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라벨은 후기 인상파로 간주될 수 있다. 프랑스 서남단 바스 피레네 지방 생 장 드 뤼 근처의 시부르에서 태어났다. 그 가족들은 모리스가 태어난 후 오래지 않아 파리로 이사했다. 그의 아버지는 채광 기사였으나 음악가가 될 뜻을 품은 일도 있는 사람으로 그의 아들의 예술가적 기질에 공감을 나타냈다.
모리스는 열네 살에 음악학교에 들어가 16년 동안 다녔다. 예술가로서의 라벨의 발전은 일반인들에게 인정받기 오래 전부터 전후파 시인, 화가, 음악가들과 교우관계(이들은 자신들을 아파치<Apaches>라 불렀다)에서 크게 자극 받았다.
그의 음악은 처음에는 군중들로부터 야유를 들었다. 평론가들에게는 비난을 받았다. 단지 몇 사람만이 그의 독특한 성질을 식별했다가 점차 그 수가 늘어나면서 유명하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라벨은 당연히 프랑스 일류 작곡가로 인정받아 유럽 각지로부터 그의 작품의 지휘를 요청받았다.
1928년에는 미국으로부터 연주를 요청받았다.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 앞서 그가 사랑하는 프랑스 포도주와 담배를 한결같이 보급을 보장받는 조건이었다.
비록 처음에는 서로 피곤하였으나 나중에는 라벨과 미국은 서로 마음에 들었다. “나는 멋진 도시들과 매혹적인 시골을 봅니다. 그러나 성공이라는 것들이 나를 지치게 만듭니다. 더구나 나는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입니다.” 그는 이렇게 집으로 편지를 했다.
말년에는 불안감과 불면증으로 괴로와했다. 그는 파리의 나이트 클럽의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몇 시간씩 째즈를 들으면서 그것을 멈춰보려 했다. 그의 나이 60세가 가까왔을 때 그는 드물게 보이는 뇌질환에 걸렸다. 정신능력은 손상되지 않았으나 언어중추와 운동신경 조직이 손상된 것이다.
점차 악보를 읽고 선율을 기억하고 쓰는 일이 불가능해졌다. 한번은 다프네와 클로에 공연 후 그는 이렇게 외치면서 울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도 머리속에 너무나 많은 음악을 가지고 있어 나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어. 아직도 모든 것을 말해야 돼.”
그리하여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각 조각 떨어져나가는”것을 지켜보지 않으려고 위험한 수술에 자신을 내맡기기로 결심했다. 수술은 1937년 말에 시행되었으나 그는 다시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라 발스(La Valse>>
http://www.youtube.com/watch?v=TK6gGWMnTZ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