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랑
최기종
서울 여의도에서 교사 집회를 마치고 내려올 때 목포 버스를 탔다. 영암 버스를 타야 하는데 거주지가 목포여서 염손선생과 함께 옮겨 탄 것이다. 버스에는 낯선 교사들도 있었지만 가깝게 지냈던 선후배도 있어서 그리 어색하지는 않았다.
버스가 서서울 나들목을 벗어나자 말재간꾼 김선생이 마이크를 잡고 사회자로 나섰다. 먼저 목포지회장인 최선생이 인사말을 했다. 지난 1년 간을 돌아 보면서 목포지회 사업의 성과가 매우 컸다며 활동가들의 노고를 치하했고 남은 기간 마무리를 잘 하겠다고 했다.
다음으로 학교별로 돌아가면서 자기 소개를 하고 자유발언을 하거나 장기자랑 하는 시간을 가졌다. 여러 선생님들이 현장 발언도 하고 노래도 하다 보니까 버스 안이 하나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런 더운 분위기에 젖어서 유선배도 오늘 집회에 대한 소감을 전하면서 민중노래 '광야에서'를 불렀다. 박선생도, 오선생도 신청곡을 받아서 노래를 불렀고 차선생도 안치환의 노래 '사랑은 꽃보다 아름다워'를 불렀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대학수시 면접 시헙을 치루고 내려가는 차선생의 조카와 형님도 함께 타고 있었다. 이 때 사회자의 재치가 드러났다. 조카를 불러 내어 노래를 시키면서 조카도 '사랑은 꽃보다 아름다워'를 부르게 했다. 자연스럽게 숙부와 조카의 노래 대결장이 되게 한 것이다. 그런데 노래 대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차선생의 조카는 노래 1절이 끝나니까 마이크를 자기 아버지에게 떠 넘겨서 차씨 집안 3인방의 노래 대결장이 되었고 장내를 박장대소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무르익은 분위기 속에서 근무지가 해남인 김선생이 앞에 나섰다. 김선생은 오늘이 결혼기념일인데 깜빡 잊었다며 어쩐지 오늘 새벽에 나올 때 아내의 표정이 조금 요상했다고 농담 반 걱정 반 하면서 노래를 마쳤다. 마이크를 돌려 받은 사회자가 김선생 살리기에 나섰다.
"이제 김선생님은 큰 일 났습니다. 어떻게 결혼기념일을 잊을 수가 있습니까? 나이가 젊어서 거시기라도 빳빳하면 그래도 넘어 갈 수 있는데 이거야 이제는 버려질 운명에 처했군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김선생님을 살릴 수 있는 방도를 찾아 봅시다. 좋은 방안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런데 목포에 도착하려면 밤 11시를 넘겨야 하니 어떤 방도를 찾는 것이 어렵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돌아 가면서 여러가지 의견을 내 놓았다. 포도주를 사 가지고 가서 함께 마시라고 하기도 하고 장미 한 다발을 선사하라고 하기도 하고 현관에서 진실을 보여 주라는 조언을 비롯하여 김선생과 친한 사람이 나서서 축하 전화를 하라거나 그냥 무릅을 팍 꿇고 용서를 구하라는 등 많은 제안이 나왔다. 하지만 그 제안들이 평이했고 그다지 감동적이지 못했다.
우리 모두는 또 다시 머리를 쥐어 짜며 좋은 방도를 찾았다. 그런데 이런 공동 사고가 죽은 사람까지 살릴 정도로 신비한 영적 체험을 주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먼저 박선생이 이런 공동 사고의 단초를 열었다.
"제가 볼 때는 진심을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봐요. 지금 김선생님이 사모님께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장내의 반응은 별로 없었다. 문자 메시지 정도로는 사모님을 흡족하게 할 수 없다고 여겼던 모양이었다. 이때 하당중학교 정선생이 마이크를 잡았다.
"저도 별 생각이 없었는데 박선생이 문자 메시지 말을 하니까 떠올랐어요. 김선생님 뿐만아니라 우리 모두가 사모님께 메시지를 보내면 어떨까요."
물론 이것도 그렇게 좋다는 호응을 받지 못했다. 김선생이 보내는 것이나 우리 모두가 보내는 것이나 그렇게 큰 차이는 없다는 생각이 앞섰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나온 제안 중에서 정선생의 제안이 가장 신선했다. 나를 비롯한 몇 사람이 그 제안에 찬성했다. 언젠가 내 블로그에 20여명이 한꺼번에 댓글을 달았을 때 가슴이 뜨거웠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사회자도 나서서 그 제안을 전체 의견으로 모았다. 우리 모두가 사모님께 문자를 날려서 김선생네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해 주기로 했다.
"그러면 제가 사모님의 손전화 번호를 불러 드리겠습니다. 메시지는 통일하지 않고 각자가 알아서 보내는 것입니다. 전화번호는 ***-****-**** 입니다. 지금 작성해서 보내세요."
우리 모두는 손전화기에 코를 빠추고 문자를 보냈다. 나도 잘 보이지 않는 눈을 집중해서 메시지를 작성했다.
'결혼 27주년을 축하합니다. 내내 행복하십시오.'
무미건조하고 시시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잘 모르는 사모님께 농을 할 수는 없었다. 전송을 누르니까 메시지가 '띵똥' 날아갔다.
"이제 다 보내셨지요. 감동적인 문자를 보내셨지요? 그러면 사모님과 직접 통화를 하겠습니다. 마이크로 생중계 되겠습니다."
"여보세요. 아, 사모님이세요. 저, 봉국이 아빱니다. 여기 버스 안인 데요. 아, 그거요? 오늘이 결혼기념일이어서 축하의 메시지를 보낸 것입니다. 아, 메시지를 받고 눈물이 쏟아졌다구요. 지금 답장을 준비하고 있다구요. 아니예요. 그 많은 수를 어떻게... 제가 고맙다는 뜻을 전달할게요. 그래도 가장 가슴 찡한 메시지를 보낸 분이 누군지요. 아직 다 못 봤다구요. 그러면 나중에 그 사람에게만 답장해 주세요. 그럼, 내려가서 뵙겠습니다."
이렇게 결혼기념일 1시간 밖에 남지 않은 김선생을 위한 배려는 대성공이었다. 정선생의 제안이 잘 먹혀 들어간 것이다. 물론 그 제안이 여러 제안들과 그렇게 색다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작은 차이도 수용자의 입장에서는 묵직하고 감동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연대와 배려 속에서 우리의 아름다운 사랑이 탄생했던 것이다. 버스는 고창 고인돌 휴게소를 지나서 목포로 달렸다.
첫댓글 여의도공원 빈 연못에는 참새들의 재잘거림이 한가롭기만 하더이다. 목포동지들..서울다녀오시는 길에 특별한 이벤트가 있어서 답답함이 조금은 덜하셨겠습니다..광양은 2시가 다되어서야 도착했답니다..
볼 수 있었는데....담엔 살째기 언질하시와요
알았어요..집회에서 빠져 나와 이곳저곳 잠시 거닐었어요..담엔 그럴께요..
ㅎㅎㅎ 사모님 잊지 못할것 같네요. 그러고 보니 울 친구들끼리 산에가서 똑같이 각자 신랑에게 메세지 했던기억납니다. 사랑해요 라고 답장메세지 보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울랑만 답이 없었답니다. 기억에 남아요. 지금도 없지요 ㅎㅎ
지난 만우절에 제 블로그에 거의 100여건의 댓글이 달렸어요. 이게 웬 일인가 하면서 가슴 뜨거워졌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블로그 관리자가 만우절이라고 뻥으로 보낸 것이었어요.
저희 부부는 결혼 기념일쯤되면 안좋은 일이 자꾸 생겨서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지나갈때가 많았답니다 올핸 출장가서 한밤중에 오니 그냥 떡하나 만들어놓고 기다렸다가 같이 조금씩 먹고 땡!! 싱겁지요 ^^ 그래도 간만에 가장 잘 치른 결혼 기념일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