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차 소식>
- 길을 잃은 자벌레에서 우리를 찾아봅니다. -
높은 성벽에 가로막혀 희망을 잃었다고 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길을 잃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합니다. 모성애에 대한 공권력을 정당화하는 낡은 질서. 그곳에는 감동도 희망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벌레와 같은 느릿한 순례의 발걸음은 두려움에 가득 차 있는 낡은 질서가 아니라, 그곳을 넘어 새로운 가치를 꿈꾸었는 자벌레들에게 희망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길을 발견합니다. 길 잃은 자벌레에서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봅니다.
<오늘 아침도 하늘을 쳐다보며>
어제는 남원 도통동 성당에서 하루 밤을 보냈습니다. 몸도 마음도 편안하게 기댈 수 있게 해준 것도 송구한데 도통동 수녀님들께서 출발준비를 하는 순례단에게 후원금 봉투를 내미십니다. “감사합니다.”라고 꾸벅 고개 숙이지만 마음속으로는 ‘죄송하고 고마워서’ 이내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오늘 날씨 좋겠는데 바람도 불고” 누군가 먼저 하늘을 살피고 말을 꺼내면 모두 하늘을 쳐다보게 됩니다. 태양의 은혜로움이야 왜 모르겠냐마는 오체투지를 하시는 두 분 성직자들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태양은 목뒤를 내리꽂는 강렬한 비수와 같이 느껴지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아스팔트 차도 위에서 길을 잃은 자벌레>
오늘은 광치동 태양원룸 앞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전일 일정에서는 광치교차로에서 끝났지만 광치 I.C, 좁은 가변차로, 고가차로, 급커브 등 이동에 위험요소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 500m를 차량으로 이동한 후 순례 정상 일정인 광치동 태양원룸에서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춘향터널 200m 전에서 차량으로 이동하고, 터널 200m 후방에서 다시 출발하여, 오리정 휴게소에서 점심식사, 이도령 고개를 지나 춘향고개까지 총거리 4.8km를 이동했습니다.
출발지인 광치동 태양원룸에서 “출발하겠습니다.”라는 진행팀장님의 구호와 함께 100m를 이동한 후, 휴식시간에 누군가 “자벌레다”하고 외칩니다. 그 소리에 순례단의 시선이 아스팔트 한곳에 집중이 되었습니다. 이곳저곳을 막고 둘러서는 사람들, 그리고 카메라를 들이대니 자벌레는 가던 길을 멈추고 머리를 고추 세우더니 갈팡질팡 하며 길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 모습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어쩌면 길 없는 길에서 길을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하는 순례기에 좌우로 머리를 흔드는 자벌레에서 가야 할 길을 찾는 우리 사회 모두의 모습을 봅니다. 혹은 인간도 땅에서 기다보니 모든 생명들이 눈앞에 선명하게 어른거리고 나와 다르지 않다는 동체대비의 심상이 그려졌는지도 모르지요. 누군가 작은 잎사귀를 들 것 삼아 재빨리 도로 밖 숲속으로 조심스럽게 놔줍니다.
<설해목>
남원-전주간 17번 국도는 거대한 덤프트럭들이 속도 경쟁을 하듯 경적을 울리면 달립니다. 달리는 트럭에 빨려 들어갈세라 덜컥 겁이 나서 바깥쪽으로 움츠립니다. 그 와중에도 두분의 성직자는 휴식시간 고요히 앉아 명상을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지긋이 눈을 감고 염불을 하시는 수경 스님의 모습에 그 앞을 지나갈 때면 사뿐사뿐 조심스럽게 지나가게 됩니다.
오늘 오전 순례에 잠시 참여하신 소향자(남원)님은 문규현 신부님의 제자입니다. 지나가는 길에 들러 신부님께 안부를 여쭙기를 “힘드시죠 신부님?”라고 하니 신부님은 “웃음을 잃지 않으시고 “괜찮아 괜찮아.”라고 연신 말씀하십니다. 소향자님은 “세상이 살기 좋았으면 두 분이 저렇게 애를 쓰시지 않아도 되는데.. 나라의 지도자들이 당신들 뜻대로만 하려고 하니 문제.”라고 하며 아파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연출될 때면 문득 법정 스님께서 쓰신 설해목(雪害木)란 글이 생각납니다. 한 겨울 밤중의 산사. 흰 눈이 사뿐사뿐 부드럽게 나뭇가지에 내려 앉습니다. 눈이 쌓이다 보면 커다란 소나무들이 우지끈하고 부러지며 천둥 같은 굉음을 냅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조용한 산사에서 노곤하게 자는 사람들이 놀라 깹니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말입니다. 부드럽게 눈을 지긋이 감고 고요히 명상을 하시는 분들의 모습은 세상을 강하게 설득시키려 하지 않아도 우리의 잘못된 마음을 이내 항복시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리정에서의 점심식사>
오늘 순례중 특이 구간은 이도령 고개와 성춘향 고개입니다. 춘향터널을 지나면 남원 북쪽 4km 지점부터 시작되는 고개가 이도령 고개입니다. 두어 번쯤 완만한 고개를 틀다가 바짝 오른쪽으로 커브를 틀면 바로 전방에 ‘이도령 고개’라고 새긴 크고 긴 바위가 흰 바침돌 위에 옆으로 놓여 있습니다. 그 고개다 끝나고 내림길을 완전히 내려서서 평지에 다다랐다고 느껴질 즈음 왼쪽에 오리정(五里亭)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오리정은 춘향이 이도령을 따라 5리를 걸어간 것을 기념한다고 합니다.
오늘 점심식사는 오리정에서 했습니다. 오리정 뒤편에 있는 쉼터는 벤취와 정자가 있어 노독을 풀기에 적합한 장소였습니다.
식사 후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에서 순례에 참여 하시려고 10여분이 오셨습니다. 벤치에 앉아 도란도란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윤종숙님은 “신부님 저는 오늘 10번의 절이 목표인 데, 다음 날은 20번을 하렵니다.”라고 하자 “나는 매일 목표가 1배야. 나머지는 당신께서 주시면 또 한배하며 여기까지 왔다.”고 하십니다. 또 “신부님 건강하셔야 해요.”라고 하시자 “건강도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더라. 당신께서 주셔야 된다.”고 하십니다. 신부님은 순례 참여자 모두에게 항상 신앙심을 북돋아 주시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순례단은 오리정에서 체력과 정신을 재충전 한 후 오후 일정에 임했습니다.
<뜨거움과 따뜻함>
오후 일정은 춘향터널 지나 500m 지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침에 예상했던 선선한 날씨와는 달리 가을 햇살은 강렬하기만 합니다. 이 더위에 오체투지를 하시는 성직자 두 분 보다 더 연세가 들어 보이시는 노인 한 분이 함께 오체투지를 따라하셨습니다. 이열치열이라고 했던 가요. 물러나지 않고 뜨겁게 맞서는 노인의 의지가 감동스럽고 또 다른 희망을 불러 일으킵니다.
또, 원불교 총회에 오셨다가 이곳에 들르신 원불교 교무님 몇 분은 차량 트렁크를 여시더니 과일이며 물품을 남김없이 주고 가셨습니다. 몸은 더위에 지치고 힘들지만 순례에 참여하시는 분들의 뜨거운 의지와 따듯한 손길은 육체적인 더위를 날려버립니다.
오후 일정은 춘향고개를 끝으로 조금 일찍 마쳤습니다. 오늘도 참여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
불교수행의 지극한 가르침의 방편 중에 하나가 반조(返照)입니다. 반조란 회광반조(廻光返照)의 준말로 ‘반성, 성찰의 의미로 마치 낙조시에 태양이 갈무리를 머금으면서 지듯이 스스로 생각을 머금고 돌이켜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옛 고승대덕을 찾아가 공부하는 방법을 여쭤보면 두 손을 꼭 잡고 “공부는 반조가 최고야, 알았지 반조가 최고야”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오늘도 반성과 성찰을 통해 자신을 비춰보고, 투철한 직관력으로 우리사회에 직면한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고자 많은 분들이 참여하셨습니다.
광주호남신학대학원오신 김대성님은 “막상 직접보니 가슴이 아픔니다. 집에 편안하게 있는 것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영성과 기도생활을 중요시 하지만 길에서 기도걸음을 하니 마음이 참 편안합니다. 예수님께서 길 위에서 기도하는 것을 왜 가르쳤는지 조금이나마 이해가 된다,”며 순례소감을 말씀하셨습니다. “종교인은 불의를 보고 침묵하지 않기 때문에 순례를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사회는 좀 더 가지려는 욕심에 덮여 있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국민들의 마음이 모아져야 현재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리산에서 사시는 시인 이원규님은 “참 못 말린 게 한입니다. 도리상으로 보면 말려야 하고 세상 꼬라지를 보면 말릴 수도 없고, 누군가 해야 할 일인데... 참 어렵네요.”라며 한숨 쉬셨습니다. “운하, 교육, 정치, 남북, 종교가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오히려 한반도가 선진국에서 후진국 대열로 역주행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대통합을 이루어도 쉽지 않은 일인데 쪼가리가 나고 있어요.”라고 우리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셨습니다. “두 분의 행보는 소신공양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을 촛불처럼 불살라 ‘제발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를 설득하지 않아도 두 분의 고행자체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의 배종열님은 오체투지를 직접 따라하시면서 “평화와 생명이 넘치는 세상을 위해, 더불어 함께하는 세상을 위해 오체투지를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두 분 노력의 결실이 비정규직 문제를 비롯한 사회전반적인 문제를 되돌아보는 단초가 되었으면 합니다. 정말 우리의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기를 기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길의 끝이 어딘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 길을 가고, 그 길의 끝을 찾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함께 이 길을 가는 모두는 동지입니다.
<함께하는 사람들>
송희철, 정재권, 윤병일(서울) / 김형근 (평화동 성당) / 박장건(구미) / 양해석(남원불교대학) / 배무궁, 김대성(광주호남신학대학원) / 임성호(남원물사유화저지대책위) / 소향자(남원하정동) / 임수경 / 김기곤 신부(천주교구나바위성당) / 배종열 외 9명(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 바자울, 김선희(노삼모) / 정진숙(남원) / 이성연, 이선묵, 오경희 교무(진주,광양,통영교당) / 전미숙 외 3명(남원) 등이 함께 순례를 진행하였습니다.
<일정 안내 - 상황에 따라 변동 가능>
● 9월 23일(화) : 오리정 휴게소 300m 후방 춘향고개(시작) - 17번 국도(경유) - 대정리 분두고개(종료 예정)
● 9월 24일(수) : 대정리 분듀고개(시작) - 오수관광농원(경유) - 의견공원 앞(종료 예정)
● 9월 25일(목) : 의견공원 앞(시작) - 오수휴게소(경유) - 군평리 SK 주유소(종료 예정)
● 9월 26일(금) : 군평리 SK 주유소(시작) - 봉천역 인근 17번 국도(경유) - 봉강리 보건진료소 앞(종료 예정)
● 9월 27일(토) : 봉강리 보건진료소 앞(시작) - 월평로터리(경유) - 임실제일교회 앞(종료 예정)
● 9월 28일(일) : 휴식 예정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 전국 공무원노동조합전북본부남원시지부에서 후원금과 음료, 얼음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 남원시물사유화대책위에서 저녁식사(21일)를 후원해 주셨습니다.
- 천주교 도통동 성당에서 후원금을 후원해주셨습니다.
- 남원에 사시는 소향자님께서 후원금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 대한호국불교소림선종 가산스님, 연화스님께서 후원금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에서 후원금, 과일, 밑반찬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 남원에 사시는 서기홍님께서 식수와 음료를 후원해 주셨습니다.
- 이성연, 이선묵, 오경희 교무님께서 과일 등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 실상사 신도 진여화 보살님께서 후원금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 김인숙 외 남원 시민 분들께서 저녁식사를 후원해 주셨습니다.
- 남원시 이백면 정원 황토방에서 잠자리를 제공해 주셨습니다.
* 도보순례 일정과 수칙은 http://cafe.daum.net/dhcpxnwl 공지사항을 참고 바랍니다.
2008. 9. 22
기도 -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찾아서
진행팀 문의 : 010-9116-8089 / 017-269-2629 / 010-3070-5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