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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인간의 생리 정세봉 자산계급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만 적나라한 이해관계와 냉혹한 “현금교역”외에는 다른 아무런 연계도 남기지 않았다. 자산계급은 종교적인 광신, 기사적 열정, 소시민적 감상 등 이런 정감의 성스러운 격발을 얼음과 같이 차디찬 이기주의적 타산의 물속에 잠가버렸다. -맑스, 엥겔스: “공산당선언” 1. 기연 신현미는 개찰구를 빠져나와서 곧 택시에 몸을 실었다. 형형색색의 호화로운 택시들이 쭉 엎드려 있는 주차장에 이르러 발길이 닿는 대로 별 선택 없이 올라탔던 까만빛의 승용차였다. “‘왕자’빌딩…” 이 한마디를 상냥히 건네고서 두 눈을 감았다. 현미는 자신이 몹시 지쳤음을 의식했다. 그리고 마음이 암담했다. (내가 왜 스스로 이런 “임무”를 짊어지고 있는 걸까? 누가 작가를 위대하게 본다구… 난 한심한 멍텅구리인지도 몰라. 세상이 그런 줄 이제야 알다니…) 불우작가 농우선생을 위해 돈 구하러 뛰어 다닌 지도 벌써 두 주일이 되었다. 세 곳에 부딪쳐보았으나 다 실패하고 네 번째로 떠오른 대상자가 S시의 송운구기업가였다. 언젠가 현미가 오체르크를 써서 신문에 소개해 준적이 있어서 희망을 걸어 볼만 했다. 그래서 그를 찾아갔던 것이고 매양 그랬듯이 농우선생의 처지와 사정, 그의 작가적 위치와 그의 문학의 가치에 대해서 적실히 말씀드리고 한 불우작가를 위해서 출판경비를 찬조해주기를 절절히 호소했었는데 역시 아주 예의적이고 완곡한 거절을 받았다. “거 듣고 보니 안됐는데… 허지만 우리 경제사정이 어려운 때여서 딱하군요.” 잠깐 동안의 침묵이 몹시 어색하게 직감돼왔을 때 현미는 치욕에 가까운 모멸감을 느꼈다. 현미는 기분 없이 열차에 몸을 싣고 착잡한 생각에 모대기었다. (하긴 기업가들도 골치 아플 테지. 찬조금명색으로 손 내미는 곳이 한두 곳 아닐 테니까? 그리고 실제 사정이 곤란할 수도 있는 거구… 그렇지만 그들은 근본 상 작가를 소중히 여기지 않아, 작가의 노고와 가치를 모르고 있어, 정말 비극이야!) 그러다가는 현미는 문득 전술을 바꾸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 내가 잘못했어. 농우선생을 거들지 말고 내가 얻으려고 했어야 할 걸 그랬어, 그것도 자각의 신분으로가 아니라 여자의 신분, “미인”의 신분으로! …어리석은 남자들한텐 그것만이 신통력을 갖고 있는 줄 왜 몰랐던가! 털끝 하나 손해 보지 않고서도 속 빼먹을 수 있는 거야. 톡톡히 골려줄 수가 있는 거야!) 현미는 급기야 이런 오기가 치솟았다. 그리고 자신의 사고가 무의식간에 풍류녀들의 생리속으로 줄달음치고 있는데 놀랐다. 그녀는 쓸쓸히 고소를 짓기도 하고 클클한 애수가 서린 눈빛으로 차창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던 것이다. (이번엔 어디메를? 누구를 찾으면 될까? …) 현미는 머릿속으로 자기가 알고 있거나 들은 적 있는 기업체들과 경리들을 하나한 배열해보고 있었다. (포기할 수는 없어. 내친걸음인데…) 택시가 멈춰서는 듯 했다. 가볍게 몸을 추슬리던 차체의 요동이 뚝 멎고 무서운 적막 같은 것이 졌을 때에야 현미는 눈을 떴다. “‘왕자’빌딩”이 우뚝 시야에 들어왔다. 택시운전사는 요지부동으로 말없이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 현미는 홀연 떠오르는 깨달음에 놀라 다급히 차에서 내렸다. 빨리 내리지 않으면 운전사가 당금 화를 낼 것만 같은 느낌이었던 것이다. 돈지갑을 꺼내들고 앞 도어 쪽에 다가서며 “얼마세요?” 차가 사르르 미끄러져나간다고 느꼈으나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지폐를 한 장 뽑아서 건네주려 했을 때 택시는 저만치 나가고 있었다. “아니, 택시!” 현미는 정신이 번쩍 글어가지고 “돈 받아요, 택시! …”하고 손 저으며 외치며 몇 걸음 따라가다가 그만 맥을 버렸다. 택시는 도망치 듯, 멀리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아이참… 이상한 사람이네!” 현미는 꼭 마치 도깨비에게 홀린 듯, 어리둥절해있었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현미네 집은 “‘왕자’빌딩” 뒤쪽에 있었다. 집을 향해 걸으면서 현미는 택시운전사의 얼굴과 인상을 떠올리려 애써보았다. 명확치가 않았다. 짙은 변색안경을 낀 얼굴 옆모습이 좀 성칼스런 인상이었다는 것과 이제 돌이켜보니까 말 한마디 없는 “침묵의 사나이”엇다는 느낌이 그 전부였다. 그제야 현미는 택시운전사에게 전혀 주의를 돌리지 않았던 자신을 깨달았다. (무슨 사람인데… 돈 안 받는 거지?) 이런 의혹이 머릿속에 둥그렇게 커가고 있었다. 며칠 후의 어느 날, 아침 현미는 출근을 하다가 “왕자‘빌딩” 정문으로 택시 한 대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저 차다! …) 내심 소리 지르며 현미는 튕기듯 달음박질쳤다. 달음박질쳐가서 뭘 어쩌려는 생각도 없이 거의 본능적으로 무의식간에 행한 불가사의한 행동이었다. “신문사까지…” 현미는 운전사 곁 좌석에 넌지시 올라앉았다. 숨 가쁜 가슴을 진정시키며 역시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요 먼저 미안했어요, 요금을 물지 않아서…” 운전사는 현미를 돌아보지 않았다. 묵묵히 앞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현미의 사과의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잠간 미세한 반응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이윽고 뭔가 결단적인 한숨 같은 것을 어깨 숨으로 쉬는 것 같았다. “미안합니다. 오히려 제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달리는 생각지 마십시오.” “아니, 이유라니요?” 현미는 또 한 번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택시요금을 받지 않는데 그 무슨 이유 같은 것이 있다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운전사는 대답을 회피하듯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는데 얼굴표정이 무섭게 굳어져있었다. 이윽고 택시는 소리 없이 미끄러져나가기 시작했다. 현미는 그 이유라는 것을 무척 알고 싶었지만, 또한 마땅히 꼭 캐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금시 입이 열리지 않았다. 깍듯이 성근한 어조와 무섭게 굳어져있는 얼굴표정은 그녀한테 뭔가 좀 삼가야겠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현미는 하회를 기다리며 번화한 거릴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순간적이긴 하였지만 의식적으로 똑바로 뜯어보았던 운전사의 얼굴과 인상을 속으로 음미해보았다. 키는 보통 키보다 좀 크다고 짐작이 갔다. 어깨가 넓고 허리가 가는 권투선수타입의 체구였다. 이마가 널게 트이고 하관 쪽으로 꺼져 흐른 얼굴선이어서 성칼스레 보이었다. 택시운전사로서는 지나치게 이지적인 눈이라고 생각했다. 고민과 슬픔과 울분 같은 것을 아는 그런 사람의 사색적인 눈… 나이는 가늠하기 어려운 것 같았다. 사십쯤으로 짐작되기도 하고 어찌 보면 마흔이 훨씬 넘은 것 같기도 했다. 총체적으로는 의롭게도 잘난 남자라는 인상이었다. 택시는 어느새 신문사 정문 앞에 이르렀다. 현미는 얼른 핸드백에서 도?갑을 꺼내어 10원짜리 지폐 두 장을 뽑아내었다. “먼저 번 요금까지 함께 셈하지요. 운전사는 핸들을 잡은 채 역시 묵묵히 앞만 응시하다가 “…그만 두십시오.” 권고조의 사뭇 따뜻함이 담긴 어조였다. “아니, 그러시면 안돼요! 그럴 이유가 없는 건데…” 현미는 이유라는 말에 특별히 악센트를 주면서 지폐를 막무가내로 운전사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때의 현미에게 있어서 요금을 받지 않는 그의 이유 같은 건 이미 무시돼있었다. 만약 이번에도 굳이 받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사람을 우롱하는 것 외의 다른 것으로는 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현미가 무척 오만한 거동을 보여주었던 것은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무슨 생각에서였던지 그녀는 갑자기 “기자, 소설가 신현미” 이런 활자가 찍혀있는 명함을 운전사 앞에 넌지시 건네었던 것이다. 그것은 무의식간에 치밀어 오른 (신분을 밝혀야 알겠나봐!) 이런 오기임에 틀림없었다. 택시운전사는 명함을 받아서 성의껏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문득 의외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실상은 자신의 낯과도 같은 그 명함장이―운전사의 멸시에 찬 눈초리아래 푸대접신세나 되면 어쩔라고? …이런 놀램에 홀랑 혀를 내밀었다. 그런데 뜻밖의 반응이 나타났다. 운전사는 짙은 변색안경을 벗으며 처음으로 그녀 쪽을 돌아본 것이다. “혹시 …‘봄을 여읜 설음’을 쓰신 분 아니십니까?” 의혹이 비낀 운전사의 두 눈이 현미의 얼굴을 삼가 하듯이, 뜯어보고 있었다. “그래요. 그 책 읽으셨어요?” “읽었지요. 보던 중 인상 깊은 소설이었습니다.” “그러세요? …아이, 고마워요!” 현미는 반갑고 기쁨에 겨워서 무의식간 천진한 소녀처럼 탄성을 질렀다. 그녀가 기쁨에 겨웠던 것은 “인상 깊은 소설”이었다는 평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책을 읽었다는 그 점, 바로 거기에 있었다. 한 불운한 남자의 운명을 핍진하게 그려내려고 장장 3년을 겪었던 그 무서운 진통과 고초가 결코 헛됨이 아니었구나! …이런 한줄기 신선한 희열이 가슴 속에 분출돼왔던 것이다. 운전사에 대한 현미의 기분은 잠간사이 확연히 달라져있었다. “소설읽기를 즐기세요?” “즐기지요, 현미선생 소설이 인상 깊었던 것은 주인공남자를 사랑했던 처녀의 운명이 제가 사랑했던 처녀의 운명이 제가 사랑했던 한 처녀의 운명과 꼭 같이 불행하였다는데 있었지요.” “그런 사연… 있으셨던가요?” “실은 요 먼저 현미선생을 이 차에 태웠던 것도 그녀와 관계가 되지요. 첫눈에 선생을 보는 순간 저는 속이 뭉클했습니다. 현미선생의 몸매와 얼굴모습이 미금이와 신통히 같았지요. 그녀의 이름이 미금이었답니다. …가끔씩 그려보려 해도 어슴푸레하기만 하던 얼굴이었는데 현미선생께서 또렷이 떠올려주었지요, 고마웠습니다!” 운전사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듯 감빠는 듯 하고 있었는데 두 눈에는 부서진 이슬방울이 번지고 있었다. (그런 일이었구나!) 현미는 뜻밖의 놀램에 두 눈을 크게 뜨고 느닷없는 남자의 눈물을 똑바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까닭 없이 헤퍼지려는 눈물을 가까스로 억제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랑하던 여자를 이토록 못 잊어하는 남자, …이런 감동의 충격이 정에 무른 여인의 마음 속에 예고 없이 던져온 것이다. “그 처년 지금…” “…이 세상에 없지요.” “오―그랬군요. 어떻게 된 건지?” “한을 품고 세상을 떴지요. 현미선생, 저의 심정을 이해하신다면 오해를 가지지 말아주십시오. 어차피 미금이 그녀를 위한 호의인데… 그리고 요금은 워낙 받을 수 없습니다. 이 차는 택시가 아닙니다. 요 먼저는 손님 바래주러 역전에 나갔다가 현미선생을 태웠던 겁니다.” 운전사는 두 장의 지폐를 현미한테 다시 넘겨주었다. “그러세요? ...그런데 차지붕에 TAXI 등은?..... ” 그 순간 운전사는 명함 한장 현미한테 건네주었다. “××택시공사 경리 이군철.” 현미는 내심 놀랐다. 놀랐다기보다 한 줄기 기쁨의 기쁨이 용솟음쳤다. “경리님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어떤 경우, 차등때기에다 TAXI 등을 얹어 놓지요. 어떤 의미에선 일종의 쇼인 겁니다." "호호...." 현미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면서 이 남자와 한번 부딪쳐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저, 이경리님, 그럼 이 돈 그대로 받아두겠어요, 그 대신 한 가지 청구가 있는데 들어주시겠어요?” “말씀하시지요.” “그 사연… 무척 듣고 싶은데요, 저녁에 식사를 함께 하실 수 있겠어요? 제가 내지요.” “뭐 긴 이야기 할 건 없습니다. 소설 감으로도 가치가 있겠는지 모르겠고.” “아니, 딱히 소설 쓰려는 게 아니고 그저 듣고 싶은 거예요. 솔직한 말이 되지만 한 남자가 사랑하던 여자를 그토록 못 잊어한다는 게 정말 눈물겨워요. 그리고 얼마나 좋아요! 그 미금이란 처녀 지금 무덤 속에서도 행복을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보고 있어요.” 저도 모르는 사이 현미는 어느새 감상에 젖어있었다. 오래간만에 젖어보는 감상이라고 생각해보았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식사는 제가 내야지요.” “아니, 그러문 안돼요, 승용차를 무료로 탄 ‘턱’을 내는 셈 제가 청구한 건데… 장소는 어딜 할까요? ‘리디씬’ 어때요? 그러잖으면 ‘목란’도 좋구…” “너무 고급적인덴 그만 둡시다. 저… ‘인민국장’ 뒷골목에 ‘몽야’라는 요리점이 있는데 혹시 가본 적이 있으신지? …조용하고 깨끗하지요.” “네, 본 것 같아요, 그럼 그곳으로 정하지요. 여섯시면 어떠세요?” “그렇게 합시다. 솔직한 얘기지만 나도 몹시 기쁩니다. 작가 분들과 안면을 익히긴 처음이니깐요.” “고마워요, 그럼 그렇게 하기루! …" 현미는 차에서 내려서 손을 낮추 들어 이군철을 바래었다. 차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못 박힌 듯,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현미는 신문사에서 좀 일찍이 점심퇴근을 했다. 식사를 간단히 끝내고 침실에 들어갔었는데 옷장에 붙어있는 큰 체경이 문득 그녀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이 세상에 몸매와 얼굴 용모와 자기와 꼭 같게 생긴 여자가 있었다는 것과 그녀를 사랑했던 한 사나이가 자기를 보는 순간 옛 연인을 무섭게 떠올리게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게만 느끼어졌다. 그녀는 조용히 체경 앞에 마주서서 자기의 몸을 비춰보고 있었다. 무척 진지하게 얼굴이며 몸의 각 부위며를 찬찬히 섭력하고 옹근 육체를 전체적으로 흔상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여성적 미를 재확인하고 있었다. 현미의 몸매는 대체로 발레무용가 타입이었고 날씬하면서도 풍만 감을 주는 멋진 스타일이었다. 얼굴도 진짜 “요염한 풍류 여인” 이었지만 속되지 않고 지성미가 도고했다. 두 눈은 크지 않고 천성적인 쌍겹눈이었는데 어찌 보면 고혹적인 애교가 넘칠 듯하였다. 여자의 애교를 굳이 경박하고 값싼 미로 철저히 인정하여온 자신의 관점 때문에 교태 그것은 무섭게 억제되어 있었고 그 대신 맑디맑은 그 시선이 어딘가 집요했다. 나이 32세, 이미 애기엄마였지만 머리모양은 그냥 잔등까지 드리운 “폭포머리”다. 이런 자신의 미에 대하여 현미는 언제나 자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생명 그것처럼 소중히 여겨져 가지고 알뜰히 가꾸어왔던 것이다. 한 것은 개인의 지, 정, 의와 육체측면을 총괄하는 전체적통일체로서의 인격을 구축함에 있어서 육체적미는 때론 (특히 여성일 경우.) 결정적요소로 된다는 것을 그녀의 그 어떤 인생경험이 집요하게 깨우쳐주었던 까닭이었다. (미금이란 처녀 틀림없이 아름답고 탐스런 인물이었을 거야! 나와 비슷하다면… 나와 꼭 같다면 그래서 이군철이가 그토록 못 잊어하는 걸까?) 이러한 의문을 마음속에 걸어보고 있는 찰나에 테블 위에 놓여있는 책 한권을 거울 속에서 시선에 뛰어들었다. 농우선생의 장편소설 “볼셰비키의 화석”이었다. 현미는 테블 쪽으로 가서 책을 들고 소중한 듯 무게를 가늠하다가 침상 우에 반듯이 누웠다. 밤을 패며 단숨에 읽어버린 작품이었지만 다시, 다시 만져보고 번져보고 했다. 작품 속에 용암처럼 용용히 깔려 있는 뜨거운 빠포스가 다시금 진한 감동으로 전해져왔다. 현미는 책을 붙안고 가슴으로 무게를 느끼면서 스르르 눈을 감았다. 농우선생의 얼굴이 망막 속에 떠오르고 있었다. 2. 불우작가 현미는 대학시절부터 농우(農牛)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저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중편 “그 여자의 꿈”으로 문단을 진동시켰고 장편 “볼셰비키의 화석”으로 강열한 센세이숀을 일으켰던 인기작가 농우선생을 못내 경모해마지 않았다. 그렇지만 단지 작품을 통해서 알고 있었을 뿐 작가를 만나보지 못했다. 이전에는 농우선생이 농촌에 있었고 또 시내에 들어 온지 몇 해 된다고는 들었지만 웬 일인지 종시 만나 뵐 기회가생기지 않았다. 사람들 말이 농우선생은 문의들의 회합이나 사교계에 얼굴을 내밀기 싫어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한낱 풋병아리 같은 문학도로서 감히 찾아가 뵌다는 것도 선뜻 엄두가 나지질 않는 일이었다. 현미가 농우선생을 처음 만났던 것은 달포전의 어느 날, 저녁무척 우연한 장소에서였다. 신문사문예부 주임 첨일선생네 댁에 문의할 일이 있어서 들렸었는데 이미 안면이 있는 출판사의 덕권선생과 낯선 손님 한분이 술상에 앉아계셨다. 그 낯선 손님이 곧바로 농우선생임을 소개받았을 때 현미는 내심 무척 놀랐다. “왕자”빌딩“ 칠동 거리는 꼭두새벽부터 남새도 매 시장에 가서 남새를 도매해 싣고 오는 인력거 군들로 장관을 이루군 하는데 그 인력거 행렬 속에서 몇 번 본적이 있는 얼굴 같았던 것이다. (설마 그럴 수야) 이렇게 내심 도리머리를 흔들며 현미는 농우선생을 유심히 뜯어보았다. 보통 키에 우람진 체구였고 골격이 굵었다. 얼굴도 투박스럽고 고생티가 푹 끼였지만 속되지는 않고 완강하고 사뭇 침울한 기색이었는데 희뿌연 잠바차림의 농우선생을 바라보면서 현미는 느닷없이 볕에 그슬고 비바람에 거칠어진 오빠의 거무칙칙한 얼굴을 떠올렸다. 힘세고 끈질긴 황소처럼 뼈 빠지게 벌어도 내내 가난하고 불행하기만 한 오빠, 가정이란 총목을 떼 메고 자기를 대학공부 시키고 시집까지 보내준 아버지와도 같은 오빠 …그 오빠와 농우선생은 뭔가 동혈의 세계에서 인생을 겪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문득 현미는 어느 잡지에 실렸던 농우선생의 수필 “소낙비”를 상기했다. 번개치고 우레 울며 소나기가 쏟아지는 밤이면 들녘이나 산언덕에 치달아 올라서 그대로 세찬 비를 무릅쓰고 서있는 단다. 그러노라면 피가 끓고 신선한 정서를 경험하여 침체상태의 사고가 함성이라도 지르듯, 깨어서 흐른다고 했다. 그리고 잡힐 듯 말듯 짓궂게 숨어서 애먹이던 영감 “주제 적 발견”이 느닷없이 머릿속을 밝히며 섬광처럼 번쩍! ―터져오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고 했다. 현미는 소낙비 속에 서있는 농우선생을 상상해 보았다. 비에 젖은 적삼이 착 달라붙은 떡판 같은 잔등 …이글이글한 두 눈을 부릅뜨고 아득한 어둠속을 바라보며 험악한 눈빛으로 번갯불을 흘기기도 하고…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첨일선생이 현미를 술상에 붙들어 앉혔지만 어쩐지 분위기가 숙연했다. 얼굴을 수그리고 소리 없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농우선생의 기색이 사뭇 처연했고 첨일, 덕권 두 분 선생들도 하나같이 심각해져 있었다. 그때 현미는 놀라운 발견을 했다. 농우선생의 왼쪽 잠바소매가 팔 굽 아래에 꺾이어 드리워있었던 것이다. (농우선생이 워낙 외팔 쟁이었던가!) 현미는 자기가 끼일 좌석이 아님을 눈치 채고 핑계를 대고 물러나 나왔다. 며칠 후, 현미는 첨일주임으로부터 농우선생을 취재하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 현미는 자전거를 타고 첨일선생이 알려준 노선대로 창릉골목을 따라 곧장 남산 밑에 이르렀다. (왼손 편 쪽 맨 앞줄 세 번째 집…) 속으로 확인하고서 낡은 판자로 울타리를 막은 뒤울안에 들어섰다. 출입문에 자물쇠가 잠가져있지 않음에 안심을 하면서 현미는 비좁은 뒤울안을 일별했다. 오른 쪽에 대강 눈비나 막을 정도로 지붕을 가린 석탄창고가 있었는데 가루탄이 조금 모아져있고 낡은 궤짝, 솔 검불을 넣은 헌 마대, 싸리광주리와 삽, 호미, 곡괭이, 낡은 물통 따위들이 되는대로 놓여있었고 왼쪽에는 엎어놓은 항아리 두 개, 오지단지 하나가 먼지를 들쓰고 있었다. 나머지 공간은 삼륜차(인력거)가 차지하고 있어서 드나들기 불편했다. 현미는 조심스레 문 앞에 다가섰다. “계십니까?” 한식경 뒤에야 문이 열리며 농우선생의 얼굴이 나타났다. 무척 의외로운 표정에다가 그닥 밝지 않은 얼굴로 “아, 들어오시지요.” 현미는 안내하는 대로 집안에 들어섰다. 집은 20평방쯤 되는 외통이었다. 왼쪽 벽 쪽에 구식 이불장과 낡은 테블이 놓이고 오른쪽 벽 쪽은 온통 서가(書架)가 차지하고 있어서 온돌면적이 비좁았다. 테블우에 책과 잡지와 원고뭉치들이 질서 없이 보아져 있고 12인치짜리 단색텔레비전이 남쪽 창문 밑, 장방형 밥상 우에 놓여있었다. 현미는 내심 경탄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은 방대한 책 세간이었다. 서적이 2천권은 넉넉히 될 것 같았고 서가만은 특별히 돈을 먹여 갖춘 게 분명했다. 번쩍번쩍 빛났다. “앉으시지요, 집이 누추해서…” 농우선생은 난색을 지으며 사전과 원고지와 볼펜이 놓여있는 둥근 밥상을 오른손으로 한쪽에 밀어놓았다. 한창 집필중인 것 같았다. 현미는 아픈 시선으로 드리워져 흔들리고 있는 왼 쪽 팔소매를 일별했다. 현미는 첨일선생한테서 인력거를 끌다가 트럭에 치워서 왼 쪽 팔뚝을 잃어버린 노우선생의 불운 사를 이미 들었었다. 얼마 전에 당한 일이었다고 했다. “선생님, 책 세간이 대단하시네요. 정말 멋져요!” 현미는 서가를 구경하는 척하다가 농우선생을 마주하고 공손히 앉았다. 팔이 어떠냐고 문안을 하려다가 그만두고 잠간 집안을 둘러보며 “집은 사신 거예요?” “…세 맡았지요.” “여기 집세는 얼마씩?” “백 50원인데…” “네― 집세가 비싸군요.” 현미는 잠깐 동안을 띄웠다가 “선생님, 전 대학시절부터 선생님 작품을 읽었어요. ‘그 여자의 꿈’은 숱한 학생들을 울렸거든요. 모두들 선생님을 만나 뵙고 싶어 했어요.” 농우선생은 면구스러운 듯 하는 기색을 약간 보이고서 올방자를 틀고 앉은 채 말이 없다. “지금 10부 대하소설 집필중이시라 들었는데 많이 나가셨겠어요?” “5부를… 시작했어요.” “제목은요?” “‘온대(溫帶)의 태양’이라구…” “‘온대의 태양’… 다루시는 내용은 어떤 겁니까?” “건국후의 40년 역사를 담으려 합니다만…” “네― 폭이 넓겠군요! 탈고 하시는 대로 출판사에 넣었겠지요?” 농우선생은 고개를 약간 지어보였다. “…힘듭니다!” 필요한 해설 같은 것도 없어 다시 입을 꾹 다문다. “출판사가 경제난을 겪고 있다고는 들었지만… 인기작품들이야 특별히 고려되어야 할 텐데요.” 농우선생은 침울하면서도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앉아서 역시 묵묵부답이다. 현미는 내심 대화를 하기 좀 힘겨움을 느꼈다. 화제가 나오면 서로 간에 가지를 치고 살찌우고 해야겠는데 일문일답식으로 일체 군말이 없다. 농우선생의 표정을 안타까이 읽다가 현미는 살포시 눈을 내리깔았다. 인력거, 인력거군, 잃어버린 팔뚝이 금시 눈앞에 현시되고 있었다. 순간 현미는 이 특출하고 불우한 작가가 몸과 마음을 잡고 있는 화려한 일상에 가볍게 떠있는 그런 확실한 거리(距離)를 의식했다. 그런 까닭에 자기의 내방이 농우선생한테는 반가운 일로 될 수가 없음을, 잉어 따위가 아무리 꼬리를 철썩거려도 고래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는 것임을 그녀는 깨달았다. 현미는 이제 본 화제, 말하자면 취재의향을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입이 떨어지질 않고 있었다. 그녀가 두려워했던 것은 생활고와 정신적 고초의 내실한 사정을 탐문했을 때의 농우선생의 반응이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거나 모멸감과 수치를 느끼거나 다 가능한 일일 터였다. 그렇게만 되면 취재대상은 마음을 걸어 잠그고 절대로 열어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현미는 당혹 속에서 취재에서의 “예술”이라는 낱말을 떠올렸다. 그렇지만 이 “거물”앞에서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이는 그 무슨 “취재예술유희”따위를 함부로 피워댈 용기가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상대방을 우롱하고 자기의 불성실을 그려내는 졸렬한 소위로밖에 될 수 없는 것이라고 느껴져 왔다. 현미는 오직 진심을, 한 불우작가를 위해서 울고 싶도록 안타까운 그런 진심을 보여주고 싶었다. 보여준다기보다 뜨겁게 간직하고 싶었다. 농우선생이 알아주건 몰라주건 상관없이 그저 진심이고자 했다. 이제 그 진심이 무시를 당할 경우 현미는 울음이 북받칠 것만 같았다. “선생님, 실은 오늘 찾아뵌 건 다름 아니고 취재임무를 맡고나와:T어요. 워낙 오래전부터 선생님을 한번 꼭 만나 뵙고 싶었는데 마침 기회가 생겨서 기뻤습니다. 취재도 취재겠지만 전 선생님말씀을 많이 듣고 싶어요. 문학이야기도 그렇고 특히는 선생님 말씀을 많이 듣고 싶어요. 문학이야기도 그렇고 특히는 선생님의 생활형편이라든가 정신적 고초 같은 걸… 선생님 같은 명작가분이 실업자격으로 차별시를 받고 있다니 정말 믿어지질 않았어요. 이런 불합리를 사회에 고발해서 주의를 모으고 실효적인 대책을 촉구하려는 것이 신문사의 취지인데 선생님, 취재를 수락해주세요!” 현미는 상냥하면서도 치열한 어조로 말을 맺고 나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잠시는 군말을 엄금하기로 했다. 침묵을 깨뜨릴 부채(負債)는 이제 상대방이 지게 되어있었으므로 내심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농우선생의 표정이 어떠하며 어떤 변화를 일고 있을 것인가를 짐작해내려 마음이 쓰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침묵이 한도를 넘었다고 느꼈다. 무심간 시선을 들었을 때 현미는 노우선생의 집요한 시선이 자기의 얼굴에서 뭔가를 읽고 있음을 보았다. “현미선생, 나를 놓고 말하면 오늘 현미서생의 내방도 그렇고 신문사의 관심도 그렇고 다 반갑고 고맙습니다. 갈수록 추워지는 세상에서 한 점 인정을 혜택 받는다는 건 목메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 고마움을 눈물로써 감수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농우선생은 마침내 입을 열어 부드럽고 웅글 지고 조용하면서도 열기 띤 음성으로 말을 시작했는데 그 화술의 능란함과 공명력에 현미는 내심 놀라마지 않았다. “취재수락에 선뜻이 응하기는 좀 난감한 기분이군요. 신문에 실리게 되면 사람들 한담거리로는 될 수 있겠으나 문제해결은 불가능합니다. 이미 4년 동안이나 많이 힘써보았지만 허사였지요. 난 이미 맥을 버렸습니다. 이게 첫째고… 다른 하나의 이유라면 공연히 여론지에다 구차스런 모습을 보이기 싫고요. 가난하고 불행한 작가의 이미지는 아름답다고들 하지만 이 시대의 풍속과 사고생리 앞에서는 수치와 모멸감만 느껴질 뿐입니다. 현미선생 앞에서도 그런 자존심 때문에 취재를 사절한다고는 생각지 마십시오. 선생의 ‘봄을 여읜 설음’도 읽었지만 현미선생의 진심은 충분히 알 것 같습니다.” 현미는 금방 벽에 부딪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찌를 수도 뛰어넘을 수도 없는 불가항력적인 벽임을 인차 깨달았다. 그렇지만 그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한 줄기 짭잘한 비애를 수반한 감동이 가슴 속에 충일해 옴을 느끼었다. (농우선생도 내 소설을 읽었구나!… 그렇지만 소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모르실테지… 나한테도 불행한 오빠가 있는 줄은 모르실테지!) 현미는 찡―솟구치려는 눈물을 가까스로 누르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 선생님 심정 충분히 헤아려집니다. 우선 취재문제는 제가 홀로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니 신문사지도부에 여실히 반영하기로 하겠어요. 그런데 선생님, 웬 일인지 전 선생님 이야길 많이 듣고 싶어요. 저도 불행한 농민의 자식입니다. 그것도 부농성분을 띤 농민의 딸이었어요. 아버지가 ‘문화대혁명’에서 세상 뜨시고 오빠가 홀로 가정을 유지하면서 저를 대학까지 보냈어요. 오빤 성분관계로 40고개에 올라서야 결혼을 했답니다. 그런데 소설에 쓴 것처럼 ‘남성’을 잃어버렸어요. ‘봄을 여읜 설음’의 갑송이는 저의 오빠를 쓴 거예요. 오빠도 선생님처럼 튼튼하고 성실해요. 전 선생님을 보니 오빠 생각이 자꾸만 나요.” 현미는 애써 미소를 지으려 했으나 어쩔 수 없이 맑은 이슬이 두 눈에 핑그르르 괴어올랐다. 농우선생은 놀라운 눈으로 현미를 바라보다가 괴로운 듯 고개를 숙인다. “미안합니다. 현미선생, ‘봄을 여읜 설음’이 몹시 아프게 씌어졌기에 고통을 아는 작가라고 진작 느끼긴 했지만 그런 아픔을 진니고 있는 줄까진 생각지 못했군요.” “아니에요, 전 ‘문화대혁명’ 때는 너무 어렸고 후에도 철부지어서 세상을 잘 몰랐어요. 대학에서 문학을 배우면서 차츰 오빠가 불쌍한 줄 알게 된 거예요. 그리고 지금은 또 현실적인 생활기분에 젖어서 왕왕 불행과 고통 같은 걸 잊곤 하거든요. 전 선생님의 사정을 듣고서부터 선생님의 심오하고 감동적인 문학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충분히 알 것 같습니다.” “그래 오빠 되는 분은?…” “지금도 농촌에 계세요.” “아, 소설엔 인생을 포기하는 걸로 되어 있으니…” “오빠도 자살을 기도했댔어요. 다행히 발견되어서 목숨을 끊지 못했어요. 지금은 ‘남성’을 완전히 회복했어요. 제가 강심을 먹고 오빠를 치료해드렸지요. 억지로 끌다시피 해서 병원치료를 시키고… 약이 좋아서 기적적으로 성공했어요. 지금 부부생활이 아주 화락하대요.” 현미는 귀밑을 붉히며 쾌활하게 웃었다. 농우선생은 두 눈에 감격을 담고 대견한 듯, 현미를 정시했다. “거 정말 훌륭한 일 하셨군요.” “그런데 지금도 소처럼 벌지만 그냥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어요. 지난 음력설에 가봤는데 농촌사정이 그렇게 낙관적이 못 되더군요. 생산비용이 높고 ‘가렴잡세’가 많고 쌀값은 낮아서 온 일연 땀 흘려 농사지어도 그저 헛일을 한 셈이라고 했어요. 제가 시내에 들어오시면 어떻겠느냐고 하니까 죽어도 시내엔 안 들어온대요. 인심만은 그래도 농촌이 좋다고.” “시내에 들어와도 마찬가집니다. 곁이 없고 줄이 없는 밑바닥 근로백성들이야 어디로 간들 용빼는 수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농촌에 있으면 남 보기 구차스럽지나 않지요. 나도 가끔씩 농촌이 그리워집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되어 시내에 들어오셨던가요?” “사정이 그렇게 돼버렸지요.” 농우선생은 담배통을 당겨 담배종이에 엽초를 담다가 문득 물었다. “담배 피워도 될까요?” “아이, 피우세요. 저의 오빠도 담밸 몹시 피워요. 제가 말아 드릴게요. 어릴 적에 장난으로 오빠한테 올리곤 했댔어요.” 한손으로 구차스레 담배를 말고 있는 농우선생한테 현미는 정성껏 담배를 말아서 올렸다. 그리고 성냥을 그어 붙여주면서 말했다. “선생님, 절 누이동생처럼 여겨주세요. 그리고 말씀을 낮추세요. 자꾸만 존대어를 쓰시니까 오히려 마음 편치 못해요.” 농우선생은 담배를 힘껏 빨아 연거푸 연기를 가슴 속 깊이 들이마셨다가는 후련히 내뿜곤 했다. 담배초기가 몹시 들었던 게 분명했다. “85년도 겨울에 시 당위 이화성부서기가 우리 집을 방문 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성과가 큰 농민작가라 해서 수많은 수행인원들을 거느리고 왔었지요. 그해 봄에 이화성부서기는 나의 창작조건을 마련해주려고 직접 현에 내려오셔서 현의 간부들을 몽땅 불러 앉혔답니다. 그 회의에서 나의 문제가 해결을 보게 되었지요. 말하자면 ‘농민모자’를 벗고 ‘전민소유제노동자’로 ‘합동간부’로 되어 현 문련에 적(籍)을 두고 ‘생활 속에서’ 글을 쓰는 전직 작가로 되었지요. 가정호구도 상품양호구로 고쳤고… 나는 그때 문학인들에 대한 ‘당의배려’를 목메게 감수했습니다. 그런데 현의 ‘당 간부’들은 좀 달랐지요. 현문화국과 문련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나를 천대하고 수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라면 ‘출근 하루 하지 않고 제 글만 쓰면서 월급을 받아먹는 사람’이라는 거였죠. 그들은 나의 소설 창작은 현의 문화사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고 있었고 ‘당의 문예사업’과도 상관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었답니다. 그들의 수준이 그 정도였지요. 기본노임은 58원 받았는데 그 외 경비 1전, 연말장려금 따위 일체를 주지 않았고 쩍하면 ‘현에서 동무를 책임질 수 없다.’고 을러메었지요. 그러다가 4년 만에 ‘유직정신(留職停薪)으로 처리해버렸지요. 끈 떨어진 망석중이 되고 보니 우선 살아갈 수가 없었지요. 상품양호구여서 농토도 이미 생산 대에 내여 놓았고… 사세 부득이 도시로 들어오게 된 겁니다.” “선생님은 워낙 진작 작가협회거나 편집기관에라도 들어가셔야 옳은 건데요. 이제껏 해결을 못 보셨다니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요. 애초에 조직에서 손 댄 일인데 다시 직접 시 당위에 제기하면 안 될 리가 없을 것 같은데요. 상식 밖의 일이라면 몰라도…” “한마디로 농민으로 태어난 게 죄지요. 중국이라는 이 나라에서는 농민이 일단 솟아나려면 무척 어려운 곡예를 두 번 해야 하는데 하나는 ‘노동자 편제’라는 담장이고 다른 하나는 ‘간부편제’라는 담장이지요. ‘간부편제’ 아니기에 안 된다는 거였죠. ‘간부’로 되자면 시 당위 상무위원회에서 ‘특수공헌인재’로 결정해야 된다는 겁니다. 나 같은 사람 ‘특수공헌인재’로 될 수가 없으니까 방법이 없지요?” “아니, 선생님 같은 분이 ‘특수공헌인재’가 못 되면 어떤 사람 된대요?” “우리 농민들 속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번데기로 되었다가 버러지 ’성충‘으로 뱐신도 못하고 마는 게 농민’이라고… 농민은 사람이 아니지요!” “선생님, 그래 어떻게 사세요? 사모님은 무슨 일하시고?” “남새장살 하는데…” “혼자 장사수입으로는 퍽 어렵겠는데요?” “어림도 없지요, 소비도 많지만 ‘가렴잡세’가 어찌나 잡다한지 명목을 기억할 수도 없습니다. 특히 호구가 들어오지 못한 관계로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데 막대한 금액을 밀어넣어야 하는데 감당하기 힘듭니다. 처음엔 식전마다 도매시장에 가서 남새를 넘겨오고 드문드문 처의 일을 거들어주곤 했는데 안 되겠더군요. 방법 없이 인력거를 끌었지요. 결국 팔뚝 하나 잃어버렸지만, 다행히 왼 팔이었죠.” “팔 어떠세요?” “뼈가 다 부서져서 팔 굽 아래를 절단하고 말았지요.” 현미는 괴로웠다. 팔뚝이 없는 빈 와이샤쓰 소매를 허무히 바라보면서 만약 오른 팔이었다면 이 불행한 소설가는 최후를 절망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프지는 않으세요?” “그런 일은 없지만… 이젠 아무 일도 할 수가 없게 되었지요. 글이나 쓸 수밖에 별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출판이 힘든 게 문제입니다. 출판사가 돈이 없어 명년도 출판계획에도 넣어주기 어려운 걸?로 말하고 있는데.” “출판경비 얼마면 된대요?” “우선 2만 원쯤 들이밀면 첫 두부를 출판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 다음 차차 계획에 들이밀어서 최후 10부까지 출판이 되도록 힘써보겠다고는 하는데…” (2만원…) 현미는 속으로 지폐액수를 외워보고 나서 “선생님, 너무 낙심을 마셔요. 일이 어련히 풀리겠지요. 그리고 저의 생각에 이 고비만 넘기면 사정이 좀 달라질 것 같아요. 듣자니 북경, 상해, 광주 등지에서는 이미 전직 작가제도를 철폐하고 초빙 제를 한다던데 여기도 오라지는 않을 것 같아요.” “난 이제 그 무슨 혜택을 바라지 않습니다. 늘 가난하게 고초를 겪으며 사는 게 아마도 농민으로 태어난 자의 숙명인가 보는데… 도전적으로 오기도 부리며 글이나 써야죠. 그저 처가 불쌍합니다!” 농우선생은 잠간 고개를 숙이고 잇다가 슬그머니 밥상우의 볼펜을 쥐고 일어선다. 서가에 다가서서 “볼셰비키의 화석” 한 편을 뽑아서 사인을 적고 있었다. 그 튼튼하고 넓은 잔등을 바라보다가 현미는 고개를 숙였다. 농우선생이 북받치는 눈물을 감추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 뒤 현미는 농우선생에 대한 생각을 좀처럼 떼어버릴 수가 없었다. 양심적이고 격동적인 문학인으로서 사회에 출중한 공헌을 한 작가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혜택과 대우를 받지 못하고 외면을 당한 채 인력거를 끌고 팔 한 짝을 잃고 막심한 생활고와 정신적 고초를 겪고 있는 이 비참한 현실을 도저히 접수할 수가 없었다. 공연히 괴로웠고 이 사회의 불합리와 불공평에 한 숨이 지어졌다. 현미는 이 불우작가를 돕고 싶었다. 강심을 먹고 오빠의 병을 치유시켰던 것처럼 출판경비 2만원을 구해보리라 마음을 다져먹었다. 일단 출판이 시작되면 원고료가 뒤따라 나올 것이니까 생활고를 이겨내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고 농우선생이 천착해나가는 문학의 보다 휘황한 폭발로 세인의 경탄과 괄목을 받게 될 것이었다. 현미는 한 불우작가를 위해서 한 점의 불티이고자 했다. 온몸의 정의심과 정한(情恨)으로 타고 싶었다. 현미는 막연한 생각에 며칠을 모대기다가 마침내 나섰던 것이다. 3. 찬란한 호랑나비 현미는 약속시간보다 썩 일찍이 “몽야”요리점에 나갔다. 자기가 요청해서 하는 식사였던 만큼 먼저 가서 기다려야만 그게 예절에 맞는 자세라고 느꼈던 것이다. 요리점은 조그마한 방 네 칸으로 꾸며져 있었고 한 칸에 손님이 있었을 분 아주 조용하고 깨끗했다. 현미는 구석 쪽 방 한 칸을 말해놓고 밖에 나와서 길 건너 맞은 켠 가로수 밑에 가 한가롭게 거닐었다. 즐겁고 뭔가 기대에 부푸는 기분이었다. 다시, 다시 생각해봐도 “수수께끼의 택시운전사”―이군철이와의 그 우연적이고 극적인 만남은 그저 신비스럽기만 했다. 그것은 그대로 작자의 기발한 상상력에 의해 꾸며져 무척 재미있는 소설의 첫 시작과도 같았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꼭 마치 그 소설속의 첫 시작과도 같았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꼭 마치 그 소설속의 여 주인공처럼 되고 있는 듯 하는 느낌이었다.
(소설을 꾸밀 수가 있어, 아주 재치 있는!…) 현미는 신선한 창작적 충동을 느끼기까지 했다. 이군철은 시간을 딱 맞추어 5분전 6시에 도착을 했다. 묵직한 풍도와 호화로움이 기름처럼 뚝뚝 흐르는 자가용승용차를 몰고서 척 왕림을 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경탄을 자아내기에 족한데 사람 또한 눈덩이처럼 흰 바지를 주름을 세워 입고 잡색 꽃무늬가 돋친 소매 짧은 와이셔츠에 넥타이까지 맨 차림이어서 이군철은 꼭 마치 황홀한 호랑나비 같아 보였다. 그리고 승용차에서 큼직한 수박 한 덩이를 들고 내렸는데 그걸 보고 현미는 무심간 웃었다. 여자가 내는 식사에 입만 가지고 빈손으로 오는 게 아니고 간단한 선물이라도 들고 올 줄 아는 남자, 그 선물이 또한 굉장히 요란스럽거나 분수와 도를 넘는 게 아니고 무람없이 받아서 함께 먹으며 담소할 수 있는 것이어서 (이 남자는 능통해!) 이렇게 내심 간격을 했다. 그리고 어저께 식사장소를 택하던 일을 떠올렸다. 너무 고급적인데를 사절하고 값이 싸고 대중적인 이 “몽야”를 선택한 이군철의 저의가 곧바로 현미로 하여금 돈을 적게 쓰도록 하려는데 있음을 깨달았다. “오셨군요.” “아, 늦었습니다.” “저도 금방 왔어요.” 현미는 이군철을 안내하여 미리 정해놓은 방에 들어가 앉았다. 이군철은 복무원아가씨 보고 식도를 달래서 능숙한 솜씨로 수박을 쪼개어놓고 “맛보십시오. 금방 따온 것이어서 신선합니다. 오던 길에 원두막에 들렸지요.” “아이, 그러세요?” 현미는 놀래며 수박 한 조각을 들고 한입 떼여 맛보았다. “아, 정말 달고 시원하군요!” 눈 깜박할 사이에 걸 탐스레 먹어치우고서 그게 스스로도 우스워 현미는 쾌활하게 웃었다. 수박도 진짜 맛있고 갈증도 느끼던 차였지만 이군철의 호의와 성의를 고맙게 받고픈 마음이었다. 이군철은 알리듯 말듯한 미소를 저어하듯 짓고 나서 “더 드십시오.” 하고 한 개 더 권하고서 자기도 한 조각 쥐고 먹는다. 현미는 빨간 수박 속을 심각하게 한 입 떼어물면서 이군철의 얼굴을 얼핏 일별했다. (첫 인상과 다름이 없어, 결정적으로 과묵한 남자야, 개성도 강하고…) 현미는 만약 이 남자의 얼굴에 흔연한 미소거나 웃음이 때 없이 피어난다면 뭔가 실망이 되리라는 생각을 했다. 이때 복무원아가씨가 메뉴를 들고 왔다. “이경리님, 짚으세요, 즐기시는 걸로…” “돼지고길 드시는지?” “전 가리는 것 없어요.” “그럼 돼지발쪽 한 접시… 그쪽에서 하나 짚으시지요.” “소꼬리 어때요?” “아, 그것 좋지요. 이제 현미선생 즐기시는 걸로 하나만 더 청하시지요.” “전 특별히 명란볶음 좋아해요. 맛있죠.” “아, 그럼 됐습니다.” 이군철은 딱 막는다. “아니, 가져와요, 그럼 제 임의대로 하겠어요. 오징어볶음 하나, 아이, 개고기 빠졌어요. 개고길 드시죠?” “아니, 그만 두십시오, 먹을 만큼 청해야죠.” “개 껍질요리 한 접시… 됐어요. 맥주는 캔 맥주로 주세요. 그리고 담배 한 갑…” 현미는 고집스레 요리 다섯가질 청했다. 적어도 돈 150원쯤은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군철은 난색을 지으며 “외국에선 딱 먹을 만큼 사는데… 여기선 안 되겠습니다.” “그래도 여기 풍속이 좋아요. 그게 인심이거든요.” 현미는 즐겁게 웃었다. 그들은 맥주를 조금씩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군철은 특별히 돼지발쪽과 소꼬리를 좋아하는 것 같았고 다른 채들도 골고루 축나게 집는 것이어서 현미는 고맙게 여기었다. 그리고 그는 현미한테 주로 문학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는데 문학 책을 좀 읽은 것 같기는 했지만 아무튼 문외한인 것 같았다. 그 질문들이 뭔가 빈곤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문학을 전문 다루는 문학인이 아니니까 그건 당연한 일인 것이고 또한 그게 더 진실 그 자체처럼 아름답다고 현미는 생각했다. 현미는 기회를 찾아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이경리님, 옛 연인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요. 저와 신통하게 생겼다는…” 이군철은 불의의 습격을 당한 듯 하는 시선으로 현미를 바라보다가 그 질문을 무시하듯이 맥주 캔 뚜껑을 새로 떼어 현미의 잔에다 조심스레 붓고 자기의 잔에도 넘쳐나게 붓고는 “드십시오. 이번엔 잔을 냅시다.” 술잔을 잡은 채 잔을 내기를 기다린다. “좋아요, 재간 없지만… 이 잔은 굽 내죠.” 현미는 흔쾌히 잔을 들어 쭉―마셨다. 이군철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진심이었다. “감사합니다!” 이군철은 깍듯이 사의를 표하고서 갑자기 목을 뒤로 꺾으며 쏟아 넣듯 단숨에 굽을 내고는 딱! 소리 나게 맥주잔을 놓는다. 놓은 것이 아니라 맥주잔 밑굽으로 식탁을 세차게 때렸다. 그 딱! 소리가 신경을 자극했고 그 거동이 어쩐지 불쾌감을 자아냈다. 이 남자의 음주벽이거나 인격 속에 잠재해 있는 난폭성 혹은 무례함 같은 것이 무심간 발로를 보인 것처럼 현미에게는 느껴져 왔다. 현미는 내색을 감추고서 이군철의 잔에다 다시 맥주를 따르며 “자, 안주를 집으세요.” 권했으나 이군철은 맥주잔을 잡은 채 입술을 감쳐물고서 미동도 안했다. 그 얼굴이 무겁게 굳어져 있다. 이윽고 이군철은 “뭐 특별한 얘긴 아닙니다.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고… 그렇지만 언제껏 잊을 수 없는 사람이고 내 가슴에 한(恨)과 울분을 심어놓은 일이었지요.” 서두를 떼고는 부어놓은 술을 이번엔 아주 정중히 마셨다. 그리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린 이전에 농촌에 살았습니다. 북적골이라고 와룡현 산골이었지요. 70년대 초에 ‘하향지식청녀’들이 우리 마을에도 내려왔었는데 그 속에 박미금이가 있었습니다. 인물이 뛰어난 처녀었지요. 곱고 쾌활하고 노래와 춤도 재간 있고… 우리 농촌 총각들은 그저 속으로 부러워했습니다. 엄두는 못 내고… 그런데 미금이가 먼저 저를 따랐지요. 지금도 저는 내가 어떻게 되어 미금이의 눈에 들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우린 서로 사랑하게 되었는데 죽자 살자 3년 동안 연애생활을 하였지요. 비극은 부모들이 빚어냈지요. 76년도 봄에 미금이의 부모들은 딸을 도시로 올려가려 했답니다. 미금이의 아버지는 시의 무슨 큰 간부라 했는데 은행에다 취직자리를 마련해 놓았다는 것이었죠. 미금이는 기뻐하기보다 몹시 당황해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깊은 고민 끝에 올라가지 않기로 작심하고 ‘농촌에 영원히 뿌리를 박겠다.’고 부모들 앞에 선언을 했지요. 물론 저와의 관계도 밝히고 임신한 사실까지 공개했지요. 그땐 이미 눈에 띄게 몸이 알렸으니깐요. 부모들은 딸의 일에 억이 막혀했고 딸을 그렇게 만든 ‘촌놈’한테 분노했지요. 그들은 딸의 마음을 돌려세우려고 얼리고 닥치고 위협까지 하면서 별수단을 다 썼지만 허사였지요. 그러자 그들은 최후수단을 썼던 겁니다. 어느 날, 미금이 오빠라는 사람이 트럭에다 여라문 명의 짝패들을 싣고 왔지요. 말은 어머니가 병이 위급해서 미금이 데리러 와:T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런게 아니었지요. 모두들 살기등등했고 나를 불러다 놓고 미금이와의 절연을 강요했습니다. 나는 분을 참고 도리를 따지려 했는데 그들은 입에 답지 못할 모욕적인 언사를 마구 퍼부으면서 달려들어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주먹은 만만찮은 축이었지만 혼자니 방법 있습니까, 죽도록 얻어맞았지요. 미금이는 악을 쓰며 말리다가 기절을 했는데 놈들은 그대로 차에 싣고 도망 가버렸습니다. 미금이는 그 후, 다시 돌아오지 못했지요. 그것이 미금이와의 영별로 될 줄이야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후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미금이의 부모들은 딸을 유산시키려 했지요. 촌놈사위를 얻지 않으려고 그들은 딸을 억지로 병원에 끌고 갔던 겁니다. 결국 미금이는 수술대우에서 숨지고 말았지요. 그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절통하고 분했지요. 미금이는 나한테 하고 싶은 말 태산 같았는데 한마디 못하고 저 세상에 갔지요. 그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을 겁니다!” 이군철은 갑자기 왼쪽 팔 굽을 식탁 우에 올려놓고 손으로 이마를 가리었는데 소리 없이 오열을 터치고 있었다. 현미는 일순 당혹을 느끼며 두 눈을 크게 뜨고 이군철을 지켜보았다. 그 눈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이 핑그르르 괴어오르고 있었다. 이군철의 이야기는 그녀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까 술잔 밑굽으로 식탁을 탁! 쳤던 이군철의 거동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았고 그 불쾌감이 마음속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럴 수가! …세상엔 비슷한 일도 많군요. 저의 오빠를 사랑했던 여자도 부모들의 핍박에 정신이 잘못 되었거든요. 오빠의 성분이 부농이래서 딸을 주지 않으려 했지요.” 이군철이 오열을 멈추기를 기다려서 현미가 급기야 입을 열었다. 이군철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훔치고 나서 물었다. “그럼 선생의 소설이 오빠를 쓴거겠군요.” “그래요, 나도 농민의 자시기예요. 그것도 부농성분을 띤 농민의 딸이지요.” “오― 그렇구만요.” 이군철은 머리를 끄떡이면서 현미의 술잔에 맥주를 따랐다. “같이 듭시다. 다 내죠.” 그들은 통쾌히 잔을 냈다. “같은 농민출신이니 하는 말이지만 나는 그때 하나의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말하자면 농민은 영원히 값없는 존재일거라는 걸 알았지요. 나라생존과 ‘혁명’에는 농민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세상은 농민을 천대합니다. 특히 분개를 일으키는 것은 당 간부들이지요. 그들은 겉으로는 듣기 좋은 말을 불어대지만 실제는 농촌을 사람이 못살 지옥으로 여기고 있지요. 자기 자식들이 ‘지식청년’으로 내려간 게 가슴 아파서 도시로 되 올려가려고 별별 수단을 다 쓰고… 기실 그들은 제 일신과 제 가족의 안일과 영달만을 꿈꾸는 이기적인 인간들인 겁니다. 나는 그때 죽어도 농촌을 벗어나리라는 야심을 품었습니다. 마침 77년도에 새로운 시험제도가 나와서 악을 공부했었는데 연속 낙방이 되었죠. 3년만에야 겨우 정치학부에 붙었던 겁니다. 대학을 나와서 교원질을 하다가 때려치우고 기업계에 나섰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성공을 했어요.” “이경리님, 혹시 ‘농우’라는 작가 분을 아시는지? ‘그 여자의 꿈’과 ‘볼셰비키의 화석’을 써서 소문 난분…” “많이 들었습니다. ‘그 여자의 꿈’은 이전에 읽었었지요.” “방금 이경리님 이야길 들으니까 농우선생님 말씀이 생각나요. 그분은 저보고 ‘번데기로 되었다가 버러지로 변신도 못하고 마는 게 농민’이라고 했어요.” “아, 생동합니다.” “그런데 전 지금 이런 생각을 해보고 있어요. 번데기로부터 찬란한 나비로 변신을 한 사람이 곧바로 이경리님이 아닐까 하고…” “건 과찬입니다. 나비로 됐는지는 몰라도 돈은 벌었죠. 그저 가슴에 맺힌 한이라면 미금이를 잃은 것입니다. 미금이가 지금 있으면 호강을 할 수 있겠는데… 요 먼저 현미선생을 보는 순간 난 아무튼 현미선생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특히 작가분이시고.” 이군철은 눈을 들어 갑자기 현미를 정시해와:T다. 현미의 마음을 투시하려는 무서운 집착과 그 어떤 갈망이 담겨진 시선이었다. 현미는 맥주를 마시는 척 자연스레 그 시선을 무시하였다. “이경리님… 작가를 크게 보셔요? 진정…” “웬 말씀을… 작가란 우리한테 신비한 존재이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정말 감사해요. 사실 세상은 그렇지 않거든요. 누구도 작가를 크게 여기질 않아요. 돈 좀 구하려고 뛰어다니다가 번번이 코를 떼웠어요.” “…돈을요?” 이군철은 의외라는 듯 두 눈에 의문을 둥그렇게 그렸다. “출판경빌 좀 얻으려고 했지요. 출판사가 돈이 없어서 아무리 좋은 작품이래도 작가가 경빌 대지 않으면 출판할 수가 없는 사정이거든요.” “그런 사정도 있군요, 대개 얼마씩이나 수요 된 답니까? 한 책 내는데…” “우선 2만 원쯤이면 될 거라고 그러는데.” “2만원… 또 장편을 쓰셨습니까?” “…아니에요!” 이 한마디를 결단하면서 현미는 내심 갈들을 겪었지만 결국 자기의 대답을 후회하지 않았다. 오늘 저녁의 만남은 이군철경리와 한번 “부딪쳐보려고” 현미 쪽에서 요청해서 마련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러나 현미는 돈을 꼭 얻으려는 목적성을 마음속에 딱히 세운 것은 아니었고 또한 그 어떤 불성실과 계략 같은 것으로 목적을 이루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만약 돈을 얻게 되었을 경우 이군철이한테 필연코 지게 될 막중한 부채감(負債感)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제 것이 아니고… 방금 말이 있었던 농우선생님을 위해섭니다. 그분이 지금 10부 대하소설을 쓰고 있는데 이미 4부까지 탈고 했어요. ‘온대의 태양’이라고… 그런데 출판경비가 없어 출간을 못하고 있지요.” “오―” 이군철은 주의 깊게 들으며 머리를 끄떡여 보인다. “지금 시내에 들어와 계시는데 정말 눈물겨워요. 농민으로 태어난 죄 때문에 실업자로 되어 무서운 고초를 겪고 있지만 세상은 그를 품어주려 않거든요. 인력거를 끌다가 차에 치워 팔뚝까지 잃었어요. 다행히 오른 팔이 아니어서 글을 쓰는 데는 별 지장이 없지만… 그분은 지금 글 쓰는 것으로 정신의 붕괴를 버티고 있어요. 심혈로 쓴 작품이 출간 못되면 최후로 절망할 거예요.” 현미는 큰 숨을 몰아쉬고서 눈을 내리 깔았다. 그는 자기의 말이 무의식간에 이군철이한테 절절히 호소한 거나 진배없음을 의식했는지 가슴이 후련했다. 분위기도 그렇거니와 이군철이를 놓고 말하면 농민으로 태어난 자의 설음과 울분과 정한(情恨)을 불티처럼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사람이 틀림없으므로 쉽사리 동정과 정의감에 불붙으리라 충분히 믿어졌기 때문이었다. 이군철은 머리를 기우뚱하고 뭔가 생각을 굴리는 듯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가타부타 입을 열지 않았다. 현미의 말에 공감을 보여주거나 농우선생의 불우한 처지에 대한 동정어린 탐문 같은 것을 예의적으로라도 할 줄 알았는데 일체 말이 없다. “술 드세요.” 이군철은 집배(執杯)하고서 난처한 표정을 보였다. “뭘 그러세요? 이제 얼마 들었다고…” “아니, 술 과합니다. 차를 가지고 다니지 않으면 무방하겠지만.” “그럼 국수나 하죠.” “난 먹을 데가 없습니다.” 이군철이 딱 막는 바람에 좌석을 멋없이 파했다. 이군철이 기어코 집까지 바래주겠다고 하는 바람에 현미는 호의를 거절할 수가 없어서 자전거를 승용차꽁무니에 집어넣고 차에 올랐다. “오늘저녁… 감사했습니다!” 이군철은 웬 일인지 이런 말을 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현미는 속으로 (이 남자… 마지막 작별 시각에 해야 할 인사를 앞당겨 하지 않아?) 그러면서 현미는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느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이군철은 입을 꾹 다물고 차만 몬다. (역시 돈에 들어가선 모두들 당나귀발통처럼 굳구나. 이젠 이 남자와 다시 만날 필요가 없어… 그리고 돈 얻는 일도 이것으로 결속이야!) 현미는 야릇한 비애를 진하게 느끼며 숨을 한번 크게 쉬었다. “‘왕자’빌딩”앞에서 차가 멈춰 섰다. 이군철은 함께 내려 승용차 뒤꽁무니에서 자전거를 손수 내려다주고는 다시 차에 올랐다. “고마워요.” 현미는 손을 낮추 들어 차를 바래려 했다. 그런데 이군철은 잠간 떠날 염이 없는 듯 미동을 않고 있더니 “내일 저녁 일곱 시 쯤 이 지점에 나오십시오. 내가… 2만원 드리지요.” “네?!” 현미는 멍청해서 사라져가는 승용차를 바라보았다. 4. 밤소나기 현미는 이군철이와 함께 “‘화려강산’빌딩”을 내려오고 있었다. 무도 청이 맨 꼭대기 12층이었으므로 스물 몇 굽이 층계를 굽이굽이 자아내려야 했다. “기분 어떻습니까?” 이군철의 물음에 현미는 “좋아요!” 했지만 딱히 기분이 좋을지 어쩐지는 스스로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기분을 논하기 전에 현미는 이런 곳에 자주 와서 돈 팔며 항락을 누리고 아까운 시간을 허송하는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몹시 빈곤하고 공허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거부감을 느꼈고 두 번 다시 이런 곳에 오고 싶진 않았지만 한편 세상을 널리 알아야 하는 작가로서는 한번쯤은 와보는 것도 무방하리라 여겼다. 단지 그런 점에서 그녀는 군철이한테 감사를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현미는 7시 정각을 딱 맞추어서 “‘왕자’빌딩” 앞으로 나갔었다. 혜택을 받는 쪽인 것만큼 먼저 나가 기다린다는 게 좀 쑥스러웠던 것이다. 이군철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 나오셨군요.” 반기며 승용차도어를 훌 열어주는 것이어서 현미는 어쩡쩡 차에 올랐다. 하긴 현미는 “이 지점”에 나오라고 한 이군철의 저의가 간단히 돈 2만원을 넘겨주는 데만 그치지는 않을 것임을 짐작은 하고 있었다. 어디 가서 커피를 마시자든가 간단히 식사나 하자든가 할 줄은 알았다. 현미 또한 그건 퍽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몸단장도 하고 나왔던 그녀였다. 몸단장이래야 얼굴화장을 진하게 하거나 특별히 옷을 요란스럽게 골라 입거나 하는 게 아니고 그저 옅은 화장에 시체 멋이 풍기는 투피스를 차려입으면 그만이었지만 스스로 만족된다고 느껴질 때에야 거울 앞에서 물러서는 게 그녀의 습벽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의 미모는 남들한테 보이기보다는 넘치는 자신심 그 자체였다. “어디 가서 뭘 좀 합시다.” “이거, 인사를 바꿔 하는 게 되잖아요?” 이러며 데리고 간 곳이 “‘화려강산’빌딩”이었다. 이 빌딩은 이 도시의 최고급호텔로서 중국요리, 서양요리, 한식, 일식… 뭐나 마음대로 맛볼 수 있고 나이트클럽, 가라OK, 디스코 무도 청, 사우나, 안마실, 당구장… 그야말로 돈만 있으면 마음껏 즐길 수 있는 향락의 세계였다. 처음 이곳에 발을 들여놓는 현미는 그 내부 장식의 호화로움과 최첨단시설의 황홀함에 아연해졌고 사치한 분위기와 사람들 얼굴에 번지르르한 허장성세와 오만, 물씬물씬 풍기는 돈 냄새와 타락냄새에 위압감과 거부심이 일었다. 그보다도 현미가 내심 놀랍게 느꼈던 것은 이군철의 요술 같은 변신이었다. 이군철은 오늘다라 깨끗이 면도를 하고 커피색바지에 섬광(閃光)박쥐적삼을 입고 있어서 귀공자 같은 모습인데다가 이 향락의 세계에 들어서자마자 그 얼굴에 자신만만하고 느슨한 미소가 떠날 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물을 떠났던 물오리가 갈망의 호수에 찾아든 듯 그 거동이 활발하고 유유했다. 전혀 무섭게 굳어져만 있던 “택시운전사”의 얼굴이 아니었고 “촌놈”의 정한을 불티처럼 가슴에 품은 “과묵한 사나이”가 아니었다. 현미는 이군철을 따라(함께가 아니고) 여러 가지 서양요리를 맛보았고 프랑스포도주와 이름 모를 외제 술도 마셨다. 마이크를 쥐고 가수흉내도 내보고 이군철과 쌍이 되어 왈쯔도 춰보고 디스코도 한참 췄다. 이렇게 먹고 마시고 노는데 이군철이가 천 여원을 메치는 것을 현미는 제 눈으로 보았다. 그때 현미는 오빠와 농우선생과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이군철은 아직까지도 “출판경비”를 현미의 손에 쥐어주지 않고 있었다. 현미는 말도 못하고 그 돈 2만원에 코를 꿰어서 “‘화려강산’섭력”을 한 셈이었다. 그들이 빌딩입구를 빠져나왔을 때 시간은 이미 밤 열시에 육박하고 있었다. 현미는 이군철이를 따라 승용차 속에 들어갔다. 이군철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담배를 붙여 물고서 맛나게 피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역시 천천히 쿠션 밑 어느 비밀스런 곳에서 자그마한 손가방을 꺼내어서 열고 두툼한 봉투를 건네준다. “2만원입니다.” “아, 정말 감사해요. 오늘밤 돈도 많이 쓰시고.” 현미는 어마지두 돈 봉투를 받아 쥐고 어쩔 바를 몰랐다. 막상 거금을 받아 쥐고 보니 백번 사례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세어보십시오.” “아니, 뭘, …정말 고마워요, 농우선생님도 감격하실 거예요.” 현미는 돈 봉투를 그대로 핸드백 속에 넣었다. 이군철은 담배를 비벼 끄더니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볼까요?” “드라이브? …좋아요.” 가볍게 응답을 해놓고서 현미는 (이젠 집에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했다. 그러다가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이경리님, 드라이브도 좋지만… 우리 이 길로 농우선생님 댁엘 가지 않겠어요? 그 선생님 감격하시는 걸 보고 싶어요. 그리고 실제 농우선생님의 인사는 이경리님이 직접 받아야죠.” “난 직접 출면하지 않겠습니다. 기왕 현미선생이 나섰던 일이고 하니 현미선생이 처리하십시오.” “그래도 농우선생님은 은혜를 베푼 분을 만나보고 싶어 하겠는데…” “후에 기회가 있겠지요.” 현미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차가 사르르 미끄러져 나가고 있었다. 현미는 숨을 크게 쉬고서 군말 없이 이군철의 드라이브 초청에 순응하고 말았다. 이군철은 다시 무겁게 굳어진 얼굴이 되가지고 차를 몰고 있었다. 이젠 행인들도 별로 없고 꼬리를 물던 택시 차들도 뜸해져서 겠지만 차는 점차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한낮의 무더위와 “‘화려강산’빌딩” 속의 열기에 땀 절었던 몸을 차창으로 휙휙 불어들어 오는 바람이 시원히 식혀주고 있었다. 그렇지만 현미의 가슴에는 차츰 검은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이 남자가 어쩌자는 건가? …수상해! …그럴 사람으로는 보지 않았는데… 설마? …) 현미는 다시금 이군철이를 처음 만나던 때로부터의 그 과정과 인상을 되새겨보았다. 그리고 자기의 머릿속에 이미 완정한 이야기로 구성이 되어있는, 이제 곧 진한 감동을 필묵에 묻혀서 치열(熾熱)하게 써내리라 작정을 하고 있는 그 소설의 주인공을 마음속에 세워보고 있었다. “촌놈”이라는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첫사랑을 잃고 울분과 원한을 불티처럼 가슴에 지닌 “번데기”, 숙명의 껍데기를 찢고나와 대명천지를 비상(飛翔)하는 찬란한 나비, 한 불우작가를 위해 선뜻이 거금을 내놓은 뜨거운 인정과 정의의 화신, 옛 연인과 꼭 같게 생긴 여인을 만나 깊은 애정을 느끼면서도 오히려 제 쪽에서 냉정히 거리(距離)를 확보하고 있는 남자, 고상한 사나이!… 이군철의 “성격발전논리”는 의당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불안해… 내 감각이 틀리는 걸까? …이젠 방법 없이 부딪쳐 보는 거야!) 현미는 마음을 다져먹었다. 그녀는 자신의 인간적 고상 미와 서리발치는 도고 성을 믿었다. 그 고상 미와 도고 성 앞에서 감히 허튼 남자들은 범접을 못한다. 악마가 아니고 이성을 잃은 짐승이 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남자든지 그녀를 무너뜨릴 수 없다. 설마 이군철이가 악마거나 짐승으로 될라고? …이런 신념이었다. 그때 문득 현미는 남편 생각을 했다. 그녀의 남편 최광호는 대학에서 의학을 배운 시립병원의 신진의사였다. 남자로서 크게 특별한데는 없고 순진무구하고 불같은 소년의 그런 귀염성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현미는 억세고 미끈한 체격의 미남자, 원숙한 지성미를 지닌 학자형의 남자, 돈 많고 직위 있는 남자… 이런 남자들을 다 스쳐 보내고 어쩌면 뭇 남자들 중에서 제일 어리고 나긋나긋한 약자일지도 모르는, 그래서 제 여자도 지켜줄 힘이 없을 것만 같은 애송이 대학생을 선택했다. 현미는 가끔씩 자기가 남자를 선택한 의거는 철두철미 생리적 감각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도 현미는 남편의 그 순진무구함과 귀염성에 끌려들어가고 있었으며 남편의 마음과 몸에 뜨끈뜨끈한 애교 풀처럼 녹아 붙어 있었다. 이 시각 현미는 남편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느꼈다. 반년 넘어 떨어져 있어서일까? …남편은 광주로 학습을 갔던 것이다. 병원당국에서 C? T 전문가로 배양할 의도라 했다. (그이가 있으면 말렸을 거야. 내가 이런 일 하는 걸… 나를 몹시 아끼니까… 그리워!) 현미는 정신을 번쩍 도사리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승용차는 어스레한 시내거리를 큰 반경을 지어 도는 것 같더니 길동교(吉東橋)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쪽은 주로 트럭들이 다니는 길이었고 길 동쪽은 교외에 잇닿아져 남새 농들이 게딱지같은 주택구와 사시장철 인분냄새를 풍기는 남새밭들이 있었다. (한 바퀴 돈다고 했으니까… 드라이브이니까.) 현미는 애써 이렇게 생각하려고 했다. 승용차는 길동교를 건너서 한참을 달리다가 천천히 멈춰 섰다. 이젠 인력거도 뚝 끊기고 지나가는 차량들도 보이지 않는 치벽한 장소였다. 뜨스한 인분냄새가 불쾌하게 호흡되었다. “좀 쉽시다.” 이군철은 한숨을 토하듯이 한마디 하고서 담배를 붙여 문다. “공기가 불결해요, 이젠 돌아 가자요.” “여기 채농들은 사시장철 인분냄새를 맡으며 살지요.” 이군철은 무슨 뜻에서인지 이렇게 말하고는 자기도 인분냄새 같은 것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담배연기를 가슴 속 깊이 들이마셨다가는 후련히 내뿜곤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한식경 후 마침내 담배꽁초를 비벼 끄고서 “현미씨!” 기습하듯 갑자기 호칭을 바꾸었다. “현민선생”이거나 “현미씨”거나 뜻으로 따질 때 별 구별이 없는 것이겠지만 현미는 대뜸 색다른 의미로 느껴 들었다. “솔직한 말을 해도 되겠습니까? 이미 말한바 있지만 현미씨의 만남을 난 참으로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이 행복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군요. 나는 금방 담뱃불을 비벼 끄는 시각까지도 속으로 투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워낙은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현미씨, 현미씨를 사랑해도 될까요?” 현미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평온했고 이제 무슨 말이 더 나오느냐 어디 두고 보자는 두둑한 배심이 일어서기까지 했다. “난 현미씨를 만나고부터 내가 행복한 사람이 아님을 깨달았지요. 하긴 미금이만 못하지 않는 여자를 얻노라 고는 했지만 결국 여자 복이 없음을 깨달았던 거지요. 현미씨처럼 아름답고 고상한 여자를 만난다면 내 인생은 여한이 없을 겁니다.” “이경리님, 절 곤혹스럽게 굴지 말아주세요. 전 남편 있는 여자랍니다!” 현미는 잔잔한 어조로 딱 막았다. “건 나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문제될 건 없지요. 난 처를 이혼하고 현미씨를 맞아들이고 싶지만 그쪽 사정이 고난하다면 비밀 적으로라도 정을 나누면 될 것 아닙니까.” “두 번 다시 말씀 드리지만… 절 딱하게 굴지 마세요.” 현미는 다시 견결함을 표시했다. 그러나 자기의 얼굴을 뚫어지게 돌아다보고 있는 이군철의 시선을 따갑게 의식하며 현미는 그 어떤 위기감을 느꼈다. “나도 모르는 건 아닙니다. 나이 차이도 그렇겠지만 워낙 나 같은 사람을 눈에 들어 할 현미씨가 아니라는 걸… 그런 까닭에 나는 교역을 하는 겁니다. 까놓고 말한다면 너절한 여자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백 원만 찔러줘도 하루 밤 실컷 데리고 놀 수가 있지요.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아니기에 허무만 느끼게 되지요. 나의 현미씨에 대한 감정은 진정입니다. 그렇지만 거저는 얻을 수가 없는 것이기에 2만원을 메친 겁니다. “이경리님, 어떻게 하는 말씀이세요? 이 돈은 명명백백히 농우선생님 출판경비로 내 놓은 게지 저를 준건 아니잖아요.” “그건 나하고 상관없습니다. 나는 어쨌든 현미씨를 준겁니다. 그 돈은 현미씨 마음대로 처리할 수가 있지요. 나는 농우라는 작가하고는 안면도 없거니와 실지 감정도 없습니다. 그리고 현미씨와 그 작가 간에 그 어떤 교역이 없다고 나는 보지 않습니다. 아무려면 순 동정심에서 돈 구하러 나 설리 없겠지요.” 현미는 억이 막혀 이군철을 쏘아보았다. 끓어오르는 분노로 얼굴이 질리어왔다. 여태까지의 모든 연기가 가면극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비루해요!) 내심에서 폭탄 같은 이 한마디가 터졌다. 그러나 좋은 말로 “이경리님, 미안해요. 전 이런 걸 교역할 수 없어요. 돈 돌리겠어요.” “이러지 마십시오. 나를 어떻게 보는 겁니까?” 이군철은 핸드백을 열려는 현미의 손등을 꽉 잡으며 무섭게 노려본다. 순간 현미는 맥주잔 밑굽으로 식탁을 치는 탁! 소리를 들었다. 이제 조금만 더 비위를 거슬리기만 하면 발끈 광기를 일구면서 이성을 잃은 짐승으로 될 것임을 의식했을 때 현미는 절망을 느꼈다. “나를, 주었던 돈 되찾을 시시한 남자로는 보지 마십시오. 교역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내 것을 주고 그 이상의 가치를 탈취하는 것이 남을 이기는 비결이지요. 현실은 이런 경쟁시대의 철학을 나한테 습독시켰습니다. 나도 한때는 인정과 의리와 정의를 미신하고 세상을 헤쳐 보려 했었지요. 그러나 촌보난행이었습니다. 시내에 호구를 옮기려 해도 먹여야 했고 아이들을 학교에 붙이려 해도 먹어야 했고 자동차 면허증을 얻으려 해도 먹여야 했고… 걸음마다 처처마다 교역을 해야 했습니다. 대부금 천만 원을 내오는데 은행의 몇몇 권력층들 호주머니에 백만 원을 질러주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썩었는데 일개 밑바닥 백성이 뭡니까. 인정과 정의 따위에 포로 되어 있어서는 남한테 먹히고 생존을 못합니다. 나는 한 가난한 작가를 동정해서 2만원을 내던질 만큼 고상한 사람이 못 됩니다.” 이군철은 분노해 있었고 갑자기 꽉 잡은 현미의 손을 끌어당기면서 오른 팔로는 허리를 끌어안고 우악스럽게 당겨갔다. 현미는 부르르 전율을 하고나서 “이러지 마세요!” 날카롭게 쏘아붙였지만 이군철의 입술이 벼락같이 그녀의 입술에 육박해왔다. 탐욕스런 흡반처럼 입술을 빨아 문채 궁둥이를 돌려 빼면서 핸들 밑에 쓰러뜨렸다. 그는 이미 미쳐있었고 현미의 악에 받친 반항도 끝내는 체념으로 무너져버렸다. “남자가 사정없이 몸을 헤집고 들어왔을 때 현미는 또다시 남편의 얼굴을 떠올렸다.… 소낙비가 내리고 있었다. 번개가 무시로 눈앞에 번쩍이고 따르릉따르릉― 우레가 천지를 진감했다. 현미는 그린 듯이 쿠션에 몸을 맡기고 앉아있었다. 이군철이가 뭐라고 사과의 말을 하는 것 같았으나 그의 귀에는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차가 길동교를 지나 북쪽교두에 이르렀을 때 현미는 “찰 세워요.” “비가 오는데…” “내리겠어요!” 조용히 부르짖었다. 불결의 승용차에 앉아서 집 근처까지 가고 싶지 않았다. 현미는 도어를 밀고 나왔다. 차디찬 빗줄기가 쏟아지는 듯 뜨겁게 단 몸을 두들겨댔다. 현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앞으로 걸었다. 그녀는 자기가 왜서 유보도에 들어섰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승용차에서, 그 악몽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소낙비는 땀에 절고 남자의 타액으로 불결해진 몸을 좔좔 씻어 내리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는지? …현미는 마침내 멈춰 섰다. 번―쩍 번개 치고 천둥이 울면서 소낙비가 더욱 세차게 쏟아져 내렸다. 부르하의 수면이 팥죽 가마처럼 격렬히 끓고 있었다. 현미는 빗속에 서서 거무칙칙한 남산허리를 바라보았다. 그 언덕 우에 틀림없이 농우선생님이 서있었을 것이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울분으로 재워진 가슴을 냉각시켜 인간세상을 사고할 것이었다. 작가의 정신(비판의 정신)을 창끝같이 벼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분을 위해서, 그분의 빛나는 문학에 이바지하려 돈을 얻었다는, 정직하고 출중한 불우작가한테 자그마한 힘이나마 될 지폐가 핸드백 속에 들어있다는, 이제 그것은 확실히 얻은 것이며 농우선생한테 드리는 일만이 남아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현미는 갑자기 거기에 바쳐진 자신의 대가가 분하고 서러워지고 있었다. 거금 2만원보다 더욱 신성하고 값진 것, 귀중키로 생명 그자체이며 남편 앞에 굳게 지킴으로써 더욱 아름다운 것을 그녀는 짓밟히고 빼앗겼던 것이다. 현미는 남산 언덕을 우러러 또박또박 “농우선생님! 굳세게 사셔요, 꼭 성공을 하셔요! …부탁드립니다. 현미가… 기원을 하옵니다!” 흐늑흐늑―현미는 마침내 흐느끼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이 오열이 터지고 있었다. 턱이 덜덜 떨렸다. 가슴 속을 폭풍처럼 뒤흔들며 울음은 덩이덩이 각혈하듯 급촉하게 토해지다가 구슬픈 통곡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5. 흐르는 생리 현미는 마른 수건으로 몸을 깨끗이 닦고서 침상 우에 올라가 누웠다. 차디찬 비에 냉각되었던 육체가 차츰 따뜻한 온기에 노곤해지고 있었다. 이따금 번갯불이 번쩍거리고 둔중하고 미약한 우레가 퇴각이나 하듯이 먼 하늘가에 울고 있었지만 이젠 비도 멎은 듯 소란스럽던 밤이 갑자기 괴괴해졌다. 집안도 고요했다. 온돌방에 신경이 쓰이었지만 별 기척이 없다. 거기서 시어머니가 딸애를 데리고 자고 있었다. 남편이 없는 동안 시어머니를 모셔왔던 그녀였다. 현미는 물참봉이 된, 어쩌면 비참하게 보였을지도 모를 자기의 몰골을 시어머니한테 안보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현미는 이제 자고 싶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잊은 채 푹 잠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게 잘 되질 않고 있었다. 몸과 마음이 다 지쳐서 혼곤했으나 가슴 속에 꾸역꾸역 괴어오르는 치욕과 오심(惡心)을 종시 떼쳐낼 수가 없었다. 현미는 이제껏 한 송이 아름다운 여성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남자들한테 강제로 당하는 능욕이라든가 몸을 더럽힌다든가 하는 일을 자기와는 전혀 무관한 남의 일처럼 여겨왔다. 그것은 작가들의 붓끝에서 꾸며진 소설에서나 있을 수 있는 그런 일처럼 생각했고 그녀 또한 자기의 어느 한 단편에서 능욕당한 여자의 심리를 아주 비참하게 그려 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자기 자신이 그런 꼴을 당했던 것이다. 현미가 분했던 것은 그렇듯 확고히 믿었고 자신심에 넘쳤던 자신의 인격적(혹은 여성적)고상미와 도고성(道高性)이 무참히 꺾인 사실이었다. 그것도 자기 자신이거나 자기가족의 이해관계에서가 아니고 한 불우작가를 위해서, 한 덩이 끓는 인간애와 정의심을 남한테 주려고 나섰다가 당하였던 것이다. (어떻게 풀어야 할까? 이 분을… 풀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현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돈 생각을 했다. 침중한 대가로써 바꾸어온 돈 2만원이 지금 핸드백 속에 들어있다는 것, 꼭 드려야 한다는 것!… 그러자 현미는 가슴이 터엉―비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그러면 난 뭐가 되지? 꿩 구어 먹은 빈터가 되지 않아? 내가 뭔데? … 농우선생이 내게 뭐가 되기에? …당에서 관계치 않고 정부에서 내버려두는데… 작가협회가 품어주지 않고 사회가 눈을 감고 있는데 내가 뭐 게? 내가 뭐가 돼서 몸까지 팔아서 농우선생님을 구제해야 하나? 꼴이 그렇게 됐지 뭔가! … 그렇다고 나를 “선진”이라 할까? “영웅”이라 할까? …그까짓 길가에 내던져도 주어가지 않을 “선진”, “영웅”을 가지고… 미쳤어, 내가 바보야!) 현미는 갑자기 오뚝이처럼 발딱 몸을 일으켰다. 핸드백 속의 돈을 이제껏 확인해보지 못했다는데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현미는 스위치를 눌러 전등을 켜고서 옷 장안에 걸어놓은 핸드백에서 두툼한 돈 봉투를 꺼냈다. 분명히 100원짜리 묶음 두 개였다. 현미는 누가 빼앗기라도 하는 것처럼 돈 묶음을 움켜쥐고 다시 침상 우에 올라왔다. 그리고는 손가락 끝에 침을 묻혀가며 열심히 세어보기 시작했다. 2만원! … 분명히 2만원이었다. 두 번 세 번 세어 봐도 틀림이 없었다. 현미는 전등을 끄고 다시 누었다. 두툼한 돈 묶음을 가슴 우에 올려놓고 두 손으로 꼭 쥔 채 눈을 감았다. 지폐의 신비한 질감과 막중한 무게는 그녀의 마음속에 굴뚝같은 욕심이 일어서게 했다. (이건 내거야! 내 돈이야! …남 줄 수 없어, 왜 남을 줘? 내가 대가를 치렀는데… 농우선생 앞에서도 양심에 꺼리 낄 것 하나도 없어, 돈 얻어주겠다고 말한 일도 없고 담보한 적도 없지 않은가? 내 스스로 “의무”를 짊어졌던 것이고 이제 또 내 스스로 그걸 포기하면 되는 거야, 내가 왜 양심가책을 받아? 내 양심이라고 못났던가. 세상 양심 다 말라 비틀어졌는데…) 현미의 사고는 터널 속을 휩쓸며 나가는 급행열차처럼 치열하게 줄달음치고 있었다. (우리도 부자가 아니잖아? 월급에 매달려 사는 가난뱅이인데… 어려운 일 많고 부러운 것 끝이 없는데… 고급주택은 둘 째 치고 냉장고도 없고 비디오도 없잖은가. 그이가 제일 부러워하는 전화도 못 놓고 있고… 죄송해요, 광호씨, 나의 “귀여운”님! … 분을 풀기 위해서라도 남 줄 수 없어, 이 바보 같은 자식! 결국 제 속 빼었지!… 억지로 따먹은 배 달기나 했을라고? 제가 2만원 떼었지!) 현미는 비로소 속이 시원한 것 같았다. 그녀는 돈 묶음을 가슴에 꼭 품은 채 서서히 잠속에 빠져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현미는 출근하던 참에 먼저 저금 소에 들리어 자기 이름으로 2만원을 저금했다. 저금통장을 꽁꽁 깊이 간수하고 신문사에 나간 그녀는 반석이 들어앉은 듯 마음이 든든했고 세상이 더 발고 아름다운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을 맺지 못하고 무한정 이어지게 되었던 것은 점심 퇴근을 하려고 막 일어서던 시각에 이군철이한테서 전화가 걸려왔기 때문이었다. “누구세요?” “아, 접니다. 현미씨!” 현미는 뜨끔 놀라며 문 쪽에 시선을 던졌다. 편집일군들이 금방 다 나가 별 위험이 없으리라 느껴졌을 때에야 “왜요? 또 날 찾을 일 있어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어저께 일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양해해주십시오.” “다른 용건 없으면 전활 놓겠어요.” “아니, 현미씨, 참으시고 한마디만 들어주십시오. 다시는 만나주지 않는 줄, 나도 압니다. 그래도 난 할 말이 없으니까요. 그저 양해한다는 한마디만 해주셨으면 괴롭지 않겠습니다.” “전화 끊겠어요!” 매섭게 쏘아붙이고 수화기를 놓으려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뇌리를 친 듯 “아, 여보세요!” 다급히 상대방을 불렀다. “그 돈… 농우선생님한테 드렸어요. 그럼 나는 뭐가 되죠? 공으로 당하고 곱게 가만있으라는 거예요? 양해하십시오. 하면 답니까? 알고 처리하세요, 시끄러운 일 만들기 전에… 어쨌든 강제로 당했으니까 나도 ‘교역’을 해야겠어요!” “아, 저… 현미씨,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한데. 이렇게 하면 안 될까요. 만원 더 드리지요, 어디서 만날까요?” “밤 아홉시 정각에 ‘왕자빌딩’앞에 오세요. 그러나 내 곁에는 경호원이 있을 거예요.” “현미씨, 거 너무하지 않습니까? 진심으로 양해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고 또 현미씨를 잊을 수가 없어서 그만큼 통이 크게 처리 하는 건데… 이건 내 진심입니다. 현미씨가 단 한번만이라도 기분 좋게 해주신다면 5만원이라도 기꺼이 메칠 용기가 있습니다.” “돈이면 단줄 알아요? 이거 사람을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리죠?” 현미는 무례하게 전화를 끊고서 편집실을 나왔다.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고서 현미는 침상 우에 누워서 방금 전에 전화 치던 일을 놓고 다시 생각해보고 있었다. 그녀가 전화를 끊으려다가 갑자기 시비를 덜었던 것은 사실은 진의가 아니었고 그저 분풀이라도 해보려는 데 불과했다. 그런데 그쪽에서 선선히 만원을 더 주겠다고 하니 그것이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현미는 내심 놀랐던 것이다. 그리고 기분만 좋게 해준다면 5만원이라도 기꺼이 메칠 용기가 있다는 말도 어쩌면 진심인 것 같았다. (그가 나한테 빠진 것만은 사실이야. 내가 미급이라는 첫 연인과 똑같이 생겼다니까. 거기다가 현대미와 지성미를 더 갖추고 있는 것이니까, 미치지 않을 수가 없을 테지… 그렇지만 아무리 미쳤다 한들 한번 정사에 2만원씩 척척 메칠 남자가 흔할까? 과연 몇이나 있을 수 있을까?… 어쩌면 그의 사랑이 진심일지도 몰라, 그리고 그가 추구해온 것이 차원이 높고 고상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어, 그런데 이제껏 이상적인 대상자를 마나지 못하고 있던 차에 나를 보자 맹렬히 타오르게 되었던 것인지도 몰라, 어제 밤일도 그래, 2만원 거금을 내어놓고 감사해요 한마디로 에 때우려 했으니 그가 억울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염치없는 쪽이 어느 쪽인가? …그의 사랑을 열렬히 받아주고 기분만 돋구어준다면 그는 밸이라도 털어내 줄 남자다! 틀림없이… 5만원! 5만원만 있었으면!) 현미는 금전의 유혹에 악착같이 매달리기 시작했고 그녀의 사고와 감정은 인간 본연의 생리 속에 치열하게 녹아 흐르고 있었다. 현미는 인차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섰다. 그가 찾아 간 곳은 신문사가 아니고 전보청사였다. 그녀는 자동전화박스 속에 들어가서 이군철의 명함 장에 찍혀있는 전화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이군철경리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누구신지요?” “미금입니다. 박미금…” “누구? …방금 누구라 했지요?” “군철동무, 저예요, 미금이래요! 17년 전에 갈라졌던…” “미금이라니? 미금이가 살아있단 말이요?” “그래요, 전 죽지 않았어요.” “아니, 가만, …지금 어디 있소? 어디서 전활 거우?” “지금은 안돼요. 요긴히 할 말씀 있으니 저녁 여덟시 정각에 ‘목란빌딩’앞에 나와 주세요.” 현미는 역시 무례하게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심술궂은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잔인하게 떠올랐다가 지워졌다. 그녀는 장난처럼 연극을 놀았고 이군철이가 속힌 건 말건 상관없었다. 그것은 이미 남자에 대한 한 음녀의 노골적인 꼬드김이었고 아양이었으며 허리를 비꼬아대는 고혹적인 교태였다. 현미는 7시 40분쯤 해서 “목란빌딩”에 나갔다. 그러나 밝은 불빛을 피해서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연극도 연극이겠지만 뭇 시선 앞에 나서기에는 얼굴 화장이 너무 진했던 것이다. (오늘 밤 넋을 잃게 해줄 거야!) 현미는 정사장면을 머릿속에 펼치면서 자기의 내부가 활활 불타오름을 느끼었다. (그에겐 남편한테 없는 있어, 억세고 강한…) 현미는 이제 이군철이와 떨어질 수가 없음을 깨닫고 있었다. 이군철의 승용차는 5분전 8시에 도착을 했다. 이군철은 차에서 내려 두리번거리다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본다. 현미는 곧 “무대”에 등장을 해서 곧추 이군철이한테로 걸어갔다. 현미를 보는 이군철의 두 눈이 이상하게 집요했다. “실망이 크겠죠? 미금이가 아니어서…” 현미는 의미심장하고 얄궂은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아, 감쪽같이 속았군요!” 이군철은 회심의 미소를 빙긋이 그렸는데 미소에서 현미는 그가 전혀 속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된 듯 차에 올랐다. 현미의 몸에서 풍기는 지분냄새와 향수냄새가 차안에 가득 찼다. “어딜 갈까요?” “표독스레 굳어서 노여웠죠? 오늘 밤… 기분 돌려드리죠.” 오히려 어리뻥뻥해 있던 이군철이한테 현미는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졌다. 이군철은 정욕이 뚝뚝 묻어나는 시선으로 현미의 성감적인 나체를 재확인해보면서 슬그머니 그녀의 손을 잡았다. 현미는 남자 쪽에 몸에 실으며 두 눈을 스스로 감았다. 그리고는 빨간 립스틱 칠을 한 달콤한 입술을 남자한테 맡기였다. 이군철은 타는 갈증을 단번에 끄려는 듯 현미의 입술을 빨아 물고 오래도록 짓이기고 있었고 현미도 한사코 매달려서 신음소리를 질러내며 남자의 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미구하여 차는 밤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현미는 흥분에 불타고 있었고 행복감에 젖어있었다. 그녀는 금방 귀부인이 된 듯 하는 기분이었고 이 호화로운 승용차도 제 차로 된 듯 하는 느낌이었다. 현미의 시야에 농우선생의 모습이 날카롭게 들어왔던 것은 “동방극장” 앞을 지날 때였다. 무슨 일에서인지 역시 구겨진 검정바지에 희뿌연 잠바차림의 농우선생이 밤거리를 골기 없이 걷고 있었다. 현미는 외면을 했다가 눈을 감았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처럼 기분이 흐려졌다. (아!…) 현미가 스스로 놀랐던 것은 농우선생과의 거리감이었다. 그녀는 요 며칠사이 자기가 그처럼 숭모하던 불우작가로부터 1만 8천리나 멀어졌음을 실감했다. 그처럼 눈부시던 농우선생의 작가적후광은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서 희미하게 지워져가고 있었으며 이 시각 현미의 눈에 비쳐진 농우선생의 이미지는 초라했고 가련한 밑바닥인생이었고 누구도 업신여길 수 있고 누구나 짓밟을 수 있는 보잘 것 없는 따라지목숨이었다. 1993년 7월 [도라지 1993년 5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