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
하루는 놀이터에 가서 똘남이가 노는 광경을 캠코더로 촬영했다. 집에 돌아와서 캠코더를 텔레비전에 연결하고 재생시켜 감상하니 화면도 넓고 소리도 똑똑하게 잘 들렸다. 재미있게 동영상을 구경하다가 마지막에는 함께 보던 똘남이 할미한테 호되게 추궁을 받았다. 모두 영찬이 덕분이었다.
영찬이는 똘남이와 놀이터에서 가장 자주 마주치는 친구였다. 똘남이보다 반년쯤 먼저 태어난 아이인데 제 부모는 타관에서 일하고 제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따라서 나도 자연스럽게 영찬이 할머니와 안면을 텄다.
동네 놀이터 입구에 쓰레기장이 있었다. 영찬이가 쓰레기장에 버려진 장난감 자동차를 놀이터로 끌고 들어왔다. 뒷바퀴 두 개가 빠져 달아난 그 고물자동차는 영찬이가 억지로 잡아당길 때마다 끌려가기 싫은 돼지새끼처럼 꺽꺽 쇳소리를 냈다.
비명을 지르거나 말거나 영찬이는 신이 나서 놀이터를 휘저으며 끌고 다녔다. 똘남이는 부러운 듯 영찬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아무리 똘남이가 자동차를 한 번 만져보려 해도 영찬이는 홱 뿌리치고 무정하게 달아나버렸다.
화면은 클라이맥스를 향하여 치닫는다. 잔디밭에 주저앉은 영찬이가 고물자동차를 사랑스런 여자 친구처럼 어루만진다. 그 곁에 다가앉은 똘남이가 동그란 핸들을 어루만지려 한다. 영찬이가 못 만지게 똘남이 손을 밀어낸다. 또 만지려고 손을 뻗는다. 또 밀어낸다. 약이 오른 똘남이가 씩씩거리며 영찬이 팔목을 꼬집어 뜯는다. 영찬이가 멀리 떨어진 할머니를 불러댄다.
“할무이! 할무이!”
텔레비전 화면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똘남이 할미는 이 대목에서 얼굴이 벌게졌다.
“옴마, 옴마, 저 짜잔헌 자식, 지기 할머니한테 일르네. 저까짓 고물자동차가 무슨 벼슬이라고. 당신도 당신이제, 저걸 가만 놔두고 비디오만 찍고 있었소? 확 뺏어서 똘남이 한 번 만져보라고 해야제.”
할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장난감
우리 아버님께서는 아이들에게 절대로 전쟁놀이 장난감을 사 주지 말도록 하셨다. 나도 그 유훈을 받들어서 될 수 있으면 사 주지 말도록 당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에는 가끔 총이나 칼, 탱크 등이 들어왔다. 마트에서 똘남이가 총을 가리키며 떼를 쓰면 사 주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 총도 사고 칼도 사고 탱크도 사고, 허허 참, 나는 입맛이 썼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똘남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장난감 자동차였다.
똘남이는 같이 일곡에 사는 외사촌 형들의 장난감을 많이 물려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아주 오랫동안 싫증 내지 않고 가지고 논 것이 배터리로 움직이는 포크레인과 노란 유치원 버스였다. 그 밖에도 자동차라면 크건 작건 재미나게 가지고 놀았다.
거실이나 탁구장에서 세발자전거도 많이 탔다. 세발자전거는 소형, 대형 두 대였는데 그것도 다 물려받은 중고품이었다.
발이 닿지 않을 때에는 자전거를 쓰러뜨려 놓고 바퀴를 돌리며 놀다가 발이 길어지니까 나중에는 제 누이까지 뒤에다 태우고 다녔다. 중고 장난감 자동차도 똘남이의 소중한 재산목록이었다. 아무리 억세게 굴리고 다녀도 고장 한 군데 안 났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립식 미끄럼대도 오랜 친구가 되어주었다.
가끔은 블록 쌓기, 조립하기, 조각 맞추기 놀이도 하였지만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주먹 연주
할아비가 좀 고상한 ‘트로이메라이’라든지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하려 해도 똘남이는 그냥 놔두는 법이 없다. 건반 뚜껑을 여는 것만 보면 다른 놀이를 제쳐두고 득달같이 달려와 끙끙거리며 좁은 피아노 의자에 기어 올라와 할아비 곁에 옹색하게 쭈그려 앉는다.
할아비가 무슨 곡을 치든 상관없이 여기저기 제 마음대로 건반을 누른다. 터무니없이 괴상한 합주가 한 동안 이어진다. 그래도 아이는 무척 재미있어 한다. 하는 수 없이 똘남이가 잘 아는 ‘곰 세 마리’나 ‘작은 별’을 쳐 준다. 그러면 똘남이는 한결 신명이 나서 주먹으로 쾅쾅 건반을 내리친다. 음정은 엉망이지만 신통하게도 박자는 그럭저럭 들어맞는다.
아코디언은 더욱 신기한 악기다. 내가 아코디언을 연주하면 똘남이는 움직이는 건반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바람통에 귀를 기울인다.
사랑은 음악을 타고 온다. 행복도 음악과 함께 흐른다. 나의 세 아들은 모두 피아노를 조금씩 익혔고, 그 중 셋째는 피아노뿐 아니라 바이올린과 기타까지 연주하지만, 똘남이도 대여섯 살만 되면 피아노 학원에 보내야겠다. 잘은 몰라도 똘남이 역시 바이엘이나 체르니 정도는 거뜬히 해낼 수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피아노
컴퓨터와 피아노 사이가 아주 가까웠다. 할아비가 서툰 솜씨로 피아노 연습을 하자 컴퓨터 모니터에 코를 박고 있던 똘남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앙칼지게 외쳤다.
“시끄러워, 시끄럽다니까!”
할아비는 담임선생한테 꾸중 듣는 학생처럼 당황하여 쩔쩔 맸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좁은 거실에서 딩동거리는 피아노 소리가 시끄러울 만도 했다. 할아비만 손자를 꾸짖을 일이 아니다. 할아비도 잘못하면 손자한테 꾸중을 들어야지.
아이한테도 배울 점이 있다. 그 뒤로 피아노 연습을 할 때에는 가운데 페달을 눌러서 소리를 왕창 줄여놓았다. 그러고부터는 시끄럽다는 꾸중을 듣지 않게 되었다.
<계속>
첫댓글 ㅎㅎㅎ
선생님! 너무 재미있습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이..어린 시절 두 아들 키울 때 생각이 납니다. 선생님! 그럴일은 없겠습니다만, 어린 아이들은 피아노 뚜껑에 손가락을 다칠 우려가 있사옵니당 ㅋ..피아노 뚜껑을 항상 열어두거나..피아노 건반 덮개를 몸체에 끈으로 짱짱하게 매어두심도 좋을 듯 싶습니다. 좋은 글 읽어보는 즐거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태석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