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선 제플린(Zeppelin)호의 발명자인 페르디난도 본 제플린 백작은 독일 남부의 바덴베르그 출신으로 한때 광신적인 애국주의 사상을 지닌 귀족이었다. 그는 1870년 8월에 스페인의 왕위계승 문제를 계기로 일어난 독.불전쟁에 귀족 출신의 육군 장교로 참가했었다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백작은 1874년에 당시의 독일 체신장관이 썼던 '항공우편과 비행여행'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고 공기를 가득채운 비행선이란 물체의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그러나 당시의 완고한 육.해군 군사 관계자들에게 백작이 고안해낸 비행선 제플린호를 제작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설득하는 문제는 헛수고로 끝났지만 그는 거기서 굴복하지 않고 사재를 쏟아넣어 1899년에 제플린 제1호 제작에 착수했다.
같은 해에 네덜란드에서 개최된 제1회 국제평화회의에서는 비행기에 탄환이나 폭발물 등을 적재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법안이 가결되었으며, 비행기는 훨씬 평화적이고 지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결의가 내려졌다.
이 결의는 세계각국에서 승인되어 5년간 유효하도록 되었기 때문에 전쟁은 육지와 또는 해상에서만 행해져야 하는 것으로 한정되어 버렸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제플린 제1호가 처녀비행을 시도한 것은 1900년7월 2일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3년후에는 라이트 형제가 최초의 화력비행기로 자유 비행을 성공시켰고, 다시 2년뒤인 1905년에는 페르디난도백작이 제플린 제2호의 제작을 개시했다.
이러한 비행선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1907년 역시 네덜란드에서 행해진 제2회 국제평화회의에서도 수차 언급되었지만, 그당시 비행기에 관해서 제출된 의견사항은 모두 애매해서 이렇다할 결론을 얻지 못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어 공역을 서로 빼앗으려고 하늘로 부터 공격이 시작되기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불과 40여년 후에는 비행기가 인간의 손으로, 더구나 단지 한번의 폭탄 투하로 엄청난 인명은 물론 건물의 대부분을 파괴해버릴 정도의 끔찍한 수단으로까지 쓰여지게 된 것이다.
1915년 1월 9일 가이더 황제는 제플린호를 사용해서 영국 본토 공습을결행토록 명령했다. 그의 성명에 의하면 공습은 군함 조선소, 병기고, 기타 군용지 및 그 건조물에 한한다고 덧붙였다. 때문에 런던 시가는 가이더 황제의 지령에 의해 난리를 면치 못했다.
초기 제플린호의 최고 스피드는 시속 45마일이었으며 상승고도는 8천피트였다. 그러나 후에 만들어진 제플린호는 1만3천피트의 고도까지 상승했고, 시속 60마일의 속도로 비행할 수 있도록 향상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구식 비행기보다 뛰어난 점은 비행선 쪽이 장시간 공중에 머물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유리했으며, 실제로 며칠간의 비행이 가능했다는 사실이었다.
제플린호에 의한 최초의 런던 공습은 1915년 3월 31일에 시작되었다. 실전참여 1년째가 되는 독일의 제플린호는 20회의 공습을 행했고 영국 본토에 37톤의 폭탄을 투하했으며, 207명의 사망자와 533명의 부상자를 냈다. 이듬해인 1916년에 22회의 공습에서는 125톤의 폭탄을 투하하고, 293명의 사망자와 691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제플린호의 악명높은 공격은 1916년에 절정을 이루었으며, 1917-18년 사이에는 단지 11회의 공습밖에 행하지 못했다. 이로인해 사망자가 56명, 부상자도 13명으로 크게 감소했다.
제플린호는 18개월간 영국 상공에 군림하며 위력을 떨쳤지만, 이와같은 대형 비행선도 전투기에 의한 공격에 대해서는 극도로 약하다는 사실이 발견되어 제플린의 지위가 형편없이 떨어져 버렸다. 또한 제플린호는 전광과 스파이크 등의 인화로 인해 빈번히 자연 발화하고 추락한다는 약점도 발견되었다.
1916년 9월 2일 W. 리후 로빈슨 중위가 런던 남동부 상공에서 제플린 SL-11형을 보기좋게 격추시켰다. 이로써 리후 로빈슨 중위는 전투기에서 감광탄이 어느정도 위력을 보일 수 있는 것인가를 증명한 최초의 파일러트가 되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부 29대의 제플린호가 대포와 전투기, 혹은 자연 발화로 추락해 버렸다. 그래서 독일군은 병기로서의 제플린호의 능력을 재고해 볼 수밖에 없었다.
일찌기 대대적으로 공인했음에도 불구하고 1918년경에 이르러서는 독일군의 제플린호에 대한 실제 이상의 높은 평가가 세인의 웃음거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러한 평판에 대해서 "독일 공군의 영국본토 대공습 1914-1918"이라는 책을 쓴 J. 모리스 대위는 다음과 같은 식의 논평을 쓰고 있다.
"전쟁의 역사는 승리와 패배로 점철되어 있다. 빛나는 승리가 있다면 비참한 패전도 있다. 그러나 제플린 백작의 거대한 비행선이 추락되는모습과 대등할 정도의 참담한 패전은 근대 전쟁에서는 보기드문 일일 것이다."
제플린호가 감행했던 대규모의 공격이란 아마도 1915년 10월 13일,
조이무 브레이사브트 대위가 조종한 L-15형 제플린호가 런던의 중심부에 있는 리시움 극장에 한개의 폭탄을 투하하여 정확하게 명중시켰을 때가 아닐까.
그로부터 정확히 54년후--아주 정확히 말하자면 하루가 모라자지만--페르디난도 본 제플린 백작이 발명한, 일종의 경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적군의 비행선 제플린호의 이름을 붙인 영국의 하드 록 밴드 레드 제플린이 같은 리시움 극장에서 화려하고도 센세이셔널한 데뷔를 장식했다.
제플린이 비틀즈의 바통을 받아 대영제국의 명예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던 것은 무척 아이러니컬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야드버즈가 해체되자 지미 페이지('45.1.9일생)는 야드버즈의 영광을 되살려 보려는 꿈을 안고 신선한 모습의 새 실력파들을 모아 밴드를 재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지미는 이러한 자신의 구상에 알맞는 인물로 세션맨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으며, 도노반의 앨범 「Hurdy Gurdy Man」에 같이 참여하면서 더욱 가까워진 베이시스트이자 키보디스트 존 폴 존스('46.1.3일생)와, 런던의 클럽가에서 명성을 날리던 보컬리스트 테리 리드에게 밴드 결성의 뜻을 비쳤다.
존은 이를 수락했지만 테리는 클럽 측과의 계약 문제로 자신의 친구인 로버트 플랜트('48.8.20일생)를 대신 소개해 주었다. 말할 나위없이 로버트는 예전에 밴드 오브 조이 시절부터 함께 활동한 바 있었던 해머 드러머 존 보냄('47.5.31일생)을 지미에게 추천하여 4인조로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밴드가 제모습을 찾게 되자 이들은 '다섯번째 멤버(?)'라 할 수 있는 피터 그랜트를 매니저로 맞이하여 뉴 야드버즈(New Yardbirds)라는 밴드명으로 재출발했다.
차분한 리허설과 세션 레코딩을 통해 새 밴드로서의 팀웍을 다지고 모든 준비를 빈틈없이 갖춘 뉴 야드버즈는 스칸디나비아 순회공연까지 무사히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야드버즈의 영광을 되살려 보자는 뜻에서 지어진 뉴 야드버즈는 밴드명이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새 이미지로 활기찬 출발을 시도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겠다고 결정한후 적당한 새 밴드명을 짓기위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후의 드러머인 키이쓰 문이 납으로 만든 대형 기구인 리드 밸룬(Lead Balloon)의 이름을 따서 밴드명으로 짓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해왔다. 이말을 듣고 지미는 '리드'의 철자를 '레드(Led)로 고치고, 1차대전 당시에 세인을 놀라게 했던 독일의 대형 비행선 제플린호의 이름을 따서 밴드명을 레드 제플린으로 확정지었다.
새출발의 준비를 이렇게 마친 제플린은 본격적인 캐리어를 닦기 시작했다. 이들의 초창기 레퍼토리는 <Long Tall Sally>와 <Tobacco Road>, 그리고 비틀즈의 <I Saw Her Standing There> 등이었으며, 런던 일대의 클럽 무대를 중심으로 팬들을 늘려갔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제플린이라는 존재는 팬들에게 생소했으므로 이들의 출연을 알리는 포스터에는 언제나 '이전의 야드버즈'라는 달갑잖은 주석이 따라다녔다.
그러는 사이에 매니저인 피터 그랜트는 어틀랜틱 음반사와 레코딩 계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당시의 영국측 프로모터와 팬들은 장도에 오르내리는 제플린에게 그다지 깊은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해서 피터 그랜트는 모국측의 냉담한 대우에 환멸을 느끼며 기수를 미국으로 돌려 69년 2월, 대망의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과 여기에서 커트한 데뷔 싱글 <Good Times Bad Times>을 각각 미국시장에 선보였다.
당시 비틀즈와 크림, 지미 헨드릭스와 재니스 조플린, 그리고 사이몬 & 가펑클을 송두리채 잃은 팬들은 록의 르네상스 시대가 최후를 고하고 있는 문턱에서 그들의 거대한 공허를 메워줄 그 무엇을 찾고 있었다. 그들의 텅빈 가슴에 처절한 충격으로 파고든 장본인이 바로 제플린이었다.
제플린의 데뷔 싱글이었던 <Good Times Bad Times는 69년 빌보드 핫100 싱글 차트 80위라는 저조한 순위를 기록했으나, 앨범은 순식간에 50만장 판매고를 돌파하며 빌보드200 앨범 차트 톱10에 랭크되는 기록을 세웠다. 이것으로 제플린은 대형 그룹임이 입증된 셈이었다.
이렇게 지미가 주축이 된 제플린은 과거 야드버즈 시절의 동료였던 면도날 기타리스트 제프 벡이 이끄는 '제프 벡 그룹'보다 다소 늦게 출발했으며, 데뷔 앨범 또한 제프 벡 그룹의 「Truth」보다 약 8개월가량 늦게 발표되었다. 그런데 이들 두 밴드는 모두 데뷔 앨범에서 윌리 딕슨의 고전인 <You Shook Me>를 수록하고 있었다.
다시말해 <You Shook Me>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두 앨범에 나란히 담겨 있어서 제플린의 앨범에서는 지미의 기타와 로버트의 포효하는 듯한 보컬로 들을 수 있고, 제프 벡 그룹의 앨범에서는 제프의 기타와 로드 스튜어트의 걸쭉한 허스키로 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블루스에 뿌리를 두고 전개된 강력하고 뜨겁게 타오르는 제플린의 헤비 사운드는 데뷔 앨범 한장만으로도 센세이션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야드버즈의 영광을 걸머지고 새출발한 제플린에게 무관심했던(?) 영국의 제작자들은 이들을 과소평가한데 대해 후회하게 되었다.
데뷔 앨범이 공개된지 불과 6개월 후인 69년 8월에는 헤비 메틀의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Whole Lotta Love>가 발표되어 4위('69.11)-- 제플린의 유일한 골드 싱글이자 싱글로서는 가장높은 순위를 기록한 곡--히트를 기록했다.
이곡이 수록된 두번째 앨범 「Led Zeppelin II」는 발매 3개월만에 감격의 1위('69.11)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로써 제플린은 69년 한해에 2매의 앨범을 선보이며 불과 1년만에 정상에 오르는 대기록을 수립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여세를 몰아 이듬해 9월에는 <Since I've Been Loving You>가 수록된 「Led Zeppelin III」가 발표되었다. 세번째 앨범은 불과 발매 1개월만에 1위('70.10)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해냈다.
아마도 록의 역사상 가장 완벽한 서사시로 기록되어야 마땅한 <Stairway To Heaven>이 담겨진 네번째 앨범이, 아무런 앨범 타이틀도 없이 발표된 것은 그로부터 1년후인 71년 11월이었다.
서정적이고 아름다우며 잔잔하고도 그윽한 분위기로 지친 몸과 마음을 포근하고 안정감 있게 감싸주는가 하면, 격정과 흥분 그리고 제플린 특유의 정열이 한데 농축되어 천국을 향해 끝없이 간구하는 듯한 인류의 열기...제플린은 <Stairway To Heaven> 한곡만으로도 그들의 모든 것을 표출해 냈던 완벽성을 과시했었다.
73년 3월에 발표한 5집 「Houses Of The Holy」는 그동안 일련번호를 붙여오던 앨범 타이틀에서 벗어나 최초로 제명을 달았던 앨범이다. 5집에는 존의 물방울 튀는 듯한 건반악기가 선보이는 서사시적 분위기의 <No Quarter>와 대중적으로 히트한 <D'yer Maker> 등이 수록되었다.
이무렵 제플린은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록 음악사에 길이
남을 환상적인 스테이지를 펼쳤다 --이 공연 당시의 하일라이트를 수록한 세미 도큐멘터리 영화가 유명한 "The Song Remains The Same"이다--그런데 약 18만 달러에 달하는 수익금 전액을 도난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기도 했다. 이것은 맨해턴에서 일어난 범죄중 현금으로 도난당한 가장 큰 금액이라는 불명예를 뉴욕시에 안겨주기도 했다.
도난사건에도 불구하고 플로리다의 템퍼에서 개최된 대규모 콘서트에는 무려 5만6천여의 인파가 운집하여 불과 하루저녁에 31만8천 달러라는 믿기지 않을 액수의 수익을 올렸다.
이렇게 성공적으로 전미 순회공연을 마친후인 73년말 발표한 매니저 피터 그랜트의 집계에 의하면 그해 한해동안 거둬들인 공연 수익금은 약3천만 달러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니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의 도난사건을 여유있는 미소로 흘려보낼 수도 있었으리라.
73년 한해를 초인적인 강행군으로(공연여행) 보낸 제플린은 74년을 새로운 작품구상 및 휴식으로 보냈다. 74년은 제플린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던 해로 기록되는데, 그것은 1-5집까지 전속되어 있던 어틀랜틱사에서 독립하여 제플린의 음반사인 '스완 송'(Swan Song)을 설립한 것. 이 레이블을 통해서는 배드 컴퍼니와 매기 벨 등을 배출해낸 바 있다.
제플린의 6집 「Physical Graffitti」는 인도계 혼혈인 로버트의 아내 모린의 안내로 인도에서 휴가를 즐기면서 구상한 곡을 중심으로 꾸며졌다. 6집에는 인도풍의 클래시컬한 배경음악에 무겁게 꽂히는 존의 드러밍과 장절한 로버트의 목소리가 한편의 서사시를 이루어 내는 <Kashmir>가 수록되었다.
6집은 75년 2월에 최초의 더블 앨범으로 선보였는데, 물론 새로이 설립한 스완 송 레이블에서 발표한 기념비적 음반이었다. 뿐만 아니라 지미의 에코 딜레이 머신과 슬라이드 존의 신들린 스틱과 로버트의 절규와 함께 니힐리즘의 극치를 연출해 내는 <In My Time Of Dying> 등이 앨범의 백미다.
그로부터 1년후인 76년 3월엔 7집 「Presence」가 지미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Tea For One>과 함께 더욱 원숙해진 면모를 과시했다.
8개월 후인 같은해 11월엔 3년전에 도난 사건으로 유명했던 메디슨 스퀘어 가든 콘서트의 하일라이트에 멤버들의 실루엣을 곁들인 세미 도큐멘터리 영화 "The Song Remains The Same"이 공개되면서, 아울러 더블 사운드트랙이 통산 8집으로 선보였다.
제플린의 명성이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을때 그리스의 섬에서 가족과 함께 휴가를 즐기던 로버트가 부인 모린과 함께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중상을 입었다. 이 사고로 인해 제플린의 모든 일정은 로버트가 건강을 되찾을 때까지 무기한 연기되었다.
이듬해인 77년 4월 교통사고의 상처를 씻고 제플린으로 복귀한 로버트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새로운 각오로 전미 순회공연을 벌이며 그들의 스테이지를 애타게 기다렸던 팬들로 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로버트의 어린 아들이 급성 바이러스 질환으로 목숨을 잃는 비극적인 사건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일로 로버트는 물론, 제플린 전체가 충격과 슬픔에 휩싸여 남은 공연일정은 전면 취소되고 말았다.
잇달은 불운의 화살이 집중된 로버트가 두가지의 치명상을 딛고 일어서는 데는 2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리고 2년동안의 침묵속에서 제플린의 해산설은 끊임없이 나돌았다. 그러나 이러한 낭설을 일축하듯 제플린은 79년 9월 9집 「In Through The Out Door」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로버트의 보컬이 더욱 듣는 이의 폐부를 찌르고 있었으며, 지미의 기타는 도인 그 자체였고, 베이시스트로서 뿐만 아니라 건반악기로서도 정점에 달해 있는 존의 핑거링, 최후의 선혈을 토해낸 존 보냄의 집중포화 등으로 9집은 팬들의 가슴속 깊이 파고들었다. <In The Evening>을 비롯하여 <Fool In The Rain>과 <All My Love>, 그리고 처절하기 이를데 없는 <I'm Gonna Crawl> 등으로 점철된 9집은 완벽 그 자체였다.
'80.9.25일 금세기 최고의 록 드러머였던 존 보냄이 세상을 떠났다. 그해 10월 16일부터 개시될 월드 투어를 앞두고 지미의 집에서 리허설을 하던중 33세의 나이로 목숨을 버린 존의 시신 곁에서 지미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기자들은 '제플린의 후임 드러머로 코지 파웰.칼 팔머.카마인 어피스중 한 사람이 채택될 것이다'라는 기사를 연일 보도했으나, 지미는 존의 장례식을 마친후 "그것은 고인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우린 존을 위해 제플린을 해체하겠다"라는 감동어린 이야기를 남긴후 12년간의 제플린의 비행에 나래를 접기에 이르렀다.
이후 로버트는 「Pictures At Eleven」, 「Principle Of Moments」, 「Shaken'N Stirred」 등 3매의 솔로 앨범을 크게 성공시켰으며, 지미는 미공개 트랙들을 모아 존의 추모 음반으로 「Coda」를 발표했다.
또한 지미는 찰슨 브론슨이 주연한 영화 "Death Wish II"의 사운드트랙을 맡기도 했고, 로버트와 의기투합한 로커빌리 밴드 허니드리퍼즈를 시도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로이 하퍼와의 조인트 앨범 「Whatever Happened To Jugula?」, 그리고 폴 로저스와 새로이 마음을 맞춘 밴드 펌 등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최근 지미는 화이트스네이크의 데이비드 커버데일과 93년 조인트 앨범 「Coverdale. Page」를 발표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부와 명성, 그리고 화려한 인기를 목표로 한 위선적인 테크니션으로서가 아니라 음악속에 살이 있는 순수한 정열을 바탕으로 진실된 인간애로 뭉쳐졌던 레드 제플린. 그들은 진정한 뮤지션의 자세가 무엇이며, 미래의 대중을 이끌어갈 사운드가 어떤 것인가를 진지하게 제시했던 완벽한 밴드였음에 틀림이 없다. 또한 광란하는 차원으로 매도당해오던 록 음악을 감상하는 차원으로 승화시킨 커다란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더우기 대중음악을 버려진 휴지조각처럼 취급해 왔던 이 땅에서도 지금까지 <Stairway To Heavern>은 수많은 록 팬들의 가슴속에 깊이 간직되어 있다. 아마도 그 이유는 현세에서는 영원히 풀 수 없는 미스테리인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을 제플린의 예지를 통해 오르고픈 인류의 염원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