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강의 팔당 하류에서 상류로 청평댐 아래에 때로는 텐트를 치시고 주무시면서 낚시정성을 드리셨다. 1968년 한 여름에 청평댐하류에서 텐트를 치고 머무시다가 강물이 차올라와 텐트를 갑자기 옮겨야하는 일도 있었다. 큰 잉어를 낚으시면 즉시 큰 솥을 걸고 보양 탕을 만들어 몸이 약한 식구들을 먹게 하셨다. 결국에 청평 호반 여기저기에서 낚시터를 옮기시더니 지금의 청평 마리나 선착장이 있는 장소에서 거대한 꿈의 성소로 자라를 잡으시고 작은 숙소와 수련장소를 마련하시고 오늘날의 천주평화동산으로 발전하게 된 것을 생각할 때 감개가 무량하다.
4. 1800가정의 축복은사
일찍이 참아버님께서는 나의 운명을 꿰뚫어 보시고 계심을 알게 되었다. 67년도 어느 날 수택리에서 귀가하시는 차안에서 ‘ 기온이 운전하면 잘 할 거야.’ 때론 ‘너는 팔자가 세서 시집은 늦게 가는 게 좋다’ 그 말씀을 듣고 내심 큰 충격을 받아 마음깊이 묻게 되었다. 내 또래의 동료들은 이르면 430가정 혹은 777가정에 거의 다 축복결혼에 참여를 하였다. 드디어 1975년 1월초 1800가정 축복약혼이 시작되었다. 이때도 나는 한국문화재단에 근무하고 있으면서 아버님 직속으로 있다보니 그 누구도 권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한국-한국 쌍 약혼이 끝나는 토요일 점심 진지를 드신 후 부모님을 뵙는 자리에서 ‘ 기온이는 미국사람하고 해 주시죠? 어머님께서 아버님께 말씀을 드리셨다. 그 동안 몇 번이나 말씀을 하셔도 아무 응답이 없으셨는데 드디어 아버님께서 저를 보시고 ’ 그래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하고 처음으로 하문을 하셨다. 나는 이 시간이 지나면 여지없이 어머님말씀대로 수택리 한-미 약혼 쪽으로 갈 것 같아 용기를 내어 ’아버님 제게 맞은 한국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한국사람 하고 해 주세요‘라고 말씀을 드니니까 ’그럼 지금 성전으로 나가 기다려라‘고 하셨다. 말씀대로 처음으로 약혼대열에 앉아 있으니 아버님께서 나오시어 중앙통로를 왔다 갔다 하시면서 나를 세우시고 남자 쪽의 맨 뒤에 있는 한 사람을 보시고 ’윤기온을 만나봐라’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2층 사무실로 올라가 서로를 파악할 대화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식구로 느껴지지 않아 더 머물수가 없어 내가 먼저 내려와 아버님께 “아버님, 교회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 같아요.”라고 말씀을 드리니 “전도하면서 살아야지~” 하고 하셨다. 아~ 이것은 하늘이 내 운명을 아시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서있는데 윗 층에서 뚜벅뚜벅 내려와 내 옆에 나란히 서게 되어 경배를 드리면서 약혼이 성립이 되었다.
5. 나의 주체에 대하여
나의 주체는 광주 사범학교를 나오신 교사 교장을 역임하신 양제연 부친과 문갑춘 모친의 3남2녀 중 차남으로 1943년 1월25일 제주도 모슬포에서 출생하여 목포 유달초등학교와 목포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2년~1966년 한국외국어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66~1968년도까지 ROTC 군복무를 하였고 1969~1970년까지 목포제일여고 교사로 재직한 후에 1970~1971년 크리스챤 신문사에서 근무하던 중 1971년 7월 주간종교 창간 취재 기자로 영입되어 1980년까지 취재부장과 편집국장을 역임하였다.
1980~1981년 초교파협의회 해외담당국장 중에 영국과 미국 연수를 하고 1982년~83년까지 강남외국어학원장을 거쳐서 1984년~1992년까지 워싱턴타임스 서울지국장을 역임하면서 세계 언론인대회 스태프로 일본, 콜롬비아, 모스크바 등을 국내 언론인들과 참여하였다. 그리고 1992년 1월부터 95년까지 세계일보 사업본부 본부장 직분을 수행하였다.
1975년도 축복을 받게 된 동기는 아직 식구는 아니었지만 이재석 주간종교 사장이 별도로 아버님께 간청을 드려 허락을 받고 참석을 하였다. 모든 것이 본인의 뜻대로가 아닌 하늘의 뜻이라 여기며 축복의 은사를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드렸다. 축복결혼 후 모든 대상부인들은 21개월 임지생활을 하면서 역사적인 여의도 구국세계대회의 성공을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을 하였지만 나는 대열에 동참하지 못하고 서울에서 임지 아닌 또 다른 임지생활을 하면서 나의 주체와 각자의 위치에서 가까워지기를 노력하였으나 어려움이 가중되어 고민하다가 76년 말경 가정출발로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는 주간종교 신문사로 인연이 되어 축복가정이 된 이후 워싱턴타임스 서울지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세계 언론인 대회를 위해 국내 언론인들을 인솔하고 마지막 모스코바대회까지 참부모님의 역사적인 행사에 스태프로 일한 것은 그로서는 제일 큰 보람 있는 기간이었을 것이다. 이후 참부모님은 세계일보에서 일하라 지시하셨는데 그의 적성에 맞은 신문제작 분야가 아닌 사업본부에서 3년 여 본부장으로 시무를 하였다. 교회조직 안에서 이렇게 참여할 수 있었음은 참부모님의 사랑과 배려로 가능하였다. 참아버님은 나의 신앙과 정성으로 그를 전도하며 좋은 가정을 이루고 아들 딸 낳고 잘 살기를 친정 부모님처럼 바라시고 지켜보시고 챙겨주시었으나 본인의 타고난 성품도 있겠고 나의 정성과 사랑이 부족하여 부모님께 심려 드렸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6.나의 가족 구성원에 대하여
우리가정은 장녀 정화, 차녀 정인 두 딸을 두었다. 1992년 장녀가 중학생이 되어 상급학교 진학과 진로를 놓고 고심하게 되었다. 입시경쟁이 심한 풍토를 벗어나 자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곳으로 보내야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잊고 있었던 10여 년 전 미국 이민으로 갈 수 있는 조건을 윤문혜 언니가 만들어 준 것이 상기되어 언니의 어려운 결단으로 두 딸이 93년 94년도에 걸쳐 도미(渡美)하여 영주권자 신분으로 입국 얼마 후에는 시민권자가 되어 무상교육과 대학에서 각종 장학금 이외 많은 혜택을 받으면서 자기들이 원하는 공부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도미 초기에 숙식과 후견인 역할을 해준 문혜 언니와 석준호 형부의 따뜻한 배려가 있어 가능한 일이였음에 늘 감사하고 있다. 딸들이 미국에 거주한 관계로 두 명의 외국인 사위를 맞게 되었고 큰 딸 정화는 부부쉐크로 아들만 둘이고, 작은 딸 정인 변호사 부부로 딸만 둘을 두었다. 이리하여 직계가족은 모두 열 명으로 구성되었으니 하나님께 귀일(歸一)할 수 있는 조건은 성립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자위(自慰)해 본다.
7. 참부모님 인도하심에 따라
1996년도 어느 날 아버님은 제게 신랑 뭐하고 있나? 하고 하문하시어 “세계일보 신문사 그만 두고 집에 있습니다.” 라고 말씀을 드리니 그 사람 신앙은 없어도 사람은 좋지“ 하시는 말씀을 주셨다. 맞다. 아버님은 당시 신앙 없는 줄 아시면서 사람 좋은 면을 보셨구나~ 하고 생각하니 그와의 인연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동안 나의 신앙 동반자로서 아직도 힘들어 하고 있지만 나의 업무활동이나 일상생활은 아주 편하게 대해 주었음에 그를 사랑하고 참부모님과 조상들께 감사를 드린다. 16세 나이에 신앙인이 되게 하시고 자녀로 축복가정으로 이끌어 주신 하늘 앞에 감사하고 남은 생애 그를 위하고 하늘이 바라시는 뜻대로 살아가기를 다짐하며 그와 함께 두 손 잡고 걸어갈 것이다.
끝으로 아버님과 효진님을 모시고 수택리를 오가면서 많이 불렀었던 그 노래를 회상해 보면서 62년간의 나의 회고를 마감하고자 한다. 김소월 시인의 시집 <진달래꽃>에 수록된 “엄마야 누나야”는 4행으로 구성된 짧은 민요조의 서정시이다. 뜰에는 금모래가 반짝이고,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가 아름답고 평화로운 자연 속에서 엄마와 누나가 함께 단란하게 살자는 이 노래는 우리식구들이 많이 부르는 것은 가화만사성이라는 가정이 중요성을 찬양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추억이 아름다운 이 노래를 흥얼거려 보면서 필을 놓는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주체: 양성길(梁成吉), 대상: 윤기온(尹基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