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막 오딧세이 > ( Jesus' Final Odyssey ) 제11회
제11장 예수, 스승 요한을 딛고 서다
깊고 슬픈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들 아호이아 - 킴 Ahoia - Kim의 숨결이 느껴진다. 예수는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어린 아들의 손에서 전해지는 건강하고 힘찬 맥박을 느낀다. 이곳 카슈미르에서 노년을 보내면서도 예수는 세월을 탓하지 않았다. 세월은 그에게서 젊음을 가져갔지만 그 대신 노년의 지혜와 인생을 여유있게 보는 눈을 주었다. 예수의 머릿속으로 젊은 날의 격동의 순간들이 스쳐간다.
'젊음, 젊음이 좋은 것만은 아니지! 그땐 젊어서 너무 성급했어! 젊은 혈기로 모두 다 이루려 했었지!'
세례요한 공동체에서 예수파가 독자적 성격을 드러내면서 갈등은 시작된다. 세례요한과 예수가 직접 경쟁하는 시기가 상당기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 경쟁은 요한이 옥에 갇힘으로써 갑자기 끝난다. 이때부터 예수의 독자행보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요한이 옥에 갇히고 나자, 요한을 따르던 사람들이 구심점을 잃고 예수에게 몰려들었다. 그 바람에 예수의 교단은 최근 갑자기 규모가 커졌다. 예수 자신은 교단이 커지는 것을 반가워할 수 만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벌써 주위에서는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혀 있는 틈을 타서 예수파가 요한의 신도들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비난이 들려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예수는 자신의 이종육촌형이자 스승인 요한의 구명운동을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걸림돌이 몇 가지 있었다.
평소 헤로데 안디바 정권을 타도하고 유대정권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유대민족 독립 운동가이자 열심당원인 가룟 유다는 세례 요한이 갇혀있은 마케론티스 Machaerontis 성채를 급습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현 정권에 맞설 경우 자칫 그 불똥이 자신들에게 까지 튈 것을 염려하며 반대하고 나섰다. 베드로는 또한 요즈음 요한이라는 구심점을 잃고 연일 몰려오고 있는 신도들도 거두어들여야 한다는 현실적 상황도 반대이유로 들고 있다. 예수 자신은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을 반대한다는 원론적 답변을 하였을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광야에 나타나시어 설교중인 「세례요한」(좌) / 예수를 구세주라하여 혹세무민의 죄를 씌여 투옥된 「세례요한」(우)
며칠 후 세례요한은 감옥으로 자신을 찾아온 제자들을 예수에게 보내 예수에게 묻게 한다. 그 질문에는 요한의 예수에 대한 실망과 꾸중이 배어 나온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세레요한의 의중이 제자들에게 드러나는 실토이다.
'세례요한은 지금껏 예수를 두둔해주던 스승이자 형이 아니었던가? 세례요한은 왜 갑자기 예수의 정체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 것일까? 여태껏 그는 예수가 바로 구세주라고 말하여 오지 않았던가? 세례요한 스스로 자신이 지금껏 가져 온 생각이 잘못이었음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감옥 창살이 불빛을 받아 돌바닥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양 발목에 채워진 쇠사슬을 절그럭 절그럭 끌며 발걸음을 옮긴다. 세례요한은 차가운 돌바닥의 격자무늬를 한 칸 한 칸 밟으며 중얼거린다. 배신감에서 오는 분노로 검푸르게 변한 그의 얼굴은 어른거리는 불빛으로 더욱 일그러져 보인다. '실로 가장 큰 죄인은 바로 내가 아닌가! 그런 위인을 경솔하게 구세주라 칭하여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결과를 낳게 하다니!'
다음 날 세례요한은 자신을 찾아와 교단의 향후 방향을 묻는 제자에게 대답한다. "만일 내가 예수를 진정한 메시아로 인정했다면 내가 이끄는 교단을 포기하고 예수를 따라 갔을 것 아닌가?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네. 더구나 예수는 강 건너편에서 자기 파벌을 이끌고 내 신도들을 자기편으로 끌어가며 나와 경쟁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로부터 며칠 뒤 세례요한은 참수를 당한다. 예수는 요한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배를 타고 조용한 곳으로 떠난다. 사람들이 예수가 달아나는 것이라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언급을 회피하고 싶은 이 곤란한 부분을 마태는 예의 매끄러운 말솜씨로 처리하고 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로 가시니 ..." (마태복음 14:13)
들려오는 소문에는 헤로데 안디바가 세례요한을 제거한 것을 시작으로 자신의 정권에 부정적인 종교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지도자들을 체포하러 올 것이라고 한다. 세례요한 다음의 표적이 될 인물이 누구인가는 자명하다. 누가도 이 일에 대해 적고 있다. 헤로데 인디바는 여전히 선교사업이 행하여진다는 말을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그는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여전히 또 다른 지도자가 나섰다하니 그 사람이 누구인고? 그 사람을 잡아와 보라."
사도들이 이 사실을 예수에게 알리자, 예수는 그들만을 데리고 사람들 몰래 별도로 벳세다 Bethsaida라는 마을로 몸을 피하였다. (누가복음 9:7-10) 마태와 누가의 이 부분에 대한 디노테이션(외시적 메세지, 외연적 메시지)은 '예수님께서는 자신도 세례 요한처럼 잡혀 죽을까 두려워 도망가셨다'이다. 안전한 곳으로 피신한 예수는 거기서 자신을 쫓아 무리 지어 모여든 사람들에게 저 유명한 '오병이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인 기적)의 기적'을 일으킨다.
왼쪽에 두손을 모으고 있는 「아기요한」과 오른쪽 「아기예수」 엘리자베스,마리아,요셉(좌) / 「성聖 요한 그리스도」(우)
세례요한이 죽은 후, 세례요한을 따르던 사람들까지 흡수하여 예수교단이 위상을 달리하게 되자 교단 간부들은 예수가 세례요한보다 위대한 존재임을 부각시키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들은 세례요한의 그림자를 지우기 시작하였다.
예수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과 그의 제자생활을 했었다는 사실은 가장 큰 약점으로 남았다. 그 사실은 너무나 확실하게 알려져 있어 어떠한 형태로든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문제도 요한의 정체성을 예수의 스승이 아니라 메시아 예수가 밟고 갈 길을 마련하는 자로 규정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즉 스승 요한과 제자 예수의 서열이 메시아 예수와 종복 從僕 요한으로 갑자기 뒤바뀌어진 것이다.
특히 요한이 베푼 세례의 의미는 완전히 폄하되었다. 세례라는 것이 무슨 특별한 것이 아니라 아무나 다 받는 단순한 일상적 종교의식에 불과한 것이라고 극단적으로 폄하하였다. 예수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것 역시 요한이 훌륭한 존재여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이 사람 저 사람 다 세례를 받듯이 받았다는 식으로 의미를 희석시키려 애썼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 예수 사도들의 세례요한 격하작업은 계속된다.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세례요한에게서 받은 세례는 가치가 없는 것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다시 세례를 받아야한다고 설득하여 다시 세례를 집행한다.
세례요한의 격하의 일면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신들은 어떤 세례를 받았습니까?"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신들은 세례요한이,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듣지 못했습니까?" "그러면 저희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다시 받겠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요한에게서 받은 세례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자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왔다는 이야기도 모두 허황한 이야기라는 뜻이 된다. 게다가 세례요한의 세례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며 예수의 세례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예수가 요한에게서 받은 세례 역시 무효이므로 예수 본인이 자신에게 다시 세례를 해야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세례요한은 분명 예수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요한은 장차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아기 예수와 아기 요한(그들은 1년 2개월 정도 차이다)(좌) / 스승인 세례요한으로 부터 세례받는 예수(우)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 중 유일하게 죄가 없는 존재라는 예수는 무엇을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을까? 그리고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가 불 또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었다는 기록은 없다. 요한의 사후, 요한 공동체와 예수파 사이의 헤게모니 쟁탈전은 바울이 세례요한 공동체의 신도들을 재세례하여 예수교단으로 흡수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또 베드로파, 바울파, 아볼로 Apollo파, 그리스도파, 야고보 James파등의 다른 파들도 바울파에 속속 통합되었다. 예수는 세례요한 공동체의 공식 자료들이 예수 교단의 바울파에 의해 대대적으로 파괴되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하지만 이제는 위대한 스승의 면모를 제대로 가늠할 방법이 없어진 것이다.
예수는 유대 땅을 떠나 이곳 카슈미르에 정착한 후에도 자신의 교단의 소식은 어렴풋이 듣고 있었다. 카라반들을 통해 서쪽에서 이따금 실려 오는 풍문에마저 관심을 끊기는 어려웠다. 역사는 흐르는 것이 아니라 반복된다고 하였다. 새로워 보이는 인간사도 반복의 연속이기 쉽다. 스승의 자리를 차지한 제자도 어느새 자신의 제자에게 다시 밀려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가보다. 예수 교단에 예수는 없고 바울만이 있으니 말이다. 예수는 눈을 감은 채 깊은 숨을 내쉰다. 이종육촌형이자 스승이었던 요한을 처음 만났을 때의 풋풋했던 두 사람의 우애가 새삼 그리워진다.
카라반 일행이 이곳 카슈미르를 지날 때 이따금씩 예수에게 들러 고향소식을 전해주는 상인들을 통해 전해들은 소식이다. 세례요한의 종파가 요한이 처형을 당한 후 지금까지도 존재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자신이 유대를 떠난 후 요한 공동체가 해체되어 지리멸렬되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예수는 오히려 반가움을 느꼈다. 더구나 일단의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이라크에서 요한을 메시아, 즉 요한 그리스도로 숭앙하고 예배드리고 있다는 소식에 새삼 깊은 안도감을 느낀다. 그나마 미안함이 덜해지는 듯한 느낌이다.
"세례 요한을 메시아로 믿고 흠숭하고 따르는 요한의 사도와 수많은 제자들이 그들의 선생이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임을 온 세상에 알렸도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출처] < 예수의 마지막 오딧세이 > ( Jesus' Final Odyssey ) 제11회|작성자 래용예수의 마지막 오딧세이 > ( Jesus' Final Odyssey ) 제11회
[출처] < 예수의 마지막 오딧세이 > ( Jesus' Final Odyssey ) 제11회|작성자 래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