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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생 Painter Kang Ho-saeng(1962 ~ )】 "천년의 아침을 깨우다"
KHS 전시 및 행사일정
‘생거진천生居鎭川’
살고 싶은 곳, 살아서 좋은 곳
진천은 충효와 관련한 이야기가 다수 전하는 아름다운 풍속을 지닌 곳,
공기 좋고 산수가 수려하기로 이름나 살기 좋은 곳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이에 역사와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진천을 새롭게 발견하고 소개하고자 이 전시를 마련하였습니다.
외지 출신의 한국화가 6명이 진천의 멋진 장관과 잔잔한 물소리를 눈과 귀로 직접 체감하고
마음에서 풍겨나는 흥興과 취趣를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림에 담긴 시정詩情을 따라 관람객 여러분도 가슴 가득 상쾌한 변화를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기간: 2017. 6. 8.(목) ~ 2017. 7. 30.(일)
장소: 진천종박물관 기획전시실
참여작가: 강호생, 박석신, 백범영, 임진성, 지요상, 최순녕
http://www.jincheon.go.kr/site/culture/sub.do?menukey=1950&mode=view&no=334713725
이번 진천 비경전에 3점 출품한 작품입니다.
진천 농다리-천년의 아침 | 93.5×210.5cm | 순지위에 수묵담채 | 2017 |
진천 식파정 | 47×110cm | 순지위에 수묵담채 | 2017 |
진천 농다리 | 32×98cm | 순지위에 수묵담채 | 2017 |
천 년의 아침을 깨우다 - 작가 강호생
민병준
아직은 다하지 않은 달, 11월 초순답지 않게 유난히 추운 날 먼데이타임스는 강호생 작가를 찾았다. 오직 한 길 40여 년, 한국화에 대한 천착과 매진으로 자신의 세계를 확고하게 구축하고 있는 강 작가를 만나는 날로서는 왠지 오늘처럼 추운 날이 적절한 것 같았다. 세상 사람들처럼 대중들과 적당하게 타협하는 삶을 거부하고,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며 높은 수준을 유지하며 살기가 어디 그리 쉽겠는가?
화실에 들어가니 작가의 체취와 묵향이 달려든다. 벽에 걸려있는 여러 작품들도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전해 주는 것 같다. 그런데 유독 한 작품이 강력하게 시선을 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작품 속에 빨려드는 것만 같다. 아니, 숨이 멎는 것처럼 느껴진다.
“진천 농다리 그림입니다. ‘천 년의 아침’이라고 제목을 붙였어요.”
‘천 년의 아침’, 천 년을 지탱해온 농다리 위로 아침 안개가 아슴아슴 피어오르고 있었다. 모두 말이 없었다. 저마다 자신의 생각대로 천 년의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문학 작품을 감상할 때 겪게 된다는 ‘추체험(追體驗)의 세계’를 지금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의 중앙에 있는 인물 중 가장 작고 못생긴 자신을 그려 넣었다는 강 작가의 낭만과 익살에 감탄하며, 작가가 겪은 미적 체험을 자신이 작가가 된 듯 공감하고, 함께 즐기고 있었다.
작가의 설명이 이어졌다. 모두들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따라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화선지를 구겼다 펴며 농담을 조절하고 물길의 흐름을 표현하며, 화면의 충만과 여백을 자연스럽게 배치하고, 거친 붓과 세필을 사용하여 웅장함과 디테일을 마음껏 구사하며, 고졸함과 기교를 대조시켜 작품의 격을 높이며 완성도를 심화했다. 한마디로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한국화의 압권이요 최고봉이었다. “아, 이 작품은 여기 있을 작품이 아닌데…, 여러 사람들이 함께 감상할 수 있어야 하는데!” 누군가의 탄식이 들려왔다.
이 작품에는 강호생 작가의 그림에 대한 철학이 잘 녹아들어 있다. 평소 그는 ‘여백’을 사랑했다. 흔히 많은 서양화가들에게는 ‘여백 공포 증후군’이 있다고 한다. 화면에 여백이 남아 있으면, 화가가 할 일을 다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져 공포심을 느끼며 정성껏 빈 곳을 채운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그림은 이른바 ‘열심히(?) 그린 그림’이 된다. 그런데 강 작가가 보기에 이런 그림은 오히려 묘미가 없다. 그려진 것 이상의 의미가 없고, 관객이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게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동양화에서는 대상의 형체보다는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 즉 여백이 더 크고 더욱 깊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따라서 화면에서 여백이 커지면 의미의 공간도 확장되고, 화면이 채워지면 의미의 공간이 축소되는 역설이 성립한다. 이런 의미에서 여백의 확장은 감상자의 시정(詩情)과 여운을 풍요롭게 하여, 작품의 묘미를 배가해 준다.
작가의 손이 한 작품을 가리킨다. 한중 작가전 ‘붓끝에 이는 조화’에 출품했던 작품이다. 햇살 가득한 봄날, 버드나무가 한들한들 늘어진 호수에 물오리가 몇 마리 헤엄을 치고 있다. 그런데 정작 붓질을 한 곳은 얼마 되지 않는다. 들 ‘입(入)’자와 사람 ‘인(人)’자를 위와 아래로 배치하여 늘어진 버드나무를 형상화했으며, 새 ‘을(乙)자’를 그 아래 그려 넣어 호수에서 노니는 오리를 표현했다. 나머지는 붓질 한 번 하지 않은 텅 빈 공간! 그래도 관객들은 오리가 헤엄치고 있으니 물결 잔잔한 호수요, 그 위는 살포시 이는 봄바람으로 버들가지 한들거리니, 생명 가득한 허공임을 안다. 아무런 설명이 없어도 관객은 함께 느낀다. 공간을 비움으로써 오히려 꽉 찬 그 느낌, 그려지지 않은 그림의 여운을….
이에 대해 강호생은 ‘작가 노트’에서 이렇게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내가 유희하는 부분의 여백! 그 ‘텅 빈 자리’, 여백! 그것은 ‘텅 빈 충만’이다. 그것은 채워 진 빈 자리, 가벼운 중량감, 그것은 숨 쉬는 공간, 비움으로써 채울 수 있기에 나는 그 여백을 사랑한다.”
강 작가의 한국화에 대한 깊은 철학과 변함없는 실천이 때로는 현실의 벽에 부딪히기도 했으니, 삶의 영원한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그는 평소, “취향의 문제는 타협할 수 있지만, 원칙의 문제에서는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으로 홀로되기에 익숙하다.”고 말하곤 했다. 본래 원칙, 진실의 길을 가는 일은 고독하다. 그 일은 인류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 길을 스스로 걷고 있는 것이다. “어떤 때 작품을 하다가 앉아 있으면 말 그대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든 것이 용해되어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어요, 살과 뼈와 마디까지…. 그런 아픔과 슬픔이 있어요. 그런 것이 버무려져서 작품이 나와요. 그러니 누가 이런 삶을 좋아하겠어요?” 그렇다면 왜 그는 그 고통의 길을 걷는 것일까? 바로 그 아픔 속에서 어떤 본질을 찾아내게 되고, 그 찾아낸 본질이 원칙이요, 진리이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어떤 모임에서 회칙을 정해 놓고, 이를 취향의 문제를 주장하며 각자 조금씩 바꾸다 보면, 결국 애초에 모임에서 추구하던 바를 잃게 되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원칙에 대한 것은 타협 그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작가의 논리는 엄정하고도 단호했다. 옛날 온갖 유혹과 타협을 거부하며 자신의 길을 가던 애국지사, 충신들의 기백을 오늘 강 작가에게서 볼 수 있었다.
요즘 세상은 그에게 그림 수준을 일반대중의 눈높이에 맞추라고 유혹한다. 물론 경제적인 이득과 명성을 함께 거론하면서. 일반적인 화가라면 남들이 권유하기 전에 스스로 대중 속으로 들어가 부와 명성을 함께 누렸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는 전혀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강 작가는 이 문제에도 단호하다. “어떤 작가한테 대중의 눈높이와 맞추라고 요구하는데, 저는 그거 싫어해요. 작가는 나름대로 고민하고 연구하는 등 치열하게 노력해서 높은 수준에 올랐는데, 그를 끌어내려 대중과 눈높이를 맞춰라? 일반대중이 열심히 공부해서 작가와의 격차를 좁히면 되잖아요?” 결국 그의 고독한 삶은 오랜 기간 지속될 것만 같다.
국가나 지자체 등의 지원을 받아 창작에만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면 최고의 걸작품이 탄생하지 않을까? 요즘 지자체에서 여러 예술 분야에 대해 지원책을 내놓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가 볼 때 지자체의 지원은 형식적 분배주의에 함몰되어 있다. 좀 더 전문적이고 자기 연구와 작품에 열정을 기울이는 작가들을 선별해서 집중적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된 생각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창조된 작품들이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작용하여 투자 대비 엄청난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함께 깊이 고민해 볼 대목이다.
그런데 강 작가의 이런 고집과 집착은 놀랍게도 창조적으로 승화되고 있었다. 그는 한국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과거의 필법을 반복하는 것은 획일화로 흐를 염려가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의 그림은 반복되고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늘 새로움을 추구함으로써 한국화의 영역을 확대하려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최근 채묵을 통해서 물의 압력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화선지뿐만이 아니라 천 위에 수묵과 컬러를 조합한 ‘채묵의 물성’을 지속적으로 연구하여 수묵의 매력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있다. 재료적 특성에 관한 체계적 연구를 통해 우연성을 필연성으로 재수정하고, 우연과 필연의 뗄 수 없는 상보관계를 만들어 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물의 양은 물론 먹의 번지는 속도를 조절하기 위해 습도계와 온도계를 활용하고 있다. 이런 노력 끝에 완성된 작품으로 국내는 물론 미국, 프랑스, 일본, 중국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과 페어전 및 그룹전에 참가한 결과, 채묵에 대해서는 국내보다는 오히려 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지금도 유럽이나 뉴욕 등에서 전시회 개최에 대한 요청이 있을 정도이다. 이는 전통이 과거의 답습이 아니라 과거를 바탕으로 새로운 탐구 결과를 더해 갈 때 더욱 생명력을 가지게 됨을 의미한다 하겠다.
작가의 열정적인 설명을 듣고 나서 다시 작품들을 감상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 했던가? 그려지지 않은 여백의 에너지가 생명으로 통합되고 있었다. 우주의 텅 빈 공간, 그 보이지 않는 여백이 얼마나 많은 생명들을 창조해 냈던가? 또한 우주의 그 기나긴 시간처럼 영원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 이는 보이는 것들은 잠깐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예술작품은 형상화를 전제로 한다. 더구나 시각적 언어로 관념을 표현하는 회화의 세계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요는 그려지는 부분과 여백으로 남는 공간의 분할과 조화이다. 그런데 그 분할과 조화의 묘미를 어떻게 터득해야 할까? 이 문제는 한국화가의 길을 걷는 사람들의 화두이다. 이 화두를 안고 ‘천 년의 아침’을 함께 맞이하며,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어떨까? 진천 농다리 천 년의 아침을 깨운, 열정의 작가 강호생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