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ichael Jackson - Rock With You
Don’t Stop 'til You Get Enough

2005년 6월 13일. 12년간의 처절했던 사투가 마침내 끝나는 순간이었다. 마이클 잭슨을 기소하게 만든 어린이 성추행 사건에 관해 배심원단(여성 8명, 남성 4명)이 증거 불확실을 들어 그와 관련된 10개 혐의를 취하하는 순간, 법정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의 팬 300여 명은 눈물을 쏟아내며 다 함께 만세삼창을 외쳤다. 전 세계 모든 언론매체가 발 빠르게 그의 무죄 판결 소식을 전파했고 팝의 황제는 팬들을 향해 감사 키스를 보낸 뒤, 변호인단을 통해 드디어 진실이 밝혀졌다는 소감 한마디를 전했다. 그러나 미소 한번 짓지 않고 법정을 떠났다. 벅찬 감동도 잠시였을 뿐, 십여년간 계속되어온 마이클 잭슨의 고독한 싸움은 쉽사리 지울 수 없을 상처를 그에게 남기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의 히트곡을 망라한 또 다른 베스트 앨범 [The Essemtial Michael Jackson]의 발매에 맞춰 그의 영욕의 세월을 되짚어본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주지하다시피 마이클 잭슨은 팝의 황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팝의 황제''였''다. 십 수년 간 벌인 법정 투쟁은 그의 위상을 바닥으로 끌어내렸고 더 이상 음악적으로 마이클의 히트곡은 배출되지 않고 있다. 그 기간 동안 발표했던 신보 역시 미진한 반응 속에 평범한 성과를 추수, 점점 더 그가 팝의 주변부로 밀려나는 것 아니냐는 관측에 힘을 실어주었다. 여러모로 우리가 기억하는 팝의 황제는 어느덧 50줄이 다 되어가는 물리적인 나이만큼이나 세월의 영욕 속에 화석화되어가고 있는 듯 보였다.
대중 음악인이 음악 외의 것으로 씨름할 일이 생겼을 때, 이러한 상황은 그 어떤 것보다 커다란 짐이 되어 뮤지션을 압박할 수 밖에 없다. 음악적 고뇌를 해볼 짬도 없이 계속되었던 마이클의 법정 투쟁은 아이디어 고갈이라는 심각한 병폐를 낳았고 결국에는 근 몇 년 간 단 한 곡의 히트송도 내놓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을 연출했다. 자연스레 이름 뿐인 팝의 황제라는 야유가 뒤를 이었고 마이클은 팝의 우상으로서 그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더 이상 발산할 수가 없었다. 오직 그의 진골 팬들만이 변치 않는 헌사를 바쳤을 뿐, 대부분의 팝 마니아들은 그의 뒤를 잇는 신세대 스타들에게 러브 콜을 바치며 점점 더 그를 팝의 중립 코너로 몰아넣었다.
팝의 전설이 개막되다.
마이클 잭슨 음악 여정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63년 4명의 형들과 함께 결성했던 패밀리 그룹 잭슨 파이브로 시작되었다. 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 빼어난 가창력과 귀여운 춤 실력 덕분에 리드 보컬을 맡았던 그는 언제나 세간의 관심대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했다. 최초, 지방을 중심으로 명성을 쌓아가던 잭슨 파이브와 마이클 잭슨은 1969년 [모타운 레코드]와 계약에 골인해, 본격적으로 팝 음악계에 명함을 내밀었다.
첫 넘버 원 싱글 ''I Want You Back''에 이어 ''ABC'', ''The Love You Save'', ''I''ll Be There'' 등이 차트에서 연쇄적으로 폭발하면서 잭슨 파이브는 일약 스타 보컬 그룹으로 명성의 깃발을 휘날렸다. 이후 2년 간 그룹 활동에 전념하던 마이클 잭슨은 1971년 12월 [탐라-모타운 레코드]와 솔로 계약을 체결, 홀로서기를 위한 준비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1971년 데뷔곡 ''Got To Be There''를 발표해 싱글 차트 4위에 랭크시킨 후, ''Rockin'' Robin'', ''Ain''t No Sunshine'', ''Ben'', ''I Wanna Be Where You Are'' 등을 잇따라 히트시키며 혼자서도 밴드 때 못 지 않은 인기의 세례를 마음껏 받았다.
변성기가 지나고 성인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시점이었던 1979년, 마이클은 드디어 첫 정규 앨범 [Off The Wall]을 발표하며 팝의 황제로서 음악 인생의 제 1막을 열어제쳤다. 1977년 흑인판 [오즈의 마법사]였던 뮤지컬 영화 [더 위즈] 사운드트랙을 통해 만났던 ''소리의 마술사'' 퀸시 존스와 함께 완성한 음반은 훗날미국사회를 강타할 ''잭슨 신드롬''에 대한 일종의 예고편이었다. 이후 이 둘은 향후 10년간 파트너십을 유지하면서 팝 계 최고의 골든 콤비로서 절대무적의 위치를 마음껏 누렸다. 잭슨이 보컬과 송라이팅을 맡고 존스가 악기 소리를 뽑아내는 것으로 가닥이 잡힌 이 기막힌 콤비 플레이는 훌륭한 레코딩 기술을 바탕으로 완벽한 하모니를 양산, 팝 예술이 그려낼 수 있는 최대치의 감흥을 선사해주었다.
활기 넘치는 리듬의 펑크(funk)와 디스코, 소울, 그리고 록과 팝, 발라드가 퓨전된 음반은 마이클 잭슨이 작곡한 2곡의 업 템포 댄스넘버 ''Don''t Stop Till You Get Enough''(1위, [그래미] 최우수 R&B 보컬상)와 ''Working Day And Night'', 로드 템퍼튼 작곡의 깔끔한 팝 넘버 ''Rock With You''(1위),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가 곡을 써 준 ''Girlfriend'' 등의 히트 퍼레이드를 통해 시시각각 판매 수치를 경신하는 경이로운 성과를 창출했다. 이렇듯, 마이클은 당시 디스코 시대를 관통한 고감도 팝의 진수를 시범하며 팝 역사상 가장 멋진 데뷔식을 성공리에 치러냈다.
처녀작 [Off The Wall]이 마이클 잭슨의 미래상을 제시해 준 앨범이라면 1982년 12월에 발표된 소포모어 음반 [Thriller]는 ''팝의 황제''라는 마이클 잭슨의 원대한 꿈을 실현시킨 불후의 명작이었다. 역시나 퀸시 존스와 마이클 잭슨의 공동 프로듀스작인 작품은 무려 37주간이나 앨범 차트 정상을 지켰으며 현재까지 미국에서만 거의 3천만 장이라는 희대의 판매고를 쾌척했다. 또한 무려 7곡이 싱글 발매되어 모두 차트 10위 내에 올랐고 그 중 2곡이 정상에 방점을 찍었다. 이에 힘입어 마이클 잭슨은 1983년 26회 [그래미] 시상식에서 역대 최다인 8개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문워크''라는 독창적인 댄스를 유행시킨 ''Billie Jean''(1위)과 에디 밴 헤일런의 태핑 연주가 압권인 ''Beat It''(1위)을 비롯, 첫 싱글로서 폴 매카트니와의 듀엣 곡이었던 ''The Girl Is Mine''(2위), ''Wanna Be Startin'' Something''(5위), ''Human Nature''(7위), ''P.Y.T.''(10위), 마지막 싱글 ''Thriller''(4위) 등이 그 주인공 트랙들. 백인 최고스타 폴 매카트니와 록 기타의 거장 에디 밴 헤일런을 끌어들였다는 사실은 음악적 크로스오버는 물론이요, 더 많은 수요층에게 다가가려는 그의 음악적 야심을 반영하는 시도로서 강한 청취 흡인력을 발산하기에 충분했다.
마이클 잭슨이 ''팝의 전설''일 수 밖에 없는 이유
어디 이뿐인가. ''Billie Jean''의 뮤직비디오는 MTV가 백인 록 뮤지션의 뮤직 비디오만을 방영한다는 불문율을 깨고 틀었던 역사적인 첫 흑인 뮤직비디오였으며 이를 통해 마이클은 백인이 경청하는 최초의 흑인 뮤지션으로서 음악적으로 뿐만 아니라 인종적으로도 최초의 크로스오버를 현실화시켰다.
바로 이 점, ''흑백의 실질적 통합''을 음악 내외 모두에서 이루어냈다는 업적 덕에 ''팝의 황제''란 호칭은 당연히 그의 몫일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전까지 미국의 백인들은 흑인들의 음악을 듣지 않았다. 1970년대 후반 미국 사회에 번진 디스코 열풍에도 백인들은 관심이 없었지만 백인 밴드인 비지스가 [토요일 밤의 열기]에서 디스코를 시연하고 나서야 비로소 호감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다면 [토요일 밤의 열기] 사운드트랙이 그토록 엄청난 세일즈를 기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로큰롤 역시 엘비스 프레슬리가 백인이었기에 망정이지, 흑인 척 베리만 고군분투했다면 이후의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마이클 잭슨은 바로 이 점에서 위대했다.
이후 영국의 난민구호 자선 프로젝트였던 밴드 에이드의 ''Do They Know It''s Christmas?''의 성공에 자극 받은 마이클 잭슨은 동료 라이오넬 리치와 함께 막강한 스타들을 규합, ''USA 포 아프리카''라는 단체를 조직해 1985년 1월 그 유명한 ''We Are The World''를 발표했다. 허나 그 해 8월에는그간 음악동지였던 폴 매카트니와 심각한 균열이 생겨 그의 인생 처음으로 대인관계에 있어 실패를 맛보기도 했다. 마이클 잭슨이 ''레논 & 매카트니'' 크레디트로 된 250곡이 넘는 비틀즈 곡들의 판권을 4,750만 달러에 사버렸기 때문이다. 이 일로 둘의 협력관계가 깨졌음은 물론 현재까지 관계가 회복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계속해서 갱스터 영화의 대부 마틴 스콜세지가 감독한 17분짜리 뮤직 비디오 ''Bad''가 1987년 2월에 선보였고, 8월에는 분위기가 한층 어두워졌으며 록적인 느낌이 강화된 새 앨범 [Bad]가 발매되었다. 퀸시 존스가 세 번째로 프로듀스를 맡은 음반은 전작의 흥행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천만 장 이상 팔려나가며 예상대로 히트의 존에 연착륙했다. 특히 무려 5곡이 싱글 차트 1위를 기록, 싱글 판매 면에서는 오히려 2곡이 1위에 오른 전작 [Thriller]를 능가했다.
여성 보컬 시다 가렛과 호흡을 맞춘 ''I Just Can''t Stop Loving You''를 시작으로 타이틀곡 ''Bad'', 흥겨운 핑거 스냅이 시종일관 등장하는 ''The Way You Make Me Feel'', 시다 가렛과 글렌 발라드가 공동 작곡한 발라드 넘버 ''Man In The Mirror'', 파워풀한 분위기가 일품인 ''Dirty Diana'' 등이 바로 차트 꼭지점에 등극해 마이클의 ''주라기 시대''를 연장전으로 이끈 주역 싱글들. 그 외에도 ''Smooth Criminal'', ''Leave Me Alone'' 등, 수록곡 전체가 주목받으며 앨범은 전작 못지 않은 호황장세를 누렸다.
이후 자신만의 고유한 음악적 색깔을 찾기 위해 퀸시 존스와 헤어진 마이클 잭슨은 젊은 감각으로 당시 유명세를 타고 있던 테디 라일리를 메인 프로듀서로 초청해 1991년 [Dangerous]를 발표했다. 작곡과 제작에 있어 그가 지닌 천재성을 마음껏 펼쳐 보인 음반이었지만 너바나 같은 그룹들의 얼터너티브 록 태풍에 휘말려 아쉽게도 전작들의 파괴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Remember The Time'', ''Jam'', ''In The Closet'' 등, 테디 라일리가 솜씨를 부린 곡들과 영화 [프리 윌리]의 주제곡으로 쓰였던 ''Will You Be There'' 같은 곡들이 대중들과 평단으로부터 동시에 큰 사랑을 받았다. 또한 ''Black Or White''의 뮤직 비디오에서 보여준 ''모핑'' 같은 신 기법들은 향후 영상 발전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으며 [Bad]에서부터 이어진 환상적인 스튜디오 테크닉들은 다시 한번 레코딩 관계자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마이클 잭슨은 자신이 원하는 악기음색과 음원을 찾을 전까지는 결코 스튜디오 작업을 끝내지 않았고, 코러스만 해도 음색을 바꿔가며 다채롭고 풍부하게 꾸며 일반 제작자들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사운드 퀄리티를 들려주었다. 녹음 기술만으로 볼 때 그는 모든 ''프로듀서와 엔지니어의 드림 랜드''였다.
법정 투쟁의 시작, 마이클의 수난 시대
해가 지지 않는 성공가도를 달리던 마이클 잭슨의 기세가 한풀 꺾인 것은 1993년의 일이다. 그 해 8월 앞서 언급한 어린이 성추행 사건이 터지며 그의 쾌속 항진에 브레이크를 걸고 만 것이다. 이 사건은 그간 깨끗한 이미지를 이어가던 그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한동안 그는 언론의 집중포화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얼마 후 갑작스럽게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한다는 빅 뉴스를 공표했지만 매스컴은 ''여론 무마용''이라며 그에 대한 강도 높은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매체의 공격이 심해짐에 따라 마이클 잭슨의 분노도 정비례해 증가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한 그의 성난 기운은 1995년에 발표한 더블 앨범 [HIStory]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한 장은 히트곡들로, 다른 한 장은 신곡들로 구성된 음반은 문자 그대로 ''역사''로 풀이될 수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이야기''로 해석될 만큼 자신의 얘기들을 많이 실어낸 ''한풀이적 성격''이 짙은 작품이었다. 특히 그를 끈질기게 괴롭혀온매스컴과 어린이 성추행 소송인에 대한 원한과 경멸, 냉소 등이 짙게 깔려있었으며, 그 때문에 음악도 예전과는 달리 한층 거칠어진 사운드를 표방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알 켈리와 지미 잼 & 테리 루이스, 댈라스 오스틴 등이 프로듀서로 참여, 명품 사운드 주조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여동생 재닛 잭슨과 듀엣을 이룬 ''Scream''과 ''They Don''t Care About Us'', ''Money'', ''2 Bad'' 같은 곡들을 통해 쇼 비즈니스와 세상의 폭력에 대한 자신의 분개를 남김 없이 드러냈다. 물론 ''You Are Not Alone'', ''Smile'' 등의 따뜻한 노래들도 있었지만 다른 차가운 곡들 탓에 듣기가 좀 부담스러웠고, 그래서였는지 흥행에서도 (상대적)부진을 면치 못했다. 1997년 내놓았던 리믹스 앨범 [Blood On The Dance Floor: History In The Mix] 역시 사정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마이클이 팝 필드에 기여한 원대한 성취들은 결코 폄하되지 않아 4년이 흐른 2001년 3월 그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영예를 얻었다. 같은 해 9월에는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휘트니 휴스턴, 엔싱크, 브리트니 스피어스, 데스티니스 차일드, 어셔 등, 당대 최고 팝스타들이 출연한 가운데 그의 솔로 30주년 기념 공연을 가졌다.
그리고 10월 30일, 6년 만의 정규 앨범 [Invincible]을 발표하며 다시금 팬들 앞에 선 마이클 잭슨은 재기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지만 예상치를 훨씬 밑도는 참패 속에 비운을 곱씹어야만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시대가 점차 석양이 지듯 하락세에 접어들고 있음을 몸소 체험해야만 했다. 이후 발표된 베스트 앨범 시리즈도 장수 채우기 이상의 의의는 없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법정 투쟁에 매진하는 통에 별다른 ''새로운'' 히트송을 내놓지 못하며 그저 ''황제''라는 과거 유명세만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일 뿐이다.
법정 투쟁의 짤막한 요약
1993.8.17
L.A 경찰국에서 고소 접수 후, 마이클 잭슨에 대한 수사 시작
1993.8.21
L.A 경찰이 마이클 잭슨의 산타 바바라 지역 네버랜드와 센서리 시티의 콘도에 대해 수색 영장을 발부 받아 23상자 분량의 테이프, 비디오 테이프, 사진 등을 압수해감. 혐의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보도됨.
1993.8.31
소년은 마이클 잭슨의 유죄를 주장하며 상당액의 위자료 청구 소송을 LA 고등법원에 제기.
1993.10.28
마이클 잭슨의 변호인이 LA 경찰을 고소함. 그에 따르면 LA 경찰이 마이클과 친했던 소년들에게 마이클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라고 강요했다는 것.
1993.11.8
경찰이 마이클 잭슨이 88년까지 거주했던 LA의 엔시노 저택을 수색함. 혐의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음.
1993.11.16
경찰이 마이클 잭슨에 대한 알몸 수색 영장을 발부받음. 이는 마이클 잭슨의 신체가 그를 고소한 소년이 묘사한 신체와 실제로 일치하는가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중대한 증거 자료로서 요청되었던 것.
1993.12.22
마이클 잭슨이 [CNN], [NBC], [ABC], [CBS]로 생중계된 생방송 연설에서 자신이 LA 경찰과 산타 바바라 경찰에 의해 알몸 수색을 받았다고 밝힘. 이와 함께 인종 차별, 인권 유린 등의 논란이 불거짐.
1994.1.26
4개월에 걸친 협상 끝에 마이클 잭슨과 소년측의 변호사들이 기자 회견을 열어 소년이 제기한 위자료 청구의 민사 소송을 재판 외 합의로 끝냈음을 발표. 마이클 잭슨 측의 변호사는 ''마이클은 결백하다''라고 말했고 소년측 변호사는 계속 수사에 협조할 것이라고 강조.
1994.1.27
마이클 잭슨에 대한 알몸 수색의 결과가 소년의 주장과 일치하지 않았음.
1994.2.9
산타 바바라 대배심이 구성되어 마이클 잭슨을 기소하기 위해 검찰측이 제출한 자료와 증언을 검토하기 시작.(미국은 우리 나라와는 달리 검찰의 기소 독점주의가 아니며 12-23인으로 구성된 대배심이 검찰측이 제시한 자료만을 보고 12인 이상의 찬성으로 기소 여부를 결정하게 되는 시스템을 택하고 있다.)
1994.4.11
검찰과 대배심의 검토가 끝난 마이클 잭슨의 신체 촬영 사진의 처리를 위해 마이클 잭슨측 변호사와 검찰이 법원에 모임. 판사는 사진을 산타 바바라의 지방 은행에 보관하라고 명령.
1994.5.8
검찰측 자료를 모두 검토한 산타 바바라 대배심이 3개월 간의 구성 기간을 끝내고 마이클 잭슨을 기소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림. LA 검찰과 경찰은 수사를 계속하겠다고 밝힘.
1994.9.21
LA 검찰과 산타 바바라 검찰이 기자회견을 열고 마이클 잭슨에 대한 불기소 처분을 발표. 수사는 계속 진행시킬 것이라고 강조.
최근
2003.11
산타 바바라 카운티 경찰, 네버랜드 랜치 압수 수색 체포 영장 발부, 마이클 잭슨 자수
2004.2
경찰, 압수 목록 일반 공개
2004.3
잭슨의 전화 통화 기록 압수
2004.4
카운티 검찰, 잭슨 아동성추행혐의 기소
2004.5
잭슨 무죄주장
2004.8
잭슨ㆍ고소인, 법정대면 네버랜드 랜치에서 찍은 비디오 인정신문에서 공개
2004.12
검찰, 네버랜드 랜치 2차 압수수색 잭슨, DNA샘플 제공
2005.1.2
미 법원, 배심원단 구성(남4, 여8)
2005.3.9
10대 소년 성추행 피해 증언
2005.3.10
잭슨, 법정 출두 거부하다 판사의 강제 구인장 발부경고에 슬리퍼에 잠옷바람으로 출두
2005.4.13
고소인 어머니 증언 착수
2005.4.27
잭슨 전 아내 데보라 증언, 마이클 잭슨 두둔
2005.5.5
피고측 반대변론 착수
2005.5.11
[나홀로 집에]의 주인공 매컬리 컬킨. 잭슨, 성추행 없었다 증언
2005.5.24
[NBC] 토크쇼 진행자 제리 리노 증언
2005.5.25
코미디언 크리스 터커 증언
2005.6.3
로드니 멜빌 판사, 변호인단 변론 종료뒤 사건 배심원회의로 넘김.
2005. 6.13
증거 불충분으로 인한 무죄 판결
2005. 7
독일 이민설 대두. 아버지 조지프의 76세 생일 잔치도 베를린에서 개최.
2005. 7
급격한 체력 저하 증세 보임. 키 183cm에 몸무게가 고작 40kg대인 것으로 판명.
마이클 잭슨에 대한 인권 유린의 예
사실 여부는 판가름나지 않았지만 마이클 잭슨은 변호인단을 통해 수사 과정에서 수많은 인권 유린을 당했다고 주장했던 바 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알몸 수색. 이는 마이클 잭슨의 신체가 그를 고소한 소년이 묘사한 것과 실제로 일치하는가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중대한 증거 자료로서 요청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조사 과정 중 경찰이 그의 성기가 왜 이리 작냐고 비웃는 등, 그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언어 폭력을 가했다고 마이클이 밝히면서 인권 유린에 대한 논란의 불씨가 지펴졌다. 게다가 취조실 안에서도 수갑을 풀지 않고 심문을 했다는 등의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인권 유린을 넘어 흑인에 대한 경찰의 인종적 폭압이 아직도 엄존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난 여론이 거세게 불었던 바 있다.
마이클 잭슨의 인기 하락, 그 근본 원인은?
솔직히 마이클 잭슨의 미래는 그리 밝은 편이 아니다. 차트 성적 등, 모든 데이터의 합산만 따져봐도 마이클 잭슨을 아직까지도 ''팝의 황제''라고 칭하는 건 왠지 모르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선물하는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 실질적 활동이 지난 몇 년 간 전무했던 탓이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지금의 그는 여러모로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물론 이를 법정 투쟁 등의 음악 외부적 한계 상황에 따른 어쩔 수 없는 결과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음악 세계 변천사를 따라가다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한창 팔팔할 젊은 시절에 ''We Are The World''를 기점으로 (두 손을 위로 들고 좌우로 천천히 흔들기에 딱 좋은) ''세대 응원가''에 맛들이면서 마이클은 그가 지닌 본래의 매력, 즉 흑인 특유의 펑키 댄스 넘버들이 발산한 대중적 근인을 상실하고 말았다. ''Will You Be There'', ''You Are Not Alone'', ''Earth Song'' 등의 트랙들이 이를 대표한다.
물론 이 곡들도 그 웅대한 스케일에 힘입어 히트의 궤도에 진입하기는 했다. 그러나 문제는 더 이상 ''Billie Jean'', ''The Way You Make Me Feel, ''Rock With You'' 같은 펑키 히트곡들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의 얼굴이 점차 지병 때문에 백색으로 변해가듯, 음악 역시도 화이트 컬러로 바뀌어가면서 마이클 잭슨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음악적으로 점차 퇴보를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가 하루라도 시급히 해결해야할 당면 과제로 보인다.
그렇다면 마이클의 미래는?
사실 50세를 바라보고 있는 마이클 잭슨에게 20대와 30대 때 들려주었던 힘찬 댄스 곡들을 요구하는 건 무리라고 볼 수도 있다. 예술적 감성의 샘물이라는 것이 본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위세가 약해지는 법이고 보면, 타고난 총기가 넘쳤던 역동적인 펑키 댄스 넘버들은 지금의 마이클에겐 불가능한 임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앞서 지적했듯, 현재의 그의 음악이 지나치게 거대한 스케일을 표방하는 형식미 중심으로 생산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그의 곡이 백인이 만든 것인지 흑인이 만든 것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점이다. 흑인만이 갖고 있는 여러 장점들을 희석화시키면서 백인 청중들은 얻을 수 있었을지 몰라도 리듬을 자유자재로 지배하는 그의 천재적 보컬 능력과 영민한 음악적 재기를 사랑했던 기존 팬들은 상당수 그를 떠나버리고 말았다.
결국 (섣부른 판단일 지 모르지만) 마이클 잭슨이 택해야 할 것은 일종의 음악적 유턴이라고 본다. 그렇다고 한창 피가 솟구치던 나이 때의 그것으로 완전히 돌아가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자신의 천부적 재능들을 굳이 폐기처분할 필요는 없기에 그것과 현재의 음악성을 결합시켜 새로운 음악적 돌파구를 만들어내는 것만이 현재 그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으로 보인다는 얘기다. 굳이 표현하자면 중용의 미덕인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음악 외부적으로 그를 억눌렀던 모든 스트레스들을 훌훌 털어버린 만큼, 마이클의 미래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20년 간 단 5장 밖에 제작하지 않았던 그이기에 앞으로 몇 년 뒤에 신보가 나올 지 짐작할 수는 없지만 마이클 잭슨의 새 작품이 여전히 기다려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팝의 황제여, 다시 한번 그 거대했던 포스를 발휘해 우리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해달라.
52street 2005년 07월호 배순탁
소울부터 디스코까지…`팝 황제` 마이클 잭슨의 50년 음악사
마이클 잭슨은 빼어난 가창력 뿐만 아니라 폭발적인 퍼포먼스와 독특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한 ‘팝의 황제’였다. 13개 넘버원 싱글, 7억5천만장 앨범 판매고, 13차례 그래미상을 수상한 ‘황제’는 50년 음악인생을 뒤로 하고 결국 ‘팝의 전설’로 남았다.
1958년 8월 29일 미국에서 출생한 잭슨은 5세 때부터 형제들로 구성된 5인조 그룹 잭슨 파이브(Jackson Five)에서 리드싱어를 맡으며, 팝계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후 1976년 잭슨스(the Jacksons)로 이름을 바꾼 후 1984년까지 활동하며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잭슨파이브, 소울 뮤직의 정착
초창기 잭슨 파이브의 음악은 1960~70년대 소울뮤직의 계보를 잇는 흑인음악 레이블 ‘모타운(Motown)식 소울’이란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이다. 소울 음악을 토대로 한 훵크, 발라드, R&B 등 다양한 장르를 선보였다. ‘아일 비 데어’(I'll Be There), ‘아이 원트 유 백’(I Want You Back), ‘더 러브 유 세이브’(The Love You Save) 등의 히트곡들은 맑고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던 소년 잭슨의 목소리를 통해 탄생됐고, ‘잭슨 파이브’는 모타운 레코드 역사상 최대 히트를 기록한 팝 그룹으로 기억되고 있다.
솔로가수로 성공, 디스코 열풍
‘잭슨 파이브’의 막내였던 마이클 잭슨은 1979년 ‘오프 더 월’(Off the Wall)의 대히트로 솔로 가수로도 성공 가도를 이어갔다. 유명 프로듀서 퀸시 존스와 손잡고 발표한 디스코 장르의 이 앨범은 1천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한 대성공이였다. ‘록 위드 유’(Rock With You)와 ‘돈 스톱 틸 유 겟 이너프’(Don't Stop 'Til You Get Enough) 등은 디스코 열풍의 정점을 찍는 계기가 됐다.
‘스릴러’의 빅히트, 60~80년대 다양한 음악 접목
하지만 ‘오프 더 월’의 성공은 1982년 발표한 앨범 ‘스릴러’(Thriller)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빌리 진’(Billy Jean), ‘비트 잇’(Beat It) 등 대형 히트곡들이 수록된 이 앨범은 전무후무한 판매기록을 세우며 팝의 역사를 다시 썼다.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1억400만장 이상이 팔린 앨범이자 올해의 앨범상을 비롯해 그래미 8개 부분의 상을 휩쓸며 잭슨은 명실상부한 ‘팝의 황제’로 등극하게 됐다.
잭슨과 프로듀서 퀸시 존스는 초창기 때 선보인 ‘모타운식 소울’과 디스코에다 헤비 메탈 사운드도 접목시키며, 다양한 음악적 스펙트럼을 펼쳐 보였다. 당시 ‘비트 잇’의 기타는 헤비 메탈 기타리스트 에디 반 헬렌이 연주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60년대에서 80년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음악 장르는 흑백 음악시장을 통합 석권하게 됐다.
‘문워크 댄스’로 뮤직비디오 인기...퍼포먼스 시대 개막
그의 음악은 퍼포먼스와 결합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당시 ‘스릴러’ 뮤직 비디오는 할리우드 영화를 연상시키듯 음악과 영상이 의도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호평을 얻었다. 실제로 잭슨은 할리우드의 공포영화 감독 존 랜디스를 영입, 20분에 달하는 대작을 만들어 냈다.
이는 곧 뮤직비디오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어 ‘듣고 감상하는 음악’에서 ‘보고 즐기는 음악’으로 패러다임을 바꾸는 혁신을 기록했다. 잭슨은 화려한 볼거리와 강렬한 이미지로 수많은 엔터테이너들을 배출하며, 80년대 대중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 잡았다.
뮤직비디오 속 잭슨의 춤은 전세계에 신드롬을 일으켰다. 검정 선글라스에 반짝이 양말, 흰 장갑을 낀 잭슨은 절도있는 동작으로 로봇을 연상시키는가 하면, 뒤로 가지만 앞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독특한 스타일로 ‘문워크’(Moon Walk) 댄스를 완성시켰다. 문워크는 브레이크 댄스의 일종으로 달에 착륙한 우주인의 걸음걸이를 연상시킨다는 데서 이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퀸시 존스와 결별 후 잇따른 ‘성공’과 ‘실패’
1991년 잭슨은 프로듀서 퀸시 존스와 헤어진 뒤 ‘데인저러스’(Dangerous)를 발표하고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잭슨의 작곡과 제작 능력을 펼친 이 앨범에는 영화 ‘프리윌리’의 주제곡으로 쓰인 ‘윌 유 비 데어’(Will You Be There)과 블랙 오어 화이트(Black Or White) 등을 통해 부드러움과 강한 이미지를 오갔다.
이후 1995년 잭슨은 자신을 괴롭혀온 어린이 성추행 사건과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미사-마리 프레슬리와의 결혼 등 화제를 뒤로 하고 앨범 ‘히스토리’(HIStory)를 발표했다. 그는 자신의 음악적 역사와 ‘그의’(His)와 ‘이야기’(Story)가 결합된 신조어를 타이틀로 기존 음악과는 다른, 거친 사운드를 선보이기도 했다. 타이틀곡 ‘스크림’을 통해 자신의 여동생 재닛 잭슨과 합작을 펼친 데 이어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오른 ‘유 아 낫 얼론’(You are not alone)으로 R&B음악의 유명 프로듀서 알 켈리와 손을 잡기도 했다.
항상 성공이 따랐던 그였지만 실패를 맛보기도 했다. 아동 성추행 혐의와 잦은 성형수술에 따른 부작용 등으로 하락의 길을 걸었던 잭슨은 2001년 앨범 ‘인빈서블’(Invincible)을 내놓았지만 재기에 실패했다.
이 많은 곡들로 마이클 잭슨은 문워킹과 팝핀 등의 신화를 만들었지만, 그가 항상 댄스곡으로만 어필했던 것은 아니였다.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소리, 그리고 잭슨의 감성적이고 서정적인 목소리로 ‘힐 더 월드’(Heal The World)는 세상을 구하자는 메시지와 함께 세계인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이 외에도 잭슨은 ‘위 아 더 월드’(We Are The World)', ‘잼’(Jam), ‘리멤버 더 타임’(Remember the time)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기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최근 성형 논란을 불식시키듯 영국에서 열리는 공연을 통해 건재함을 과시하려던 잭슨은 25일 급성심정지로 심장마비 증세를 보여 LA의 한 병원에 후송됐지만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전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친 ‘팝의 황제’의 죽음에 많은 이들이 애도를 표하고 있다.
[마이클 잭슨. 사진=마이클 잭슨 홈페이지]
박영웅 기자 hero@mydaily.co.kr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press@mydaily.co.kr
최연소 리드보컬
- 5살의 나이에 그룹 잭슨파이브의 막내 마이클잭슨이 리드 보컬을 맡음
최연소 빌보드 넘버원
- 당시 그의 나이 11세
- 그룹이라는 이유로 정식 기록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 12살의 스티비 원더가 정식으로 올라있음.
그룹 역사상 처음으로 4곡이 연속으로 빌보드 1위에 오름
- 잭슨파이브의 첫 데뷔곡 I Want You Back 그리고 이어 발표한 ABC, The Love You Save, I'll Be There이 모두 연속으로 넘버원 기록
최연소의 나이로, 흑인 최초로 롤링스톤지 표지에 등장
- 당시 그의 나이 13세
공중파 방송 최초로 선보인 브레이크 댄스
- 74년 소울트레인에서 Dancing Machin을 부르면서 브레이크 댄스를 선보였다. 당시 만 16세
- 그 이후 Dancing Machin 레코드는 매상 1위로 올랐고, 당시 브레이크 댄스를 유행시킨 장본인
그해 가장 많이 팔린 앨범 Off The Wall
- 1979년 발표한 Off The Wall의 성공으로 마이클잭슨은 성인 솔로가수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 약 1000만장 판매. 당시 흑인 음반 중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기도 했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Thriller
- 1984년 Thriller는 사상 최고로 많이 팔린 앨범으로 인정 되었다.
- 일주일 안에 100만장의 레코드 판매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 37주간 빌보드 앨범 차트 1위 기록
- 판매량의 증가가 매우 급속했기 때문에 플래티넘 인증을 받은 후 거의 2년간 집계가 불가능
- 플래티넘 인증을 받은 거의 1년만에 20배로 불어남
- 현재까지 약 1억400만장 기록
앨범에 수록 된 9곡 가운데 무려 7곡이 탑 10위 안에 오름
Billie Jean, Beat It, Thiller, The Girl Is Mine, Wanna Be Startin' Somethin', Human Natuer, P.Y.T.(Pretty Young Thing)
앨범 전체가 댄스 차트 1위
- Thriller앨범의 모든 트랙(총 9곡)이 댄스 차트 1위를 기록.
빌보드 싱글차트, 댄스차트, 블랙차트에서 동시에 1위를 한 최초의 곡
- Billie Jean은 당시 싱글차트와 댄스, 블랙차트에서 1위를 한 최초의 곡이다.
뮤직비디오 최초의 집단 댄스
- Beat It은 최초로 집단 댄스를 등장 시킨 뮤직비디오였고 이것은 오늘날 뮤직비디오의 고전이 됨.
뮤직비디오 최초로 35mm 필름으로 촬영
- 극장 상영용 장편 영화에 쓰이는 필름
MTV 사상 최초로 방영된 흑인 뮤직비디오
- 당시 백인들의 Rock음악 중심으로 방영되던 MTV에서도 마이클잭슨의 뮤직비디오 Billie Jean을 틀 수밖에 없었다.

1984년 Grammy Awards 최다 부문 수상
- E.T 사운드 트랙까지 총 8부문을 수상
- 이 기록은 1999년까지 유효
역대 그래미어워드 최고 시청률 1위
- 1984년 그래미 12개부문후보 8개부분 최다수상
- 그래미어워드 시청률 2위는 88년 마이클잭슨이 앨범 배드로 최다 부분 후보에 올랐을 때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음악 비디오 The Making Of The Thriller
- 약 100만장 가량이 팔림
- 최초의 뮤직비디오 메이킹 필름. 메이킹 필름 개념의 시초
MTV가 뽑은 사상 최고의 뮤직비디오 1위 Thriller
- 그 외 많은 조사에서도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뮤직비디오
팹시가 코카콜라의 수익을 넘어서게 한 최초의 스타
- 84년과 86년
가장 많은 액수를 받은 아티스트
- 팹시로부터 천오백만달러
앨범 Bad 발매 하자마자 전 세계 25개국에서 1위 기록
- 오스트레일리아를 포함한 몇개국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나라에서 1위를 했다.
CBS레코트 역사상 최다 예약 기록
- Bad 앨범 예약 판매만 225만장
한 앨범에서 5개의 1위곡 배출
- 마이클잭슨의 87년작 Bad에서 I Just Can't Stop Loving You, Bad, The Way You Make Me Feel, Dirty Diana, Man In The Mirror 등 5개의 1위곡이 나왔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과 두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을 동시에 가졌던 유일한 스타.
- 당시 Bad앨범이 스릴러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판매 기록을 세움으로서 한 가수의 앨범이 판매량 1~2위를 석권하는 유일무이한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첫 공연 일본에서 9회분 공연티켓 25만장이 예매 한시간만에 매진
- 그래서 5회 공연 추가 역시 매진
- 총 45만장 판매
- 이 후 88년 두번째 일본 공연에서도 40만5천장 매진
- 배드투어 일본에서만 총 85만 5천명 동원 (이전 일본기록의 4배)
- 암표 가격 일본 최고의 기록

Bad Tour... 세계에서 가장 큰 운동장인 웸블리스타디움에서 8회 연속 매진 기록
- 미처 티켓을 구하지 못해 경기장 밖에서 관람한 사람들을 포함 해서 어마어마한 인파가 공연을 관람했다.
가장 많은 수익을 얻은 콘서트
- Bad 투어로 1억2천5백만달러의 총 수익을 벌어들여 당시 가장 많은 수익을 얻은 콘서트 기록을 갱신
- 후에 셰어의 패러웰 투어가 1억9천250만달러로 기록 갱신, 2006년 머다나의 컨패션스 투어가 1억9천370만달러로 기록 갱신
89년 최초로 포브스 연예인 소득 연 1억 달러 시대를 열었다.
- 연간 매상고가 1억달러를 넘은 최초의 엔터테이너, 89년에 1억2500만달러로 사상 최고 금액의 소득을 얻은 엔터테이너 (1989 년,Forbes 잡지)
- 가장 성공적인 연예인으로 2008년판 기네스북에 등재
뮤직비디오에서 최초로 몰핑기법을 사용
- 당시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사용된 신기술 몰핑기법이 뮤직비디오로서는 처음으로 마이클잭슨의 Black Or White에 사용되었다.

MTV역사상 일주일간 가장 많이 방송을 탄 뮤직비디오
- 마이클잭슨의 Black or White
그해 가장 많이 팔린 앨범 Dangerous
- 1991년 11월 발매 되었음에도 그해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록 되었다.
사상 최고의 시청률
- 93년 오프라 윈프리 쇼의 마이클잭슨 출연분이 생중계 되었고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다.
토스터 기술을 사용한 최초의 아티스트
- 무대 아래에서 별안간 튀어나오는 것 (Dangerous 투어 오프닝 장면)
- 어셔나 비, 서태지 등 많은 가수들이 흉내내고 있음
투어에 뮤지컬의 개념을 도입한 최초의 아티스트
- 오늘날 퍼포먼스형 가수들에게 있어서 거의 고전처럼 되었으며 수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음
대만 등 일본 이외의 아시아 주요국들에서 순회공연을 한 최초의 메이저 가수로 기록.
- Dangerous Tour
방송국 HBO가 구입한 루마니아 공연 중계권은 2천만달러로 사상 최고액.
- Dangerous Tour
HBO에서 방송한 공연의 시청률은 미국 케이블 TV 역사상 최고 시청률 기록.
- 21.4%
1993년 Grammy Awards - Living Legend Award(살아있는 전설 상) 최연소 수상
- 당시 그의 나이 35세

한 명의 팝스타(마이클 잭슨)가 지원하는 최다 자선 단체
- Heal The World
최초의 핫샷 1위
- 1995년 R.Kelly와 함께 작업한 You Are Not Alone이 남녀 통틀어 사상 최초 1위로 데뷔
- 이 기록 전엔 마이클잭슨&재닛잭슨의 Scream이 핫샷 5위로 데뷔해 기록을 세움
세계에서 가장 비싼 뮤직비디오
- 여동생 재닛 잭슨과 함께한 뮤직비디오 Scream
- $700만(₩84억)을 들여 제작 되었다.
- 세계에서 가장 비싼 뮤직비디오 탑 20 순위 선정에 한 가수당 한편의 뮤직비디오만 선정하는대, 그렇지 않을 경우 20위권 내 순위가 마이클잭슨 잔치가 되기 때문
최초의 퍼포먼스 리뷰
- Dangerous의 획기적인 안무로 평론가들을 놀라게 함으로서 최초의 퍼포먼스 리뷰의 개념이 시작
- 찰리채플린이 골프 치는 장면, 대부에서 말론 브란도가 양복을 터는 장면을 비롯 200여가지가 넘는 영화의 장면들을 안무에 응용
가장 많이 팔린 리믹스 앨범
- 마이클잭슨의 Blood On The Dance Floor은 약 600만장 판매, 리믹스 앨범으로서는 최대 기록
세계에서 가장 긴 뮤직비디오
- Stan Winston과 Michael Jackson이 만든 Ghosts
- 35분의 길이로 마이클잭슨이 1인 5역을 연기했다.
Childhelp USA등 39곳의 자선 단체를 지원함으로 인해 기네스 북에 기록
- 2000년도판
The Rock & Roll Hall Of Fame Foundation(락큰롤 명예의 전당)에 최연소로 두번 오름
- 1997년 잭슨파이브가 연주자(Performence) 부문에 이름을 남김
- 2001년 마이클잭슨 단독으로 연주자(Performence) 부문에 이름을 남김
세상에서 가장 많은 음악상 수상 기록
- 영어권국가에서만 350회/유럽,남미국가에서 210회/동양권국가에서 19회
- 미국의 기록북 리플리의 믿거나 말거나(Reply's believe or not)에 등재
SMAPxSMAP 최대 출연료 갱신
- 마이클이 처음으로 텔레비전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 칸토 지구의 시청률은 22.0 퍼센트, 순간 최고 시청률은25.9 퍼센트를 기록했다.
- 30분 출연하고 받은 출연료는 20만달러

빌보드 싱글 1위를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가족.
- Michael Jackson & Janet Jackson
지미 카터 부터 파더 부시 까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귀빈 자격으로 백악관에 초청 받은 유일한 아티스트
- 조지부시의 요청은 거절함
옷깃까지 떨리는 TBS음향 시스템을 최초로 사용
레코딩 역사상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
- 기네스 월드 레코즈

아무도 공개적으로 얘기하기를 꺼리지만 미국 음악계는 결국 흑백의 대결 구도라는 큰 그림에 갇혀 있다. 리듬 앤 블루스와 컨트리 앤 웨스턴이 마주하며 백인 청년의 록이 있으면 흑인의 힙 합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이 신나는 경쟁은 아니다. 인종에 따른 음악적 체질 차(差)가 가져온 스타일의 나열에 불과하다. 흑백의 대치가 흑인 아티스트와 백인 뮤지션 개체의 승부로 나타난 적은 드물다. 실상 인종주의가 만연한 미국 사회에서 ''소수 흑인''이 ''다수 백인''과 맞서 이기기는 어렵다.
늘 백인은 흑인의 음악 문법을 가지고 산업적 이득을 챙겨왔다. 흑인은 발명했으나 그것을 상품으로 만들어 판 것은 모조리 백인의 음악 자본가들이었다. 디스코만 해도 그것은 흑인 클럽에서 잉태된 흑인의 사운드트랙이지만 디스코의 존재를 일반인들이 알게 된 것은 비지스(Bee Gees)로 비롯되었다는 점이 하나의 증좌가 될 것이다.
따라서 현실은 흑백의 대결이고 뭐고 없다. 언제나 흑인은 팔렸고 백인은 팔았다. 오로지 흑인의 것을 시장에 내다 팔아 돈을 번 백인 음악사업자 그리고 백인 아티스트만이 있을 뿐이다.
만약 온전한 흑백 가수의 경쟁이 전제되려면 미국 사회에서 좀처럼 존재하기 힘든 ''흑인 자본가''가 전제되어야 한다. 가수가 흑인이라고 무조건 흑백 대결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의미도 없다. 설사 의미가 부여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뿌리 깊은 인종주의에 기초한 저널리즘의 화제성이 가져온 억지일 따름이다.
아마도 팝의 역사에서 진정한 흑백의 대결은 딱 한 차례 벌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마이클 잭슨이 있었던 잭슨 파이브(Jackson 5)와 도니 오스몬드가 버티고 있던 오스몬즈(Osmonds)가 그 주인공들이다. 이 팀을 라이벌로 묶을 수 있는 것도 흑인 그룹인 잭슨 파이브가 흑인 음반사업가인 베리 고디(Berry Gordy)가 세운 모타운 레코드사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그들 뒤에는 빛을 가리는 ''백인의 조종''이 없었다.
예민한 팝 팬들은 즉각 뉴 키즈 온 더 블록과 뉴 에디션을 떠올렸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같은 흑인 매니저이자 프로듀서인 모리스 스타의 기획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두 그룹의 차트나 시장에서의 실적이 차이가 난다는 점에서 라이벌로 붙이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다.
잭슨 파이브와 오스몬즈는 그들과 달리 전성기 시절 모든 부문에서 저울이 기울지 않았다. 캐시 박스 차트에서나 앨범 판매고에 있어서나 숫자가 엇비슷했다. 그리고 양측이 분명히 서로간 상대를 경쟁 상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금세기의 인물 마이클 잭슨이 있음으로써 잭슨 파이브가 역사적 위상은 높지만 그 때의 중력은 팽팽했다.
그룹간 차트 대결은 마이클의 잭슨 형제가 앞섰다. 오스몬즈는 One bad apple 한 곡이 차트 1위에 올랐지만 잭슨 파이브는 ''70년 신년에 정상을 밟은 첫 싱글 I want you back부터 ABC, The love you save, I''ll be there 등 네 곡이 내리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오스몬드 형제의 광채는 가족들의 전면적 솔로 활동에서 광채를 발했다.
그룹의 결속력이 강했던 탓인지 잭슨 파이브에서는 저메인과 막둥이 마이클만이 솔로 곡을 발표했다. 이 시기에 저메인은 리메이크 곡인 Daddy''s home을 히트시켰으며, 마이클은 Got to be there, Rockin'' robin 그리고 유명한 Ben 등 세 곡을 넘버 원 곡으로 만들었다.
오스몬즈도 그룹 내에서는 간판인 도니 오스몬드만이 솔로로 나섰으나 오스몬즈에 들지 않은 다른 가족들, 구체적으로 마리 오스몬드, 리틀 지미 오스몬드가 나와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으며 도니는 마리와도 듀엣을 이뤄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당시 잭슨 파이브, 그리고 마이클의 솔로곡은 차트 순위에서 상대적 우위를 보였음에도 골드 싱글이 하나도 없었던 반면 오스몬드나 도니 마리의 싱글은 순위가 다소 떨어져도 판매에서는 대부분 골드 디스크를 기록하는 대기염을 토했다. 도니 오스몬드의 기념비적인 싱글들인 Sweet and innocent(7위), Go away little girl(1위), Hey girl(9위), Puppy love(3위), The twelfth of never(8위) 등은 모조리 5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려 골드 레코드가 됐다.
대중적 인기도 평행선을 달렸다. 두 그룹은 모두 TV 쇼에 출연해 도니와 마리는 MC로도 두각을 나타냈으며 잭슨 5는 토요일 아침 어린이 프로에 만화 캐릭터로도 등장했다. ''75년 모타운을 떠났을 당시 잭슨 5는 ''미국 젊은이들에 대한 공헌''으로 의회로부터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에서의 위업일 뿐이었다. 전세계에 걸쳐 특히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오스몬드 형제들의 인기가 더 높았다. 미국 그룹에 은근한 경계가 있는 영국에서마저 그들의 인기가 절정이던 ''75년 런던 웸블리 풀 공연에서는 우리의 ''뉴키즈''와 같은 팬들의 소동이 발생했다.
국내에서도 오스몬드 형제들의 인기가 훨씬 좋았다. 물론 잭슨 5의 In our small way(한국의 형제 그룹인 ''작은별 가족''이 번안해 불렀다), Going back to Indiana 등이 다운타운에서 애청되었으나 오스몬드 브라더스의 빛나는 레퍼토리를 따라가지는 못했다. 도니의 Puppy love, Young love, Too young, 마리의 Paper roses 그리고 리틀 지미의 Mother of mine 등이 라디오 전파를 독식했고 오랫동안 팬들의 신청엽서가 방송국에 날아들었다.
많은 음악 관계자들이 한국에서의 흑인 음악의 홀대의 사례로 ''잭슨 대 오스몬드''를 지목한다. 지금이야 흑인 음악이 제대로 평가받고 있지만 그 땐 ''먹통 음악''이라며 외면을 당했고 그러한 차별에 잭슨 파이브도 희생된 것이었다.
문제는 오스몬즈가 ''71년 매니저 마이크 커브에 의해 MGM 레코드사와 계약을 체결했을 때 잭슨 파이브의 화려한 히트 퍼레이드를 보고 잭슨 파이브의 ''화이트 버전''으로서 재탄생했다는 점이었다. ''패밀리 그룹으로 가자! 백인들로 가자!''였다.
커브의 구상은 ''컨트리 버블 검 그룹''의 주조에 있었다. 모타운의 베리 고디 사장이 잭슨 파이브를 ''소울 버블 검''으로 일컬은 사실을 잊지 않았다. 모조품, 복사물이라도 괜찮았다. 인종은 달랐지만 몽키스가 비틀즈를 베껴 만들어진 것과 같은 식이었다.
그리고 첫 싱글로 프로듀서 릭 홀을 엮어 노골적으로 잭슨 파이브의 사운드와 흡사한 곡 One bad apple을 내놓았다. ''침묵하던 다수''의 백인들이 일어섰고 그들의 성원으로 오스몬즈는 순풍가도를 달리게 됐다. 유타주의 솔트 레이크 시(市) 출신인 그룹 멤버들이 몰몬교 신자라는 점은 한층 그들의 사생활이 깨끗하다는 팬들의 신뢰를 증폭시키면서 인기몰이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갑자기 잭슨 파이브는 비틀즈가 철저히 몽키스를 무시한 것과 달리 경쟁자의 존재와 부상을 인식해야 했다. 음악계에서는 당시 잭슨 형제들의 무대 의상이 번쩍거리고 현기증을 일으키는 댄스를 강화한 것이 오스몬즈가 혜성처럼 출현하고 나서였던 것으로 분석했다.
언론은 흥미 있게 두 그룹의 인기 격돌을 다루기 시작했다. ''57년생 도니 오스몬드와 ''58년생 마이클 잭슨은 라이벌의 핵으로 집중 조명을 받았다. ''75년 1월 처음으로 시상된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에서 두 사람이 함께 출연한 것이 센세이션을 일으켜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정도였다.
''흑인 마이클이 있다면 백인 도니가 있다''는 인식이 오랫동안 미국인들을 지배했다. 그래서일까. 마이클의 ''88년 BAD 공연 열풍이 지나간 뒤인 이듬해 도니는 13년의 긴 침묵을 깨고 컴백을 단행했다. 이 때 발표한 곡 Soldier of love는 올드 팬들의 지원에 힘입어 차트 2위까지 진격했다.
일각의 팝 역사는 두 그룹의 라이벌 의식이 서로에게 순기능으로 작용했다고 기록한다. 서로가 좋은 노래를 내놓고 훌륭한 무대를 꾸미는데 기여한 ''아름다운 경쟁''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굉장한 규모를 자랑했던 팬 클럽들도 실제로 상대 진영에게 조금도 비방과 힐난을 던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의 후한 정리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오스몬즈에 대한 평가는 결코 따뜻하지가 않다.그흔한 팝 관련 서적에도 딱히 록 서적이 아니더라도 오스몬즈는 이름 한 자 오르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잭슨 파이브는 마이클 잭슨 때문에라도 반드시 언급된다. 이러한 차별은 무엇 때문인가.
마이크 클리포드가 편집한 록 인물사전에 그 일단이 확실하게 나온다.
''기껏해야 오스몬즈 그룹은 잭슨 파이브에 대한 창백한 모방에 불과하다. 그들의 전문성과 세련된 음악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측면에서 오스몬즈는 팝에 대한 안전하고 교활한 쇼 비즈니스적 접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어찌 보면 몽키스의 운명과 유사하다. 조형된 그룹 특히 버블 검 그룹의 말로는 언제나 비참하다. 솔직히 잭슨 파이브도 베리 고디의 막강한 후원이 거름이 됐다는 점에서 그다지 우대되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오스몬즈가 더 불리한 것은 예의 ''오리지널에 대한 모조''와 ''뒷북 치기'' 때문이다.
지금도 무수한 틴 그룹이 있다. 한 팀이 성공하면 마치 시장법칙이라도 되는 듯 그와 흡사한 팀이 쏟아져 나온다. 그 순간에는 평자들의 무시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남부럽지 않은 스타덤을 창출하지만 곧 잊혀져 버린다. 언제나 최초만이 남으며 나머지 그룹들은 훗날 재기하려 해도 여의치 않다. 그래서 오스몬즈는 현재의 많은 버블 검 그룹한테는 ''반면교사''의 역할을 한다.
얼마 전 <타임>지는 라틴 팝 열풍을 전하면서 흥미로운 기사를 게재했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리키 마틴의 자극적 무대를 그래미상에서 보고 유타주의 솔트 레이크 시의 팬들은 레코드 매장으로 몰려왔고 마틴의 음반을 싹쓸이해 갔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이지만 솔트 레이크 시의 경우가 놀라운 것은 이 지역은 라틴 팝에 대한 열광보다는 전통적으로 오스몬드 브라더스에 대한 충성으로 유명한 곳이기 때문이다''
솔트 레이크 뿐 아니라 그 어디도 오스몬즈를 기억하지 않는다. 도니 오스몬드가 반짝 재기에 성공했지만 그것도 어언 10년 전 일이다. 허나 마이클 잭슨은 차트 인기 곡이 없어도 가는데 마다 메가톤 지진을 일으킨다. 4반세기 전에는 도니와 마이클이 흑백의 라이벌이었지만 지금 한 사람은 슈퍼스타요, 다른 한 사람은 흘러간 인물이다.
이렇듯 현재 진행형과 역사의 기록은 큰 차이를 보인다. 근래의 틴 뮤직도 세련된 사운드를 뽐내고 있지만 결코 자유롭게 비쳐지지 않는다. 그들이 역사에서 어떤 응대를 받게 될지는 오스몬즈와 잭슨 파이브의 라이벌전이 말해줄 것이다. 물론 요즘의 그룹들은 나중 어떻게 정리되든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보이지만.
글/임진모
gmv 2000년 01월호 임진모
첫댓글 정말 귀중한 자료다 남수야 ~ 잘 간직할게 고맙다 ~
남수 대단해!!
아!우리세대의 영원한 아이콘이 전설로 사라져가는구나 - -.....
난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이 도려내진 것 같은 느낌이다...ㅜㅜ
뭐로 위안이 삼아야될지? 참답답하다..... 그지 은임아!!
술과 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