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지금의 우리는 뒷짐을 진 채 비합법의 포장마차로 간다.
분류없음 2009/01/20 10:13 |
머지않아 우리는 우리와 함께 했던 모든 비합법적인 것들을 소싯적 추억으로만 묻어두게 될 것이다. 물때 자욱한 주홍색 천막을 둘러 감은 노천 포장마차보다 '실내 포장마차'로 둔갑한 일본식 선술집 이자까야에 더 익숙해져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실용과 합리 그리고 합법이란 면죄부를 부여받은 이 사회의 미덕이다. 그럼에도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2009년 지금의 우리는 뒷짐을 진 채 비합법의 포장마차로 간다. |
저녁 6시. 잠실역 1번 출구의 포장마차에 하나 둘씩 짝을 지은 사람들이 자리를 채운다. 주머니가 얇은 대학생, 연거푸 취업에 실패한 청년 실업자, 상사에게 차이다 못해 짓눌린 오피스맨, 현장에서 막일을 마친 깊은 주름의 중년 등, 저마다 가져온 사연들도 각양각색이다. 집어 들던 젓가락과 술잔을 잠시 내려놓고, 그들이 그려낸 익숙한 어수선함을 느껴본다. 분명 하이퍼 리얼리즘이란 말을 어디 고상한 것에만 쓰란 법은 없는 듯하다.
이렇다 할 간판도, 이정표도 없는 이곳을 사람들은 잠실 포장마차 일명 '잠포'라고 부른다. 지난 1월 12일 정부에서 승인한 제2롯데월드의 신축 부지 한켠에 자리한 잠포는 90년대 초반 송파 지역의 개발붐에 공사 인부들이 늘어남에 따라 하나 둘씩 생겨난 것이 최초다. 당시 수십 개의 점포들로 성황을 이루었으며, 퇴근길 직장인과 인근 주민들의 하루 시름을 떨치기에 더 없이 좋은 장소였다. 하지만 정부의 단속과 부지 소유주인 롯데 측의 반납 요청에 따라 현재 7개의 점포만이 성업 중이다.
6개의 점포는 2개 동에 3,4개로 사이좋게 나눠져 있다. 어디가 맛있을까 기웃 기웃 들여다보지만 처음 찾는 이라면 결정하기가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각각의 점포는 규모만 조금씩 다를 뿐, 차이점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중, 고등학교의 나무책상으로 되어 있는 테이블과 파란 플라스틱 의자를 사용하는 것하며, 기본 안주인 양파와 초고추장 그리고 어묵 국물이 제공되는 것까지 모두 동일하다.
"그때 갔던 덴가 고추집이었다? 찬이집이었나?"
종종 잠포를 방문한다는 사람도 헷갈리기는 마찬가지다. 한 달에 한 번씩 자리를 바꾸고, 점포의 이름보다 위치로 기억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매번 다른 집이다. 하지만 이렇다 할 단골집이 없다하더라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음식의 양도, 맛도, 종류도 말 그대로 고만 고만이다.
이런 저런 고민이 끝나고 자리에 앉으면 투박하게 썰어진 양파(아예 채를 썰는 곳도 있음)와 초장, 그리고 공짜 안주 치고는 제법 훌륭한 어묵 국물이 책상 위 양철 쟁반에 놓인다. 곧이어 허름한 포장마차 안에서 가장 그럴싸하게 만들어진 코팅된 메뉴판을 건네받는다.
'오뎅 국물은 셀프입니다.' 라고 쓰여 있음에 무한리필임을 깨닫고 흐뭇해하며, 30개나 되는 음식 중 무엇을 먹을까 한참을 고민한다. 음식의 가격대는 \5,000이 대부분, 개중에 단가가 조금 더 나가는 과메기(\10,000)나 제육볶음(\6,000)은 가격이 조금 더 나간다. 만 몇 천원에 어설픈 세 가지 안주를 주는 호프집이나, 어이없는 가격으로 서민 등을 후려치는 동네 어귀 포장마차를 생각하면 확실히 경쟁력 있는 가격이다. 좌우지간 메뉴가 많으니 손님의 고민은 깊고, 길어져만 간다.
우동은 너무 배고파서 먹은 거임.
딱히 구미가 당기는 것이 없다면 오돌뼈(표:오도독뼈), 닭똥집 볶음, 고갈비가 실패 확률 0%의 일명 안전빵 메뉴이다. 물론 어느 것 하나 대단한 맛을 보이지는 않지만 '포장마차에서'이기 때문에 더욱 맛있는 음식들이다. 먼저 오돌뼈 볶음은 여느 술집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오돌뼈 볶음이라 할 수 있던가? '월리랑 오돌뼈를 찾아라!' 수준의 다진 고기볶음에 본 기자를 포함한 전국의 오돌뼈 매니아들은 빈번히 실의 금할 수 없었다.
잠포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젓가락질을 하는 족족 오돌뼈가 월척이니 오돌뼈 볶음이 드디어 진정한 자아 정체성을 되찾는다. 오돌뼈 주위에 적당히 붙어 있는 살코기에는 짭쪼롬하고 칼칼한 맛이 자작하게 배어 있어 그 중독성 강한 맛에 음식도 술도 술술술 넘어간다. '조미료 맛이 심하네', '간이 짜네'하는 불평도 들리지만 과연 누가 소주와 오돌뼈의 조합을 거부할 수 있을까?
다음은 포장마차 안주의 터줏대감 격이라 할 수 있는 닭똥집 볶음이다. 오돌뼈의 강한 맛이 불편하고, 미세한 입자에 감질났다면 더 없이 좋은 선택이다. 잠포의 닭똥집은 특별한 양념을 가미하지 않아 담백하고, 썰어 놓은 두께 역시 두껍지도 얇지도 않아 궁합 좋은 콤비가 완성된다. 기름에 아름답게 코팅된 닭똥집을 소금에 살짝 찍어 양파와 함께 입안으로 넣으면 그 독특한 치감과 양파의 향긋함에 절절한 감동이 밀려올 뿐이다.
당신이 잘생겼다면 사이다는 뽀나스
아니라면 소주나 드셈.
절절한 감동을 소주로 깨끗이 씻겨 내리기를 수차례, 소주 가격이 \2,000 밖에 하지 않으니 주머니 가벼운 학생도, 지갑 얇아진 직장인도 "이모 한 병 더!" 라는 말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 그렇게 붓고 마시는 사이에 안주도 쉽사리 바닥을 보인다. 어묵 국물만을 술 안주삼기 버거울 무렵, 속도 채우고 뒷맛도 깔끔한 고갈비는 더 없이 적절한 선택이다.
역시나 선불 \5,000이다. 어지간한 백반집 자반 가격이지만, 못지않게 신선하고 살이 실하니 딱히 아쉽거나 미운 감정은 들지 않는다. 순식간에 알맞게 구워온 고등어가 상에 놓인다. 고소한 향기와 담백한 맛에 무뎌진 젓가락질이 다시금 빨라진다. 배는 뜨끈뜨끈하게 불러오고 얼굴에는 얼큰하게 취기가 돈다. 다이어트 해야 한다며 튕기던 아가씨의 이성도 이 순간만큼은 식욕에게 백전백패다.
술잔이 기울지언정 분위기는 기울지 않는다. 그 누구도 먼저 자리를 뜨려하지 않으며, 이야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무르익고 깊어지며, 횡설수설을 동반한다.
자정. 손님들은 하나 둘씩 빠져나가고 포장마차 안에는 인사불성이 된 사람들이 힘겹게 눈을 뜨고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가까스로 짐을 챙긴다. 천막 뒤에는 불편한 화장실을 탓하며, 누구의 수고스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위풍당당 남자들이 노상방뇨의 추억을 만들고 있다. 포장마차 밖으로는 부족한 탄수화물을 보충하려는 사람들로 핫도그집이 성황을 이룬다. 막차를 놓친 커플 손님은 야릇한 이색광경을 연출하며 어딘가로 향하고, 술이 덜한 사람과 술이 더한 사람은 자리를 이을 것인지 말 것인지로 한참을 실랑이 벌인다.
인간의 삶에서도 가장 부서지기 쉽고 불안한, 한편으로는 가장 행복하기도한 순간들이다.
이 모습을 2009년 6월부터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별달리 내세울 것 없는 맛이지만 다시는 맛볼 수 없을지 모른다. 어수선 하면서 묘한 분위기를 다시는 느낄 수 없을지 모른다. "잠포에서 보자"라는 친구의 말을 들을 수 없을지 모른다.
시답잖은 실용, 합리, 합법 그리고 물질 만능주의가 만든 피해자인 잠포에게 묵념을.
잠실 포장마차 기본정보 가는 법 : 2,8호선 잠실역 1번 출구 바로 오른편 영업시간 : 오후 5시 ~ 자정 가격대 : \5,000~10,000 소주 : \2,000 ★ 위생 : 별루 맛 : 나름 만족 추천 점포 : 고추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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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