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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江原道] 강릉[江陵] 대도호부[大都護府]
관동팔경[關東八景]으로 유명한 강원도[江原道]의 강릉[江陵]은, 동해[東海]의 바다가에 위치[位置]한 천하[天下]의 명승지[名勝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역사서[歷史書]에서 강원도[江原道]는, 예[濊]와 맥[貊]의 지역이었다고 하며, 강릉[江陵]은 대도호부[大都護府]로서, 일도[一道] 큰 부[府]였다고 기록[記錄]하고 있다.
한서[漢書]에서는, 예군남려[濊君南閭]가 28만명을 이끌고, 요동[遼東]으로 와서 한[漢]나라에 귀순하니, 한[漢]나라의 무제[武帝]는, 예맥[濊貊]의 지역인 이곳에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했다가, 폐지[廢止]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강릉[江陵] 인근[隣近]의 삼척[三陟]에는, 그 유명한, 삼척척주동해비[三陟陟州東海碑]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어 보존[保存]되고 있다. 전설[傳說]같은 신화[神話]가 곁들여진 이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는, 미수[眉叟] 허목[許穆]선생이 삼척부사[三陟府使]로 있을 때, 세운 것이라고 한다.
비석[碑石]에는 동해송[東海頌]을 짓고, 전서체[篆書體]로 비문[碑文]을 새겨 글씨체가 아름다우며, 이 비석[碑石]을 세우고 나서, 동해[東海]바다의 풍랑[風浪]이 진정[鎭靜]되고 잠재워 졌다고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는, 삼척척주동해비[三陟陟州東海碑], 일명,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贊碑]의, 설명을 보기로 한다.
1661년 현종[顯宗]시대에 삼척부사[三陟府使] 허목[許穆]이 동해[東海]의 풍랑[風浪]으로 바닷가에 사는 백성[百姓]들이 피해를 입는 일이 많아, 이를 막고자 동해[東海]를 칭송하는 글인 동해송[東海頌]을 짓고, 그의 독특한 전서체(篆書體)로 비문[碑文]을 새겨 바닷가에 세워서, 풍랑[風浪]을 진정[鎭靜]시킨 비석[碑石]이라고 한다.
그 뒤 비석[碑石]이 유실[流失]된 것을, 1710년 숙종[肅宗]때에 삼척부사[三陟府使] 박내정[朴來貞]이, 유실[流失]한 비석[碑石]의 탁본[拓本]으로 옛 비석[碑石]과 같은 비석[碑石]을 다시 만들어, 지금의 자리에 세웠다. [중략]
당시[當時]에 세운 비석[碑石]은 유실[流失]되고, 다시 세운 비석[碑石]으로, 전면에는 해서[楷書]로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贊碑]라 새기고, 측면에는 고종[高宗] 41년[1904]에 비석[碑石]을 옮겨 세운다는 기록[記錄]이 있으며, 뒤에는 전서[篆書]로 된 48자[四十八字]의 비문[碑文]이 있다. [중략]
그럼 여기서,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에 새겼다는, 동해송[東海頌]의 시[詩]를 보기로 한다. 동해송[東海頌]을 보면,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의 유래[由來]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내용과, 동해송[東海頌]의 시[詩]에 나오는 내용은, 완전히 다른 것을 보게 되는데, 우리의 역사[歷史]가 뒤바뀌고, 우리의 역사[歷史]가 왜곡[歪曲]되며, 조작[造作]되는, 일면을 보게 된다.
미수기언[眉叟記言]
동해송[東海頌]
陟州 古悉直氏之地 在獩墟南 去國都七百里 東臨大海 其頌曰 [중략]
척주[陟州]는 옛날 실직씨[悉直氏]의 땅으로 예[獩] 지역의 남[南]쪽에 있어 국도[國都]와의 거리가 700리[七百里]쯤 되는데, 동[東]쪽으로 큰 바다를 임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송[頌]한다. [중략]
큰 바다 가이 없어 [瀛海漭瀁],..... 온갖 냇물 모여드니 [百川朝宗],.... 그 큼이 끝이 없다오 [其大無窮],.... 동북쪽은 사해여서 [東北沙海],..... 밀물 썰물 없으므로 [無潮無汐]대택이라 이름 했네 [號爲大澤],.... 파란 물 하늘에 닿아 [積水稽天],....출렁댐이 넓고도 아득하니 [浡潏汪濊],...... 바다가 움직이고 음산하네 [海動有曀]
밝디 밝은 양곡에는 [明明暘谷],..... 태양의 문이라서 [太陽之門],.... 희백이 공손히 해를 맞고 [羲伯司賓],..... 석목의 위차요 [析木之次],... 빈우의 궁으로 [牝牛之宮],..... 해가 돋는 동쪽의 끝이로다 [日本無東]
교인의 보배와 [蛟人之珍],... 바다에 가득한 온갖 산물 [涵海百産],... 한없이 많으며 [汗汗漫漫],..... 기이한 물건 변화하여 [奇物譎詭],.... 너울대는 그 상서는 [宛宛之祥],.... 덕을 일으켜 나타 나도다 [興德而章]
조개의 태에 든 진주는 [蚌之胎珠],.... 달과 더불어 성하고 쇠하며 [與月盛衰],.... 대기를 따라 김이 올라가고 [旁氣昇霏],...... 머리 아홉의 천오와 [天吳九首],.... 외발 달린 기는 [怪夔一股],..... 폭풍을 일으키고 비를 내린다네 [飆回且雨]
아침에 돋은 햇살 [出日朝暾],..... 둥글게 올라 휘황 찬란 빛나니 [轇軋炫熿],..... 자줏빛 붉은빛 가득 하여라 [紫赤滄滄],..... 십오일 둥실 뜬 달 [三五月盈],..... 하늘에 밝은 거울 되니 [水鏡圓靈],..... 뭇 별들 빛을 감추도다. [列宿韜光]
부상과 사화 [扶桑沙華],.... 흑치와 마라 [黑齒麻羅],..... 상투 튼 보가며 [撮髻莆家],.... 연만의 굴조개 [蜒蠻之蠔],.... 조와의 원숭이 [爪蛙之猴],.... 불제의 소들은 [佛齊之牛],.... 바다 밖 잡종으로 [海外雜種],..... 종류도 풍속도 다른데 [絶儻殊俗],.... 같은 동산에 함께 자라도다 [同囿咸育]
옛 성왕 덕화가 멀리 미쳐 [古聖遠德],..... 오랑캐들 중역으로 찾아오니 [百蠻重譯],.... 복종하지 않은 곳 없었네 [無遠不服],..... 크고도 빛나도다 [皇哉煕哉],..... 그 다스림 넓고 커서 [大治廣博],..... 유풍이 오래 가리로다 [遺風邈哉]
동해송[東海頌]에서 말하는 삼척[三陟]의 동해[東海]바다는, 사해[沙海]의 바다 즉, 모래의 사막[沙漠]으로 된, 삼척[三陟]의 동해[東海]인, 대해[大海[를 말하고 있다. 삼척[三陟], [陟州]은, 동[東]쪽으로 모래로 된 대해[大海],.... 사해[沙海]가 인접하고, 곳곳에 대택[大澤]이 있는,....... 바다와 같은 크고 넓은 육지[陸地]의 호수[湖水]들이 있는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미수[眉叟]선생은, 이곳 척주[陟州]에서, 동해송[東海頌]을 시[詩]통하여 노래하고 있다.
동해송[東海頌]의 시[詩]에....... 동북[東北]쪽은 사해[沙海]여서 [東北沙海], 밀물 썰물 없으므로 [無潮無汐], 대택[大澤]이라 이름했네 [號爲大澤], 파란 물 하늘에 닿아 [積水稽天], 출렁댐이 넓고도 아득하니 [浡潏汪濊], 바다가 움직이고 음산하네 [海動有曀],.......... 동북[東北]쪽은 모래의 바다라서, 밀물, 썰물이 없으므로, 대택[大澤]이라 이름하고, 라고 하였다. 한서[漢書]에서 말하는 창해[滄海]와 동해[東海], 그리고 창해[蒼海]로 그려지는,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들이, 반도[半島]의 동해[東海]바다를 말하고 있을까 ? 아니면, 지금 중국[中國]의 동해[東海] 바다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 ?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은, 둘 다 아니다. 천지[天地]가 개벽[開闢]을 한다고 해도, 반도[半島]의 동해[東海]바다와, 중국[中國]의 동해[東海]바다가, 모래의 사막[沙漠]이 펼쳐지는, 사해[沙海]는 절대로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서[史書]가 변질[變質]되고, 어지러워 혼란[混亂]함이 극치[極致]에 이르고 있으나, 여러 사서[史書]들을 살피다보면,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은, 사실[史實]로 드러나게 된다. 또한,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는, 고종[高宗] 41년[四十一年]에, 당시[當時]의 비석[碑石]이 유실[流失]되어, 다시, 새로 비석[碑石]을 세우고,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贊碑]라고 새겼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이 사실[事實]이라고 한다면, 이 비석[碑石]이 세워질 때에는, 이미 조선[朝鮮]은 없어지고, 우리의 역사[歷史]는, 반도[半島]로 이식되어 조작[造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일제[日帝]가, 1900년[千九百年]대를 전후[前後]로 하여 찍은 사진과, 서양[西洋]사람들이 찍었다는 사진들은, 본래 조선[朝鮮]의 궁궐[宮闕]과 조선[朝鮮]의 왕성[王城]과는 관계가 없는, 열강[列强]들에 의해서 반도[半島]로 이식되고 조작[造作]된, 이미 허수아비가 되어버린 왕정[王廷]의 사진임이 사실[事實]로 들어나는 것이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
명주[溟州]
本濊國 一云鐵國, 一云蘂國 漢武帝遣將討右渠, 定四郡時, 爲臨屯. 高句麗, 稱河西良 一云何瑟羅州 [중략]
본래 예국[濊國], 철국[鐵國] 혹은 예국[蘂國]이라고도 한다.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장수를 보내 우거[右渠]를 토벌하고 사군[四郡]을 정하면서 임둔[臨屯]이라 하였다. 고구려[高句麗]에서는 하서량[河西良]이라고 칭했으며, 하슬라주[何瑟羅州]
라고도 하였다. [중략]
新羅善德王, 爲小京, 置仕臣. 太宗王五年, 以地連靺鞨, 罷京爲州, 置都督, 以鎭之. 景德王十六年, 改今名, 惠恭王十二年, 復古. [중략]
신라 [新羅], 선덕왕[善德王]때 소경[小京]으로 삼아 사신[仕臣]을 두었다. 태종왕[太宗王] 5년에 이 지역에 말갈[靺鞨]과 접해 있다고 하여 경[京]을 없애고 주[州]로 삼아 도독[都督]을 두어 진수[鎭戍]하게 하였다. 경덕왕[景德王] 16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가 혜공왕[惠恭王] 11년에 옛날의 명칭[名稱]을 회복시켰다. [중략]
太祖十九年, 號東原京. 二十三年, 又以爲溟州. 成宗二年, 稱河西府, 五年, 改溟州都督府, 十一年, 更爲牧. 十四年, 爲團練使, 後又改防禦使. [중략]
태조[太祖] 19년에 동원경[東原京]으로 불렀다. 23년에 또 명주[溟州]라고 하였다. 성종[成宗] 2년에 하서부[河西府]라고 했으며 5년에 명주도독부[溟州都督府]로 고쳤다가 11년에 목[牧]으로 바꾸었다. 14년에 단련사[團練使]로 했다가 뒤에 다시 방어사[防禦使]로 고쳤다. [중략]
元宗元年, 以功臣金洪就鄕, 陞慶興都護府. 忠烈王三十四年, 改江陵府. 恭讓王元年, 陞爲大都護府. [중략]
원종[元宗] 원년[元年]에 공신[功臣] 김홍취[金洪就]의 고향이라 하여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로 승격시켰다. 충렬왕[忠烈王] 34년에 강릉부[江陵府]로 고쳤다. 공양왕[恭讓王] 원년[元年]에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켰다. [중략]
別號臨瀛. 有五臺山 五峯環列, 大小均敵, 故名. 西臺之下, 有泉湧出, 卽漢水之源 有大嶺. 有鏡浦. 屬縣三.[중략]
별호[別號]는 임영[臨瀛]이다. 오대산[五臺山]은, 크고 작은 다섯 봉우리가 둘러 있다하여 이와 같이 부른다고 한다. 서대[西臺]의 아래에 샘이 솟아나는데 곧 한수[漢水]의 발원지이다. 대령[大嶺]이 있다. 경포[鏡浦]가 있다. 속현[屬縣]이 3개이다. [중략]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
강릉[江陵] 대도호부[大都護府]
名山曰五臺 在府西 山五峯環列, 大小均敵, 山以是得名 西臺之下水精庵側檻, 泉湧出, 色味勝常, 其重亦然 曰于筒水, 卽金剛淵, 爲漢水之源 [중략]
명산[名山]은 오대[五臺]이다. 부[府] 서[西]쪽에 있다. 봉우리 5개가 고리처럼 벌려 섰는데, 크기와 작기가 고른 까닭에 오대산[五臺山]이라 한다. 서대[西臺] 아래 수정암[水精庵] 옆에서 함천[檻泉]이 솟아나는데, 물의 빛과 맛이 여느 물과 다르고, 그 무게도 또한 그러하므로 우통수[于筒水]라고 하며, 곧 금강연[金剛淵]은 한강물[漢水]의 근원[根源]이 된다. [중략]
春秋令所在官行祭 漢水 雖受衆流之聚而于筒爲中泠, 色味不變, 若中國之揚子江, 漢之得名以此 [중략]
봄·가을에 그 고을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한다. 한강[漢水]물이 비록 여러 곳의 물을 받아 흐르나, 우통수[于筒水]가 중령[中泠]이 되어 빛과 맛이 변하지 아니하여 중국[中國]의 양자강[楊子江]과 같으므로, 한[漢]이란 이름이, 이로 인하여 되었다. [중략]
要害大嶺在府西三十五里 烽火五處, 於乙達在任內羽溪縣南, 南準三陟地廣津, 北準吾斤 吾斤、北準府地海令 所伊洞在府東北隅, 南準海令, 北準沙火 沙火、北準連谷 注乙文 注乙文 北準襄陽任內洞山 陽也 所領都護府一, 襄陽。 郡二, 旌善、平昌 [중략]
요해[要害]는 대령[大嶺]이니, 부[府] 서[西]쪽 35리에 있다. 봉화[烽火]가 5곳이니, 어을달[於乙達]이 임내[任內] 우계현[羽溪縣] 남[南]쪽에 있고, 남[南]쪽으로 삼척[三陟] 지광진[地廣津]에, 북[北]쪽으로 오근[吾斤]에 응한다. 오근[吾斤] 북[北]쪽으로 부[府]의 땅, 해령[海令]에 응한다. 소이동[所伊洞]이 부[府] 동북[東北]쪽에 있으며, 남[南]쪽으로 해령[海令]에, 북[北]쪽으로 사화[沙火]에 응한다. 사화[沙火], 북[北]쪽으로 연곡[連谷], 주을문[注乙文]에 응한다. 주을문[注乙文],북[北]쪽으로 양양[襄陽], 임내[任內], 동산[洞山]의 양야[陽也]에 응한다.
관할[所領]은 도호부[都護府]가 1이니, 양양[襄陽]이요, 군[郡]이 2이니, 정선[旌善]과 평창[平昌]이다. [중략]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강릉[江陵] 대도호부[大都護府]
군명[郡名]
예국[濊國], 임둔[臨屯], 하슬라[何瑟羅], 하서량[河西良], 명주[溟州], 동원[東原], 임영[臨瀛], 동온[東溫], 경흥[慶興], 명원[溟源], 예국[蘂國] 이하는 이곡[李穀]의 염양사[艶陽寺], 기문[記文]에 있다. 철국[鐵國], 도원경[桃源京], 북빈경[北濱京] [중략]
풍속[風俗]
이제현[李齊賢]이 박안집[朴安集]에게 준 시[詩]에, 진흙이 섞인 물결을 같이하고, 불을 놓아서 푸른 구름 속에 개간한다. 하였다. [중략]
황희[黃喜]의 시[詩]에, 예의[禮儀]로 오래된 지역인데, 어찌 괴이쩍게 신선[神仙]을 말하리. 하였다. [중략]
청춘경로회[靑春敬老會], 고을 풍속[風俗]이 늙은이를 공경[恭敬]하여, 매양 좋은 절후[節侯]를 만나면 나이 70 이상 된 자를 청하여 경치 좋은 곳에 모셔놓고 위로한다. [중략]
형승[形勝]
이곡[李穀]의 시[詩]에, 산맥이 북[北]쪽에서 왔는데 푸름이 끝나지 않았고, 바다가 동[東]쪽 끝이어서 아득하게 가이 없어라. 하였다. [중략]
김구용[金九容]의 시[詩]에, 강릉[江陵]의 산수 경치가 천하[天下]에 첫째이다. 하였다. [중략]
안축[安軸]의 기문[記文]에, 먼 데 있는 물은 창해[蒼海]가 넓고 크며, 먼 데 있는 산은 골짝이 천[千] 겹이다. 하였다. [중략]
서거정[徐居正]의 운금루[雲錦樓] 기문[記文]에, 일도[一道]에서 큰 부[府]이니, 부상[扶桑]을 당기고 양곡[陽谷]을 잡는다. [중략]
십 수년[十數年] 전에, 중국[中國]의 산서성[山西省]일대를 조사 하면서, 역사[歷史]의 자료[資料]를 수집한 적이 있었다. 황하[黃河]를 건너서 북[北]쪽으로 올라가면서, 몽고[蒙古]의 울란바트로에 이르기까지 이, 일대에는, 고대[古代]로부터, 근세[近世]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역사[歷史]의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이 전해져 오고 있었으며, 보존[保存]되기도 하고, 방치되고 있었다. 가장 마음에 와 닿고 인상이 깊었던 것은, 이러한 역사[歷史]의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을 보면서, 전혀, 남의 나라에 와 있는 것과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산서성[山西省]에는, 평요[平遙] 고성[古城]이라고 부르는 성곽[城郭]이 잘 보존[保存]되어 있고, 옛 건물들이 원형[原形]을 잃지 않고 있다. 그리고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렸던 크고 작은 옛 가옥들과, 크고 작은 성곽[城郭]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고풍[古風]스러운 가옥들에는 많은 문양[文樣]이 새겨져 있는데, 모두 역사적[歷史的]가치가 높은 것들이다.
그리고 반도사관[半島史觀]에서, 가야[伽倻]의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반도[半島]의 남해안[南海岸]에서 출토된,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과 같은 문양[文樣]과 형태[形態]를 지닌, 많은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이, 옛날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대동[大同]의 서북[西北]쪽에는, 운강석굴[雲岡石窟]있고, 동남[東南]쪽에는 현공사[悬空寺]가 있다. 동[東]쪽으로 15리의 거리에는, 문영[文瀛]이라는 호수[湖水]가 있는데, 그 곳에서는 문영호[文瀛湖]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북[北]쪽으로는, 거대한 왕릉[王陵]이 두기가 있는데, 한기는, 현지[現地]에서 대동[大同], 방산[方山] 영고릉[永固陵]이라고 비석[碑石]에 새겨놓고 있다.
북위[北魏] 문성제[文成帝]의 황후[皇后]인 문명황후[文明皇后]의 릉[陵]이라고 하는데, 이곳에는 우리의 역사[歷史]를 찾는 사람들이 다녀와서, 그대로 소개를 하고 있으나, 우리의 역사[歷史]를 찾는 그 뜻이 진실[眞實]로 있는 것인지, 알 수 없게 하고 있다.
조선사[朝鮮史]에서는, 강릉[江陵]의 북[北]쪽에 사화산[沙火山]이 있다고 기록[記錄]을 하고 있다. 사화산[沙火山은, 대동성[大同城]에서는 동[東]쪽이 되고, 동남[東南]쪽에 위치[位置]하고 있는 대동현[大同縣]에서는, 북[北]쪽으로 사화산[沙火山]이 솟아 있다. 넓은 평야지대에 솟아 있는 사화산[沙火山]들은, 멀리서 바라보면, 그 경치가 장관이다.
경포대[鏡浦臺]는, 강릉[江陵]의 동[東]쪽15리에 있다고 했는데, 문영호[文瀛湖]라는 호수[湖水]역시, 정확히 15리에 지금도, 그 모습을 잃지 않고 위치[位置]하고 있으며, 그 크기도 역사[歷史]의 기록[記錄]과 같으며, 대동[大同]사람들의 휴양지와 휴식처로서 사랑을 받고 있다.
강릉[江陵]의 옛 군명[郡名]이 임영[臨瀛]이다. 문영호[文瀛湖]는, 임영[臨瀛]의 임[臨]을, 문[文]으로 바꾸어, 문영호[文瀛湖]라고 부르고 있을 뿐이다. 사가문집[四佳文集]에서,....... 바다를 낀 지역이라 기이한 명승[名勝]이 많으며 더러 신선[神仙]이 남긴 자취가 있으므로 임영[臨瀛]이라고 부르니, 대개 봉래[蓬萊]와 영주[瀛州]에 견준 것이다. 라고 하였다.
지금 대동[大同]이라고 부르는 것도, 신라[新羅] 시대[時代]의 소경[小京], 고려[高麗]의 동원경[東原京], 동경[東京], 강릉[江陵]의 대도호부[大都護府]의 대[大] 자[字]와, 동[東] 자[字]만을 취하여 대동[大同]이라고 바꾸어 부르고 있는 것일 뿐이다.
부상[扶桑]은, 고대[古代]의 역사[歷史]에서, 동방[東方]에 있는 나라를 지칭[指稱]하는 것이며, 양곡[陽谷]역시,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 나오듯이, 동방[東方의 해가 뜨는 곳으로 노래하며 기록[記錄]하고 있다...... 서거정[徐居正]의 시[詩]에,........ 부상[扶桑]을 당기고 양곡[陽谷]을 잡는다........ 라고 하였다. 이 시[詩]의 뜻은. 대륙[大陸]의 동방[東方]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척주[陟州]가 반도[半島]의 동해[東海]안에 있는 삼척[三陟]이라면, 부상[扶桑]과 양곡[陽谷]은, 동해[東海]바다 속에 있어야 한다. 거정[居正]선생은, 조선[朝鮮]의 대신[大臣]이며 학자[學者]요. 국가[國家]의 중신[重臣] 이었다. 이러한 분이 지금의 삼척[三陟]에서 동해[東海]바다를 바라보며, 부상[扶桑]과 양곡[陽谷]을 노래하였으랴 !
시[詩]에............ 진흙이 섞인 물결을 같이하고,........라고 하였다. 진흙이 섞인 물이 물결을 이루고 출렁이며 흘러가는 강[江]은, 황하[黃河]와 그 지류[支流]들 뿐이다. 강원도[江原道]의 강릉[江陵]은, 황하[黃河]가 흘러가는 유역[流域]에 위치[位置]하고 있었다. 강릉[江陵] 대도호부[大都護府]는, 동[東]쪽으로 경포대[鏡浦臺]가 있고, 서[西]쪽에는 대령[大嶺]과 오대산[五臺山]이 자리 잡고, 황하[黃河]가 흘러가는 유역[流域]에 위치[位置]하고 있었다.
사가문집 권지일[四佳文集卷之一]
강릉부운금루기[江陵府雲錦樓記]
江陵府 本濊國之遺墟 漢置郡爲臨屯 高句麗稱河西良 新羅稱溟州 高麗初 置東京 後或稱河西 或稱慶興 忠烈朝 改今名 [중략]
강릉부[江陵府]는 본래 예국[濊國]의 옛터로서 한[漢]나라 때 군[郡]을 두어 임둔[臨屯]이라 했었다. 고구려[高句麗] 때에는 하서량[河西良]이라 일컬었고 신라[新羅] 때에는 명주[溟州]라 일컬었다. 고려[高麗] 초에 동경[東京]을 두었다. 뒤에 하서[河西]라 일컫기도 하고 경흥[慶興]이라 일컫기도 하다가 충렬왕[忠烈王] 때에 오늘날의 명칭[名稱]으로 고쳤다. [중략]
江原一道之巨府也 地濱海 多奇勝 往往有神仙遺跡 號曰臨瀛 盖擬之蓬瀛云耳 其俗淸簡 人心淳古 [중략]
강릉[江陵]은, 강원도[江原道]의 일도[一道]에서 큰 부[府]이다. 바다를 낀 지역이라 기이한 명승[名勝]이 많으며 더러 신선[神仙]이 남긴 자취가 있으므로 임영[臨瀛]이라고 부르니, 대개 봉래[蓬萊]와 영주[瀛州]에 견준 것이다. 그 풍속[風俗]이 청백하고 간이하며 인심이 순박하고 고풍스럽다. [중략]
予惟吾東韓山水之勝 關東爲最 於關東 江爲第一 嘗讀稼亭李先生東遊記 謹齋安相國瓦注 乃知江之最勝者曰鏡浦臺 曰四仙峯 曰寒松亭 曰石竈 曰石池 曰文殊臺也 而前輩風流 因亦可考矣 [중략]
내가 생각건대, 우리 동한[東韓]에서 산수의 빼어남은 관동[關東]이 으뜸이고 관동[關東]에서는 강릉[江陵]이 제일이다. 일찍이 가정[稼亭], 이 선생[李先生]의 동유기[東遊記]와, 근재[謹齋], 안 상국[安相國]의 와주[瓦注]를 읽어 보고, 강릉[江陵]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이 경포대[鏡浦臺], 사선봉[四仙峯], 한송정[寒松亭], 석조[石竈], 석지[石池], 문수대[文殊臺] 등인 것을 알았고, 선배들의 풍류[風流]도 이로 말미암아 살필 수 있었다. [중략]
寒松琴曲 傳之中原 朴惠肅,趙石磵鏡浦之遊 至今爲勝談 胡宗旦之沈碑 亦落落奇偉 居正職事拘縻 未暇一訪 東望臨瀛 徒費卧遊之興者有日矣 [중략]
한송금곡[寒松琴曲]은 중원[中原]에까지 전해졌고, 박혜숙[朴惠肅]과 조석간[趙石磵]이 경포대[鏡浦臺]에서 놀았던 일은, 오늘날까지도 멋있는 이야기로 남아 있으며, 호종단[胡宗旦]이 비석[碑石]을 물속에 넣은 일 또한 특별히 기이한 일이다. 거정[居正]이 직무에 얽매여 한번 가 볼 겨를이 없었다. 동[東]쪽으로 임영[臨瀛]을 바라보며 부질없이 누워서 즐기곤 한 지가 오래되었다. [중략]
가정선생문집권지오[稼亭先生文集卷之五]
동유기[東遊記]
二十四日 至淮陽府留一日 二十六日 踰鐵嶺關宿福靈縣 鐵嶺 國東之要害 所謂一夫當關 萬夫莫開者也 故嶺以東江陵諸州 謂之關東 [중략]
24일에 회양부[淮陽府]에 와서 하루를 머물렀다. 26일에 철령관[鐵嶺關]을 넘어 복령현[福靈縣]에서 유숙했다. 철령[鐵嶺]은 본국[本國]의 동[東]쪽 요해지[要害地]로서, 이른바 한 사나이가 관문[關門]을 지키면 만[萬] 명이 공격해도 문을 열 수 없다. 고 하는 곳이다. 그래서 철령[鐵嶺] 동[東]쪽에 있는 강릉[江陵] 등 여러 고을을, 관동[關東]이라고 칭한다. [중략]
三十六峯峯有碑 胡宗旦皆取而沉之 今其跌猶存焉 胡宗旦者 李昇唐之人也 來仕本國 出巡五道 所至輒將碑碣 或刮去其字 或碎或沉 至於鍾磬 有名者皆鎔鉄以塞之 使之不聲 [중략]
이 36봉[峯]에는 봉우리마다 비석[碑石]이 있었는데, 호종단[胡宗旦]이 모두 가져다가 물속에 가라앉혔다고 한다. 지금도 그 비석[碑石]의 받침돌은 아직 남아 있다. 호종단[胡宗旦]이란 자는 이승[李昇]의 당[唐]나라 출신으로, 본국[本國]에 와서 벼슬하였는데, 오도[五道]에 나가 순시할 적에 이르는 곳마다 비갈[碑碣]을 가져다가 비문[碑文]을 긁어 버리는가 하면 깨뜨리기도 하고 물속에 가라앉히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종경[鍾磬]까지도 유명한 것들은, 모두 쇠를 녹여 용접해서 소리가 나지 않게 틀어막았다고 한다. [중략]
若於寒松,叢石亭,三日浦之碑 鷄林府奉德之鍾之類 可見也 四仙亭 朴君淑眞存撫時所置 座主益齋先生爲之記 自三日浦渡城南河 過安昌縣亭宿明波驛 [중략]
이는 한송정(寒松亭)과 총석정(叢石亭)과 삼일포(三日浦)의 비석, 그리고 계림부(鷄林府) 봉덕사(奉德寺)의 종 같은 경우를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다. 사선정은 박군 숙진(朴君淑眞)이 이 지역을 존무(存撫)할 때 세운 것인데, 좌주(座主)인 익재(益齋) 선생이 기문을 써 주셨다. 삼일포에서 성 남쪽의 강물을 건넌 뒤에 안창현정(安昌縣亭)을 지나 명파역(明波驛)에서 유숙하였다. [중략]
是日到平海郡 未至郡五里 有松萬株 其中有亭曰越松 四仙之遊偶過於此 故名焉 平海郡者 江陵道之南界也 [중략]
이날 평해군[平海郡]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군[郡]에 이르기 전 5리 지점에 소나무 만[萬] 그루가 서 있고 그 가운데에 월송정[越松亭]이라는 이름의 정자[亭子]가 있었는데, 이는 사선[四仙]이 유람하다가 우연히 이곳을 지나갔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평해군[平海郡]은 강릉도[江陵道]의 남[南]쪽 경계[境界]에 해당하는 곳이다. [중략]
北自鐵嶺 南盡平海 盖一千二百餘里也 平海以南則慶尙道之界 予甞所往還者 玆不錄云 [중략]
강릉도[江陵道]는 북[北]쪽의 철령[鐵嶺]에서부터 남[南]쪽의 평해[平海]까지 대개 1200여리[千二百餘里]의 지역을 관할하는데, 평해[平海] 이남은 경상도[慶尙道]의 경내에 속한다. 이곳은 내가 일찍이 갔다가 온 일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기록[記錄]하지 않는다. [중략]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에서는, 관동[關東]과 관서[關西]가 있고, 관북[關北]이 있다. 이는 역사서[歷史書]에서 수 없이 거론되는 지역이다. 황해도[黃海道]와 평안도[平安道], 그리고 함경도[咸鏡道]에는, 사막[沙漠]이 있는 지역이라고 수 많은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은 전[傳]하고 있다. 관동[關東]은, 철령[鐵嶺]의 동[東]쪽 지방을 말하고 있으며, 관서[關西]는, 철령[鐵嶺]의 서[西]쪽 지방을 말한다고 한다. 관북[關北]은, 평안도[平安道]와 황해도[黃海道], 강원도[江原道]의 북[北]쪽 지역인 함경도[咸鏡道]를 말하고 있다.
가정선생[稼亭先生]은,....... 鐵嶺 國東之要害 所謂一夫當關 萬夫莫開者也 故嶺以東江陵諸州 謂之關東, 철령[鐵嶺]은 본국[本國]의 동[東]쪽 요해지[要害地]로서, 이른바 한 사나이가 관문[關門]을 지키면 만[萬]명이 공격해도 문을 열 수 없다. 고 하는 곳이다. 그래서 철령[鐵嶺]의 동[東]쪽에 있는 강릉[江陵] 등 여러 고을을 관동[關東]이라고 칭한다. 고 말하고 있다.
철령[鐵嶺]은, 백두산[白頭山]에서 남[南]쪽으로 내려오는 대령[大嶺]에 있는 천험[天險]의 요새지[要塞地]라고 일컬어져 왔다. 고구려[高句麗]의 평양[平壤]이 있는 곳은, 관서[關西] 지방이니, 철령[鐵嶺]은,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에 있어서, 동[東]과 서[西]를 나뉘는 기준이 되는 산맥[山脈]에 위치[位置]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반도[半島]의 평양[平壤]은, 북[北]쪽에 위치[位置]하고 있으니, 관서[關西]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다.
강릉도[江陵道]는, 北自鐵嶺 南盡平海 盖一千二百餘里也, 북[北]쪽의 철령[鐵嶺]에서부터 남[南]쪽의 평해[平海]까지 대개 1200여리[千二百餘里]의 지역을 관할 한다. 고 하는데, 우리의 역사서[歷史書]에서 말하는 강릉도[江陵道]의, 그 크기를, 반도[半島]의 식민사관[植民史觀]을 교육[敎育]받은 사람들은, 상상도 할수 없을 것이다.
1200여리[千二百餘里]지역이라고 한다면, 지금 분단 된 반도[半島] 한국[韓國]의 전체의 크기와 같다. 이 기[記]에서는, 북[北]쪽으로부터, 남[南]쪽까지의 거리를 말하고 있는데, 강릉도[江陵道]는, 강원도[江原道]의 전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강릉[江陵]의 대도호부[大都護府]가 관할하는 지역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강원도[江原道]의 동[東]쪽과 서[西]쪽, 남[南]과 북[北]쪽의 면적과 크기는 얼마나 될 것인가 ?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에서 수춘[壽春], 즉, 춘천[春川]에 대한 기록[記錄]을 보면, 춘천[春川]은, 맥국[貊國]이 있던 곳이며, 맥[貊]은, 예[濊]의 서[西]쪽에 있었으며, 이 곳이 춘천[春川]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춘천[春川]에 있는 소양강[昭陽江]은, 물결이 푸르며 동[東]쪽으로 흐른다고 적고 있으며, 많은 대신[大臣]들과 문인[文人]들은, 소양강[昭陽江] 푸른 물은, 동[東]쪽으로 흐른다고 기[記]와 시[詩]를 통하여 노래하고 있다.
가정선생[稼亭先生]은, 역사[歷史]의 흔적[痕迹]을 지워 버리는, 호종단[胡宗旦]이라는 무리들에 대해서도 기술[記述]하고 있다. 국가[國家]를 보위[保衛]하며, 적국[敵國]의 침략[侵略]을 미연에 방지하고, 자주성[自主性]을 지켜 국가[國家]의 존엄[尊嚴]과 서리 발 같은 기상[氣像]을 천하[天下]에 드날리는 일은, 국가[國家]의 지도자들이 수행[遂行]해야 할 필수적인 사명[使命]이며 책무[責務]인 것이다. 당시[當時]에, 호종단[胡宗旦]같은 자들이 있었다면, 지금도 그러한 자들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
다른 나라를 침략[侵略]하고 역사[歷史]를 무너트리며, 국가[國家]와 국민[國民]의 정신[精神]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간교[奸巧]하고 사악[邪惡]한 계략[計略]은, 오늘날에 이르러 더 치밀[緻密]하고 은밀[隱密]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극성[極盛]을 부리고 있을 것이다. 국가[國家]와 국민[國民]들이 필요에 의해서 세운 비석[碑石]을 훼손하고, 심지어 사찰[寺刹]에 있는 종[鐘]까지 사용하지 못하게 망가트리고 다닌 자가 수[數] 백년[百年]전에 있었다면, 이는 적국[敵國]이 계획적으로 저지른 일일 것이다.
가정선생[稼亭先生]은, 계림부[鷄林府]의 봉덕사[奉德寺]의 종[鐘]도 거론하고 있는데, 반도[半島]에 있는, 에밀레종이라고 알려진 성덕대왕 신종 [聖德大王神鐘]은, 봉덕사[奉德寺]의 종[鐘]이 아닐 것이다. 국보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는 성덕대왕 신종 [聖德大王神鐘]인 봉덕사(奉德寺)의 종[鐘]은, 진품[眞品]이 아님이 분명하다.
봉덕사[奉德寺]의 종[鐘]이, 호종단[胡宗旦]에 의하여 망가진 것을, 가정선생[稼亭先生]이, 당시[當時]에 확인 한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그러한 봉덕사[奉德寺]의 종[鐘]이 어떻게, 그대로 전해져 왔겠는가 ? 실증사학[實證史學]을 소리 높여 외치는 반도[半島] 한국[韓國]의 고고[考古]한 학자[學者]들은, 그 동안 무엇을 가르치고,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스스로 돌아 봐야 할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박시형(朴始亨)의 기문[記文]
임영[臨瀛]은 예국[濊國]의 터이다. 예전 명도[溟都]이며, 삼한[三韓]때에는 북빈경[北濱京]이었다. 고려[高麗]는, 동원경[東原京]이라 불렀는데, 이는 신라[新羅] 태종[太宗]의 5대손 주원공[周元公]이 도읍[都邑]하여서 여러 대로 살았던 까닭에 이름한 것이다. [중략]
그 후에는 혹 명주목[溟州牧]이라 하고, 혹은 도독부[都督府]라 불렀으며, 지금은 도호[都護]에다 대[大]자를 붙여서 구별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름난 구역의 훌륭한 경치가 사방에 알려져서, 고관으로 풍류[風流]를 좋아하는 사대부[士大夫]들은, 누구나 그 지역에 한번 가서 평소의 소원[所願]을 이루고자 하였다. [중략]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으로 말미암고, 물화[物華]는 하늘이 내린 보배인 것으로서, 그 절묘하고 장함이 대관령[大關嶺]의 동[東]쪽에서 집대성[集大成]하여, 유독 으뜸이 되게 한 것이로다. 그 호수[湖水]와 산[山]의 훌륭함이 유람하기에 좋은 것은 이곳의 어디를 가든 그러하나, 그중에서도 한두 가지를 든다면, 관도[官道]에 있는 누각[樓閣]은 의운[倚雲]이라 현판[懸板]하였고, 연당[蓮塘]에 있는 누각[樓閣]은, 이름이 운금[雲錦]이다. 동[東]쪽으로 바닷가에 있는 정자[亭子]는 한송[寒松]이며, 북[北]쪽으로 호수[湖水]에 가까운 누대[樓臺]는 경포[鏡浦]다. 이것이 모두 명승[名勝]의 으뜸이다. [중략]
나는 이 고을 사람이니, 즐거운 마음을 뽐내어서 송사[頌辭]를 꾸며, 거리에서 노래하기를 원한다. 송[頌]에 이르기를, 악양[岳陽]에 누[樓]가 있으니 동정호[洞庭湖]가 눈앞에 있고, 등왕[滕王]이 각(閣)을 지으니 형려[荊廬]가 안개처럼 벌여 섰다. 높은 데에서 낮은 곳에 임하였고 공중에 솟아 바람을 탄 듯한데, 누각[樓閣]이 아니면, 이런 경치 있을 것인가. 대관령[大關嶺] 밖의 형승[形勝]은, 임영부[臨瀛府]가 독차지하였다. [중략]
운금[雲錦]의 높은 누각[樓閣]이 뛰어나게 깨끗하여 사랑스러웠는데, 그것을 없애고 객관[客官]을 지으면서 터마저 뭉개버렸다. 그리하여 여러 해가 그럭저럭 지나갔다. 호수[湖水]와 산[山]이 조롱하고 꽃과 대도 부끄러워하였다.[중략]
김극기[金克己]의 시[詩]에, 외로운 정자[亭子]가 바다를 임해 봉래산[蓬萊山] 같으니, 지경[地境]이 깨끗하여 먼지 하나 용납하지 않네. 길에 가득한 흰모래는 자욱마다 눈[雪]인데, 솔바람 소리는 구슬 패물을 흔드는 듯하다. [중략]
권한공[權漢功]의 시[詩]에, 옛 땅에 인가는 멀고, 차가운 조수[潮水]만이 해문[海門]을 두드린다. 천[千] 그루 소나무는 이미 넘어졌어도, 눈알 같은 두 우물이 아직도 남았다. 새 날아가니 모래톱 고요하고, 갈가마귀 빙빙 도는데 산에 해가 저문다. [중략]
이곡[李穀]의 시[詩]에, 오로지 좋은 경치만을 찾을 양으로, 옛 성문[城門]을 일찍 나섰다. 선인[仙人]은 가도 송정[松亭]은 있고, 산에는 석조[石竈]가 묻혀 남아 있네. 인정은 예와 지금이 달라도, 경치는 아침이요 저녁이로다. [중략]
고려[高麗] 이무방[李茂芳]의 시[詩]에, 정자[亭子]가 소나무 산기슭에 의지했는데, 동[東]쪽으로 바라보니 바다는 끝없다. 지경[地境]이 고요하니 신선[神仙] 자취있고, 모래 밝은데 새 발자국 남았네. 비석[碑石]에는 이끼 무늬 푸르고, 돌에는 비 맞은 자국이 어둡네 [중략]
이곡[李穀]의 시[詩]에, 붉은 깃발에 옹위되어 화성[火城]에 돌아오니, 사신[使臣]의 놀이가 인정에 알맞았다. 야복[野服]을 입으니 수수하여 좋고, 시편[詩篇]은 선배를 따름이 기쁘구나, 긴 여름해에 바람 쏘이려 난간을 부여잡았고, 깊은 밤에 달빛을 따라 배 가는대로 맡겨둔다. 호수[湖水] 가운데 어찌하면 경치를 독차지하여, 미친 객 미친 이름이 사명[四明]을 이으랴. 하였다. [중략]
경포대[鏡浦臺], 부[府] 동북[東北]쪽 15리에 있다. 포[浦]의 둘레가 20리이고, 물이 깨끗하여 거울같다. 깊지도 얕지도 않아, 겨우 사람의 어깨가 잠길 만하며, 사방[四方]과 복판이 꼭 같다. 서[西]쪽 언덕에는 봉우리가 있고 봉우리 위에는 누대[樓臺]가 있으며, 누대[樓臺]가에 선약[仙藥]을 만들던 돌절구가 있다. 포[浦] 동[東]쪽 입구에 판교[板橋]가 있는데, 강문교[江門橋]라 한다. [중략]
다리 밖은 죽도[竹島]이며, 섬 북[北]쪽에는 5리나 되는 백사장이 있다. 백사장 밖은 창해[蒼海] 만[萬] 리인데, 해돋이를 바로 바라볼 수 있어, 가장 기이한 경치다. 또한 경호[鏡湖]라 하기도 하며, 정자[亭子]가 있다. 일찍이 우리 태조[太祖]와 세조[世祖]께서 순행하다가 여기에 어가[御駕]를 멈추었다. [중략]
미수기언[眉叟記言]
한송정기[寒松亭記]
十月二日宿史東 早出寒松 道上見山花 初發如春 至亭上海岸 荒原斷壟 往往有二三松樹而已 父老曰 古有千歲深松 寒影蒼蒼 至今有寒松之號云 [중략]
10월 2일에 사동[史東]에서 묵고 아침 일찍 한송정[寒松亭]으로 출발했는데, 길가에서 산의 꽃을 보니 갓 피어난 것이 봄꽃과 같다. 해안[海岸]가의 정자[亭子]에 이르니, 거친 평원[平原]과 불쑥 솟은 언덕에 이따금 두세 그루의 소나무가 있을 뿐이다. 부로[父老]들이 말하기를 “옛날에 천년[千年] 된 소나무 숲이 있었는데 시원한 그림자가 매우 짙었기에 지금까지, 한송[寒松]이라는 이름이 있게 된 것이다. 라고 하였다. [중략]
海上皆白沙 謂之白沙汀 沙上松林甚遠 有沙堤如山 臨大海 觀蜃樓百丈 [중략]
바닷가는 모두 흰 모래여서 백사정[白沙汀]이라고 부른다. 모래사장 가에 소나무 숲이 매우 멀리 뻗어 있고, 산[山]처럼 생긴 모래의 둑이 있는데 이곳에서 망망대해를 내려다보면, 백 길의 신기루[蜃氣樓]를 구경할 수 있다. [중략]
미수기언[眉叟記言]
오대산기[五臺山記]
寒溪東爲雪嶽 雪嶽南爲五臺 山高大深邃 山氣最積者五 謂之五臺 其最北爲象王山 極高峻 其絶頂爲毗盧峯 其東次峯爲北臺 有甘露井 [중략]
한계산[寒溪山] 동[東]쪽이 설악산[雪嶽山]이고 설악산[雪嶽山] 남[南]쪽이 오대산[五臺山]인데, 산이 높고 크며 골짜기가 깊어, 산 기운이 최대로 쌓인 것이 다섯 개이므로 오대[五臺]라고 부른다. 최북단은 상왕산[象王山]인데 산이 매우 높고 험준하며, 정상은 비로봉[毗盧峯]이다. 그 동[東]쪽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가 북대[北臺]인데 감로정[甘露井]이 있다. [중략]
毗盧南地爐 地爐上爲中臺 山深氣淸 無鳥獸 釋子曉禮無像佛於此 此最極也 中臺少下 有獅子庵 我太上神武王所建也 命參贊門下近 作獅子庵記 [중략]
비로봉 남[南]쪽이 지로봉[地爐峯]이고, 지로봉[地爐峯] 위가 중대[中臺]인데 산이 깊고 기운이 맑아 조수[鳥獸]가 살지 않는다. 승 효례[曉禮]가 말하기를, 이곳에 부처를 모신 것이 없으니, 이곳이 가장 깊은 산중이다. 중대[中臺]에서 조금 내려오면 사자암[獅子庵]이 있는데, 우리 태상신무왕[太上神武王]이 창건[創建]한 것으로,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사자암기[獅子庵記]를 짓게 하였다. [중략]
강원도[江原道]의 대관령[大關嶺]은, 어떤 지역에 있는 산맥[山脈]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 임영[臨瀛]은, 대관령[大關嶺]의 동[東]쪽에 있고, 오대산[五臺山]은 강릉부[江陵府]의 서[西]쪽에 있다고 기록[記錄]하고 있는데, 오대산[五臺山]에는, 사찰[寺刹]이 여러 곳에 있었으며,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제왕[帝王]들도, 각별한 정성을 들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산서성[山西省]에 있는 지금의 오대산[五臺山]은, 대동[大同]의 남동[南東]쪽이다. 현재, 오대산[五臺山]에 있는 사찰[寺刹]들을 살펴보면, 많은 대찰[大刹]과 암자[庵子]들이 오대산[五臺山]의 정상과 산줄기를 따라서 자리를 잡고 있다. 역사서[歷史書]와 문집[文集]등에서는, 강릉부[江陵府]의 서{西]쪽에 있다고 기록[記錄]하고 있으며 오대산[五臺山]의 이름을 얻게 된 내력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오대산[五臺山]에는, 신라[新羅]의 두 왕자[王子]가 들어와 도[道]를 닦았다고 기록[記錄]은 전하고 있는데, 태자정[太子亭]이 있는 곳은, 지금의 오대산[五臺山]이 아니라 대동[大同]의 서남[西南]쪽에 있다. 지금의 오대산[五臺山] 서[西]쪽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문집[文集]들을 살펴보면, 대찰[大刹]은 없고, 오대산[五臺山]의 암자[庵子]에 대해서만 자세하게 기술[記述]하고 있다. 분명히 대찰[大刹]이 있었으면, 기[記]를 지을 때 언급을 하였을 것이다, 금강산기[金剛山記]를 살펴보면, 대[大] 가람[伽藍]의 이름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강릉부[江陵府]의 여러 기문[記文]들을 살펴보면, 내용은 모두 대동소이 한데, 대령[大嶺]의 동[東]쪽에 임영[臨瀛]이 있고, 임영[臨瀛]의 서[西]쪽에 오대산[五臺山]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된 역사[歷史]를 찾아가는데 있어서, 겪는 어려움과 난관[難關]은, 바로 이렇게 동서남북[東西南北]이 뒤바뀌고, 거리 지명[地名] 등 많은 것들이, 역사서[歷史書]와는 다르게 혼재[混在]되어 있는 예에, 수도 없이 부딪친다는 것이다.
기문[記文]에,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으로 말미암고, 물화[物華]는 하늘이 내린 보배인 것으로서 그 절묘하고 장함이 대관령[大關嶺] 동[東]쪽에서는 집대성[集大成]하여, 유독 으뜸이 되게 한 것이로다. 그 호수[湖水]와 산[山]의 훌륭함이 유람하기에 좋은 것은 이곳의 어디를 가든 그러하나,[중략]
대관령[大關嶺] 밖의 형승[形勝]은 임영부[臨瀛府]가 독차지하였다. 운금[雲錦]의 높은 누각[樓閣]이 뛰어나게 깨끗하여 사랑스러웠는데, 그것을 없애고 객관[客官]을 지으면서 터마저 뭉개버렸다. 그리하여 여러 해가 그럭저럭 지나갔다. 호수[湖水]와 산[山]이 조롱하고 꽃과 대도 부끄러워 하였다.[중략]
임영부[臨瀛府]는, 경포대[鏡浦臺]의 호수[湖水]와 누각[樓閣]이 그림같이 펼쳐지고, 동해[東海]가 동[東]쪽으로 닿아 있으며, 5리에 이르는 백사장[白沙場]이 펼쳐지고, 한송정[寒松亭]이 있으며, 먼데 있는 산[山]들이 천[千]겹이고, 산수[山水]의 빼어난 경치는 관동[關東]에서 제일가는 곳으로 그려지고 있다.
지금 한국[韓國]에 있는 오대산[五臺山]과, 중국의 오대산[五臺山]이, 본래의 오대산[五臺山]이라고 한다면, 여러 문집[文集]에 기록[記錄]된 내용들은 모두 소설이 되고 만다. 지금 중국[中國]의 오대산[五臺山]이 있는 동[東]쪽에는, 그들이 말하는 태행산맥[太行山脈]이 서남[西南]쪽으로 내려와, 비스듬이 황하[黃河]에 이르고 있으며, 임영부[臨瀛府]의 환경[環境]을 설명하는 자연[自然]의 형세[形勢]와 지형[地形], 지리[地理]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한국[韓國]의 오대산[五臺山]도 다를 것이 없다. 또한, 그러한 자연[自然]의 환경[環境]도 되지 않는다.
기문[記文]을 쓰고 시[詩]를 지은 분들은, 유학[儒學]의 가르침을 갈고 닦으며, 선비의 정신[精神]에 투철했던 유학자[儒學者]들이며, 조정[朝廷]의 대신[大臣]들이었던 분들이고, 직접 현지[現地]에서 지방을 다스리고, 체험[體驗]을 바탕으로 남긴 기록[記錄]들이다. 또한, 기문[記文]과 많은 시[詩]들이, 임영부[臨瀛府]의 산수[山水]와 경치를 노래하고, 자연[自然]의 지형[地形]과 지리[地理]를 노래하고 있는데, 모두 일맥상통[一脈相通]하고 있다. 현지에서 지금까지 전하는 유적[遺跡]과 유물[遺物], 지명[地名]등은, 지금 우리가 보고 있고,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오며 알고 있는, 모든 지식[智識]과 상식[常識]들을 뒤집는다.
우리의 선대[先代]와 선현[先賢]들이 남긴 기록[記錄]들이, 역사[歷史]의 사실[史實]이며 진실[眞實]인 것이다. 현지의 자연[自然] 환경[環境]과, 역사[歷史]의 연원[淵源], 유적[遺跡]과 유물[遺物], 지형[地形]과 지리[地理]가 일치 한다면, 그 전[傳]하는 기록[記錄]은 정확[正確]한 것이다.
왕조실록[王朝實錄]의 한양[漢陽]에 대한 지세[地勢]를 설명하는 기록[記錄]에서, 동[東]쪽으로 대관령[大關嶺]이 높이 솟고, 라는, 이 기록[記錄]의 대관령[大關嶺]과, 선대[先代]들의 문집[文集]속에서 설명하는 강릉부[江陵府]의 대관령[大關嶺]은, 지금의 황하[黃河]가, 북[北]쪽에서 남[南]쪽으로 흐르는 지역의, 동[東]쪽에 인접해 있는 산맥[山脈]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동[大同]의 서[西]쪽이며, 북[北]에서 남[南]쪽으로 내려와, 서남[西南]쪽으로 뻗어내려, 화산[華山]과 삼각산[三角山]이 되고, 그 정남[正南]쪽에 한양[漢陽]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선비행장[先妣行狀]
신사임당[申師任堂]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
慈親鶴髮在臨瀛 늙으신 어머님을 임영[臨瀛]에 두고, 身向長安獨去情 외로이 장안[長安]으로 가는 이 마음, 回首北村時一望 돌아보니 북촌[北村]은 아득도 한데, 白雲飛下暮山青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조선시대[朝鮮時代] 현모양처[賢母良妻]의 사표[師表]로 일컬어지는,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시[詩]를 보면, 임영[臨瀛]과 장안[長安]의 방향을 짐작 할수 있게 하는데, 임영[臨瀛]은 북[北]쪽이고, 장안[長安]은, 남[南]쪽에 있는 것이다. 혹자는 북촌[北村]을 해석하기를, 임영[臨瀛]에 자택이 북촌[北村]있어, 방향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역사[歷史]의 흐름을 전혀 모르고 말하는, 괴변에 지나지 않는다.
장안[長安]으로 길을 가는 사임당[師任堂]은 대관령[大關嶺]올라, 지나오는 북[北]쪽에 있는 고향을 돌아보며 이 시[詩]를 짓고, 장안[長安]으로 떠나야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미수기언[眉叟記言]
동계[東界] 동유박물[東遊博物]
江陵 古獩國 漢元朔間 初置滄海郡 四郡時 爲臨屯郡 海上鏡浦,寒松,下述郞井,石竈,石池 平海之越松浦 [중략]
강릉[江陵]은 옛 예국[獩國]으로, 한[漢]나라 원삭[元朔] 연간에 처음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였고, 한사군[漢四郡] 때 임둔군[臨屯郡]이 되었다. 바닷가에 경포대[鏡浦臺]와 한송정[寒松亭]이 있고, 아래에 술랑정[述郞井]과 석조[石竈], 석지[石池]가 있고, 평해[平海]의 월송포[越松浦]가 있다. [중략]
于山鬱陵一島 望三峯岋嶫 海晴則山木可見 山下白沙甚遠 古于山國 負固不服 新羅以計降之 至高麗 有白吉土豆獻方物 [중략]
우산도[于山島]와 울릉도[鬱陵島]는 하나의 섬인데, 바라보면 세 개의 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다. 바다가 쾌청하면 산[山]의 나무를 볼 수 있으며, 산[山] 아래에는 하얀 모래가 매우 멀리 뻗어 있다. 옛날 우산국[于山國]이 지형[地形]의 험고함을 믿고서 복종하지 않자 신라[新羅]가 계략을 써서 항복시켰고, 고려[高麗]에 이르러 백길토두[白吉土豆]가 토산물을 바쳤다. [중략]
此皆東界古事古跡 老人嘗客遊過此 特詳之 列書 以爲東遊博物二百八十七言 [중략]이는 모두 동계[東界]의 고사[古事]이며 고적[古跡]이다. 늙은 내가 일찍이 나그네로 유람[遊覽]할 적에 이 지역[地域]에 들렀으므로, 특별히 상세하게 알고 있기에 나열하여 기록[記錄]해서 동유박물[東遊博物] 287자[二百八十七字]를 짓는다. [중략]
미수기언[眉叟記言]
지승[地乘]
交州 淮陽府 東界 古獩貊之地 自沃沮至句麗 南境沙海千里其西貊 多山土瘠 其種菽,麥,大秬,小秬 [중략]
교주[交州]는, 회양부[淮陽府]이다. 동[東]쪽 경계[境界]는, 옛 예맥[獩貊]의 땅이니, 옥저[沃沮]에서 고구려[高句麗]에 이른다. 남[南]쪽 경계[境界]는, 사해[沙海]가 1000리[千里]이고, 그 서[西]쪽은 맥[貊]이니, 산[山]이 많고 토질이 척박하다. 곡물[穀物]로는 콩, 보리, 굵은 기장, 잔 기장이 생산된다. [중략]
平原種稻蓄積 海濱鬻魚,鹽 多大澤 食螺蛤 海岸多竹箭 峽中絲,麻,林,漆,蔘,歸,群藥,紫檀 貊俗癡騃少嗜欲 尙廉恥 同姓不相娶 [중략]
평원[平原]은 벼농사를 지어 저장하고, 바닷가에서는 생선과 소금을 팔아 생활한다. 대택[大澤]이 많고, 소라와 대합을 먹는다. 해안[海岸]에서는 대살[竹箭]이 많이 나고, 산골에서는 사[絲], 삼[麻], 목재[木材], 옻[漆], 인삼[人蔘]과 당귀[當歸] 등 여러 약재[藥材], 자단목[紫檀木]이 산출된다. 맥[貊]의 풍속[風俗]은, 어수룩하고 기욕[嗜慾]이 적다. 염치[廉恥]를 숭상하여 동성[同姓]끼리는 서로 혼인[婚姻]하지 않는다. [중략]
交州 淮陽府 東界 古獩貊之地, 교주[交州]는 회양부[淮陽府]이다. 동[東]쪽으로는 예맥[獩貊]의 지역이며,...... 강릉부[江陵府]는 예[獩]의 지역이며, 수춘[壽春], 즉 춘천[春川]은, 맥[貊]의 지역이라고 역사서[歷史書]는 적고 있다. 한서[漢書]의 창해[滄海]와 예군남여[濊君南閭]의 고사[古事]와, 요동[遼東]과의 관계가 서서히 드러나는 기록[記錄]이다. 지금의 강릉[江陵]과 춘천[春川]이, 예맥[濊貊] 지역이라고 주장하는 논자들은, 무엇을 근거[根據]로 그러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 소위 고지도[古地圖]라는 것들을, 다시 한 번, 거론 할 수밖에 없는데, 고지도[古地圖]라는 것은,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된 것이며, 그저 참고용에 지나지 않는다.
自沃沮至句麗 옥저[沃沮]에서 고구려[高句麗]에 이른다. 南境沙海千里其西貊 남[南]쪽의 경계[境界]에는, 천리[千里]에 걸처 사해[沙海]인 모래 바다가 있으며, 그 서[西]쪽이 맥[貊]이다. 이곳에서 말하는 사해천리[沙海千里]는, 우공[禹貢]의 류사[流沙]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류사[流沙]는, 곤륜산[崑崙山]에 인접해 있는 타클라마칸[塔克拉瑪干] 사막[沙漠]을 말하는 것이고, 지금 말하는 것은, 강릉[江陵] 대도호부[大都護府]와 춘천[春川] 도호부[都護府]의 지역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형[地形]과 지세[地勢]와 기후는, 하루 아침에 변하지 않는다. 지금 사해천리[沙海千里]의 지역은, 서안[西安]의 북[北]쪽에 있는 황하[黃河]가, 서[西]쪽에서 동[東]쪽으로 흐르다가, 북동[北東]쪽으로 방향이 바뀌는, 서북[西北] 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대륙[大陸]의 전체 지역을 살펴보면, 신강성[新疆省]의 류사[流沙]를 제외하고, 천리[千里]의 모래 바다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은, 이곳 밖에 없다. 강릉[江陵] 대도호부[大都護府]와 춘천[春川] 도호부[都護府]는, 지금의 대동[大同]과 이곳 서안[西安]의 북[北]쪽인, 사해천리[沙海千里]의 남[南]쪽 지역에 걸쳐 있었던 것이다.
한서[漢書]에서 말하는, 창해지군[滄海之郡]과 예군남려[濊君南閭]의 고사[古事]가,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될 수 있는 지역이며, 요동[遼東]과는 인접하는 지역이니, 대륙사[大陸史]에서 설명하는, 역사[歷史]속에 있는, 각 나라의 위치[位置]를 이해 할 수 있으며, 또한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에서 말하는, 역대[歷代] 나라들의 강역[疆域]과 위치[位置]에 대하여, 일치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나와 돌아다니는, 고지도[古地圖]의 허구가 다시 한 번, 들어나는 것이며,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가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 되었음을 증명[證明]하고, 또한 증거[證據]하는 것이다. 반도[半島] 한국[韓國]의 강릉[江陵]과 춘천[春川]이, 어떻게 예맥[濊貊]의 지역이 될 수 있을 것인가 ? 한서[漢書]나오는, 창해지군[滄海之郡]과 예군남여[濊君南閭]의 기록[記錄]을, 이해 할 수 있는 위치[位置]는 사해천리[沙海千里]의 지역이다..
蔚珍東海中 鬱陵千山 울진[蔚珍]의 동[東]쪽으로 동해[東海] 가운데에, 울릉도[鬱陵島]와 천산[千山]이 있다......... 僕嘗斥守陟州 州大嶺東海上窮處 去東省四百里 내가 일찍이 좌천되어 척주[陟州] 를 맡았는데, 본주[本州]는 대령[大嶺]의 동[東]쪽의 바닷가 궁벽한 곳에 위치하여, 동성[東省]으로부터 400리 떨어져 있다......... 其外海濱東海 皆沙海 實日出之墟 그 외 지역의 바다가는 동해[東海]인데, 모두 사해[沙海]인 모래로 된 바다로서, 실로 해가 뜨는 곳이다.
于山鬱陵一島 望三峯岋嶫 우산도[于山島]와 울릉도[鬱陵島]는 하나의 섬인데, 바라보면 세 개의 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다......... 海晴則山木可見 바다가 쾌청하면 산[山]의 나무를 볼 수 있으며,....... 山下白沙甚遠 산[山] 아래에는 하얀 모래가 매우 멀리 뻗어 있다......... 古于山國 負固不服 新羅以計降之 옛날 우산국[于山國]이 지형의 험고함을 믿고서 복종하지 않자, 신라[新羅]가 계략을 써서 항복시켰고,...... 至高麗 有白吉土豆獻方物 고려[高麗]에 이르러 백길토두[白吉土豆]가 토산물을 바쳤다.
此皆東界古事古跡 이는 모두 동계[東界]의 고사[古事]이며 고적[古跡]이다...... 老人嘗客遊過此 늙은 내가 일찍이 나그네로 유람[遊覽]할 적에 이 지역에 들렀으므로,...... 特詳之 列書 以爲東遊博物二百八十七言 특별히 상세하게 알고 있기에 나열하여 기록해서, 동유박물[東遊博物] 287자[二百八十七字]를 짓는다. [중략]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는, 모순[矛盾]과 혼란[混亂]으로, 일그러진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우산국[于山國]이 있었다는, 울릉도[鬱陵島]의 기록[記錄]을 보면, 거짓과 위선[僞善]의 극치[極致]를 보게 된다. 왕조실록[王朝實錄]에서 우산도[于山國]의 사람들에게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농기구를 내려주었다는 기록[記錄]을 보게 되는데, 지금의 울릉도[鬱陵島]에, 농기구를 싣고, 동해[東海] 바다를 건너갔다는 것도 기이 하지만, 이곳에 우산국[于山國]이 있었다는 기록[記錄]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當時]에, 지금의 울릉도[鬱陵島]에 살고 있는 인구가 얼마나 되었을까 ? 신라[新羅]가 우산국[于山國]를 점령하여, 항복을 받았다고 하는데, 신라[新羅]의 시대[時代]에는, 우산국[于山國]의 인구가 얼마나 되었을까 ? 대륙[大陸]의 육지에도 인구가 많지 않던 시대에, 동해[東海] 바다에 있는 작은 섬에, 나라가 있었다고 하는 웃지 못 할, 반도사관[半島史觀]인, 식민사관[植民史觀]의 교육[敎育]은, 강단[講壇] 사학계[史學界]의 현실[現實]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선생은, 삼척[三陟]에 부사[府使]로 있었고, 누구보다도 이곳의 실정을 손바닥 보듯이 알고 있던 분이다. 동해[東海], 창해[滄海], 창해[蒼海], 창해만리[滄海萬里]로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되고 있는, 푸른 물결이 출렁이는 동해[東海]의 깊은 바다에 있는 외로운 섬, 울릉도[鬱陵島]와 우산도[于山島],..... 누구나 동해[東海], 창해[滄海]로 열변을 토하고,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에 기록[記錄]이 되어 있는 울릉도[鬱陵島]가 있는 동해[東海],......... 이 동해[東海]는, 皆沙海 實日出之墟 사해[沙海]인 모래로 된 바다로서, 실로 해가 뜨는 곳이었으니, 고대[古代]에, 해가 뜨는 양곡[暘谷]이었음을 어찌 알았으랴 !
울릉도[鬱陵島]와 우산도[于山島]의 해안에는 흰 모래가 널리 깔려 있고, 울진[蔚診]에서 바라보면, 맑은 날에 세 개의 산[山] 봉우리가 보이는 곳에 , 울릉도[鬱陵島]와 우산도[于山島]가 있었다. 이 지역은, 지금 북경[北京]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의 북[北]쪽으로부터, 몽고[蒙古]의 내륙지역에 펼쳐진 황량한 평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선생은, 老人嘗客遊過此 내가 일찍이 객으로 유람[遊覽] 할 적에 이 지역에 들렸다. 고 기록[記錄]하고 있다. 울릉도[鬱陵島]]와 우산도[于山島]에, 직접 가서 보신 분의 기록[記錄]이니, 무엇을 다시 논[論]할 수 있겠는가 ?
서[西]쪽으로는 지금의 고비사막에 이르고, 동[東]쪽으로는, 현재의 동북[東北] 삼성[三省]에 이르는, 모래의 사막[砂漠]과, 염호[鹽湖]와 대택[大澤]으로 이루어진 푸른 평원이 펼쳐지는 이곳이 바로, 창해[滄海] 만리[萬里]요, 동해[東海]로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이 되고 있는 지역이다. 이 광활[廣闊]한 지역이, 바로 시서[詩書]에서 이르는, 양곡[暘谷]에서 공손히 해가 뜨는 것을 맞이 한다는 곳이며, 고대[古代]의 여러 기록[記錄]들은, 역사[歷史]의 연원[淵源]이 깊고, 깊음을 우리가 다시금 돌아보게 하고 있다.
旌善稱孝弟鄕 溟州獩國 壽春貊國 襄陽海上有東海神祠 小祀 平原雉嶽 有東嶽祠 東州楓泉原 弓裔所據 廣野三百里 四塞多阻 有濁川 蔚珍東海中 鬱陵千山 [중략]
정선(旌善)은 효제(孝悌)의 고을로 일컬어진다. 명주(溟州)는 예국(獩國)에 해당하고, 수춘(壽春)은 맥국(貊國)에 해당한다. 양양(襄陽)의 바닷가에 동해신사(東海神祠)가 있는데, 소사(小祀)이다. 평원의 치악(雉嶽)에는 동악사(東嶽祠)가 있다. 동주(東州)의 풍천원(楓泉原)은 궁예(弓裔)가 웅거했던 곳이다. 넓은 들판이 300리 정도이고, 사방이 막혀 험난한 지형이 많다. 탁천(濁川)이 있다. 울진(蔚珍)의 동쪽으로 바다 가운데에 울릉도(鬱陵島)와 우산도(于山島)가 있다. [중략]
미수기언[眉叟記言]
위정고증증관동조안사[爲政攷證贈關東趙按使]
僕嘗斥守陟州 州大嶺東海上窮處 去東省四百里 再至省 聽約束 道里所過 一從嵐嶠,彌首 一從薩奈,巾衣,寧越 [중략]
내가 일찍이 좌천되어 척주[陟州] 를 맡았는데, 본주[本州]는 대령[大嶺] 동[東]쪽의 바닷가 궁벽한 곳에 위치[位置]하여 동성[東省]으로부터 400리 떨어져 있다. 재차 동성[東省]에 이르러 약속[約束]을 들었는데, 한 번은 남교[嵐嶠]와 미수[彌首]를 경유하였고, 한 번은 살내[薩奈], 건의[巾衣], 영월[寧越]을 경유하였다. [중략]
問魯陵 山峽阻深 古獩貊之地 北至靺鞨 東西五百里 南北千里 古俗尙孝悌睦友 嫁娶有禮 江陵,壽春,太原 最大都 [중략]
영월[寧越]의 노릉[魯陵]을 물었는데, 산협[山峽]이 막히고 깊었으니, 옛날 예맥[獩貊]의 땅이다. 북[北]쪽으로는 말갈[靺鞨]에 이르는데, 동서[東西]의 길이가 500리이고 남북[南北]의 길이가 1000리[千里]이다. 옛날의 풍속[風俗]이 효제[孝悌]와 화목[和睦], 우애[友愛]를 숭상하고, 혼인[婚姻]에 예의[禮儀]가 있었다. 강릉[江陵], 수춘[壽春], 태원[太原, 원주原州]은, 가장 큰 대도[大都]이다. [중략]
通物貨 善蓄積 居民富樂 其他嶺下諸邑 山高早寒 五穀不成 食蕎麥 其外海濱東海 皆沙海 實日出之墟 [중략]
물화[物貨]를 유통하고 저축[貯蓄]을 잘하여 사는 백성[百姓]들이 부유[富有]하였다. 그 외에 영[嶺]아래의 여러 읍[邑]은 산[山]이 높고 일찍 추워져서 오곡이 자라지 않아 메밀과 보리를 먹는다. 그 외 지역의 바다가는 동해[東海]인데, 모두 사해[沙海]인, 모래로 된 바다로서, 실로 해가 뜨는 곳이다. [중략]
海上多深松大澤。其俗逐魚鹽末利。不勤耕作。生業極貧。峽中聚。落甚遠。怾恒,五臺,雪岳,頭陁,太白煙霞八百里。其產瑰材,甘木,蔘苓諸藥物 [중략]
바다에는 깊은 대택[大澤]과, 소나무가 많고, 그 풍속[風俗]은, 고기 잡고 소금 굽는 것을 좇아서 경작[耕作]에 힘쓰지 않아 생계가 지극히 빈궁하다. 산골짜기 안의 취락[聚落]은 매우 먼데 기달[怾怛], 오대[五臺], 설악[雪岳], 두타[頭陀], 태백[太白]은 800리[八百里]에 걸쳐 안개가 끼고, 그곳에서 생산되는 것은 옥[玉], 목재[木材], 감목[甘木], 삼[蔘], 복령[茯苓] 등 여러 가지 약물[藥物]이다. [중략]
官府之治 無奇巧淫奢之禁 循俗而治 淳厖樸騃 多壽考 府中無事 上之元年 大夫趙公由密直出爲關東觀察使 於其行 敍述山川風俗民物古事 贈以爲爲政攷證 凡二百餘言 [중략]
관부[官府]의 다스림은 기교[奇巧]와 음란[淫亂], 사치[奢侈]를 금[禁]하지 않고 시속[時俗]을 따라서 다스려서 순후하고 질박하여 장수[長壽]하는 자가 많으며, 부중[府中]에는 일이 없다.금상[今上] 원년[元年]에 대부[大父] 조공[趙公]이, 밀직[密直]을 거쳐 외직[外職]으로 나가 관동[關東] 관찰사[觀察使]가 되었다. 그가 떠날 때에 산천[山川], 풍속[風俗], 민물[民物], 고사[古事]를 서술[敍述]해서 선사하여 위정[爲政]의 고증[攷證]으로 삼게 하니, 도합 200여[二百餘字] 자이다. [중략
미수기언[眉叟記言] 별집[별집]
삼척기행[三陟記行]
庚子冬 吾出爲三陟 受命三日 辭朝行 止漣西留 治行數日 與鄕里老少話別於玉溪 十月十三日也 前夕 權右尹致書 請其先大夫墓表 仍書之曰 陽川許穆 謹書 以表尊慕古德之心云 [중략]
경자년[庚子年]겨울에 나는 외직[外職]으로 나가 삼척 부사[三陟府使]가 되었다. 임명을 받은 지 사흘째 되던 날, 조정[朝廷]을 하직하고 길을 떠나 연서[漣西]에서 잠시 머물렀다. 행장을 꾸리는 며칠 동안에 향리[鄕里] 사람들과 옥계[玉溪]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니, 10월 13일이었다.전날 저녁에 권 우윤[權右尹]이 편지를 보내와, 선친[先親]의 묘표[墓表]를 지어 줄 것을 청하기에 이를 써 주고서, 양천[陽川)] 허목[許穆]이 삼가 써서 고덕[古德]을 존모[尊慕]하는 마음을 표한다. 하였다. [중략]
自含春驛行二十餘里 上開胸嶺 山深路險 踰嶺山中 多土少石 山爲童 山高地可以燒菑 下地可以芒種 有白屋依山谷者五六 嶺間開地少 出日常晏 是日常曛 山谷沍陰 登嶺 始望遠岫平川落日 嶺得開胸之名 以此耶 [중략]
함춘역[含春驛]에서 20여 리를 가서 개흉령[開胸嶺]에 오르니, 산[山]이 깊고 길이 험하였다. 고개를 넘자 산중에 흙이 많고 바위가 적으며 산은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어서, 지대가 높은 곳은 화전[火田]을 일굴 만하고 낮은 곳은 보리를 심을 만하였다. 그 아래에는 산골짜기에 기대어 흰 띠풀로 지은 초가집 대여섯 채가 있으며, 고개 사이로 확 트인 곳이 적어 해가 뜨는 시간이 항상 늦고, 해가 기울면 늘 어둠이 드리워지는 까닭에, 산골짜기에 음습[陰濕]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고개 위에 올라서야 비로소 먼 산[山]과 평평한 개천[開川]과 지는 해가 바라다 보인다. 고개를 개흉령[開胸嶺]이라 이름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인 듯하다. [중략]
東行六十里 登彌首坡 此楓岳南麓 多秀石 登臨 東海無窮 踰嶺則䢘城 [중략]
동[東]쪽으로 60리를 가서 미수파[彌首坡]에 올랐는데, 이곳은 풍악산[楓岳]의 남[南]쪽 기슭이라 빼어난 바위가 많았다. 올라가 내려다보니 동해[東海]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고개를 넘으니 수성[䢘城]이 나왔다. [중략]
嶺下東南行二十里 則元巖 自元巖從海上南行六十里 降仙 自降仙二十里 襄陽 又二十里 祥雲 祥雲南二十里 洞山 不及洛山寺十里 [중략]
고개 아래에서 동남[東南]쪽으로 20리를 가면 원암[元巖]이 나오고, 원암[元巖]에서 바닷가를 따라 남[南]쪽으로 60리를 가면 강선[降仙]이 나온다. 강선[降仙]에서 20리를 가면 양양[襄陽]이 나오고, 다시 20리를 가면 상운[祥雲]이 나오고, 상운[祥雲]에서 남[南]쪽으로 20리를 가면 동산[洞山]이 나오는데 낙산사[洛山寺]에 10리쯤 못 미쳐 있다. [중략]
自元巖過洞山,連谷,連倉,大昌,沙洞,史東,安仁,樂豐 踰火飛嶺。羽溪,平陵數百餘里 丙子丁丑間 避亂行歷之地 追思奔竄荊棘 一日得一食則生 不得則死 道路艱難 歷歷在目 今二十五六年 相從親戚皆亡 至此良爲長嘆 [중략]
원암[元巖]에서 동산[洞山], 연곡[連谷], 연창[連倉], 대창[大昌], 사동[沙洞], 사동[史東], 안인[安仁], 낙풍[樂豐]을 지나 화비령[火飛嶺]을 넘어 우계[羽溪], 평릉[平陵]까지 수백여 리는, 병자년[丙子年]과 정축년[丁丑年]에 피난[避難]을 다니면서 지났던 길이다. 하루에 한 끼라도 먹으면 살고, 먹지 못하면 죽을 정도로 힘이 들었던 피난[避難]살이의 가시밭길을 돌이켜 생각하노라니, 그 당시 도로[道路]에서 겪은 갖은 고초[苦楚]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지금은 25, 6년이 지나 함께 피난[避難] 다녔던 친척[親戚]들이 모두 죽고 없으니, 이런 생각을 하매 참으로 깊은 탄식[歎息]이 우러나왔다. [중략]
강원도[江原道]원주목[原州牧]
사가집[四佳集]
원주객관중신기[原州客館重新記]
原 本高句麗之平原郡 新羅置北原小京 高麗初 置州 後降爲知州 又降爲一新縣 中間 陞爲瑞 原都護府 後改爲益興 恭愍朝 復爲牧 [중략]
원주[原州]는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평원군[平原郡]이다. 신라[新羅]에서 북원소경[北原小京]을 두었으며 고려[高麗]초에 주[州]를 두었다가 뒤에 낮추어 지주[知州]로 하였고, 또 낮추어 일신현[一新縣]으로 하였다. 중간에 승격시켜 정원도호부[靖原都護府]로 하였다가 고쳐서 익흥[益興]으로 하였고, 공민왕조[恭愍王朝]에 다시 목[牧]으로 하였다. [중략]
舊屬楊廣道 今爲江原道之界首官 其地廣 其民夥 山川之勝 土田之饒 物產之富 爲諸州最 [중략]
예전에는 양광도[楊廣道]에 속하였으나, 지금은 강원도[江原道]의 계수관[界首官]이다. 땅이 넓고 백성[百姓]들이 많으며, 산천[山川]이 아름답고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物産]이 풍부하여 여러 고을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중략]
其俗勤儉節用 貯財殖貨 水旱不能爲災 實東道之美州也 居正少時 讀書雉岳,法泉諸山寺 往來于州非一再 [중략]
그 풍속[風俗]은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쓰는 것을 절약하여 재물을 저축[貯蓄]하고 물화[物貨]를 늘려서, 홍수와 가뭄이 재해[災害]가 되지 못하니, 실로 동[東]쪽 지방의 아름다운 고을이다. 서거정[徐居正]이 젊었을 때에 치악[雉岳], 법천[法泉] 등 여러 산사에서 글 읽느라고 원주[原州]를 왕래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중략]
每見中家以上 務營居室 豐堂廣宇 高樓美榭 在在皆是也 而獨奈何以如是之州之鉅之富 而官廨之湫隘不振如是乎 [중략]
매번 보면 중류 이상의 집들이 힘써 집을 경영하여 마루와 넓은 집과 높은 누[樓]와 아름다운 정자[亭子]가 가는 곳마다 수두룩하였다. 그런데 홀로 어찌하여 이와 같이 크고 부유한 고을로서 관아[官衙]의 건물은 누추하고 좁아서, 초라함이 이와 같은가 ? [중략]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누정[樓亭] 봉명루[奉命樓], 빙허루[憑虛樓] 모두 객관의 동[東]쪽에 있다.
강회백[姜淮伯]의 시[詩]에, 높은 누[樓]에 홀로 오르니 이번 걸음 유쾌한데, 소나무 산 헌함에 가득히 그늘 지우네. 인정은 엎치락뒤치락 구름이 산[山]으로 들어가는것 같고, 옛뜻은 처량한데 눈[雪]이 성[城]을 눌렀네. 강개한 마음 하루아침에 계책[計策]을 결정하더니, 존망[存亡]이 백년을 넘었건만 이름 아직도 남았네. 농사 짓고 누에치고 가는 곳마다 백성[百姓]의 생업[生業]이 안정되었는데, 포곡새[布穀鳥]는 무슨 일로 밭갈기를 재촉하는가. 하였다.
우승범[禹承範]의 시[詩]에, 말 들으니 원공[元公]이 칼을 짚고 떠날 때, 장한 마음 기유생[棄襦生]보다도 뛰어났네. 한 번 휘둘러서 천년[千年]의 외구[外寇]를 소탕하니, 우뚝이 선 것이 백치[百雉]의 성[城]처럼 든든하다. 예부터 고원[高遠]한 지세[地勢]는 유적을 수호하고, 이제까지 물고기와 새들도 위명[威名]을 두려워하네. 남아[男兒]의 사업은 이미 이같이 성대한데, 나는 항상 몸소 밭 가는 한사[寒士]임을 웃네. 하였다.
성현[成俔]의 시[詩]에, 햇볕을 무릅쓰고 산 넘고 물 건널 일 항상 근심했는데, 누[樓]에 오르니 지나치게 서늘한 바람 반가워라. 두어 포기 작약[芍藥]은 붉은빛 섬돌에 번득이고, 일만 줄 늘어진 버들은 푸른 성[城]에 가득하구나. 젖먹이 제비는 처마 곁에서 처음으로 말을 배우고, 꾀꼴새는 나무를 뚫으면서 제 이름 제가 부르네. 발[簾] 가득한 성긴 비에 남은 꿈 놀라 깨어 일어나 보니, 검정소[烏犍] 농경[農耕]에 달려가네.” 하였다.
홍귀달[洪貴達]의 시[詩]에, 따뜻하고 경치 고운 국도[國道]에 사람들은 어지러이 오가고, 눈 녹은 마을마다 봄물이 생겼네. 산 기운[山氣]은 노을을 찌는 듯 그림병풍 둘렀고, 경치는 물에 닿아 강[江]가의 성[城]을 옹호하네. 가볍고 날씬한 처마의 제비는 때로 능히 말을 하고, 아름다운 담 위의 꽃은 이름조차 알지 못하겠네. 가장 기쁜 일은 농가에서 살아가는 일이 풍족하여, 한 늙은이가 다시 비를 맞으며 밭을 가네.
홍귀달[洪貴達]의 시[詩]에, 이글이글 타는 듯한 여름 해에 괴로워 천천히 가는 길에, 짙은 나무 그늘이 물 밑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너무도 반가워라. 한 점 검은 구름이 먼 봉우리에 둘리니 잠깐동안 서늘한 비 외로운 성[城]을 지나가네. 한가로워지니 잔 가운데의 술맛이 나고, 취한 뒤에는 종이에 기록될 이름 같은 것 마음에 없네. 남훈곡[南薰曲]타서 마치니 재물[財物]은 이미 넉넉하나, 다시 농관[農官]을 불러 백성[百姓]의 농경[農耕]을 권장한다. 하였다.
이숙함[李淑瑊]의 기문[記文]
나의 벗 자간[子幹] 민정[閔貞]군이, 원주목사[原州牧使]로 나간 지 해포가 되었는데,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원주[原州]는 관동[관동]지방의 계수[界首]이다. 치악[雉岳]의 한 자락이 서[西]쪽으로 잇달아 백여 리를 달려와서 주(州)의 진산이 되었다. 모든 읍의 공관(公館)과 관고[筦庫]와 영각[鈴閣]이 다 여기에 자리잡았다. [중략]
진각[鎭閣]의 남[南]쪽에, 우뚝 솟은 땅이 있으니, 평평하기는 바둑판 같고 매우 시원하다. 두 면은 산을 등지고 있어 소나무와 전나무가 빽빽하게 서있고 한 면은 앞에 강물을 굽어보며 초원[草原]과 평야[平野]가 넓고 펀펀하게 펼쳐져 있다. [중략]
또 곧, 높은 정자[亭子]를 세우고 시서예악[詩書禮樂]의 가르침과 효제충신[孝悌忠臣]의 도[道]를 펴는 데 이용하니, 곧 온 고을 안에 화기[和氣]가 가득하게 되었다. 이것은 곧 교화[敎化]를 숭상하기 위함이며, 형[刑]이 없게 하기 위한 것이니, 풍광[風光]과 경치에 빠져 놀러다니기 위한 시설은 아니다. 다른 날 성상[聖上)의 포상(褒賞]을 받아 조정[朝廷]에 들어가 큰 벼슬에 제수되면, 크게 헌의[獻議]하여 도[道]를 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장차 교화[敎化]는 한 나라에 미치고 혜택[惠澤]은 만민[萬民]에게 돌아갈 것이니, 어찌 다만 백리 [百里]되는 고을에 그칠 뿐이겠는가 ? [중략]
원충갑[元冲甲]
몸이 왜소[矮小]]하고 키가 작으며, 민첩[敏捷]하고 사나웠으며, 눈에 번개 같은 광채[光彩]가 있었다. 능히 어려운 일을 당하면 몸을 아끼지 않을 사람이다. 향공진사[鄕貢進士]로서, 본주[本州]의 별초[別抄] 부대에 예속하여 있었다. 충렬왕[忠烈王] 때에, 원 [元]나라의 반적[叛賊] 합단[哈丹]이 와서 성[城] 아래에 주둔하여 온갖 계책[計策]을 써서 침공하니, 성[城]이 거의 함락될 지경이었다. 원충갑[元冲甲]이 주[州]의 사람들과 함께 이를 막아 적의 거의 반이나 쏘아 죽였다. 이로부터 적[敵]은 예기[銳氣]가 꺾여서, 감히 여러 성[城]들을 공략하지 못하였다. [중략]
정필[鄭弼]의 시[詩]에, 성[城]안 범이 우레같이 으르렁거려 땅을 진동[震動]시키며 가는 것을, 북원[北原]에서 막아 끊으니 만민[萬民]이 살았네. 으뜸되는 전공[戰功]은 홀로 삼분[三分]된 나라의 으뜸이고, 장한 기운[氣運]은 아직도 오히려 백번[百番] 싸우던 옛 성[城]에 서려 있네. 사신[史臣]에게 보고하여 뒷세상에 있게 하고, 이미 도호부[都護府]라는 새 이름으로 바꾸었네.
설장수[偰長壽]의 시[詩]에, 우레가 소리치고 바람이 날리듯 호령이 행하여지니, 고을의 백성[百姓]들이 힘입어 여생을 보전할 수 있었네. 영웅스러운 위엄은 홀로 천 사람의 군진[軍陣]을 쓸어버렸고, 뛰어난 계책[計策]은 능히 백치[百雉]되는 성[城]을 보전하게 하였네. [중략]
조준[趙浚]의 시[詩]에, 철관(鐵關)에 오랑캐의 말이 바람처럼 달리더니, 백면[白面]의 젊은이가 한 칼로 전공[戰功]을 높이 세웠네. 나라에 바친 의로운 충성[忠誠]은 마땅히 해를 꿰뚫을 만하고, 몸을 버린 대의[大義]는 문득 만리장성[萬里長城] 같구나. [중략]
서거정[徐居正]의 시[詩]에, 치악산[[雉岳山]은 푸른 봉우리를 모아서 조령[鳥嶺)]에 이었고, 섬강[蟾江]은 흰빛을 끌어서 여성[驪城]에 닿았네. 하였다. [중략]
우리가 산서성[山西省]을 말할 때, 문득 떠 올리는 것은, 평요고성[平遙古城]과 태원[太原]이다. 중국[中國]에서는, 평요고성[平遙古城]을 명[明]나라가 축조[築造] 했다고 장광설을 늘어놓고 있으나, 이는 모두 조선[朝鮮]이 망하고 나서 벌어지는, 굴절된 역사[歷史]에 대한, 왜곡[歪曲]의 한 단면일 뿐이다. 평요고성[平遙古城]의 웅장[雄壯]함은, 적군[敵軍]을 방어하는 옛 사람들의 치밀함과 높은 기상[氣像]을 다시금 엿 보게 하고 있다.
태원[太原]에서 황하[黃河]에 이르는 지역에는, 옛날의 모습이 잘 보존[保存] 된 가옥들과 성곽[城郭], 누각[樓閣], 이에 새겨진 고풍[古風]스럽고 아름다운 문양[文樣] 등이 즐비하다. 이곳에 가보면 그 옛날, 물화[物貨]의 유통과 부[富]가 얼마나 융성[隆盛]하고 성대[盛大] 했는지를 실감[實感]하고도 남는다. 지도[地圖]에서는 산서성[山西城]도 예외 없이 북위[北魏]의 강역[疆域]으로 그리고 있는데, 우리의 역사[歷史]를 찾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이러한 지도[地圖]들을 신봉하고 있다.
其俗勤儉節用 貯財殖貨 水旱不能爲災 實東道之美州也 그 풍속[風俗]은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쓰는 것을 절약하여 재물을 저축[貯蓄]하고 물화[物貨]를 늘려서 홍수와 가뭄이 재해[災害]가 되지 못하니, 실로 동[東]쪽 지방의 아름다운 고을이다. 居正少時 讀書雉岳,法泉諸山寺 往來于州非一再 서거정[徐居正]이 젊었을 때에 치악[雉岳], 법천[法泉] 등 여러 산사에서 글 읽느라고, 원주[原州]를 왕래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每見中家以上 務營居室 豐堂廣宇 高樓美榭 在在皆是也 매번 보면 중류 이상의 집들이 힘써 집을 경영하여, 마루와 넓은 집과 높은 누[樓]와 아름다운 정자[亭子]가 가는 곳마다 수두룩하였다. 而獨奈何以如是之州之鉅之富 而官廨之湫隘不振如是乎 그런데 홀로 어찌하여 이와 같이 크고 부유한 고을로서 관아[官衙]의 건물은 누추하고 좁아서 초라함이 이와 같은가 ?
평요성[平遙城]을 자세히 살펴보면, 평요성[平遙城]은, 성곽[城郭]의 치[雉]가 70여개에 이르고, 성문[城門]까지 포함하여 80여개에 이르고 있다. 지금의 평요성[平遙城]은, 원형[原形]이 모두 그대로 보존[保存] 된 것은 아니다. 성곽[城郭]은, 사각형에 가까우며, 예외 없이 동남[東南] 방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대륙[大陸]과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에, 동남[東南]과 서남[西南]의 방향으로 축조[築造] 된 성곽[城郭]들은, 우리 역사[歷史]의 후예[後裔]들이 만든 것임을 알아야 한다. 반도[半島]의 한국[韓國]에서 시작하여, 대륙[大陸], 몽골, 러시아의 동남부 지역,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에 있는 성곽[城郭]들은, 서남[西南], 동남[東南], 방향으로 축조[築造]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모두 성곽[城郭]에 치[雉]가 있으며,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정사각형으로 축조[築造]되어 있다.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에 한발씩 다가가면서,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과, 성곽[城郭]이 축조[築造]되어 있는 지역들이, 우리의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들과 정확[正確]히 일치되고 있음이 증명[證明]되고 있으며, 사실[事實]로 확인[確認]되고 있다. 평요고성[平遙古城]이 있는 지역은, 우리의 역사[歷史]에 있어서 무엇이었을까 ?
原 本高句麗之平原郡 新羅置北原小京 원주[原州]는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평원군[平原郡]이다. 신라[新羅]에서 북원소경[北原小京]을 두었으며 [중략]
지리지[地理志]에, 원주목[原州牧]은,......... 恭愍王二年, 安胎于州之雉岳山, 復原州牧. 別號平涼京, 又號平涼 [成廟所定], 屬郡二, 縣五. 공민왕[恭愍王] 2년에 본 주[州]의 치악산[雉岳山]에 왕[王]의 태[胎]를 안치하고 원주목[原州牧]으로 회복시켰다. 별호[別號]는 평량경[平涼京]이며 또는 평량[平涼]이라 부르기도 한다. 성종[成宗]이 정하였다. 속군[屬郡]이 2개, 현[縣]이 5개이다. [중략]
태원[太原]과 평요고성[平遙古城]에 대하여, 수 많은 추정[推定]과 가설[假說]이 난무[亂舞]하고 있는데, 이곳은,..........平原雉嶽 有東嶽祠 평원의 치악(雉嶽)에는 동악사(東嶽祠)가 있다............ 東州楓泉原 弓裔所據 廣野三百里 四塞多阻 동주(東州)의 풍천원(楓泉原)은 궁예(弓裔)가 웅거했던 곳이다. 넓은 들판이 300리 정도이고, 사방이 막혀 험난한 지형이 많다. .......... 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태원[太原]에서 평요고성[平遙古城]에 이르기까지의 들판은, 300리 정도이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 곳은, 역사[歷史]의 기록[記錄]과 지형[地形]과 지리[地理], 유적[遺跡], 자연환경[自然環境]등이 일치하고 있으며, 역사서[歷史書]와 문집[文集]등에서 설명하는 내용과 합치[合致]되고 있으며, 어긋남이 없는 지역이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선생은, 원주목[原州牧]을 태원[太原]이라고 말하며 기록[記錄]하고 있다.
당시[當時]에 조정[朝廷]의 대신[大臣]으로, 강원도[江原道]의 지역을 다스리기도 하고, 유람[遊覽]도 하며, 직접 보고 체험[體驗]을 바탕으로 남긴 글들이며, 기록[記錄]들이다. 기[記]에,....... 問魯陵 山峽阻深 古獩貊之地, 노릉[魯陵]을 물었는데, 산협[山峽]이 막히고 깊었으니, 옛날 예맥[獩貊]의 땅이다.
平原雉嶽 有東嶽祠, 평원의 치악(雉嶽)에는 동악사(東嶽祠)가 있다. 北至靺鞨 東西五百里 南北千里, 북[北]쪽으로는 말갈[靺鞨]에 이르는데 동서[東西]의 길이가 500리이고 남북[南北]의 길이가 1000리[千里]이다.
古俗尙孝悌睦友 嫁娶有禮 江陵,壽春,太原 最大都 옛날의 풍속[風俗]이 효제[孝悌]와 화목[和睦], 우애[友愛]를 숭상하고 혼인[婚姻]에 예의[禮儀]가 있었다. 강릉[江陵],임영[臨瀛],........ 수춘[壽春],춘천[春川],.......... 태원[太原,원주[原州]는, 가장 큰 대도[大都]이다. 이렇게 기[記]에서 기록[記錄]하고 있다. 강원도[江原道]의 강릉[江陵], 원주[原州], 춘천[春川]은, 모두 예맥[濊貊]의 지역이다. 산서성[山西省]의 태원[太原]은, 바로 원주목[原州牧]이 있는 지역 이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공교육[公敎育]을 통하여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중독이 되어 있다. 세상에 태어나 초등학교[初等學校]에 입학하여, 대학[大學]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망치는 반도사관[半島史觀]인 식민사관[植民史觀]을 교육[敎育]받으며 성장[成長]했으니, 그 폐해[弊害]가 어찌 작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지금 한국[韓國]의 대다수 국민[國民]들은,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찾아가는 사람들을, 이해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찾는 것은, 우리의 선대[先代]인 조상[祖上]의 일이요, 우리는, 우리 역사[歷史]의 후예[後裔]들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후손[後孫]들에게, 우리의 진실[眞實]된 역사[歷史]를 바로 알지 못하게 하고, 어릴 때부터 자라나는 새싹의 기상[氣像]을 죽이고, 정신[精神]과 혼[魂]과 얼을 비굴하고 쇠약하게 만드는, 식민사학[植民史學]의 교육[敎育]을 계속 한다면, 이 나라의 미래[未來]는, 결코 밝지 못할 것이다.
반도[半島]의 한국[韓國]에서 식민사관[植民史觀]의 교육[敎育]을 받고 자란 세대들은, 강원도[江原道]라고 하면, 동해[東海] 바다가 있고, 산이 높고 산골이 많으며,
춘천[春川], 원주[原州]는, 지방의 산골도시 정도로 생각하고, 지금도 그러하니 옛날에도 그러했을 것이다. 라고 인식[認識]하는 것이 대체적인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당시[當時]를 살았던 분들의 기록[記錄]들은, 이와는 상반된 다른 설명을 하고 있으니, 식민사관[植民史觀]은, 국가[國家]와 국민[國民]의 정신[精神]과 혼[魂]과 기상[氣像]을 병들게 하고 있음을, 우리들의 눈앞에서 현실[現實]로 보게 되는 것이다.
관동[關東] 지방의 강원도[江原道] 원주목[原州牧]은, 산이 높고 많은 것은 사실[事實]이나, 그 융성[隆盛]하고 부유[富有]함이 조선팔도[朝鮮八道]에서, 손가락을 꼽을 정도였다. 그 뿐만이 아니다. 국가[國家]와 백성[百姓]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지키기 위한, 웅장[雄壯]한 성곽[城郭]들이 요새지[要塞地]마다 빈틈없이 축조[築造] 되어 있었다. 지금도 성곽[城郭]이 원형[原形]을 지니고 있는 것이 여러 개 남아있고, 성곽[城郭]의 터도, 그 흔적[痕迹]이 뚜렷하여, 성곽[城郭]의 배치상황을 한눈에 알아 볼수 있다.
舊屬楊廣道 今爲江原道之界首官, 예전에는 양광도[楊廣道]에 속하였으나 지금은 강원도[江原道]의 계수관[界首官]이다. 其地廣 其民夥 山川之勝 土田之饒 物產之富 爲諸州最, 땅이 넓고 백성[百姓]이 많으며, 산천[山川]이 아름답고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物産]이 풍부하여 여러 고을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 강원도[江原道]의 원주목[原州牧]은, 조선[朝鮮] 시대[時代]에도 이렇게 융성[隆盛]한 곳이었다.
또한, 원주목[原州牧]은, 양광도[楊廣道]에도 속한 적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양광도[楊廣道]는, 고려[高麗]가 대륙[大陸]의 중원[中原]을 중심으로, 설치 한 도[道]였다. 지금의 황하[黃河]를 기준으로, 남[南]쪽과 북[北]쪽의 광대한 면적이 양광도[楊廣道]에 포함 되었다. 여기에는 고려[高麗]의 남경[南京]인 양주[楊州]까지 포함 되고 있는데, 양주[楊州]는, 지금의 서안[西安]이며, 조선[朝鮮]의 장안[長安]인, 한양[漢陽]이 되는 곳이다.
충렬왕[忠烈王]때에, 원[元]나라의 반적[叛賊] 합단[哈丹]이 와서 성[城] 아래에 주둔하여 온갖 계책[計策]을 써서 침공하니 성[城]이 거의 함락될 지경이었다. 원충갑[元冲甲]이 주의 사람들과 함께 이를 막아 적을 거의 반이나 쏘아 죽였다. 이로부터 적[敵]은 예기[銳氣]가 꺾여서 감히 여러 성[城]들을 공략하지 못하였다.
정필[鄭弼]의 시[詩]에, 성[城]안 범이 우레같이 으르렁거려 땅을 진동[震動]시키며 가는 것을, 북원[北原]에서 막아 끊으니 만민[萬民]이 살았네.
홍귀달[洪貴達]의 시[詩]에, 산 기운[山氣]은 노을을 찌는 듯 그림병풍 둘렀고, 경치는 물에 닿아 강[江]가의 성[城]을 옹호하네.
성현[成俔]의 시[詩]에, 두어 포기 작약[芍藥]은 붉은빛 섬돌에 번득이고, 일만 줄 늘어진 버들은 푸른 성[城]에 가득하구나.
우승범[禹承範]의 시[詩]에, 천년[千年]의 외구[外寇]를 소탕하니, 우뚝이 선 것이 백치[百雉]의 성[城]처럼 든든하다.
설장수[偰長壽]의 시[詩]에, 위엄[威嚴]은 홀로 천[千] 사람의 군진[軍陣]을 쓸어버렸고, 뛰어난 계책[計策]은 능히 백치[百雉]되는 성[城]을 보전하게 하였네.
강원도[江原道]의 원주목[原州牧]에는, 성곽[城郭]의 치[雉]가 백[百]여개에 이르는 웅장[雄壯]한 성곽[城郭]이 있었다. 그 성[城]은 바로, 원주목[原州牧] 태원[太原]의 남[南]쪽에 우뚝 서있는, 지금의 평요고성[平遙古城]이다. 이 성[城]이 원[元]나라의 반적[叛賊] 합단[哈丹]의 무리를, 원충갑[元冲甲]이 백성[百姓]들과 함께 무찌르고 성[城]을 지켜낸 곳이다......... 수춘[壽春]은 춘천[春川], 태원[太原]은 원주[原州], 강릉[江陵]은 임영[臨瀛]은,........ 모두 예[濊]와 맥[貊]의 지역이며, 북[北]쪽으로는 옥저[沃沮], 고구려[高句麗]로 이어지고, 서[西]쪽으로는 요동[遼東]으로 이어진다.
옥저[沃沮]와 예맥[濊貊]의 사이에는, 1000리[千里]에 이르는 모래 사막[沙漠]인 사해[沙海]가 있으며, 1200여리[千二百餘里]의 지역을 관할하는 강릉[江陵] 대도호부[大都護府]는, 지금의 대동[大同]에 있었다. 울릉도[鬱陵島]와 우산도[于山島]는, 내몽고[內蒙古] 자치주인 우란차부의 동[東]쪽에 있었다. 이곳에는 지금도 하얀 모래가 끝없이 펼쳐지고 있는 지역이 많이 있으며, 바다같이 넓은 대택[大澤]들이 수 없이 널려 있다.
몽고[蒙古]의 울란바트로에서 북[北]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바이갈호수와 울란바트로의 중간 지점에 있는 평원[平原]에, 고색창연[古色蒼然]한 궁궐[宮闕]같은 옛 건물이 있다. 지금은 사찰[寺刹]이 되어 있는데, 이 건축물은, 몽고[蒙古] 사람들이 지은 것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 지역 사람들은, 이러한 건물을 짓지 못한다. 이곳에 있는 팔각정[八角亭]은, 서울의 원구단[圓丘壇]에 있는 황궁우[皇穹宇]의 건축보다 더 정교하고, 단청[丹靑]도 고색창연[古色蒼然]하며, 원형[原形]이 아주 잘 보존[保存]되어 있다.
팔각정[八角亭]이 있고, 본궁[本宮]의 건축 형태로 보아, 사찰[寺刹]로 지은 건물은 아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건축물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이러한 건축물 누가 이곳에다 지었을까 ? 현지[現地]에서 이 건축물에 대하여 아는 사람을 찾아보았지만 그저 옛날에 지은 사찰[寺刹]이라고 말할 뿐 아는 사람이 없었다. 여기서 북[北]쪽으로 올라가면 바이칼호수와 만나게 된다.
건물의 규모가 상당히 큰데, 나라의 명[命]이 아니면 이러한 건축물을 이곳에 세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조[朝鮮朝]에서 몽고[蒙古]의 아르항가이, 코브골 호수[湖水], 바이칼 호수[湖水]까지 둘러본 대신[大臣]이 있었다. 이분이 바이칼 호수[湖水]에서 말하기를, 서북[西北]쪽으로는 산이 높고, 끝없이 얽혀 있는데, 8월에도 눈이 내리는 곳이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북[北]쪽을 둘러보고 싶으나, 바람이 심하게 불고, 풍랑[風浪]이 심하여 건널 수가 없으니, 아쉽지만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고, 기록[記錄]을 하고 있다. 이 분의 기록[記錄]으로 보면, 바이칼 호수[湖水]까지 조선[朝鮮]의 영역[領域] 안에 있었다.
시[詩]와 문집[文集]의 기록[記錄]들을 보면, 조선조[朝鮮朝]에서 지은 것임은 분명하다. 이 화려하고 정교하며 단청[丹靑]이 휘황찬란[輝煌燦爛]한 건물의 용도[用途]는 무엇이었을까 ? 대신[大臣]들의 문집[文集]에 기록[記錄]된 내용으로 보아서는, 북해[北海]의 신[神]을 모시는 북해묘[北海廟], 동해의 신[東海神]을 모시는 동해신묘[東海神廟], 북악[北岳]의 신[神]을 모시는 북악사[北岳祠]중의, 하나 일 것이다.
조선[朝鮮]과 명[明]나라와의 관계,....... 조선[朝鮮]과 청[淸]나라와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重要]한 것은, 조선[朝鮮]의 강역[疆域]을 찾아서, 이를, 증거[證據]하고, 고증[考證]하는 일이다. 조선[朝鮮]의 강역[疆域]과, 영역[領域]을 확실[確實]하게 증명[證明]하게 되면, 나머지 역사[歷史]의 의문[疑問]과, 역사서[歷史書]의 모순[矛盾]과, 허[虛]와실[實]은, 스스로 드러나며, 풀리게 되는 것이다.
명[明]과 청[淸]이 조대명[朝代名]이냐, 아니냐는, 그리 중요[重要]한 문제가 아니다. 역사서[歷史西]를 통하여, 머지않은 시기에, 이에 대해서 밝혀질 것이다. 고려[高麗]가 망하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명[明]에 사대[事大]을 하고, 대륙[大陸]에서 반도[半島]로 쫓겨 들어 왔을까 ? 반도사관[半島史觀]에 근거[根據]를 두고서, 우리의 역사[歷史]를 찾는다는, 그러한 뜻에 대하여, 그 진심[眞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저 추정[推定]과 가설[假說]로 주장하는 설[說]들이 난무[亂舞]하고 있는, 우리 역사[歷史]의 현실[現實]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조선[朝鮮]의 세조[世祖]가, 평안도[平安道] 도절제사[都節制使] 양정[楊汀]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나는 중국[中國]이 오랑캐를 진정[鎭靜]시키지 못하리라고 생각해왔는데, 두려워 몸을 움츠린 채, 스스로 달아나느라고 지친 꼴이 이와 같으니, 가소로울 뿐이다. 전에 경[卿]으로 하여금 군대[軍隊]를 사열하여 위세[威勢]를 보이게 한 것은 공격[攻擊]하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으니, 조선[朝鮮]의 위세[威勢]와, 조선[朝鮮]의 위엄[威嚴]은, 천하[天下]를 쓸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때, 조선[朝鮮]의 군세[軍勢]는, 활을 쏘는 군사[軍士]가 30만[三十萬], 정예병[精銳兵]이 10만[十萬], 용사[勇士]가 3만[三萬]이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군사[軍士]를 상시[常時] 운용하는 조선[朝鮮]이, 무엇이 두려워 반도[半島]로 쫓겨 왔으며, 무엇이 두려워, 명[明]에 복종[服從]을 하였겠는가 ?
조선[朝鮮]이 망하고 나서, 대륙[大陸]에서도, 조선사[朝鮮史]의 역대[歷代] 역사[歷史]를, 대륙[大陸]의 땅에서 지우기 위한, 은밀[隱密]하고 치밀[緻密]한 계획이 진행되어, 사서[史書]와 고지도[古地圖]라는 것들이, 왜곡[歪曲] 조작[造作]되어, 이에 맞추어지고,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 우리 역사[歷史]의 현실이다. 조선[朝鮮]이 망하고, 반도[半島]에 허수아비 왕조[王朝]가 세워지는 정황[情況]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여러 사서[史書]에서 그대로 들어나고 있다. 다만 그 것을, 우리가 살피지 않고, 모르고 있을 뿐이다.
반도[半島] 조선[朝鮮]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역사서[歷史書]에 대한 조예[造詣]가 얼마나 깊은지는, 알 수 없으나, 모든 사서[史書]에 나오는 기록[記錄]들을 따라서, 그 기록[記錄]이 가리키는 현지[現地]에 대한 조사[調査]를, 한번이라도 해보고, 그러한 주장[主張]을 하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의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의 역사[歷史]를 찾아가는 것을, 한국[韓國]사람인지, 다른 나라 사람인지는 알수 없으나, 이를 방해[妨害]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한 짓을 하는 시기[時機]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깨닫고, 알아야 할 것이다.
명[明]과 청[淸]나라의 북경[北京]이, 어떻게 지금 중국[中國]의 북경[北京]이 될수 있겠는가 ?
欽定滿州源流考흠정만주원류고에, 始祖 定 三姓之亂 청[淸]나라의 시조[始祖]가 삼성[三姓]의 난[亂]을 평정[平定]하고, 장백산[長白山] 동남[東南], 建國鄂多理城,악다리성[鄂多理城]에 나라를 세우고, 卽以滿州建號 즉위[卽位]하여 부른 이름이 만주[滿州]라고 하였다. 지금의 동북[東北] 삼성[三省]이, 어찌 청[淸]나라의 발상지지[發祥之地]가 될 수 있겠는가 ?
삼성[三姓]이란 것은, 장백산[長白山]에 살고 있던, 세 부족[部族]의 성씨[姓氏]을 말한 것이다. 이것이 동북[東北] 삼성[三省]으로 둔갑[遁甲]을 하여, 지금의 백두산[白頭山] 북[北]쪽이 만주[滿州]라고 하는데, 이는 일제[日帝]가 고의적으로 만든 것이지, 이곳이 어찌 만주[滿州]가 될수 있으랴 ! 지금의 백두산[白頭山]을 장백산[長白山]이라고 한다면, 청[淸]나라의 발상지지[發祥之地]는, 동해[東海]의 바다속에 있었단 말인가 ?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조선[朝鮮]이 어찌 반도[半島]에 있었겠는가 ?........ 평안도[平安道]와 함길도[咸吉道]는, 도로[道路]가 아득히 멀어,....... 반도[半島] 한국[韓國]의 평양[平壤]이 그렇게 아득히 먼 길이었던가 ?
國朝寶鑑 국조보감에, 上率 王世子 西巡 平壤, 세조[世祖]가 왕세자[王世子]를 거느리고 서[西]쪽으로 평양을 순행[巡行]하였다. [중략] 申叔舟 自 北來朝 이때, 신숙주[申叔舟]가 북[北]쪽으로부터 와서 알현하고, [중략]
命 [叔舟]試取 平安 黃海二道 文武士, 신숙주[申叔舟]에게 명[命]을 내려, 평안[平安], 황해[黃海] 두도[二道]의, 문사[文士]와 무사[武士]를 시취[試取]하게 하였다. [중략] 라고 하였다.
세조[世祖]는, 조선[朝鮮]의 서[西]쪽에 있는 평양[平壤]으로, 순행[巡幸]을 하였다. 이때, 야인[野人]을 토벌[討伐]하던 咸吉道함길도 都體察使도체찰사 申叔舟신숙주가, 북[北]쪽에서 내려와 세조[世祖]를 알현[謁見] 하였다. 평안도[平安道]와 황해도[黃海道]는, 서[西]쪽, 서북[西北]쪽에 있었다. 평양[平壤]을 이적[夷狄]들과 경계[境界]한 서북[西北]의 대[大] 거진[巨鎭]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종족[種族]과 경계[境界]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역사서[歷史書]에, 그렇게 기록[記錄]을 하고 있는 것이다.
평양[平壤]은,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이미, 머리와 눈동자와 피부색이 다른, 이적[夷狄]들이, 평양[平壤] 백성[百姓]의 반을 차지하고 있어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통역[通譯]을 되리고 다녀야 할 정도가 되었다고, 사서[史書]와 문집[文集]들은,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다.
사가시집권지구[四佳詩集卷之九]
기함길도부원융강동년[寄咸吉道副元戎康同年]
당부하건대 일찍 연연산[燕然山]에 공훈 새기고, 煩君早勒燕然石개가 부르며 돌아와 태평성대[太平聖代] 보좌하게나, 奏凱歸來佐太平 [중략]
장백산[長白山]은 높다랗게 푸른 하늘에 우뚝 솟아, 長白山高揷大靑산[山]꼭대기는 유월[六月]에도 눈이 겹겹 쌓였으니, 山頭六月雪崢嶸 [중략]
사가시집권지44[四佳詩集卷之四十四]
송황해도권도사[送黃海道權都事]
서관[西關] 지방의 쇠퇴가 극심하니, 西關凋弊極백성[百姓]을 편안케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라네, 第一要安民 [중략]
양관[陽關]에서 이별주 한 잔을 권하고, 陽關一杯酒이제 다시 서[西]쪽으로 보내는구려, 今復送西歸 [중략]
사가시집보유이[四佳詩集補遺二]
황화집[皇華集]
차운평양회고[次韻平壤懷古]
청운 길이 만리[萬里] 멀리 펼쳐 있는데, 萬里靑雲遠그대는 지금 기족[驥足]을 펴는 처음일세, 君今展驥初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하고 오래전에 합병하여, 朝鮮開國久合倂절령[岊嶺]의 관새[關塞]를 금성탕지[金城湯池]로 삼았는지라, 金城湯池關岊嶺천산[天山]에 활 걸고 바다에는 파도도 일지 않아, 天山掛弓海無波군대[軍隊]의 경보가 없으니 사방[四方]이 평안하구나, 刁斗不鳴寧四境 [중략]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는,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으로 확인[確認]할 수 있는 것이 5000년[五千年]이다. 오천년[五千年]전부터, 기록[記錄]되어 근세[近世]에 이르기까지, 자연환경[自然環境]은 변화[變化]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사막[沙漠]이 되어 있는, 대륙[大陸]의 동[東]쪽에서, 서[西]쪽으로 타글라마칸 사막[沙漠]에 이르기까지의 지역에는, 고대[古代]의 성곽[城郭]의 유지[遺址]가 수십개 남아 있다.
당시[當時]에 지금 같은 사막[沙漠]의 지대였다면, 성곽[城郭]을 축조[築造]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지금은 물이 줄어들고 작아져 호수[湖水]라고 부르지만, 그 옛날에는, 바다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광대[廣大]한 염호[鹽湖]의 흔적[痕迹]이, 현재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가 사서[史書]를 읽고, 폐절[廢絶]된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찾으면서, 현재[現在]의 자연환경[自然環境]을 바라보면 안되는 이유[理由]는, 수십[數十] 수백[數百]가지에 이른다.
장백산[長白山], 백두산[白頭山]은, 유월[六月]에도, 흰 눈이 겹겹이 쌓였으니, 이름하여 백두산[白頭山]이라 부른다. 양관[陽關]에서 한잔 술을 권하고, 다시 서[西]쪽으로 떠나 보내나니,....... 양관[陽關]이 어디에 있는가 ? 양관[陽關]에서 서[西]쪽으로 떠나면, 어디로 가겠는가 ?
절령[岊嶺]의 관새[關塞]를 금성탕지[金城湯池]로 삼고, 천산[天山]에 활을 거니 천하[天下]의 사방[四方]이 편안[便安] 하구나. 이러한 것이 바로,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이며, 조선사[朝鮮史] 역대[歷代] 역사[歷史]의 강역[疆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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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환국고려님이 고증한것과 제가 어렴풋이 추정하던것이 일맥상통한것같아 기쁨니다. 구글 위성사진으로 전부터 윗글에서 말한 지역을 살펴봤는데 아주 광활한 지역일뿐만 아니라 큰 호수가 있었던곳이 확연히 보이며 또 어떤 지도(곤여만국전도)에도 그곳에서 고비사막일때까지 크고 긴광활한 호수가 표시돼 있는걸로봐서 이곳을 빼놓고는 다른 무엇을 설명한다는것이 소설이라 생각하고있었는데 환국고려님께서 이렇게 명쾌하게 밝혀주니 속이다 후련합니다. 이곳을 찍은 여러 여행사진기록이나 또 영상물을 봐도 물이 없었다고 하기에는 그 땅을봐도 석연치 않다는생각을 했었습니다. 더 놀라운점은 강릉도호부만 1200리라하니 강원도는 얼마?
신년벽두에 <환국고려>님의 정성어린, 열정적인 글,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그곳을 직접 방문하여 조사를 하셨다니 그 열정에,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님>의 말씀처럼 우리들의 선조들이 기록한 기록서만 갖고도 "반도조선"의 허구는 백일하에 들어나는데도, 기존사학계에서는 "반성은 커녕 억지 주장과 거짓된 유물유적을 만드는 비열한 짓을 서슴치 않고 있지요." 누가 보아도 믿을 수 없는, 확연히 보이는 거짓을 진실인 냥 포장하는 반도 학자들은 이젠 치유가 불가능한 환자들"입니다. 이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스스로 나서는 수밖에요! 더욱 열심히 "원전"을 파고들어 그 허와 실을 밝혀내야만 합니다.
반도는 <무엇이 거짓이며, 무엇이 진실인가>를 판단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사학'계뿐만 아니라 '정'계도 역시 마친가지이며, 이는 거짓을 진실인 냥 살아온 후유중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선사의 진실은 분명하게 밝혀져야 합니다. 앞으로 구체적이며 효율적인 적극적인 방법을 모색해 보고자 합니다. 지난 해에 보내주신 성원에 감사드리며, 신년에도 아낌없는 성원, 부탁드립니다. 함께 조선의 영광을..............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
소략한 글에, 항상 격려와 성원을 보내 주시는데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선대의 역사이며, 우리 조상님들의 역사인 조선사의 역대 역사를, 그 후손들인, 우리가 바로 세우지 않는다면, 그 누가 할수 있겠습니까 ? 천하에 서릿발 같은 기상과, 천하를 덮는 위엄을 드날리던 우리의 역사는, 깊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서기만을 간직하고 비추고 있으나, 미명의 어둠을 헤치며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과 같이, 천하를 밝게 비출수 있도록, 조선사의 후예들이, 성심을 가지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문무 선생님 항상 건강하시며, 대부여님께서도, 항상 건강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글 잘보았습니다.
모처럼 조선의 변방이 아닌 중심강역(현 산서성과 그 주변)에 대한 글이라 더욱 반갑습니다. 대부여님도 ‘일맥상통한다’ 하였읍니다만 제 생각과도 일치된점이 있어 좀 놀라기도 하였습니다.
현 산서성 대동시가 강릉이라 하셨지만 제 판단은 석가장시(현 하북성)가 아닐까 합니다. 철령 동쪽이 강릉이니 석가장시의 서쪽이 철령이고 강릉을 철국이라 했으니 철과 깊은 관계가 있는 곳일 것입니다. 바로 석가장시 서쪽에 양천철산이 있습니다. 현재에도 양천시 가 있는곳입니다.
허목선생이 삼척부사로 좌천되었을때 그의 본관인 양천부근으로 갔던것이죠. 허목의 본은 양천허씨입니다.
대동시가 강릉이라면 강릉 서쪽에 있어야할 철령은 어디쯤일까요...또 고려 초에 동경을 두었다 하니 대동시가 동경이면 그 서쪽에 서경(..?)...
현 산서성 태원시가 원주라 하셨는데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태원과 창츠사이 어디쯤이 아닐까 합니다 . 평요와 태원은 북경(연행사들이 갔던)으로 생각되고 원주와 북경은 서로 멀지 않은곳일 것입니다. 무슨 엉뚱한 말인가 하시겠지만, 현 우리나라 원주시 옆 치악산에 영원산성과 영원사가 있습니다. 물론 왜곡의 단면입니다만 그 영원산성에 고려 충렬왕때 몽고의 합단형제와의 전투가 있었다는 곳입니다. 합단형제에 관해서는 연행록에도 보이지만 바로 의주 통군정 동쪽의 구룡정과 철우의 이야기에도 나오는 내용인데 그 철우가 있던곳은 현 황하강변입니다.
반도사학에서 합단형제가 두만강을 건너 철령을 지나 원주 치악산에서 전투를 하고 지금의 세종시 원수산까지 왔었다 하지만, 원주나 강릉 회령 종성(현 함경북도에 있는)등은 현 태항산맥 언저리에 있어야할 지명들이고 요동 역시 산서성 중부의 평야지대라 생각됩니다. 영원산성에서 합단과의 전투와, 원숭환과 누루하치와의 그 영원성 전투, 또 현 평안북도 영원군의 영원은 같은 지역으로 현 산서성 중부 일대일 것입니다.
정철의 관동별곡에 나오는 ‘ 평구역에 말을갈아 흑수로 돌아드니 섬강이 어디메뇨 치악이 여기로다.’ 하는 구절(평구 흑수 섬강 치악) 역시 철령관 부근의 현 태항산맥의 일대가 아닌가 합니다.
<고구려[高句麗] 때에는 하서량[河西良]이라 일컬었고 신라[新羅] 때에는 명주[溟州]라 일컬었다. 고려[高麗] 초에 동경[東京]을 두었다. 뒤에 하서[河西]라 일컫기도 하고 경흥[慶興]이라 일컫기도 하다가 충렬왕[忠烈王] 때에 오늘날의 명칭[名稱]으로 고쳤다>
위의 사료에서 강릉부가 하서, 하서량 이라고도 했다는 말에서 하(河)는 현 황하 (황하에서 현 하북성지역을 흐르는 구간)이고 그 서쪽이란 말이니 석가장시가 유력합니다.
한서에 <예군남려[濊君南閭]가 28만명을 이끌고, 요동[遼東]으로 와서 한[漢]나라에 귀순하니, 한[漢]나라의 무제[武帝]는, 예맥[濊貊]의 지역인 이곳에 창해군[滄海郡]을 설치~~~>의 내용으로 보아 요동과 창해군(강릉?)은 서로 인접지역임을 알수 있습니다.
평요고성에도 가 보셨다 하셨는데 혹 구룡벽을 보셨는지요.. 또 표호의 시작이라는 일승창도 보셨는지요. 또 평요에서 (동남쪽으로) 가까운 곳에 유명한 관광지인 면산이 있습니다. 산서성의 어느 석탄부호가 이곳에 호텔도 짓고 도로도 넓히고 개발하는데 애를먹었다 합니다. 이곳으로 가는 길목에 청석으로 된 암석지대가 있어 그 돌을 깎아내는데 어려웠었다 하더군요. 어느 지역엔들 청석이 없겠냐마는 연행록에서 청석령은 중요한 지명입니다. 청석령과 회령령이 가장 높다 했는데 바로 이 일대 일것입니다. 조선의 성곽도 모서리는 청석으로 했다니 아마도 이곳의 돌이 아니었을까요..
실제로 평요 근처의 ‘장벽고보’란 동내의 길바닥에 수없이 깔려있는 돌이 대부분 청석입니다. 열하일기중 피서산장에 갔다가 다시 연경으로 오는 여정중에도 청석령이 나옵니다. 압록강을 건너서 바로 나오는 청석령과 다를수도 있지만 제 판단으로는 같은곳입니다.
특이한 것은 이 면산에는 크고 작은 자연동굴이 수백개가 있다합니다. 처음부터 자연동굴인지, 아니면 과거의 수도승들이 도를 닦기위해 적당히 파놓은 굴인지는 알수 없습니다만 하여튼 많이 있습니다. 이 굴들도 중일전쟁때 많이 파괴되었다 하더군요.이 면산에는 유 불 선의 유적이 혼재하는곳이고, 지금은 하도와 낙서의 그림이 간판처럼 걸려있습니다.
황제 헌원이 광성자진인에 치국과 양생에 관한 도(道)를 물었다는 공동산이 바로 이 면산이라 생각되는 곳입니다. ‘공동’이란 말의 어감도 텅빈 굴 또는 그러한 굴들이 많은 동내란 의미가 있는듯합니다.
지리지[地理志]에, 원주목[原州牧]은,......... 恭愍王二年, 安胎于州之雉岳山, 復原州牧. 別號平涼京, 又號平涼 [成廟所定], 屬郡二, 縣五. 공민왕[恭愍王] 2년에 본 주[州]의 치악산[雉岳山]에 왕[王]의 태[胎]를 안치하고 원주목[原州牧]으로 회복시켰다. 별호[別號]는 평량경[平涼京]이며 또는 평량[平涼]이라 부르기도 한다. 성종[成宗]이 정하였다. 속군[屬郡]이 2개, 현[縣]이 5개이다. [중략]
현 감숙성 평량시에 공동산이 있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원주의 별호가 평량이었군요..원주의 위치가 태원~평요 일대이거나 적어도 그 인근지방일 것입니다.
댓글이 길어저 죄송합니다.
아뭏튼, 조선사의 진실은 산서성을 파헤치지 않으면 해결될것 같지 않습니다. 산서성을 지상 박물관이라 합니다. 사람 살기에 비교적 척박한 이곳에 그 많은 유적들은 조선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지 궁금합니다. 님의 글을 통하여 많은것을 배우고 또 새로운 사실들도 알게되었습니다. 깊이 감사드림니다.
'대부여'님과 '맑은영혼'님의 열정에 감사드립니다. 조선사의 진실은 틀림없이 밝혀지리라 생각됩니다. "반도 평안남도" 에 "대동"이라는 지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대동"이라는 지명은 대륙의 황하 서북안(영하성 황하 서북안 옛 요나라의 천덕군)에 있으며, 이곳에 <대동천과 대동성>이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곳에 있던 "대동"이 현 산서성 동북 "대동"으로 이동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고구려.백제.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의 저자이신 "정용석"님께서도 "강릉은 임분(산서성)"이라고 주장하신 것 같군요. 다양한 주장과 의견을 취합해 보면, 조선사의 진실찾기에 관한 방향은 결정될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맑은 영혼님의 열정에 탄복 합니다. 산서성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글에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산서성의 동부는 천하의 절경이 다모여 있는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산수가 수려한 곳이며, 유서깊은 고적들이 깊은 산 골짜기마다 수없이 산재하고 있는 곳이지요. 글에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반도에서 가야의 유물이라고 주장하는 파형동기의 무뉘가, 산서성의 중부, 유서깊은 고적의 돌에 새겨져 있으며, 잘아시겠지만 작약과 모란의 꽃 무뉘, 학의 무뉘 등 많은 문양등이 고루누각에 수 없이 새겨져 있습니다. 파형동기의 무뉘가 왜, 이곳에 새겨져 있겠습니까 ?
이 파형동기가 새겨져 있는, 유적은, 고려나 조선시대 때의 건축으로 생각이 되는데, 산서성의 고건축에 있는, 각종 돌에 새겨진 문양을 보면, 이는, 조선사 역대 역사의 문양이지, 명과 청과는 관계가 멀다고 보여 집니다. 그리고 구룡벽은 명나라나 청나라의 것이 아닙니다. 용은, 우리 민족이 본류이며, 용의 나라는, 고려와 조선 입니다. 생각하는 관점은 다르겠지만, 지금 중국에서 한나라 유적지로 둔갑을 시키고 있는, 한나라의 건축을 보십시요, 용마루가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반도의 시골에서 작은 집을 지어도 용마루를 올린다고 합니다. 식민사관이 나라를 망치는 사관인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산서성의 평요고성은, 성의 방향이 동남쪽 입니다. 산서성에 대하여, 많은 주장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찾는것이, 의문에서 시작 되었으니, 노력을 하다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사료 됩니다. 평요고성은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지만, 그리 큰 성곽이 아닙니다. 이 정도의 규모의 성곽은, 수도 없이 산재하고 있습니다. 방향은 다르지만, 지금 대동에서부터, 북경에이르는 장성이 진시황의 만리장성을 이어 명이 축조 했다고 하는데, 이는 조선사의 역사 기록으로 보더라도 새빨간 거짓입니다. 맑은영혼님의 열정에 경의를 표하며, 항상 건강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본글도 훌륭하고 맑은 영혼님의 댓글 또한 훌륭한 지음 입니다 두분의 글이 확실한 힘을 보여주는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