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2일(토) 09:30 ~ 15:00까지 봉수대 정비작업 실시
7월 중순경 우연히 포남동 동인병원 뒷산에서 산책을 하게 되었다. 일행은 포남동 뒷산의 산책로를 걷다가 MㆍBㆍC 뒷산이며 수원지 바로위로 풀잎 무성한 작은 길이 눈에 띄어 올라가 보게 되었다. 잡초와 이름모를 무성한 나무에 덮여 쌓여 있는 봉수대를 보게 된 것이다. 일행은 봉수대에 걸터 앉아 강릉지역읜 문화재 관리 실태를 비판하게 되었고 또한 시민으로서 문화재를 관리하여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모임에서 이에 대한 정비작업의 필요성을 강조하게 되었으며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동 내용은 같은 날 도민일보에 기사화 되었다. 우리가 본 봉수대의 위치는 강릉시의 중심지역에 위치하여 있는 곳으로서 산책로에서 내려다보면 강릉시내와 멀리 대관령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며 특히, 강릉의 4주(기둥)산인 모산봉과 월대산, 시루봉, 태장봉과는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강문 바다와도 직선거리로 10리(4Km)이내의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고려시대의 행정업무를 도맡아 보던 칠사당도 마주 보이는 요새이다. 강릉시민 대다수가 강릉지역에 봉수대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봉수에 대한 참고 내용 요약 ⇒ 봉 수 (烽 燧)
1. 개념과 시원
봉수는 밤에는 횃불로써 알리는 烽(燃烽)과 낮에 연기로써 알리는 燧(燔燧)를 합친 말이다. 봉수는 변경지방의 긴급한 상황을 중앙 또는 변경의 진영(鎭營)에 알리는 통신체제로 주로 군사상의 목적으로 설치 운영하였다. 봉수의 시원은『三國史記』․『三國遺事』에 擧火․烽峴․烽山․烽山城 등이 나타나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미 삼국시대에 봉화에 의한 통신법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군사적 의미의 봉수제의 성립은 고려 의종 3년(1149) 8월 이후이다. 이 때 西北兵馬使 曺晋若의 上奏에 의해 각 烽燧에서 정세의 위급에 따라 올린 炬數와 봉화대를 지킬 요원의 배치 등을 정하였다. 고려의 봉수제는 원 지배하에서 상당기간 중단되었다가 고려말에 이르러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지면서 더욱 정비 강화되었다. 조선건국 초기에는 고려의 봉수제를 거의 그대로 답습하다가 세종대에 와서 炬火炬數法 등의 관계규식을 새로이 정비하고, 각도 연변에 烟臺를 새로 축조하고 나아가 봉수로를 회정하는 등 봉수제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2. 조직과 운영방법
봉수의 관장은 중앙에서는 兵曹의 武備司에서, 지방에서는 監司․兵使․水使와 都節制使․巡察使 등 모든 군사책임자가 이를 감독하였다. 봉수의 임무를 수행하는 요원으로는 봉수군과 伍長(監考), 伍員이 있었다. 이들은 반드시 봉수대 근방에 거주하는 자로 배속하도록 하였는데, 京烽燧․沿邊烽燧․內地烽燧에 따라 시설 및 정원에 차이가 있었다. 모든 봉수지에는 伍長 1인이 근무하였고, 경봉수(5개소)에는 2명, 연변봉수에는 5인, 내지봉수에는 3인이 근무하였는데, 대체로 10일마다 교대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邊境安危의 傳告는 그 정세의 완급에 따라서 이를 炬數로서 구별하였는데,『經國大典』에는 海上賊과 陸上賊의 구별없이 5炬로 규정되어 있었다. 평상시에는 한줄기, 적이 나타나면 두줄기, 적이 가까이 오면 세줄기, 적이 침입해 들어오면 네줄기, 적과 접전하게 되면 다섯줄기의 연기나 불을 피워서 신호하였다. 만약 前烽이 오르지 않거나 風雨 등으로 연기와 불빛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봉화대에 상주하는 烽燧軍이 즉시 다음 烽燧에 急報하여야 하였다. 봉수에 의해 상달된 정세는 京烽燧에서는 5員이 兵曹에, 地方烽燧에서는 伍長(監考)이 관할 鎭將에게 보고하였다.
3. 봉수의 종류
봉수에는 京烽燧․沿邊烽燧․內地烽燧의 3종류가 있었다. 京烽燧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봉수로서 서울 木覓山(南山)에 위치하여 木覓山烽燧 또는 南山烽燧라고도 불렀고, 沿邊烽燧는 海陸邊境의 제일선에 설치되었으며, 內地烽燧는 沿邊烽燧와 京烽燧를 연결하는 중간봉수로 數的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였다.
각 봉수대간의 거리는 산세와 雲霧 등 자연조건에 의해 차이가 나게 마련이나 대체로 沿邊烽燧(烟臺)는 10∼15리, 內地(中間)의 晝燧지역은 20∼30리, 夜火地域은 40∼50리 정도가 기준이었다.
4. 전국봉수망
전국 烽燧網은 5大路가 있고, 여기에 間線이 연결되어 있었다.
第1路는 永安道 慶興(西水羅 牛巖烽燧)으로부터 江原道를 거쳐 楊州 峨嵯山에 이르러 서울 木覓山 제 1烽에 응하는 것이고,
第2路는 慶尙道 東萊(多大浦 鷹峰)로부터 忠淸道를 거쳐 廣州 天臨山에 이르러 서울 木覓山 第2烽에 응하는 것이며,
第3路는 平安道 江界(滿浦津 餘屯臺)로부터 내륙으로 황해도를 거쳐 漢城 毋岳東峯에 이르러 서울 木覓山 제 3烽에 응하는 것이고,
第4路는 平安道 義州(古靜州 余屯臺烽燧)로부터 海岸을 거쳐 서울 毋岳西峯에 이르러 서울 木覓山 第4烽에 응하는 것이며,
第5路는 全羅道 順天(防踏鎭 突山浦烽燧)로부터 忠淸道를 거쳐 陽川 開花山에 이르러 서울 木覓山 第5烽에 응하는 것이었다.
5. 영동지방 봉수
16세기초에 편찬된『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강원도 지방은 함경도 慶興으로 연결되는 본선과 동해안 지대에 간선이 있었다. 조선전기 강원도의 봉수로 본선은 함경도 안변의 철령을 통해 전해오는 봉수를 본도의 淮陽-平康을 통하여 경상도 寧海의 大所山으로 연결되어 청송을 경유, 안동에 이르러 東萊본선에 연결되었다.
조선전기 강원도의 烽燧臺는『세종실록지리지』와『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48개처가 기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강릉지역은 간선망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봉수대는 注文山[지금의 주문진]․沙火山[지금의 사천]․所同山[지금의 화부산 아래 소동산(일명 포남동의 바깥뫼)․海靈山[지금의 안인진 해령산]․吾斤山[지금의 옥계 오근산]․於達山[동해 어달동 어달산]에 있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와서는 경흥으로 이어지는 본선에 속한 平康․淮陽․鐵原․金城의 봉수대만 존속하고 동해안으로 이어지는 간선망은 모두 폐지된다. 이는 조선초기에는 왜구가 동해안에 출몰하는 경우가 있어 이에 대한 경계의 필요성에서 유지되었던 것이나 양난을 겪은 후 국방정책의 관심이 수도와 서북변경지역에 집중되고 동해안에서의 왜구의 출몰이라든가 기타의 사변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참고:『세종실록지리지』
『여지도서』
『강릉시사』, 강릉시사편찬위원회, 1996
첫댓글 좋은 史料료를 발견하셨네요.. 지금은 지자제가 활성화 되어 향토 문화에 관심이 더욱 커지는데 한부분을 더 밝혀내어 활용하게 되었네요,,축하합니다.
만해시전에 함께하지 못한 점이 아쉬웠습니다. 저는 봉수대 정비작업을 하느라 몸에 옻이 올랐습니다. 가려운 부위가 아주 얄미운 옻!ㅎㅎㅎ 그러나 마음 뿌듯합니다.
바다새님 안녕하세요? 요즘 기관장이상 국장님 까지 봉사활동 하신다는 애기 들었어요~짝짝짝 박수를 보냅니다 . 깨끗한 강릉 지역을 위하여 열심히 사회봉사 해주세요 ~다음에는 옻은 오르지 마시고요 ㅎㅎㅎ
바다새님 ! 이제는 움직이는 백과사전이라 닉을 바꾸셔야겠네요.언제 그 많은 전문 지식들을 발췌해내는지 궁금.
8월 12일까지만 읽고 그 다음부터는 어려워서 미루고 , 좋은 일 많이 하시네요. 바다새님 움직이는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