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개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연산군의 유배지가 기다렸다는 듯 초라한 모습으로 다가선다. 제일 먼저 "연산군 유배지"라고
쓴 커다란 비석이 보이고, 중앙에는 교동도 유배 문화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 뜰에는 황금 햇살이 고요히 내려앉았다. 왼쪽엔 유배 생활을 하셨던
방 두 칸에 부엌 하나 딸린 조그마한 초가집이 을씨년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울타리는 가시가 달린 탱자나무를 빙 돌려 심었다. 유배 자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심는다고 한다. 이 법은 연산군 자신이 만든 법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자기가 만든 법에 자기가 갇히고
말았다. 방문 앞에는 내시가 허리를 숙여 서 있고, 옆에는 시중드는 시녀 둘이 시무룩하게 있다. 마당 한쪽 편엔 유배 오실 때 탔던 마차가
놓여있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초가집은 애처롭게도 연산군의 넋이라도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듯 방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비록 유배 생활을 했던
집이지만 다행히 오늘은 풋풋한 3월의 향기가 날아와 쓸쓸해 보이는 유배지를 향기로 채워준다.
연산군은 어떠한 사람인지 먼저
알아보자. 매우 내성적이면서 착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원래는 멀쩡했다고 하는데, 연산군 모친(생모)이 강제적으로 폐위(사악을 받고 죽은 경우)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미치광이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역사와 정치에는 정답이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를 오로지 난폭한 폭군으로만 알고 있다. 정말 연산군은 피도 눈물도 없는 폭군이었을까? 수백 년간
폭군으로만 알려져 있었던 연산군, 그는 업적조차 없었던 것인가? 그리고 과연 연산군이 폭군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조금씩 연산군의 기록을
파헤쳐보자.
연산군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과 폐비 윤 씨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폐비 윤 씨가 궁에 있을 때, 윤 씨와 성종이
싸운 적이 있었는데, 윤 씨가 잘못하여 용안(임금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었다. 즉시 윤 씨는 궁 밖으로 쫓겨났고, 그녀는 매일 자신의 집에서
궁이 제일 잘 보이는 큰 바위에 흰 치마를 걸어놓고 매일 울었다 한다. 윤 씨가 반성한다는 것을 알게 된 성종은 사람을 시켜 윤 씨의 생활
태도를 보고 오라 하였는데, 그 사람에게 대비 윤 씨가 반성은 하지 않고 임금을 헐뜯는 말을 한다고 하라’며 돈을 주었다. 요즈음 공무원들의
금품 수수 비리 같은 것과 비슷하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성종은 화가 나서 윤 씨에게 사약을 내렸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연산군은
정현왕후 윤 씨가 친어머니로 알고 어린 시절과 즉위 4년을 보냈다. 역사책에 의하면 즉위 4년간은 녹도에 침공한 왜구를 격퇴하고 만주에 살던
여진족을 회유 또는 토벌하는 등 국방에 주력하였다. 한편, 사창(社倉), 상평창(常平倉), 진제창(賑濟倉)의 설치로 빈민구제에 힘썼고,
사가독서를 부활, <경상우도 지도>, <국조보감>, <역대 제왕 시문잡저>, <여지승람>의 완성 등
다소 업적을 이룩하였다고 한다.
연산군은 1494년부터 1506년까지 12년간 재위하여 조선 10대 임금이 되었다.
1476년(성종 7년) 11월 7일 부왕인 성종과 판 봉상시사 윤기견의 딸인 폐비 윤 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7살 세자로 책봉되어
후계자 수업을 시작해 19세에 조선 제10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그가 극도로 포악한 정치를 한 것은 한 간신의 고발 때문이다. 윤 씨의 살해
소식을 접하게 된 그는 살해사건과 관련된 자를 모두 찾아내어 사형시키고 극한 고문을 하였다. 연산은 재위 12년 동안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 등 수많은 옥사를 일으켜 많은 사류(士類)를 잔인한 형벌로 희생시키는 참극을 벌렸던 임금이다.
위리안치(圍籬安置)는 중죄인에 대한 유배형 중의 하나이다. 죄인을 배소(귀양지)에서 달아나지 못하게 하려고 집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돌리고 그 안에 사람을 가두는 곳이 위리안치(圍籬安置)다 또 한글로 된 책 중에 투서가 있다고 하여 한글로 된 책을 모두 태우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 결국, 연산군은 자신이 파직시켰던 성희안과 박원종 등에 의하여 일어난 중종반정 때문에 왕위에서 물러나 교동으로 쫓겨나고 군(君)으로
강봉되었다. 연산군은 교동에서 병으로 3개월 만에 죽었다. 그때 그의 나이 31세이다
"흥청망청"이란 말을 임금 연산군으로 인해
만들어졌다. 연산군은 각지에서 미녀와 좋은 말을 구해오게 하였으며, 성균관을 놀이터로 삼았다. 그리고 원각사를 연회장, 유흥장으로 만들었다.
이때 선발해 들인 흥청들과 그들의 식비, 유흥비 등으로 국가 정사가 피폐해진다 하여 "흥청망국(興淸亡國)"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이 말은 곧
"흥청망청"의 어원이 되었다. "연산군일기" 61권, 연산군 12년 3월 17일 정유 8번째 기사 1506년 경회루 못(池)가에
만세산(萬歲山)을 만들고, 산 위에 월궁(月宮)을 짓고 채색 천을 오려 꽃을 만들었는데, 백화가 산중에 난만하여, 그사이가 기괴 만상이었다.
그리고 용주(龍舟)를 만들어 못 위에 띄워 놓고 채색 비단으로 연꽃을 만들었다. 그리고 산호수(珊瑚樹)도 만들어 못 가운데에 푹 솟게 심었다.
누(樓) 아래에는 붉은 비단 장막을 치고서 흥청(興淸).운평(運平) 3천여 인을 모아 노니, 생황(笙簧)과 노랫소리가 비등하였다.
조선 10대 왕이었던 연산군은 조선 시대의 가장 패악한 군주로 알려져 있다. 연산군의 학정으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이 일어났고, 연산군은 그날 바로 폐위돼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었다.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실린 연산군 유배 여정은 다음과 같다. 연산군은 붉은 옷에 갓을 쓰고, 내전문(內殿門)을 나와서 땅에
엎드려 "내가 큰 죄를 지었는데 특별히 왕의 은혜를 입어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라고 고한 후 4명이 메는 평교자(종1품 이 상 타는 가마)에
올라탔다. 나인 4명, 내시 2명, 반감(飯監) 1명이 따라갔고, 중종반정에 참여한 무신
심순경(沈順徑).최한홍(崔漢洪).유계종(柳繼宗).이곤(李坤)이 동행하고, 정3품 당상관이 군사들과 함께 호위하였다. 9월 2일 창덕궁 인정전
동쪽에 있는 선인문을 빠져나와 돈의문 서대문으로 향한 도성을 벗어나 연희궁(지금의 연세대학교 정문) 근처에서 첫날 유숙하였다. 둘째 날 김포,
셋째날 통진에서 유숙한 뒤 넷째 날 강화로 들어와 유숙하고 다섯째 날인 9월 6일에 유배지인 교동에 도착했다. 유배지의 울타리는 좁고 높아 해를
볼 수 없으며, 음식을 넣을 수 있는 작은 문 하나가 있을 뿐이다. 교동으로 유배를 오던 날 연산군이 안으로 들어가자 함께 따라간 시녀들이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연산군은 홀로 유배를 떠났으며 폐비 신씨(廢妃 愼氏)는 왕비로 있을 때 어진 품성과 덕을 쌓았다는 이유로
정청궁에서 있다가 자신의 친정아버지인 신승선(愼承善)의 집을 수리해 옮겨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연산군의 적자인 폐세자 이황(李滉)은 강원도
정선, 창녕대군(昌寧大君) 이성(李誠)은 황해도 수안, 서자 양평군(陽平君) 이인(李仁)은 충청도 제천, 이돈수(李敦壽)는 황해도 우봉으로 유배
보냈다가 그해 9월 24일에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떴다. 연산군은 강화 교동에 유배된 후 역질에 걸려 물도 마시지 못하고, 눈도 뜨지 못했다.
그해 11월 8일에 죽었다. 연산군이 죽자 강화에서 왕자군의 예우로 장사 지내도록 하고, 수행 시녀는 3년, 수행 방자는 100일 동안 복을
입게 했다. 또 수행 내관은 백일 기한으로 서로 교체해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중종은 소선(素膳:고기나 생선을 쓰지 않는 반찬)으로 수라를
올리게 하고 경연(經筵:왕에게 강론)을 정지했다. 장사 지낸 후 강화 교동에 분묘와 사당을 짓고, 1508년(중종 3년)에 3명의 백성을 선정해
지키도록 했으나 1512년(중종 7년) 12월에 폐비 신(愼)씨의 상언으로 1513년 3월에 연산군을 양주 해촌(지금의 도봉구 방학동)으로 이장
했다. 2016년 12월 17일에 서울 둘레길을 순례할 때 연산군 묘를 그곳에서 보았다. 문화관광해설사 한미옥 님으로부터 상세하고 감명 깊게
해설을 받은 바 있다. 그래서 연산군에 관한 관심이 더 커졌는지 모르겠다. 연산군의 묘역이 조성되고 30여 년이 흐른 뒤 폐비 신(愼)씨의
사후에는 외손녀의 시가인 능성구씨 집안에서 제사을 이어오다가, 그 뒤에는 외증손녀의 시가인 덕수 이씨 집안으로 제사가 이어져
내려갔다.
즉위 초 연산군은 세종대왕 못지않은 많은 치적도 이뤄냈다. 단지 문제는 간신의 말을 너무 믿었던 것이 문제였다. 아니
믿는다기보다는 그 전 세대 권력가들의 세력다툼에 휘말린 것이라 봐도 되겠다. 그 모든 사건의 발단은, 윤 씨의 잘못이지만, 대비가 윤 씨를
미워해 죽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만약 윤 씨가 살아서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았더라면 연산군은 폭군이 아니었을 것이고, 조선의 또
한 사람의 성군으로 칭송받았을 텐데, 아쉽기만 하다. 시어머니의 등쌀에 쫓겨나고, 죽임까지 당한 윤 씨는 자기 아들이 자신 때문에 하루하루를
술과 기생들과 함께 방탕한 생활을 하고 유생들이 공부할 곳을 놀이터로 만든 것을 안다면, 저승에서 한 번 더 목을 매려 할 것이다. 참 안타까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다시 되돌아보면 연산군은 비극의 임금이고, 조선왕조 500년 동안 단종 다음으로 불행한 왕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상 연산군의 일생을 간단하게 마무리한다. 제3편에서는 시산제를 지내는 순서와 방법에 대해 쓰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