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 제70주년을 추념하며 사람들이 궁금 해하는 김달삼에 관한 글을 퍼 올려봅니다.
이런 자들 때문에 선량한 제주도민들이 엄청난 희생을 당하게 됩니다.
(근 현대사)
‘김달삼 모가지 잘린 골’(제주 4.3 사건)
김대중 전 대통령이 CNN과의 인터뷰에서 “제주 4.3은 공산 폭동”이었다는 발언(1998. 11. 23.)과, 제주 4.3은 “폭동“이라는 대법원의 판결(2014. 6. 12.)의 주된 근거 중 하나는 그 주동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가장 긴 지명이 강원도 정선군에 있는데, 그 중 두 번째로 긴 지명이 '김달삼 모가지 잘린 골'이다. 제주도 출신 제주 인민 해방군 남로당 지구당 총책이던 김달삼이 ‘강원도 정선군 여량면 봉정리’ 근처에서 잡혀 목이 잘렸다 하여 이렇게 이름 지어졌다. 이 같은 내용은 정선군 임계 면사무소가 정선 아리랑 연구소에 의뢰해 2011년에 발간한 『정선 임계면 지명 유래』(신국판, 376쪽)에 담겨 있다. 그런데 제주 4.3 폭동 인민 유격대 제 1대 사령관이었던 김달삼이 어떻게 강원도에까지 가서 죽었을까?
김달삼(1923∼1950)은 제주 대정읍 영락리 태생으로, 본명은 이승진이다. 김달삼이란 이름은 공산주의자였던 그의 장인 강문석이 쓰던 가명(假名)을 이어받은 것이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중앙 대학에서 수학하던 중 학병으로 징집되어 일본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김달삼은 1946년 대구 10.1 폭동에 가담하여 남로당 군사부장 이재복의 신임을 받는다.
1947년 제주도 3.1 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하였으며, 남로당 제주 도당책이 되어 한라산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군사부 책임자가 된다.
1948년 전쟁을 방불한 ‘전국 2.7 폭동’으로 인해 남로당 검거 선풍이 일자, 그는 부산에 있던 장인 강문석(남로당 중앙 위원)에게 피신하여 있다가 김달삼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1948. 4. 3. 제주도를 남로당이 장악한다는 계획 하에 무장 투쟁을 주도한 것이다.
제주 4.3 폭동의 성공은 공산 좌익들에게 한반도 공산화에 대한 확신을 준 사건이 된다.
김달삼은 그해 8월 25일 선거를 위해 해주 인민 대표자 대회에 참석하라는 북한의 지령을 받고, 8월 2일 성산포에서 어선을 타고 목포에 도착하여, 열차 편으로 서울에서 모여 38선을 넘어 월북하여, 최고 인민 회의에서 제주도 폭동의 진상을 보고해 대의원들의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다.
또한 이들은 9월 2일 평양에 모여 인민 공화국 창건을 위한 ‘조선 최고 인민회 제 1차 회의’를 열었는데, 이 회의에서 김달삼은 김일성, 허헌 등과 함께 49명의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헌법 위원회 헌법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동시에 김달삼은 국기 훈장 2급 훈장을 받았다.
그의 제주 4.3 폭동 성공에 대한 훈장이었다.
김달삼은 제주4.3폭동의 성공 후 북한 해주로 간 뒤 약 1년 만에 1949.8.4 북한 인민유격대 제 3병단장이 되어. 강동정치학원 출신 300여 명의 북한 인민유격대를 이끌고 오대산과 태백산맥을 따라 내려와, 경북 영천 보현산을 중심으로 동해여단을 편성해 국군을 공격하였다.
북한은 한국전쟁 직전까지 10차에 걸쳐 인민유격대를 남한에 침투시켰는데, 열 번의 무장공비 남파 중 네 번이 김달삼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김달삼은 제 4차때 경북 영양의 일월산으로 남파되었다.
이 후 제 7차 인민유격대 약 360명은 1949.8.17에 태백산으로 남하하여 대부분 토벌되고, 100여 명이 김달삼 부대와 합류하여 경북 일원에서 활동하였다.
그해 11월 6일 제 9차 인민유격대 100여 명이 김달삼 부대와 합류하였으나, 김달삼 부대는 전멸에 가까운 위기에 처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북한은 전멸에 처한 김달삼의 월북을 지원하기 위해 1950.3.28에 제 10차로 약 700명의 강력한 화력을 가진 정예부대를 오대산과 방대산으로 침투시켰으나, 강원도 정선군에 있는 반론산에서 국군 토벌대에 위해 소탕되었다.
반론산(1,068m)은 빨치산 퇴로중 하나였다.
그런데 실제로는, 김달삼은 1950. 3.28에 강원도 정선군 반론산 전투에서 죽은것이 아니라, 경남 신불산 전투에서 죽었다. 국제정치학자 토르쿠노푸가 쓴 책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에 "남한의 신문, 라디오는 김달삼의 사망을 보도했으나 그는 현재 빨치산 활동을 위해 북한을 방문중"이라는, 평양 주재 소련 대사가 모스크바로 보낸 전보(50.4.10) 내용이 실려 있다.
즉 김달삼은 3월 28일에 반론산에서 국군 토벌대 8사단 21연대의 공격을 받았지만 월북에 성공한 것이다.
3개월 후, 한국전쟁이 발발한 6.25. 아침 9시경. 제주4.3폭동 주동자 제 1대 제주인민유격대장 김달삼은 강동정치학원 출신 유격대원 3백여 명으로 구성된 조선인민유격대 제 3병단을 이끌고 주문진항에 상륙 후, 경북 청도군 운문산 지구로 침투하여 경남 신불산 부근에서 부산 지구에 침투할 계획으로 해로로 남하하던 중에 사살되었다.
김달삼 모가지 잘린골'은 '강원도 정선군 여량면 봉정리'가 아니라 경상남도 신불산 이었던 것이다.
1950.6.25 당일에 김달삼 유격대가 부산 침투에 성공했더라면, 부산항을 통한 즉각적인 미군과 UN군의 도움은 어려웠을 것이다. [ 뉴스엔 바이블 newsnbible.com ]
첫댓글 경남 신불산은 경남 양산시에 있는 신불산으로 추정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