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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인생의 끝이 좋을 자신 있습니까?
성경본문 : 사무엘 상 31장1절-6절
설 교 자 : 박 한 서 목사 <2016년11월13일 주일오전>
사랑하는 행복 가족 여러분 !
요즘 날씨가 추워지고 황사 현상이 심합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 조심 하십시오.
오래 전에 불교의 <현각> 스님이라는 사람이
<한국 신학> 대학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지은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 까지" 라는 책이 있습니다.
관심은 어떻게 <하버드>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다가 스님이 되었을까? 라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는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다 <숭산> 스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를 알게 된 것입니다.
책 내용을 보면서 안타까운 것은 고민을 많이 한 사람인데
생명이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안에 <부처님>, <예수님>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 눈으로 보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는 초월적인 주님!
자신이 피조 물 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끝이 다른 길로 가게 된 것입니다.
저는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 믿는 것은 쉬우나 끝으로 갈수록 더욱 어렵구나!"
"끝을 잘해야 하구나!" "나이 먹을수록 정말 조심해야겠고
더욱 자기 개발과 자기 개혁이 필요하구나!"
그런 마음이 자꾸 들게 됩니다.
사실 영적인 지혜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끝을 보는 것입니다.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는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가서 심판을 받는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고 받아야 한다.
그런 논리가 기독교 논리 아닙니까?
예전에 왜 성경에는
족보 이야기가 많을까? 궁금해 하였습니다.
제 주변에서 누가 누구를 낳고 이런 말로
은혜 받았다는 소리를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성경의 의미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사람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태어나면 죽는다. 너무나 당연한 진리!
이 진리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태어나고 죽는 이야기가 쓰여 있습니다.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바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끝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끝이 나쁜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신약>에서는 <가룻> 유다 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끝이 나빠
자살로 삶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제일 끝이 나쁜 사람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울> 왕입니다.
최초의 왕! 그러나 그의 죽음은 처참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전부 죽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끝이 좋을까요?
<사울>의 죽음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첫째),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자.
<사울>이 인생을 왜 이렇게 실패했습니까?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왜 <사울>이 <하나님> 눈 밖에 나기 시작합니까?
아마 잘 아실 것입니다.
<사무엘 상>13장 말씀에 보면
<사울>이 전쟁을 하게 됩니다.
제사장 <사무엘>을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직접 제사를 진행하게 됩니다.
이 일로 <사울>의 끝이 나빠지게 됩니다.
왜 자기가 직접 제사를 드린 지 아십니까?
성경을 보면
"백성이 흩어질 까봐
빨리 자기가 제사를 드렸다" 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보았더니 막 집에 갈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무엘> 제사장을 기다리다
자기가 제사를 지낸 겁니다.
기억나십니까?
<사울> 왕이 왜 사위인 <다윗>을 미워했습니까?
간단합니다. 처음에는 관계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이상한 노래가 들립니다.
요사이로 말하자면 고무 줄 놀이 일겁니다.
우리가 어릴 때 고무줄 놀이하면서 불렀던 노래
"무찌르자 공산당 몇 천만이냐?" 뭐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당시에 시대상을 반영하는 아이들의 노래가 있었습니다.
그 노래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사울>은 천천 <다윗>은 만만" 이것 때문에
<다윗>을 죽이려고 일생을 보내게 됩니다.
왜요? 사람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사가 교인들이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고 기뻐하면 어떻게 목회를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확실하게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 마음입니다.
정말 어렵게 교회 나오시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저는 어떻게 맛있는 밥을 지어줄까 하는
마음만 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울> 왕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세상을 흔들었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을 보십시오.
오늘 본문 <사무엘 상>31장4절 말씀을 보세요.
4절 “그가 무기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자기가 무슨 <이 순신> 장군 입니까?
그는 이제 죽게 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사람들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렇게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기쁨인지 관심이 없습니다.
매일 자기 문제에 빠져 살아가다가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히브리서> 9장27절 말씀입니다.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입니다.
저는 정말 사람을 의식하기 싫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해도 바쁘잖아요.
어떻게 해야 내가 <하나님>의 기쁨이 될까?
이 부분만 신경을 써도 바쁘다 말입니다.
어떤 분은 죽기 전에 회개하면 됩니다.
그리고 천국에 가면 되지요.
이렇게 말하는 분이 계시지요. 그것은 교만입니다.
내가 어떻게 나의 죽음을 알 수 있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보혈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이게 쉽게 될 수 있습니까?
놀라운 것은 부부 상담을 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사랑해 용서해 줘”
이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남편이 절대 안 합니다.
아니오. 못합니다. 이런 말을 해 봤어야죠.
정말 어렵습니다. 하도 못해서
목사가 중간에 서서 사랑한다고
이야기를 해보세요, 다그칩니다. 그러면
“응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목사님이 사랑 하라고 해서”우물쭈물합니다.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끝에 가서
멋대로 살다간 사람은 멋대로 죽게 됩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평상시에 기도하지 않은 사람이
죽음을 앞에 두고 기도 할까요?
아니오! 할 수 없습니다.
늘 기도하던 분이 죽음을 앞에 두고
기도한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자기가 했던 방식으로 합니다.
“갑자기 <하나님> 사랑합니다.”되지 않습니다!
찬송하면서 죽고 싶습니까?
그러면 지금 찬송 하십시오,
말씀을 듣고 죽겠다면
지금부터 말씀을 듣고 살아야 합니다.
사람을 의식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영적인 적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시길 바랍니다.
둘째로)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울> 왕의 죽음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합니까?
<사울> 왕의 주위에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가룟 유다>도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배반했습니다.
은혜 받을 자리에서
은혜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매번
기적을 일으키시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거기에 있었지만
병 고침을 받은 자는 너다.
그 이유는 네 믿음 때문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습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에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듣는 자가 믿음으로 화합하지
아니하였기 때문 입니다.
결국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여기에 <사울>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망하게 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같은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 차이는 믿음을 가지고
말씀을 듣게 되는가?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을 나타나려면
두 가지 조건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는 설교자가 책임 입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 입니다.
또 하나는 말씀을 듣는 자입니다.
듣는 자의 책임도 큽니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강단의 소리를
자꾸 사람의 소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사람의 소리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소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신약에서 가장 성공한 교회가 어디입니까?
예!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그 교회가 부흥이 되었던 이유는
말씀을 사람의 소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소리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도 죽은 사람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죽을병에서 살아나는 사람들이
우리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물론 제가 잘 준비하고
영적인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또 하나는 여러분이 믿음으로
비빔밥을 잘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마귀라면 어디를 공격하면 되겠습니까?
강단입니다. 강단을 죽이는 겁니다.
사람의 소리다. <하나님>의 소리가 아니다.
그렇게 우리를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사람들 에게 갑니다.
사람들끼리 비판하게 하고 싸우게 합니다.
<사울>이 되게 하는 겁니다.
우리는 비빔밥을 잘 만들어야 합니다.
믿음의 비빔밥을 잘 만드시길 바랍니다.
오래 전에 임종을 앞두신
어느 할머니께 세례를 주게 되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불교에 심취해 계시다가 개종을 하시고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된 것입니다.
처음 그 분을 뵈었을 때 죽음을 앞에 두고
그 분은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아멘> 하는 거예요.
그분의 눈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눈물로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나중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죽었으나 산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에 대한 애착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 들일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셋째). 고난이 오면 기도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본문 <사무엘 상> 31장1절 말씀을 보세요
1절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어떤 모습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반면 <다윗>도 비슷한 상황이
본문 <사무엘 상> 30장1절 말씀에서 나타납니다.
1절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네겝>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사무엘 상> 30장 과 31장을 비교됩니다.
<사무엘 상> 30장 은 <다윗>의 이야기이고
<사무엘 상> 31장은 <사울> 이야기입니다.
사실 <다윗>이 훨씬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는 <시글락>에서 가족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오합지졸 600명 뿐 이었습니다.
그래서 힘들어진 부하들이
<다윗>을 돌로 쳐 죽이자고 하극상을 벌립니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어떻게 이겨 나갑니까?
<사무엘 상> 30장6절 말씀을 읽습니다.
6절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정말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했습니까?
다급 하였다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힘을 얻게 됩니까?
<하나님>에게 용기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다윗>도 슬펐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충성스런 부하들이
<다윗>에게 돌을 들어 치려합니다.
험한 광경입니다.
자기 처자식을 잃었다는 생각에
흥분해서 이성을 잃은 것입니다.
이들은 <다윗>과 생사고락을 같이한 동지들입니다.
<사무엘 상>22장2절 말씀에 보면
2절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다윗>이 받은 정신적인 충격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 충격도 충격이지만 무슨 재주로 돌을 든 자들을
다스릴 수 있습니까?
<다윗>도 인간인지라
크게 당황하고 답답하고 곤란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고 합니다.
직역하면 <다윗>은 그의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 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기도를 했는지, 묵상을 했는지 무엇인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얻었습니다.
<다윗>은 궁지에 몰렸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습니다.
다른 것으로 도움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믿음도 다 같은 믿음이 아닙니다.
능력의 믿음이 있습니다.
남들은 이런 상황이면
있는 믿음도 버릴 지경입니다.
그런데 능력의 믿음은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빛을 발합니다.
참 믿음은 어려울수록 더 강해집니다. 믿습니까?
가짜 믿음은 사람이 여럿이고,
환경이 좋으면 믿는 것 같으나
사람이 떠나고 환경이 달라지면
곤두박질합니다. 가짜 믿음입니다.
참 믿음은 어려울수록 더 강해집니다. 믿습니까?
<바울>과 <실라>도
<여호와>가 주시는 힘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16장24절-25절 말씀에 보면
24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25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체험했습니다.
<여호수아>도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얻은 사람입니다.
<여호수아>1장6절-8절 말씀에
6절 강 하고 담대 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7절 오직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절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말씀을 읽고 묵상하십시오.
기도하고 찬양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는 방법입니다.
<사울>도 어려움에 빠졌고
<다윗>도 어려움이 빠졌습니다.
동일한 어려움입니다. 어찌 보면
<다윗>이 더 큰 어려움이에요.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에게 의지하여 역경을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역경 속에 파묻혀 죽었다는 것이에요.
아마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너무나도 어려운 고난이 있을 것입니다.
고난을 이기기 쉽지 않습니다.
만만하지 않습니다. 세월이 약이 아닙니다.
잘못하면 <사울>처럼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살길은 하나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내려놓은 것입니다.
<다윗>이 다급하였을 때 힘들었을 때
눌렸을 때 한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한 것입니다. 머리 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다윗>의 시편 내용이 무엇입니까?
"힘들었습니다. <하나님>!
내가 고난의 수렁 속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징징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들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시편>116편3절-6절을 말씀을 보면
3절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4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하였도다.
5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6절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다윗>의 강점은 무엇입니까?
고난이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이 자기를 눌렀습니다,
왜 나는 요 모양 요 꼴일까?
하면서 힘들어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한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였습니다. 정말 여러분 위기입니까?
한국 교회가 위기입니까?
교회가 썩어 있습니까? 하는 일이 안됩니까?
자녀들 때문에 힘듭니까? 물질 때문에 힘들어요? 그렇치요?
그러나 마귀가 물으면 싸워야지요.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고난을 당하고 있으면 역전시키십시오,
어떻게요? 기도밖에 없습니다.
왜 여러분을 회사에 가정에
사업장에 심어 놓은 줄 아십니까?
기도하기 위함입니다.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 없는 한 민족보다
강하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고대 <이집트>에
사치와 향락에 빠진 한 왕비가 있었습니다.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로 금으로 만든 장신구였습니다.
그녀는 길을 지나가다가 금으로 만든 것만 보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미였습니다.
바로 그때 이웃 나라와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워낙에 단단하게 성문을 잠가 놓은 터라 이웃 나라에서는
도무지 철통같은 수비된 이 도성을 공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적국의 왕은 직접적인 공격은 포기하고,
우회할 방법을 궁리하던 중에 성안에 살고 있는 왕비가
황금 장신구 애호가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당장 왕은 부하를 불러 그녀에게
금으로 만든 각종 장신구를 보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이웃 나라에서 보낸
각종 장신구를 받아본 왕비는
너무나도 그것을 사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자 이때다 하고 신하가 말을 건넸습니다.
어떻습니까?
왕비님! 매우 훌륭하지 않습니까?
왕비님께서 이것을 원하신다면 그냥 드리겠습니다.
단, 오늘밤 성문의 문고리만 벗겨주신다면 말입니다."
황금에 눈이 먼 왕비는 성문을 열어줄 때에
금 장신구들을 받기로 합의하고는
엄청난 약속을 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자정쯤 되어 왕비는 침실에서
몰래 빠져 나와 성문의 문고리를 벗겨 주었습니다.
그러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군사들이
문을 박차고 물밀 듯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까?
왕비는 순식간에 밀려오는 군사들에게 짓밟혀 죽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보다 중요한 일을 위해
자기 욕심을 억제하지 못하는 자의
결말은 비참하기 마련입니다.
<사울> 역시 그의 화려한 출발과는 대조적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고 있는데,
그 이유 또한 보다 중요한 일을 망각한 채,
육신의 소욕을 따르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최후의 순간이 있기 마련입니다.
죽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있기 마련입니다.
풍요와 환락 속에서 일생을 보냈던 사람들일 수록
죽음을 피해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 보았으나
별 소용이 없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죽음이란 참으로 공평하게
누구에게나 꼭 한번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준비해야 하는 것은
죽음을 피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 있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닙니까?
어느 날, 새벽부터 배추밭에 나간
<우 장춘> 박사가 한낮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연구실의 제자는 연로한 선생님이 걱정되어
배추밭으로 갔습니다.
그는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숨쉬기가 힘든지
한번 씩 심호흡을 해가면서 배추포기 하나하나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것을 노트에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놀란 제자가 달려가
선생님, 이 땀 좀 보십시오.
이건 제가 할 테니 들어가 쉬십시오. 하며
노트와 연필을 받아 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 장춘> 박사는
괜찮네. 이것만 마저 하고 갈 테니 먼저 들어가게. 하며
다시 배추를 살폈습니다. 결국 선생님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옆에 서 있는 제자에게 박사는 한참 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 내 얘기 하나 들어 볼라나.
내가 죽은 뒤 <하나님>이
너는 세상에 태어나서 무엇을 했느냐? 하고 물으면
나는 배추 잎사귀 하나
사람들 먹기 좋게 만들어 놓고 왔습니다.'
하고 대답할 생각이네.
그렇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하고
그는 또 배추를 들여다보았습니다.
날마다 우리가 식탁에서 만나는 싱싱한 채소나 감자는
모두 땀 흘려 일한 <우 장춘> 박사의 손끝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고 <우 장춘> 박사는 일신의 영욕을 멀리한 채로
조국의 농업 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조국의 농업 근대화라는 자신의 역사적 사명과 과제를
분명히 인식하고 조국을 너무도 사랑했기에 <일본>의
파격적인 예우를 거절하고 강제 추방당하면서 귀국했습니다.
사랑하는 행복 가족 여러분!
<하나님>이 만약 너는 무엇을 하다 왔느냐고
물으신다면 무엇이라 대답할 것입니까?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