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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다의 축복을 받으라(막7:31-37)-2013.1.13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들이 여러 가지로 많이 있지만, 크게 세 가지로 압축해 볼 수 있습니다. 선포와 가르침과 치유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시며, 개인 한 영혼 한 영혼을 치유하시는 일입니다. 그 가운데 치유사역은 절반이상을 넘을 정도로 비중이 크게 나타납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사역의 대부분이 치유사역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받아들이는 성향에 따라서 무리한 주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도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 사역중에 한가지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에 이르셨을 때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주님께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예수님이 안수하여 주시면 귀먹고 어눌한 자가 고침받을 줄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귀먹고 어눌한 자가 자기 스스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주님께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언제부터 귀가 먹고 어눌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주변 사람들은 그 사람을 무척 불쌍히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 근처에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우선 당장 농아인인 이 사람부터 치유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데리고 나온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이 사람이 주님의 긍휼하심을 받기에 가장 시급한 사람인 것처럼 보였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이 사람을 데려온 모든 사람들 전체가 주님의 긍휼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육신의 장애를 가진 이 사람이 불쌍해 보였겠지만, 영적인 눈으로 보면 이런 사실을 깨달아야 할 사람들은 정작 당사자들입니다.
사람들은 육안으로 보이는 문제를 가진 사람만 주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려움이 생기면 교회나 다녀보라고 주문합니다. 하지만 자신들은 전혀 주님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이 땅에 주님을 필요치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농아인인 이 사람만 불쌍히 여기고 주님앞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마치 그들은 주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자들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이 주님앞으로 나올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나옵니다. 주님은 당신께로 나온 모든 사람들의 고민을 해결해 주시고 문제를 풀어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귀먹고 어눌한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에바다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에바다는 무슨 말입니까? 에바다는 아람어로서 열리라는 뜻입니다. 닫힌 것이 열리고 막힌 것이 뚫리며 꼬인 것이 풀리는 것입니다. 닫힌 것이 열리는 것이 치유입니다. 막힌 것이 뚫리는 것이 치유입니다. 꼬인 것이 풀리는 것이 치유입니다. 치유는 회복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에바다는 열리는 복이요, 치유의 복이며, 회복하는 복입니다. 때문에 우리 모두 다 에바다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금년에 우리 교회위에 에바다의 축복이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성도들의 가정에 에바다의 축복이 임하기를 간구합니다. 모든 자들 위에 에바다의 축복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에바다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1) 가장 먼저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영육간에 병든자입니다. 단순히 신체적인 장애나 질병을 가진 자만 병든자가 아닙니다. 어찌보면 육신의 환자들보다는 영적인 환자들이 훨씬 더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심각한 장애나 질병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문제는 육신적인 장애보다는 영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육신적인 장애나 질병을 가진 사람들은 비록 치유가 안될지라도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환자들은 고침받기 전에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문제를 문제로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질병 못지않게 영적 질병은 시급하게 치유 받아야 하는 질병입니다. 하지만 육신적인 질병은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부끄럽고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영적인 질병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식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암이 발병하면 낙심하고 두려워하며 난리를 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 자살문제에 대해서는 위기의식을 크게 느끼지를 못합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치유할 대책도 없고 의지마저 없습니다. 우리나라 자살율이 세계 최고라고 하잖아요. 그렇다면 자살은 육신적인 질병일까요? 정신적인 질병일까요? 정신적인 질병입니다. 모든 것이 심리적인 이유로부터 시작된 정신적인 질병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귀먹고 어눌한 자는 육신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입니다. 쉬운말로 벙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각장애를 가지면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정상적인 말을 하지 못합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들어야 입을 통해서 나가는 것이거든요. 죄송하지만 벙어리라는 장애는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귀가 먹어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입니다. 거기다가 자기 의사 표현마저 할 수 없으니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우리는 단순하게 그런 사람들을 불쌍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육신적인 장애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육신적인 벙어리도 불쌍하겠지만 영적인 벙어리가 더욱 불쌍합니다. 미안하지만 교회안에는 영적 벙어리들이 정말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도 들을 수 없는 성도들이 영적 벙어리입니다. 귀는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고, 들을 수 없는 귀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말씀하기를"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진짜 귀가 없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귀는 붙어 있는데 들을 수 없는 귀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귀머거리 독사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때문에 육신적인 장애만 장애라고 생각지 마시고, 영적장애를 더욱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육신의 귀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만 불쌍한 생각을 갖지 마시고 영적 귀머거리 된 것으로 탄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도대체 듣지를 못하는 영적인 귀머거리들은 반드시 에바다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에바다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가장 먼저 주님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주님께로 나오지 아니하면 에바다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앞으로 나와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만남도 인격적인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본문의 귀먹고 어눌한 사람은 자기 스스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어찌됐든지 주님앞으로 나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나와도 좋습니다. 나와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은 주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분 앞으로 나와서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그분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면 나온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주님앞에 나와서 그분을 만나는 경험을 가져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안수하여 주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주님의 필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2) 그리고 그분의 만지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벙어리 된 사람을 주님께로 데려와 안수하여 주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들은 최소한 이 사람에게 주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주님께 안수를 청원한 것입니다. 이 벙어리 된 사람이 주님의 안수를 받으면 좋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기대감으로 말입니다. 물론 여기까지 온 것은 이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는 선행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께로 나올 때는 주변사람들의 도움으로 나왔을지라도 이제는 이 사람이 직접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만지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믿음은 전적으로 주님과 나와의 만남을 통해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주변 사람들의 믿음이 좋아도 믿음의 역사는 당사자인 내가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만지심을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주님과의 개인적인 접촉이 없으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했을지라도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난 경험이 없으면 주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그분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반드시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에 그분의 만지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주님의 만지심이 있어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적이 일어나고 치유도 일어납니다.
반드시 주님을 만나서 그분의 만지심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만지심은 그분의 터치하심입니다. 우리 시대에 그분의 터치하심은 성령님의 터치하심을 말합니다. 성령님께서 나를 만져주셔야 그리스도의 사람이 됩니다. 성령님이 나를 만져주셔야만 내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령님의 만지심은 성령이 개인의 심령속에 찾아오시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님이 내 영혼을 만지시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영접하게 됩니다. 물론 내 믿음이 기독교 전통에 의한 어떤 절차나 과정이 없었을지라도 상관없습니다. 혹은 내가 성경을 구체적으로 읽어본 적이나 공부한 적이 없었을지라도. 혹은 내가 제대로 된 종교의식에 참여한 적이 없었을지라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성령이 내안에 거하시면 비록 내가 그분의 모든 것을 전혀 알 수 없을지라도 의심없이 믿게 됩니다. 성령이 내안에 거하시면 기쁨 과 즐거움과 행복과 위로하심을 경험할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세상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경험할 수 없었던 기쁨이요, 즐거움이며 행복과 평안함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만져주심입니다.
때로는 주님이 우리를 강하게 만지실 수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그분을 의지하는 것만큼 아주 다양하게 만져주십니다. 사람에 따라 아주 다양하게 말입니다. 신앙의 깊이에 따라 다양하게 말입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만지심이 있어야 역사는 일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사람에게도 주님을 만나는 개인적인 경험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만지심이 필요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안수부탁 이전에 주님은 이 사람의 갈급함을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부탁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주변 사람들의 부탁은 중보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람과의 개인적인 만남이 필요했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과의 만남을 갖기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셨습니다(33절). 물론 그 자리에서 그들의 부탁을 들으시고, 그 사람의 믿음을 확인하여 치유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마치 동물원에 구경 온 사람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으로부터 그 사람을 격리한 후에 인격적인 고백을 듣기 원하셨는지는 모릅니다. 오직 그 상황은 우리 주님만 아실 겁니다. 정 궁금하시면 나중에 천국가서 이 본문으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나친 추측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주님의 치유사역을 상식선에서 이해해보면 그 사람에게 인격적 만남을 갖기 원하셨던 것은 분명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만지심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으시고 침을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에바다라고 외치셨습니다. 주님의 독특한 치유방식이었습니다. 물론 말씀으로 명령하사 고칠 수도 있지만, 굳이 이런 절차를 보이시며 치유하신 의도는 있을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우리가 이것도 알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하지만 주님은 그 사람을 주님의 방식으로 그렇게 치유하신 것입니다.
(3) 그러면 에바다의 축복이 임합니다
주님은 그 사람을 치유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장애를 가지고 불행한 삶을 살았는지 모릅니다. 다만 이제 그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완전한 치유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치유는 온전하시고 완전하십니다. 그 사람에게 주님께서 명령하신 에바다의 축복이 임한 것입니다. 에바다의 축복은 열리는 축복입니다. 열리는 축복은 치유의 축복입니다. 치유의 축복은 회복의 축복입니다.
그 사람의 귀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맺혀 있었던 혀가 풀렸습니다. 그러자 그의 말이 온전해졌습니다. 지금까지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전혀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사람은 언어를 통해서 자기 의사를 한번도 제대로 전달하며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이 그의 말을 분명히 알아듣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바로 주님의 치유역사입니다. 이와같이 우리 주님으로부터 만지심이 있으면 치유가 일어납니다. 주님의 치유는 전인적인 치유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치유를 받으면 전인적인 회복이 됩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주안에서 치유받기를 원하시고,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전인적인 치유와 전인적인 회복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영과 육이 회복되기를 축복 원합니다.
우리 모두 금년에 에바다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도 에바다의 축복을 받으며, 우리의 가정에 에바다의 축복이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 막혀있던 모든 것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막힌 문제가 시원하게 뚫어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인 모든 문제들이 주안에서 아주 깔끔하게 풀어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가장 먼저 내가 주님안에서 에바다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가 삽니다. 한 사람의 에바다 축복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37절). 에바다의 기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존재와 능력에 대해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전파되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비록 한 사람이 받은 에바다의 축복이었지만 주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그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수많은 영혼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기회가 되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이 비록 정상적인 믿음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들의 입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역사가 칭찬받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사료되는 마태복음15장31절은 말씀하기를 무리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사람들의 입을 통해 마치 장차 오실 메시아의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번 37절 말씀을 주의깊게 관찰해 보십시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이들이 불렀던 메시아의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마치 이들의 고백이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아의 노래와 같지 않습니까? 이사야서35장5-6절 말씀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우리 모두 금년에 에바다의 축복을 받아 너와 나 우리 모두가 행복하고, 교회는 부흥하며, 가정은 주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충만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하고 축원합니다. 할렐루야!!!(20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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