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오픈 18일 차
아직 소문도 나지 않았는데 어디서 들었는지 광고업체들한테서 전화가 온다. 그곳은 광고 안하면 장사하기 어려운 데라면서 싸고 효과 확실하게 날 수 있도록 해 준다고 한다.
할까? 해야 하나? 시작할 때 제대로 해야 나중에 돈 쏟아 붓는 것 보다 낫지 않을까?
아내는 지역정보지에 광고해도 연간 몇 백 만원은 들어가는데 차라리 그 돈을 음식이나 잘 만드는 데 투자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며 광고해서 돈 벌 것 같으면 못 버는 집 없을 거라고 말한다. 그래. 그 말이 맞아. 어차피 음식으로 승부를 걸 거라면 제대로 한 판 붙어봐야지.
그런데 장사가 징그럽게도 안 된다. 어제는 고작 70만원 팔았다. 손님이래야 하루 종일 40여 명. 그나마 10여명 단체손님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못했으면 50만원도 못 팔 뻔 했다. 한심하기가 그지없다.
오늘은 정 선생님이랑 퓨전한정식 전문점에 벤치마킹을 가기로 했다. 며칠에 걸쳐 서 너 군데를 가보고 난 후에 마실의 방향을 잡기로 했다.
가장 먼저 간 곳은 퓨전한정식으로만 10개가 넘는 점포를 운영하는 유명한 J한정식이었다. 운중저수지 부근에 있는 판교점은 오후 3시가 되었는데도 웨이팅이 걸려 있었다.
30분을 바깥에서 기다렸다. 주차장에 빼곡하게 서있는 차들을 보면서 알지 못할 시기심과 질투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솔직히 부러웠다. 나도 언제 이렇게 할 수 있으려나?
그 날 먹은 음식은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와~ 하는 소리만 나왔다. 맛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내가 놀란 것은 상품력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모아진 담음새였다. 그래도 서울이나 다른 도시의 유명한 한정식집을 가보지 않은 것도 아닌데 오늘만큼 새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한 상 가득 나오는 요리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음식담는 그릇이 이렇게 다양하게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마실은 크기만 다른 토기 같은 그릇 한 종류만 있던데 여기는 음식에 따라 그릇이 다 달라 보였다. 사이즈도 다르고 모양도 사각, 원형, 주름잡힌 접시, 마름모 형태 등 색깔도 튀지 않으면서도 여러 가지였다. 그러면서도 어느 일정한 흐름을 유지하고 있었다.
‘청국알쌈’이란 요리가 나왔는데 그것을 보고서야 퓨전이 어떻게 해석되는가를 배웠다. 정 미경 선생은 생청국을 유자소스에 버무려 새싹야채를 뿌려 깻잎에 싸먹는 이런 것이 바로 한식을 웰빙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했다.
그날 정 미경 선생과 많은 얘기를 나눴다. 주눅이 들어있는 모습을 보고는 조금만 노력하면 저 정도는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해 마음이 조금 놓였다.
앞으로 더 많은 논의를 하겠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날 논의되었던 부분들이 전체적인 틀을 잡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업종 변경은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는 위험과 애써 구축해 놓은 이미지를 버려야 한다는 점. 그래도 한 때 대박식당으로 소문났던 인지도를 재활용하는 것이 신규시장에 진입하는 것보다 비용적인 측면에서도 많은 절감을 하게 해 준다는 것. 주부 고객들을 목표고객으로 잡으면 점심영업에 주력할 수 있다는 것도 논의 되었다. 술을 팔면 밤늦은 시간까지 고생해야 하는 점도 제기되었다. 자연스럽게 얘기는 한 곳으로 모아졌다.
8) 오픈 21일 차
퓨전한정식으로의 방향을 잡은 다음 메뉴구성에 모든 힘을 기울였다. 정 미경 선생과 몇 번의 식당 벤치마킹과 협의를 한 끝에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새로운 메뉴구성
< 1차 메뉴 >
1. 죽(계절별로 다르게)
2. 야채샐러드(훨씬 고급스럽게)
3. 궁중잡채
4. 백김치
5. 낙지볶음
6. 참치회 야채무침
7. 보쌈(수육고기)
8. 코다리고추장 양념구이
9. 부침개
10. 새송이 버섯과 떡갈비구이 <
<2차 메뉴 >
11. 대통밥
12. 된장찌개 또는 청국장
13. 생고등어 고추장 무조림
14. 계란찜
15. 김치
16. 젓갈(계절별로 다르게)
17. 야채볶음(계절별로)
18. 들깨탕
19. 제육고추장불고기
20. 나물 1(계절별로 다르게)
21. 나물 2(묵은 나물로)
가짓수를 대폭 줄이는 대신 음식의 질을 높였다. 기존에 일하던 직원들이 익숙한 요리중 몇 개는 한두 달 더 나가기로 하였다. 무리하게 전체를 바꾸기 보다는 만드는 사람들도 익숙해지는 것이 중요하리라 판단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1차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바꿀 거라면 ‘와!’ 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이번 메뉴개발은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개업식을 4월 5일 수요일에 하기로 했다가 연기하기로 했다.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는 욕만 얻어먹고 말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왕 준비하는 것이니만큼 잘 준비해서 시작부터 좋은 출발을 하고 싶은 마음이다.
아버님께 연락해서 4월 하순 경으로 다시 날을 받아 달라고 부탁드렸다. 아버님은 시골유림으로 이런 것에 익숙하신 분이셨다.
9) 오픈 27일 차
며칠 동안 집중적인 조리교육과 맛 점검 그리고 신 메뉴를 본격적으로 출시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지냈다. 오기로 약속한 찬모도 왔고, 기존 직원들도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바꾸는지 궁금해서 잠자코 교육한대로 따라와 주었다.
3일 정도 낮 시간을 집중적으로 이용해 조리교육을 하고 메뉴판을 다시 만들고 홀 서버들에게는 메뉴 설명을 잘할 수 있도록 다시 교육을 하느라 새벽에 출근해 퇴근하면 12시가 훌쩍 넘기기 일쑤였다.
드디어 퓨전한정식 신 메뉴가 완성되었고 손님들에게 제공되기 시작했다. 잔뜩 기대를 하고 지켜봤는데 고객들의 반응이 제각각 달랐다. 맛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상당수 고객들은 예전 음식이 더 낫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손님은 자리에 앉았다가 메뉴 설명을 듣고는 그냥 일어나 가버리는 일도 생겼다. 열에 일곱은 긍정적이지 않은 평가를 하는 것이다.
당황스러웠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정 선생님과 다시 연락을 했다.
내부 시식과 손님들 반응은 음식 맛이 너무 없고 딱히 먹을 만한 것이 없다는 것에 포인트가 맞춰졌다.
보름 동안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벤치마킹해서 내노라하는 요리연구가가 만든 메뉴가 이런 평가를 받다니! 기가 차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때 나온 평가는 다음과 같다.
[들깨탕과 샐러드는 고급스럽고 맛있었다. 하지만 낙지볶음의 두부는 손도 대지 않는다. 밥을 먹을 때 너무 소홀한 느낌이 들고, 보쌈의 고기에서 냄새가 났다. 한꺼번에 음식이 나오니까 상은 좁고 그릇만 크고 오히려 뭘 먹어야할 지 난감하다. 상을 받을 때는 괜찮다는 느낌이 들지만 나중에는 이게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여자들은 참치같은 것은 잘 먹지 않아서 남아 나오는 것이 너무 많다. 그래서 그런지 매상도 좋지 않다.]
메뉴 개발자와 다시 미팅을 하고 문제점을 분석해야만 했다.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
[인력 부족의 원인을 포함하여 양념과 소스배합에서 조리원들의 조리법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애초 우려했던 대로 너무 많은 가짓수가 한꺼번에 올라감에 따라 따듯한 요리가 따듯할 때 먹지 못해 제 맛을 느끼지 못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또 메뉴의 메인요리를 정해놓지 못해서 먹는 고객들이 느끼는 생각이 반감될 수 있는 부분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각 요리의 특징을 살리지 못하고 당장 만들어 나가는 것에 급급한 상황이라 맛은 뒷전일 수밖에 없다.
식사가 나가는 순서는 여러 가지로 실험해보고 있는데 어떨 땐 밥 주문을 해 준비해 주면 앞 상차림이 너무 일찍 빠져 상이 빈약해 보이거나 반대로 밥과 찬이 너무 일찍 나와 먹고 있는 앞 요리를 강제로 빼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해 손님이 역정을 내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매상과 음식의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까지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는 보기 어렵다. 적어도 한 달은 지나야 어느 정도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 며칠 가지고 진단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을까? 일단 틀은 잡았으니 하나씩 고쳐나가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를 믿고 고객을 믿자. 다시 방향을 바꿀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