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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한시기행 6부 두보초당의 봄날
(지난 여정)
첩첩준봉의 거센 물결이 용솟음치는 장강삼협. 영웅호걸들의 무대이자 시인 묵객들이 머물던 발자취를 따라 나선 길. 살아 꿈틀대는 역사와 전설을 만났습니다. 푸른 자연을 통해 깨달은 무위자연의 삶. 고통 속에서도 불멸의 시를 남긴 두보.
(두보초당<杜甫草堂>의 봄날)
삼국시대의 역사가 살아있는 거리. 다함없는 사랑의 그리움을 읊은 여인네의 노래, 자연과 역사와 사랑이 시로 변하는 중국의 한시 문화를 만나봅니다. ‘불학시면 무의언이라’, ‘시를 배우지 않고는 말을 할 수 없다.’고 한 공자의 말을 통해 중국 사람의 한시 사랑을 엿볼 수 있는데요. 유구한 역사에서 베어 나오는 한시를 간직한 쓰촨성의 성도 ‘청두’에서 여정을 시작합니다.
삼국지에서 유비의 나라 촉한의 수도였던 청두는 오늘날까지 쓰촨성의 성도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중국 서남부를 대표하는 도시로 인구 천만 명이 넘는 청두 곧 성도는 시인 두보가 살았던 삶의 흔적과 촉나라의 유적을 간직한 시와 역사의 도시입니다.
▶ 청두(성도成都) - 중국 쓰촨성(四川省)의 성도(省都)로 행정, 경제, 교통, 문화의 중심지.
성도는 풍요로운 평원이 있으며, 또한 물이 풍부해 예로부터 ‘하늘 창고’로 불리며 번영을 누렸는데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로 역사 문화 유적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여정은 성도에서 70km 떨어져 있는 중국의 유명한 도교 성지 청성산(靑城山)입니다.
▶ 청성산(靑城山) - 사계절 내내 푸르다고 하여 ‘청성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중국 도교의 성지.
청성산은 짙푸른 수목으로 덮여 ‘사계절 모두 푸르다.’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도교의 명산인 청성산에 왔습니다. 성도에서 멀지 않아서 성도에 오게 되면 꼭 한번쯤 둘러봐야 하는 산인데, 예부터 ‘그윽하다.’고 명성을 날린 좋은 산입니다.”
수많은 봉우리로 둘러싸인 모습이 마치 성곽과도 같아 보이는데요, 청선산은 지난 2000년에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됐습니다.
“와! 여긴 뭐 벼랑이, 깎아지른 벼랑이 아주 장관이네요. 와! 여긴 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까마득한 낭떠러니... 저 위로도 아찔해요, 아찔해... 야! 저기 나무뿌리 좀 보세요, 나무가 절벽에 버티고 있네요. 나 이거 오금이 저려가지고. 옛날에 여기에서 수련하던 도사들은 여기를 붕붕 날아다녔을 텐데. 우리같이 문명에 찌든 사람들은 몸이 무거워가지고 벌벌 떨면서... 아! 이거 정말 계곡이 깊어요. 아! 정말. 이런 깊은 계곡 옆으로 이런 조그마한 길을 왜 다녔을까요? 그건 일종의 수련 방법이었던 것 같아요. 긴장, 조금도 방심하지 않는 것, 그렇게 정신을 집중하는 것, 어쩌면 그런 수련방식의 하나로 절벽을 타고 다니고 그러지 않았을까요?”
과거 도인들은 도력으로 올랐던 걸까요? 신선만이 오를 수 있을법한 험준한 지세는 도교의 발원지다운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아이고, 손 좀 씻고, 맑은 물에 손 좀 씻고... 두보가 성도에서 살 때 여기에 놀러왔었던 모양이에요. 이 청성산과 관련된 시를 남기고 있거든요.
‘자위청성객(自爲靑城客)이니
불타청성지(不唾靑城地)라’
‘내 스스로 청성산의 객이 되었으니
청성의 땅에 침 뱉지 않으리라.‘ 하면서 여기가 도교의 명승지니까 도교에 관련된 심의를 쭉 풀어간 시가 있어요.“
무위자연을 근간으로 하는 도교의 가르침이 입신양명하지 못한 두보에게 큰 위안이 되었을 겁니다. 가파른 산행 길에서 두보는 자신의 기구한 삶을 떠올렸는지도 모릅니다. 산꼭대기 신선의 세계에 오르면, 혹여 답이 있을까요?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서 날개가 돋는 신선이 되는 겁니다. 높이 올라오니까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으려는지 근질근질하네요. 아이구 힘들다. 신선의 세계로 가는 길이 ‘단제(丹梯’예요. ‘붉을 단’, ‘사다리 제’. 지금 붉은 사다리 타고 신선 만나러 갑니다. 신선이 있을지 텅 빈 고요가 있을지...”
청성산은 앞산과 뒷산으로 나뉘는데요, 앞산은 경치기 수려하고 문화유적이 많고 뒷산은 자연경관이 신비하게 아름다워 원초적인 무릉도원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도교는 신선사상에 뿌리를 둔 중국 자생 종교이자 철학사상입니다.
“‘따또무웨이’, ‘대도무위(大道無爲)’, ‘큰 도는 작위함이 없다.’ ‘억지로 하는 것은 큰 도가 아니다.’ 라는 말이에요. 이게 도교의 가르침, 도가의 가르침. 그래서 큰 도라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움을 존중하는 게예요. 억지로 마구 인위적으로 하는 그것은 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대도무위라....”
해발 1,600여 미터 청성산 정상에는 도교의 시조 ‘노자’를 모신 ‘노군각(老君閣)’이 세워져 있습니다. ‘도교을 모르고는 중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만큼 도교에는 중국 민중의 정서가 짙게 베여있습니다. 중국의 이름난 작가 ‘노산’은 청성산의 푸르름이 떨어질 듯 말 듯, 움직일 듯 말 듯 마음속 깊이 스며드는 것이 기이할 정도라고 감탄했습니다.
“아! 새소리 좋다. 이백이나 두보 같은 시인들이 도교에 심취했었어요. 그것은 아마 도교가 주는 초월성, 현실에 메이지 않는 것, 자유로움 이런 것들을 좋아해서 그렇게 명산을 찾이서 도사를 만나고 그랬는데, 그런 자유로운 정신 현실에 메이지 않는 초월적인 정신 같은 것들이 그들의 시가(詩歌)에 그대로 들어와요. 그러면서 그런 시가를 읽는 사람들은 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현실에서 벗어나서. 그런 면에선 도교가 일정하게 문학에 그 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친거죠, 좋은 영향을.”
청성산의 푸름에서 영감을 얻고 도교에서 깨달음을 얻어 천고에 빛나는 명시들이 탄생했나 봅니다. 청성산을 찾아 시를 읊었던 두보는 당시 성도 외곽에 살고 있었는데요, 두보가 4년간 머물렀던 터는 두보를 기리는 ‘두보초당’으로 바뀌었습니다.
▶ 두보초당(杜甫草堂) - 두보가 48세 때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피해 청두에 왔을 당시 머물렀던 집.
“두보초당이라. 이 대나무를 보니까 두보가 처음 여기 와서 초당을 만들 때, 이 지방의 특산물인 면죽을 구해댜가 심는 그런 시가 있어요. 그게 생각나네. 좋다. 이 어르신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의 성인 ‘시성’ 두보입니다. 보통 이백이 술잔을 들고 하늘을 보고 있는 것에 비해서 이 분은 지금 땅을 보고 있죠? 침울한 표정으로.”
두보의 일생에서 일어난 사건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여기 보게되면, 여기 젊은 두보가 있는데 태산 높이 올라가가지고 ‘내가 저 꼭대기에 올가가서 반드시 제일부가 되겠다.’는 호쾌한 모습을 드러낸 그런 장면이고, 여긴 두보가 팔을 들고있고 옆에 불꽃이 일고 있잖아요, 이건 당시 모순에 가득한 현실, 거기에 대한 분노가 치밀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면서 그의 시에 현실을 고발하고 풍자하는 내용이 담기기 시작해요. 두보의 시에 전체적인 흐름을 만들어가는 시기. 이 내용은 당시 ‘안록산의 난’이 발발하면서 전쟁 속에서 백성들이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는 거예요. 그 현장을 목두하면서 두보의 시는 완전히 현실참여 현실비판 현실적인 시편으로 거듭나게 되죠.”
두보의 유명한 시 ‘석호리(石壕吏)’는 당시 전쟁으로 인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비참한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날 저물어 석호촌에 머무니
밤에 관리가 와서 사람을 잡아가네.
할아버진 담 넘어 도망가고
할머니가 문 열고 나와 보는구나.
관리의 호통소리 어찌나 매서운지
할머니 우는 소리 얼마나 구슬픈지.
“여긴 두보가 살던 살림집이에요. 띠풀로 엮어 놔가지고, 초가집인거죠.”
두보는 고통의 한가운데 서서 누구보다 낮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런 그의 시를 시로 엮은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어찌하면 넓은 집 천만 간을 마련하여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 기쁜 얼굴 갖게 할까
비바람에 끄덕 없는 산처럼 편안히 살까
아, 눈앞에 우뚝한 이런 집을 본다면
집이 부서지고 홀로 얼어 죽어됴 족하네
-두보의 (모옥위추풍소파가,茅屋爲秋風所破歌) 中
자신의 고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에요. 그래서 두보의 시가 위대한 시가 되는 거예요. 항상 자기의 고통에 함몰되면 안돼요. 고통에서 벗어나서 남들의 더 큰 고통을 바라보는 그런 시선 그런 군양들을 이 시가 보여주죠.”
고뇌에 찬 두보를 만났습니다.
“나라 걱정하느라고, 백성 걱정하느라고 깡마르셨네, 깡말랐어...”
비극 속에서 꽃핀 그의 시는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
“감사합니다. 당신이 몸을 태워가면서 만든 그 불멸의 시로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얻고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닦을 수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두보를 시의 성인 ‘시성’이라 칭하는 것은 왜일까요? 그가 최고 수준의 시를 썼기 때문일까요?
“‘성인의 마음으로 시를 썻다.’ 저는 그렇게 봐요. 어떤 말이냐면, 성인은 어떤 존재냐면 사람의 아픔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람이 성인이에요. 그래서 어떻게든지 나서서 그 아픔을 달래주고 그 아픔을 없애기 위해서 노력하고... 그게 성인이라고요. 두보가 시로써 그렇게 한 거예요. 지기 시로서, 자기가 직접 체험한 깊은 슬픔에서 베어 나온 그 시를 가지고 똑 같이 슬픔에 처한 사람, 고통에 처한 사람 눈물을 닦아 준거예요. 그래서 ‘시성’이예요.”
두보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당시 세상의 울분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일 겁니다. 다소 우울하기도 한 두보의 시처럼 평탄하지 못했던 두보의 삶은 48세에 이곳 청두로 와 초당을 짓고 잠시 평화로운 나날을 맞이합니다. 그는 이곳에서 4년간 240여 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아! 풍경이 참 좋습니다. 아이고 여기서 좀 쉬어갑시다. 두보가 이 초당에 살면서 좋은 시를 많이 썼어요. 그 중에서 제가 꼭 소개하고 싶은 시가 있는데, 그게 ‘춘야시우’라는 시에요. '봄밤에 내리는 비를 반가이 맞으면서 기뻐하면서'라는 뜻인데, 우리나라에서 정우성인가 누군가 주연해가지고 찍은 영화 ‘호우시절’이란 영화 있었죠? 그 호우시절에 나오는 시예요.
좋은 비는 시절을 알아
봄이 되니 내리네.
바람 따라 몰래 밤에 들어와
소리 없이 촉촉이 만물을 적시네.
들길은 구름이 낮게 깔려 어둡고
강 위에 뜬 배는 불빛만 비치네.
새벽에 붉게 젖은 곳을 보니
금관성에 꽃들이 활짝 피었네.
이 시에서 제일 멋진 구절이 뭐냐면, 삼사구에요. ‘수풍잠입야(隨風簪入夜)’ 바람 따라서 몰래 밤에 들어와요. 태평시절에 봄비는 항상 밤에 내린다고 했어요. 그래가지고 ‘윤물세무성(潤物細無聲)’이야, 만물을 다 촉촉하게 적시는데 정작 봄비 자신은 가늘어서 소리가 없어요. 다 길러주지만 자랑하지 않아요. 위대한 봄비의 덕성입니다. 여기 물고기들이 내 관중이네. 여기 두보초당에 살고 있는 물고기들이라서 수준이 있어요, 수준이... 시를 불러주니까 춤을 춰요. 좋아요 좋아...“
두보가 읊었던 그날의 봄비가 연못을 이룬 걸까요? 고단한 삶을 살면서 자연이 주는 평화와 안식에 기대했던 두보의 마음에 물고기들도 귀를 기울입니다. 그가 결국 의지하고 참여(?)했던 것도 역시 자연이 아닐까요?
두보초당을 나와 성도 시내로 나옵니다. 성도는 삼국지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익숙한 이름입니다. 삼국지의 주인공인 유비가 관우 장비 제갈량과 함께 1,800년 전 촉나라를 세운 곳이기 때문이죠. 삼국시대 촉나라의 수도였던 성도에는 촉나라 시대 거리를 재현해 놓은 ‘금리(錦里)’가 있습니다. 금리는 촉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상업거리로 최초의 번화가였다고 합니다. 옛 모습 그대로 지어져 있어 촉나라 수도로 번성했던 당시 성도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기기 금리인데, 무후사 바로 옆에 붙은 삼국시대의 분위기를 재현해 놓을 거리예요. 옛 거리인데 여기에 먹거리 중에 ‘장비우육(張飛牛肉)’이란 게 있어요. ‘장비’의 이름을 딴 육포가 있어요. 장비의 육포, 소고기로 만든 육포. 하하하 여기 장비가 있네요...”
“장비 분장을 하신 건가요?”
“네. 장비예요.”
“안녕하세요. 저희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한국에서 오셨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도 만나서 반가워요. 멀리서 오셨네요.”
“네, 그렇죠.”
“장비는 저기 전설에 적혀 있듯이 소고기를 좋아합니다.”
“아~ 장비가 소고기를 좋아했군요?”
“네. 자주 먹었다고 해요. 그래서 저도 이렇게 장비 분장을 했고요.”
삼국시대에 흥망성쇠의 역사와 달리 영웅들의 정신과 영혼이 깃든 금리엔 후대에 젊은이들이 모여든 활기찬 모습입니다.
“이렇게 한 덩어리 고기를 잘라서 주는데, 이렇게 생겼어요. 야! 먹음직스러워요. 냄새도 괜찮은데요.”
장비가 위나라 정벌을 위해 만들었다는 육포입니다.
“음~ 먹을만해요.”
사람은 가도 사람의 흔적은 남습니다. 촉도에서 측백나무가 그러하듯 여기 금리에서 장비는 ‘장비육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50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금리에 제갈량을 흠모했던 ‘두보’가 당도했습니다. 어둠이 짙어지면 홍등은 더욱 밝아지듯 크나큰 아픔을 겪으며 성도에 도착한 두보. 그가 느꼈을 제갈량을 향한 그리움의 크기가 짐작됩니다.
금리와 이어지는 길 끝에 ‘무후사’가 자리해 있습니다. 무후사는 제갈량이 죽은 뒤 70년이 지난 후 제갈량을 공덕을 높이 사 세워졌는데요, 하지만 무후사를 들어서면 제갈량이 아닌 촉나라의 황제 유비가 먼저 맞이합니다. 군신 서열에 따른 것이겠지요.
▶ 무후사(武候祠) - 1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유비와 제갈량의 제사를 모신 사당.
“여기가 무후사인데 왜 유비황제가 있나면, 본래는 여기가 유비를 모셨던 것인데 조금 떨어져있던 제갈량의 사당을 명나라 때 합쳤어요. 군신합사했다고요. 그건 살아서도 항상 같이 있었잖아요. 죽어서도 함께... 그만큼 임금과 신하 사이에 아주 친밀하고 서로 깊은 신뢰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죠.”
성도에 터를 잡은 두보는 무후사를 찾아와 제갈량을 향한 시 ‘촉상(蜀相)’을 남깁니다. 그가 지은 시 ‘촉상’에는 제갈량을 애타게 그리워했던 두보의 마음이 절절하게 그대로 묻어나는데요, 두보는 제갈량에 대한 시를 계속 남길 만큼 왜 이토록 흠모하고 존경했던 것일까요?
“그가 재능 있음을 알아줬잖아요. 그리고 세 번이나 찾아왔잖아요. 삼고초려했단 말이에요. 그점이 이제 참 감동을 주는 거예요. ‘나도 재능이 있는데, 나도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 재능을 가진 그런 능력 있는 사람인데, 왜 어진 임금을 만나지 못해서 나는 왜 내 꿈을 펼치지 못하는가?’ 이런 심정이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갈량의 이 모습에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하고 이런 것이요.”
두보에게 제갈량은 거울이었나 봅니다. 두보는 개인의 입신양명을 위해 벼슬을 꿈꾼 것이 아니라 어진 임금을 도와 백성을 보듬는 정치를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유비의 인정을 받은 제갈량이 그토록 사무치게 그리웠던 거죠.
▶ 망강루공원(望江樓公園) - 당대(唐代)의 여류시인 설도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청두(成都) 외곽에 있는 공원.
▶ 설도(薛濤, 770~830) - 중국 당대(唐代)의 명기(名妓) 겸 여류시인.
두보가 떠난 자리에 한시의 문학 전통을 이어준 여류시인 ‘설도’을 만나러 갑니다. 설도는 우리에게 익숙한 가곡 ‘동심초’의 작사가입니다. 일생동안 자신의 지조에 견주어 사랑했던 대나무 숲 사이에 선 설도의 모습이 단아해 보입니다.
집안이 기울어 기녀가 되었지만, 그녀는 시를 잘 지어 이름을 떨쳤습니다. 성도는 양질의 종이가 생산된 곳이었는데요, 설도는 붉은 종이를 직접 만들고 이를 ‘설도전’이라 불렀습니다. 설도전을 만들 때 물을 길던 우물도 그대로입니다.
“‘설도전’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보도록 합시다. 야! 여기 멋진 시들이 있네요. 바로 이거예요, 이거. 이것이 설도전에요. 연한 그림이 이렇게 바탕에 있고 그 위에다 글씨를 쓰는 거예요.”
“설저전이 있나요?”
“저쪽에서 하는 모양입니다. 가지고 나오네요. 이게 설도전인가요?”
“네. 여기 있어요.”
“예쁘네요.”
설도는 연꽃과 맨드라미 꽃잎으로 붉은색 종이를 만들어 작은 편지지에 시와 그림을 그렸습니다.
“설도가 살던 곳에 사람들이 종이를 많이 만들었어요. 그런데 설도가 보니까 자기 마음에 안든 거예요. 그래서 나름대로 고안을 했어요. 꽃 같은 것을 잘 활용해가지고 붉은색 나는 종이를 만든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다가 시를 써서 선물을 했더니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아예 이름을 ‘설도전’이라고, 많은 사람이 그 한 장 갖기를 소원했던 아주 귀중한 물건이 됐지요.”
“이게 청나라 때 만든 설도전이네요. 아! 참 예쁘다. 글씨도 좋고....”
당나라 때에는 황궁에서까지 유행했다고 합니다. 설도는 당대의 유명한 문인인 원진과 백거이, 유우석(?) 등과 시를 주고받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사람들의 흠모를 받았습니다.
“무어라 맘과 맘을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가곡 ‘동심초’
설도가 좋아했다는 대나무 사이를 걷다보니 그녀가 작사했다는 ‘동심초’ 노래가 저절로 흥얼거려집니다.
“우리가 설도전을 샀잖아요. 설도의 무덤 앞에 와서 설도가 지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가 가장 잘 알려진 ‘동심초’. 사실은 ‘동심초’가 아니고 ‘춘망사’예요. ‘봄날 멀리 바라보면서 부르는 노래’ ‘춘망사’라는 시인데 그걸 우리나라에서 가사로 쓰면서 주제를 살려가지고 ‘동심초’라고 한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신사임당이 지었다고 하는데, 아니에요. 설도가 지은 거예요. 그 설도가 지은 ‘춘망사’ 일부분을 제가 설도전에다가 한번 직접 써 보겠습니다.
꽃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마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어 풀잎만 맺으려느냐
- 설도의 (춘망사春望詞) 中
자 한번 보세요. 초서로 썼습니다. 아~ 사랑의 그 기약 없는 이별은 한 많은 청춘남녀들이 이 노래로 이 시로 많이 위로를 받았을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는 설도가 고맙죠.”
아름다운 자연은 시로 칭송하고, 나라를 위한 충성심을 시로 격려하고, 어지러운 세상은 시로 꼬집었으며, 이루지 못한 사랑은 시로 위로했습니다. 역사와 삶이 곧 시가 된 풍경을 따라 떠났던 여행은 한 편의 시로 남았습니다.
浣花溪絶句(완화계절구) - 김성곤
옛 비는 초당에 내리고
지금 새는 대나무 무덤에 운다.
천 년 시를 찾는 길
대금 한 자락에 꽃이 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