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교수 일본 건국설화(建國說話)는 부여와 동족인 고구려의 건국설화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우리가 주목하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옛 신화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신화(神話)에 나오는 지역이 어디이며 그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간 것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않다.
4세기 오진왕(應神王 363~394) 때부터 백제(百濟)의 아직기(阿直岐;阿知吉師)와 왕인(王仁;和邇吉師) 박사(博士)가 천자문(千字文)과 논어(論語) 등으로 왜(倭)에 한문과 유학(儒學)을 전했고 6세기 초 케이타이(繼體王 507~527) 때에는 오경(五經)박사, 김메이왕(欽明王)때에는 의(醫)·역(易)·역(歷) 박사가 초빙되어 왜왕(倭王)의 주변을 한국인 지식인들은 제대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구라다(倉田康夫)편 「일본사요설(日本史要說)」과 주코(中京)대학의 히라다(平田伸夫)는 백제(百濟)로부터 각 분야의 학자들이 왜(倭)에 초청되어 간 사실을 기제하고 있다. 이들에 의한 정치사상(政治思想), 국사의 기록, 양잠·직조·토목·농업·토기·제작 등 모든 기술이 장족(長足)으로 진보해 야마토(大和朝廷)의 발전 기반(基盤)이 되었다고 하고 있다.
백제가 망한 후 많은 유민들이 왜(倭)로 가고 그 곳에 정착하면서 기술과 지식이 고대 일본의 정치·경제·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貢獻)한 것은 주목할 일이다. 당시 왜(倭)로 이주(移住)한 집단은 많은 경우 본국의 통솔자(統率者)들과 함께 특이한 집단으로 거주했다고 한다.
당시 집단들은 각지에 분화(分化), 분산(分散)해서 여러 호족(豪族)에 속하기도 하였고 그 전체적인 규모와 숫자들을 살펴보면 815년에 편찬된 「신찬성씨록(神饌姓氏錄)」은 지배층을 형성한 성씨(姓氏), 즉 중앙정부에서 인정한 정치적 자격을 갖춘 가문의 일람표이다. 당시 전체 1059의 성씨(姓氏) 가운데 백제에서 건너온 성씨(姓氏)는 324개로 약 30%를 차지했다고 하고 있다.
일본의 작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가 1985년 한국에 방한(訪韓)하여 “일본이 아직 미개했던 야야요이문화(飛鳥文化) 후기(後期)에 한인(韓人)에 의해 쌀농사문화를 중심으로 한....백제로부터 도래(渡來)한 20만 명이 일본(日本)의 율령국가(律令國家)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일본)의 조상(祖上)은 한국인(韓國人)이다”고 하였다.
또한 720년 편찬된 「일본서기(日本書紀)」는 백제 패망 후 일본으로 간 백제인(百濟人)이 쓴 일본왕실(日本王室)의 권력사(權力史)라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라고 최태영 선생은 말하고 있다.
오늘은 중·일의 역사왜곡은 중국 일본인보다도 한국 매국 반도사관자들에 의하여 중국과 일본에 역사를 왜곡하게끔 원인을 제공하고 있어서 우리역사가 더 뒤집힌 점을 살펴보고 져 한다.
전후 활발해진 역사왜곡에 대한 학자의 시각(視覺)
태평양전쟁 당시 명치헌법 제1조는 “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歲一系)의 천황이 통치한다”는 것이고 “제3조는 천황은 불가침이다”고 하여 일왕(王)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정(大正)시대의 민주화 바람을 타고 연구와 고등비판이 나오기 시작 하였다.
기다 사다기지(喜田貞吉)와 쓰다 사우기치(津田左右吉)의 새로운 저서가 나왔다. 「발해사고(渤海史考)」등을 쓴 사학자(史學者)인 쓰다(津田)는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일본 황실(皇室)의 통치(統治)를 정당화(正當化) 하려는 목적으로 야마토조정(大和朝廷)의 관인(官人)에 의해 작위(作爲)된 것”이라 비판하여 당시 일본에서 뿐 아니라 사학계에 오랫동안 주목을 받았다.
쓰다 사우기치(津田左右吉)의 저서들은 일본의 근대적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가 되게 하려는 염원(念願)에 있다 할지라도, 국가권력의 기본정책과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것이 분명했다. 1935년 전후(前後) 극단적 언론탄압시대에 그의 연구도 군국주의의 박해를 피하지 못했다.
쓰다 사우기치(津田左右吉)는 1942년 ‘왕실존엄모독죄(王室尊嚴冒瀆罪)’로 유죄판결을 받고 학교에서 쫓겨나고 저작이 발금(發禁)되었다. 그 때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의문점을 묻는 학생들을 때리고 감점(減點)을 하며 벌(罰)을 주었다고 한다. 이후 잘못 걸리면 감옥에 갈 형편임으로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쟁점을 신화(神話)를 핑계대거나 종교문제인 것처럼 해석하였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나라 강단에서 매국 반도사관만을 고집하며 이 사관에 따라 답안을 내거나 학위논문을 쓰지 않으면 점수를 주지 않고 배제하며 망국적인 역사만을 가르치고 학위논문도 이 범주에서 못 벗어나도록 고집하는 매국 반도사관자들과 똑같은 부류의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나 진작 아키히토(明仁) 일왕(日王)은 2001년 일본왕실의 외가(外家)가 백제인(百濟人)이라는 것을 자인(自認)했다. 그런데 이것도 잘못되고 있다. 일본의 첫 왕 오진왕(應神王363~394) 때부터 12대 케이타이(繼體王 507~527)까지는 가야계(伽倻系)이고 그 이후는 백제(百濟系)라는 것을 일본의 지식층과 한국의 사학자들도 다 알고 있는데 이를 숨기고 있었다.
필자는 1978년 학위를 받고 잠시 쉬는 1978년, 귀국하기 전 일본역사를 좀 더 알기 위하여 일본의 조상(祖上)을 모시고 있는 미에겡 미에시(三重縣 三重市)에 있는 이세궁(伊勢宮)에 간 적이 있다. 그러나 이세궁(伊勢宮)은 몇 년에 한번 씩 개방하기 때문에 내부를 볼 수는 없었다.
이 이세궁(伊勢宮)에는 36위의 신위(神位)가 모셔져 있는데 모두가 우리나라 가야계(伽倻系)와 백제계(百濟系) 임을 안다. 2001년 이시와타리 신이치로(石渡信一郞)가 쓴 책 「백제에서 건너간 일본천황(日本天皇)」이 번역 출간되었다. 이 저서(著書)는 한국의 바른 역사학자(歷史學者)들이 수고해야 할 수고를 덜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허나 반도사관 자들은 왜곡역사만 말한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해보면 일본 고사(古史)와 고전(古典) 책은 우리의 고대 영역이 일본민족의 발상지이며 일본인의 조상 중, 상당수는 우리 땅에서 건너간 한인(韓人)이고 일본의 왕가는 한국에서 건너간 망명자(亡命者) 또는 그 자손인 것을 밝히고 있어서 이를 숨길 수 없는 것이다. (以上은 최태영, ‘일본국의 시원과 에가미나미오 비판’.-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所收의. 201面 ~ 204面을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 하였음을 밝힙니다.)
일본은 우리와 피를 나눈 형제국
지금 한국과 일본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며 세계로 나가야 함에도 그러지 못한 것은 슬픈 일이다. 서로 우의(友誼)와 신의(信義)로 나갈 수가 있는데도 그러지 못함은 양국의 정치인들의 사고가 문제이다. 우리는 해 돋는 동방에서 아침 해를 보고 즐거워하는 양국의 국민이기에 신의(信義)로 유지하는 교류를 강조한 아메모리 호슈(雨森芳州)의 “誠信之交隣” 못 할 것이 없다.
예로부터 한일의 국민은 거의가 한 핏줄의 조상에서 태어난 후손들이다. 고대부터 서로 도우며 평화를 나누는 사이였다. 사이좋게 지낼 때 평화와 번영을 기할 수 있었다. 4세기 오진왕(應神王 363~394) 때부터 백제의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 박사(博士)가 한문과 유학(儒學)을, 6세기 초 케이타이(繼體王 507~527) 때에는 오경(五經)박사, 김메이 왕(欽明王536~571) 때에는 의(醫)·역(易)·역(歷)을 전함으로 양국의 우호친선을 도모하였음은 이미 위에서도 기술했다.
야마오의 저서 「일본국가의 형성(日本國家)의 형성(形成)」과 그의 논문 ‘일본고대 왕권과 도래인’에서는 “이전의 귀화인, 도래인은 일본왕권의 봉사자였다는 정도가 아니고 도래인이 중심이 되어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는 내용은 전전의 논조와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또한 인류학자 하니하라(埴原和郞)는 야요이시대부터 나라시대에 이르는 약 1000년 간 일본에 건너온 사람이 100만 명이라는 측정 통계보고서를 발표해서 대량 집단이 이주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東京大學) 잡지 「인류학(人類學)」 ‘고대 일본이주자(移住者) 추정(推定)’ 1987).
한편 도쿄대학(東京大學)의 도쿠낭아 가쓰시(德永勝士) 교수와 도토리대학(島取大學)의 이노우에 다카오(井上貴央) 교수가 조사한 일본인의 DNA는 한국인과 중국에 사는 조선족과 가장 가깝고 그 수치는 다소 차이는 있으나 높게 나타난다는 것은 같은 동족임을 말하는 것이다.
한일양국의 고대사 부분에 있어서는 공통적인 역사인식을 가져야 한다. 한국과 일본의 조상은 누구였으며 어디서 어떻게 오늘과 같이 두 나라로 갈라져서 대륙과 일본열도로 갔는가? 역사를 제대로 연구해 보면 알 수 있다. 우리의 조상은 같으며 남이 아니다. 서로 좋게 지내야 한다.
그것은 고대 가고시마 옥산징구(玉山神宮); 미다마진자(美玉神社)에 있는 단군사당(檀君祠堂)의 제문(祭文)과 이세궁(伊勢宮)의 제문(祭文), 황궁(皇宮)에서의 조상에 대한 제문(祭文)이 어느 나라 말이며 어떤 내용인가를 고찰해보면 더욱 명백해 진다. 한국과 일본은 형제의 나라이다.
제사에 대한 일본의 ‘엔기시키(延喜式)’은 일본대궐 제례(祭禮)의 모든 내용과 절차가 소상히 적혀 있는데 “유세차 모년 모월”로 시작되는 제문도 우리와 똑같은 형식이며 과일 생선 등의 제물도 비슷하다. 우리의 종묘제례가 얼마나 세세한 사항까지 설명하고 있는 것과 거의 같다.
이로 인해 일본인들이 꼼짝 못하게 걸려들었다. 이 ‘엔기시키(延喜式)’만큼은 순수 일본인 역사기록이라고 생각하여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 사당(祠堂)도 200년 전에 헐리고 제사도 없어졌다. 이는 제사를 계속 지냈다가는 한국에서 온 조상이 계셨던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에 한국인 조상이 없는 척 하려는 일본인에게 이들의 존재는 거북하기 때문이다.
이 같이 일본조상의 발상지는 우리나라이고 국가성립과 문화와 문물제도에 있어서 세계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우리나라의 전적인 도움을 받아 일본은 점차 발전한 것을 숨길 수 없다.
한편 중국은 진(秦)·한(漢)·당(唐)이 중원을 통일하고 대륙의 우리나라 역사를 반도로 내몰며 아예 뭉개거나 축소하는데 끝이지 않고 우리의 대륙사를 자기들 것으로 하는 대담한 변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역사의 주역이 거의 우리 한민족이지만 중국 한족(漢族)은 자기들 조상으로 바꿨다. 그래서 삼황오제(三皇五帝)는 모두 우리 조상들인데 자기들 조상이라 하고 있다.
우리 대륙역사의 진실 바로 가르쳐야
일본의 사학자(史學者) 가시마 노보루(鹿島 昇)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사(日本史)를 옹호(擁護)했던 학자이었다. 그도 우리의 「환단고기(桓檀古記)」를 접하고 단군탄신(檀君誕辰)이 시간까지 밝힌 것을 보고 “일본의 황통사(皇統史)는 거짓 역사”라는 것을 실토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단군왕검의 탄생지도 제대로 모르고, 단군(檀君)은 어디서 탄생한 것인가!도 모른 이들이 많다.
단군은 서기전 2370년 음력 5월 2일 인시(寅時), 아버지 환웅(桓雄)과 어머니 교웅 간에 지금의 중국 연길시(延吉市) 하천평(下天坪)에서 탄생하였다. 「홍사환은(鴻史桓殷)」에는 비서갑(斐西岬) 하백(河伯)의 딸 ‘태원(太源)이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은 「홍사환은(鴻史桓殷)」에 나오는 기록도 단군왕검(檀君王儉)의 탄신일은 서기전 2370년(신묘년(辛卯年) 음력 5월 2일 인시(寅時)임이 확인되었다. 또한 등극일은 왕검의 38세인 무진년(서기전 2333년)이다.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왕후(王后) 이름은 ‘비서갑(斐西岬)’이며, 하백(河伯)의 딸 태원(太源)으로 기록돼 있다. 고향이 연길시(延吉市)로 단군왕검(檀君王儉)과 황후 태원(太源) 슬하에 부루(扶婁)·부소·부우·부여 등, 네 아들이 있었다고 했다. 단군왕검의 고향은 하청평(下天坪)이다.
연길에는 상천평(上天坪)과 하천평(下天坪)이라는 곳이 있는데 현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백두산 동쪽에 해가 일찍 뜨는 곳이 상천평(上天坪)이고, 백두산 밑 서쪽이 하천평(下天坪)이라고 한다.
주(註)에는 “왕검의 아버지인 환웅재위(桓雄在位) 48년에 천평산성(天坪山城)을 쌓았고 환웅재위 68년에는 정평(定坪)에 두성을 쌓았다하는 기록 있다. 「단기고사(檀奇古史」에는 “천평(天坪)의 위치는 길림의 동쪽에 있다”고 했다.
또 「홍사환은(鴻史桓殷)」에는 “태자 검을 위하여 도문(圖門)을 만들고 축하행사(祝賀行事)를 거행한 곳으로 그 곳을 ‘국자가(國子街)’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은 국자가(國子街)는 왕검(王儉) 단군(檀君)의 고향임이 틀림없다. 지금도 연길시 중앙로에는 왕자(王子)가 낳은 국자가(國子街-거리)가 있다. 그런데 일제 때 발행 된 ‘간도(間島)’라는 연변유적도(延邊遺跡圖)에 기록된 국자가(國子街)를 ‘국자가(局子街)’로 바꿨다.
이것은 왕검(王儉) 단군(檀君) 탄생(誕生)을 숨기려는 의도임이 틀림없다. [삼성기 상편]에도 “왕검(王儉)이 성장하여 비서갑(斐西岬) 하백(河伯)의 딸을 아내로 맞아 네 아들을 두었다라고 하였다. 여기의 하백(河伯)은 송화강(松花江)지역을 다스리는 우두머리를 일컫는다. 즉 지방수령을 하백(河伯)이라고 하는 것이다. 고향은 연길(延吉市)로 나와 있다. (以上은 반재원, 저 「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을 참조하였음을 밝힙니다.)
글을 맺으며 - 일제는 단군역사도 신화로 했다 -
엄연히 실존하는 단군의 역사도 신화(神話)로 하던 일본도 지금은 이를 숨길 수 없기 때문에 단군이전의 배달국과 환국도 연구를 하며 지난날 상가야역사(上伽倻歷史)라 하던 상고사(上古史) 까지도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우리네 사학계는 연구를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조용한 상황이 우리의 상고사연구(上古史硏究)의 실상(實狀)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이제는 고대사와 상고사도 공동으로 연구하고 아시아의 역사를 복원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한국과 일본은 삼국시대 이전의 조선 즉, 고조선, 배달국, 환국까지 제대로 연구하여 한일양국의 조상은 하나이며 한일양국은 다른 민족도 아니며 같은 역사 민족임을 확인하고 가야 한다.
한국과 일본민족은 어디서 왔는가? 이를 밝히고 세계시원국으로 대륙과 한반도와 일본열도까지의 역사를 지배한 사실을 확인하고 올바른 역사를 되찾고 가야 한다. 상고사가 없는 중국은 중화사상을 내세워 자기네가 모든 패권을 가져야 하는 것처럼 철저히 주변국의 역사를 개조하며 조선이라는 국명도 다 지웠으나 지리지인 「산해경(山海經)」만은 기적적으로 개조를 면했다.
이 「산해경(山海經)」에는 “영양동해 북산 남쪽에 나라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한다.”....“군자의 나라로 서로 다투지 않고 훈훈하여 박하지 않다.”....“공자는 자기의 도(道)가 중국에서 잘 행해지지 않으니 떼를 타고 구이(九夷)의 나라(조선)으로 갈까 보다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은 책봉한 제후국이 많다. 이 제후국이 한데 모여 복종할 때는 제후국(諸侯國)이고, 분열하여 저마다 패권(覇權)을 다툴 때는 열국(列國)이라고 부르는데 고조선은 일찍부터 대제국(大帝國)답게 부족의 장이나 수장(首長)에게 조선의 관위(官位);작위(爵位)를 주어서 그들의 풍습에 따라서 통치를 인정한 간접통치방법을 썼다. 이를 기미정책(羈縻政策)이라고 한다.
고조선 단군과 배달국의 환웅, 환국의 환인(桓因)도 신화가 될 수 없다. 이 고대사뿐 아니라 우리삼국사를 뭉갠 자는 「삼국유사」를 쓴 김일연(金一然)으로 그는 우리 상고사와 삼국사까지 왜곡하여 중일에 빌미를 주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역사를 반도 안에 가둔 원흉이 되고 있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로 이 왜곡과 조작은 다 거짓임 밝혀지고 있어서 역사광복도 그리 머지않았다고 본다. 단군의 역사를 기록한 「단군세기」는 47대 단군의 세세한 업적을 전한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 편입된 이 기록은 신라 때의 역사서이다. 단군이야기도 일본의 상고사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檀君)세기 ‘상기’」에 나와 있는 대로 우리가 왜(倭)를 친 기록도 나온다.
이제는 단군 역사뿐만 아니라 상고시대의 환국과 배달국 역사속에서도 한일양국의 역사는 공통역사로 차이는 있어도 그 속에 내재하고 있음을 제대로 알고 바로 말을 할 때가 되고 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카터 코벨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吳在成,‘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조선상고사에 한반도 상고사가 없다.’ ‘高句麗史’,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校勘 十八史’ ‘우리역사(東夷傳)’. ‘高句麗史’, 九犂系, 新羅史’, ‘‘斯盧新羅史’, ‘百濟史’ ‘加羅史’. 九犂系, 倭-日本史’. 吳在成 編著, ‘지도로 보는 우리나라역사(東夷疆域圖)’. 윤진영, 編集 ‘三國史. 苻都誌’. 반재원,‘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단군과 교웅-단군의 호적등본’. 國會 文公分科委員會, 國史敎科書內容要求에 關한 請願-[國史公聽會 陳述人 發言內容].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마드부활과 되마사상’. 김동락, ‘천부경과 문디’ 거시기’. 황순종, ‘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임나일본부는 없었다.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이종호, ‘한국인의 뿌리’. 박영규, ‘고려왕조실록’. 李丙燾, ‘譯註 三國遺事’. 이강민,‘대한국고대사’. ‘조선사람의 형성과 기원’.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智勝, ‘우리上古史’-발로 확인한 桓檀古記, 符都誌의 실상-’. ‘바이칼민족과 홍익인간세상’.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石井進外3人, ‘詳說日本史,.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秋山謙藏, ‘日本の歷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津田秀夫, ‘ひとりで學べる日本史’. 槐一男, 永原慶二 監修, ‘絶對 中學社會歷史’.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上. 中, 下. 李民樹,'朝鮮傳‘.外 其他多數書冊을 參照, 本文引用 함을 밝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