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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번째 사기열전은 병법가들의 전기입니다. 병법으로 유명한 손자와 오자에 관한 전기입니다. 이 열전에서 소개하는 손자(孫子)는 한명이 아니라 두명입니다. 손자병법의 저자로 알려진 손무와 손무의 후손으로 전국시대때 활약한 손빈입니다. 이번 열전에서 손무와 손빈은 꼭 손자라고 존칭하고, 오자병법의 저자인 오기에게는 꼭 오기라고 이름을 호칭한 것은 오기를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마천의 시각이 들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손무는 제나라 사람인데, 자기가 저술한 병법서 13편을 오나라 왕 합려에게 바치고 출사하기를 원하니, 합려도 왕이 되기 전까지 군대를 지휘했던 사람이어서 병법서가 실전에 도움이 되는지 의심스러웠는지 "선생의 병법서는 잘 읽어봤습니다. 부녀자들에게도 훈련시켜 병사들의 대오점검 시범을 보여 줄수 있겠소?"라고 물어보니 손무는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합려의 후궁과 궁녀 180명에게 대오점검 훈련을 시키기로 합니다. 180명을 두 편으로 나누고 각 편의 대장은 합려가 총애하는 후궁 두명을 임명합니다. 후궁과 궁녀들은 자신들에게 창을 나눠주면서 군사훈련을 한다고 하니 진지하게 참여하지 않고 재미있는 장난으로 생각합니다.
손무가 대에 올라 대오훈련을 설명합니다. "'앞으로' 하면 가슴 앞쪽을 바라보고, '좌로'하면 왼쪽을 쳐다보고, '우로'라고 하면 오른쪽을 바라보고, '뒤로'하면 등뒤를 보라."고 설명을 한 다음에 군령을 약속하고 여러번 설명을 합니다. 그런 후에 북을 치면서 "오른쪽"이라고 했지만, 궁녀들은 깔깔거리면서 웃기만 합니다. 손무는 "군령이 병사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은 장군이 군령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기 떄문이다."라고 말하면서 다시 반복해서 설명을 해준 다음에 북을 치면서 "왼쪽"이라고 명령을 했지만 궁녀들은 더 크게 웃고맙니다.
이에 손무는 "군령을 제대로 설명을 하지 않은 것은 장군의 잘못이지만, 이미 충분히 알아듣게 설명을 했는데도 군령이 이행되지 못하는 것은 각대의 대장들의 책임이다."라고 말하고 군사들에게 대장을 맡은 후궁들의 목을 베라고 합니다. 손무를 놀리기 위해 일을 벌린 합려왕은 멀리서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서 사자를 보내 이렇게 전합니다. "선생의 실력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두 후궁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라 이들이 없으면 밥을 먹어도 단맛을 못느끼니 살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손무는 "장군이 군대를 지휘할 때는 왕의 명령을 듣지 않을 때가 있는 법이다."라고 말하고 기어코 두명의 후궁을 참수하고 그 목을 궁녀들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두편의 대장으로 합려가 그 다음으로 총애하는 후궁을 임명합니다. 궁녀들은 두명의 후궁들이 참수되자 깜짝 놀라서 바짝 얼어붙게 됩니다. 손무가 북을 치면서 다시 명령하자 궁녀들은 손무의 명령대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행동했고 감히 떠드는 궁녀들도 없게 됩니다.
손무는 사람을 합려에게 보내 "병사들의 움직임이 정연해졌으므로, 대왕께서는 시험해보시기 바랍니다."라고 전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당부했는데도 후궁의 목을 친 손무가 불쾌해진 합려는 "장군은 숙소에서 쉬기 바랍니다. 과인은 내려가 보고 싶지 않소."라고 합니다. 그러자 손무는 "대왕께서는 단지 병법의 글귀만 좋아하고 그 내용은 써먹을 줄 모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그제서야 손무가 용병에 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합려는 손무를 장군으로 삼았는데, 오왕 합려가 강력한 초나라를 격파하고 초나라 수도를 점령할 때 손무도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는 이야기입니다.
사기열전에 손무가 부녀자를 제식훈련 시켰다는 내용 외에 다른 이야기가 없고, 사기열전 말고 다른 책에서도 손무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아서 손무가 실존 인물인지, 또 손무가 <손자병법 >의 실제 저자인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손자병법>은 손무가 아니라 손무의 후손이라는 손빈이 지은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현대에 와서 발굴된 한대의 무덤에서 <손자병법>과는 다른 <손빈병법>이 발견되어서 손무와 손빈 둘 모두 병법서를 저술한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손무가 부녀자를 훈련시킨 이야기는 사마양저가 장고를 참수하여 군기를 세운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나중에 팽월 열전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마도 명장을 묘사할 때 의례적으로 나오는 클리셰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손무가 죽은지 100년 후에 손빈이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이미 전국시대가 한창일 때입니다. 오왕 합려를 섬긴 오자서는 합려의 아들인 부차에게 목숨을 잃게 됩니다. 오자서와 같이 합려를 섬긴 손무는 어떻게 되었나 알 수 없습니다. 공을 세운 후에 은퇴를 했는지, 오자서가 죽을 때 손무도 쫓겨나서 고향인 제나라로 돌아갔는지 아니면 오나라가 월나라에 망하는 오월쟁패의 와중에 자식들만 목숨을 겨우 건져 제나라로 갔는지 알 수 없지만 어떻든 손무의 후손인 손빈은 제나라에서 태어납니다.
손빈은 방연과 같이 병법을 익혔다고 했습니다. 방연은 자기의 능력이 손빈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방연이 위나라 혜왕을 섬겨 먼저 장군이 되었는데, 위왕에게 벼슬자리를 추천하겠다고 손빈을 초청한 다음 손빈의 두 다리를 자르고 얼굴에 글자를 새기는 형벌을 가해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한비와 이사의 이야기 처럼 자기보다 능력이 뛰어난 친구를 질투해서 친구에게 해를 입히는 일이 손빈과 방연 사이에서 또 벌어집니다. 이사는 통일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그랬다는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만, 벼슬로 경쟁하는 사이도 아닌 손빈을 불러들어 방연이 손빈을 앉은뱅이로 만들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단순히 시기심으로 그랬다는 것외에는 설명이 없어서 진짜로 그랬다면 방연이라는 인간은 정말 악독한 인간일 것입니다. 어떻든 손빈은 방연이든 위나라이든 이들에 대해 원한을 갖게됩니다.
손빈(孫臏)의 이름에서 빈이라고 하는 것은 무릎뼈를 자르는 형벌을 말합니다. 빈형을 당한 손빈이 그 형벌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삼은 것인지 모르지만 본명 대신에 손빈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제나라 사자가 위나라에 왔다가 손빈이 비범하다고 생각하여 몰래 제나라로 데리고 오니, 제나라 왕족 출신인 장군 전기가 손빈을 빈객으로 대우합니다.
그때 제나라에서 왕을 포함해서 여러 공자들이 돈을 거는 말달리기 경주를 즐겨했습니다. 손빈이 말들이 달리는 것을 살펴보니, 말들이 서로 큰 차이는 없지만 상중하의 등급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전기에게 크게 돈을 걸게하고 경주를 이깁니다. 손빈이 쓴 방법은 삼사법(三駟法)으로 알려지는 것으로 부분적 패배를 이용하여 전체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입니다. 상대의 상급 말에 전기의 하급 말을, 상대의 중급 말에 전기의 상급 말을, 상대의 하급 말에 전기의 중급 말을 맞붙게 해서 결국 2:1로 이겨서 큰 돈을 벌게 합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전기가 제나라 위왕에게 손빈을 추천하니 왕이 군사(軍師)로 삼게됩니다.
학교체육대회 때 씨름을 할 때, 미리 선수들의 순서 명단을 내는데 "오더를 잘 짜야 한다"고 하지만 상대방의 오더를 알 수 없으니 삼사법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결국 삼사법을 적용하려면 미리 상대방의 오더를 훔쳐보던지, 첩자를 통해 오더를 빼오는 수 밖에 없어서 정정당당한 스포츠맨쉽은 아닙니다.
전기와 경주를 한 왕족들은 다음번에는 또 당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상대방의 순서를 본 다음에 우리편의 순서를 정했을텐데, 이런 방법은 기책(奇策)이지만 역시 정공법은 아닙니다. 뛰어난 기량을 가진 말들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 승리를 거두는 첫번째 조건일 것입니다.
방연이 지휘하는 위나라 군대가 조나라를 침범하여 위급해지자, 조나라는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합니다. 제 위왕은 손빈을 장군으로 삼으려 했으나 손빈이 사양해서 군사로 삼고 전기를 장군으로 임명합니다. 손빈은 지붕이 있는 수레에서 머물면서 계책을 세우게 합니다. 삼국연의에서 제갈량이 사륜거를 타고 전쟁을 지휘하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장군 전기는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으로 진격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손빈은 말리면서 위나라의 용맹한 군사들은 모두 조나라에 출병했으니 위나라에는 노약자들만 있을 것이므로 위나라의 수도인 대량으로 쳐들어 가자고 합니다. 전기는 손빈의 계책대로 위나라로 쳐들어가니, 위나라 군대가 놀라서 조나라의 포위를 풀고 위나라로 돌아왔지만 계릉에서 제나라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고 맙니다. 이 전투를 위위구조(圍魏救趙 : 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한다.)라고 합니다.
그로부터 13년 후에 이번에는 위나라가 조나라와 함께 한나라를 침공합니다. 원래 한, 위, 조는 하나의 나라였는데 갈라진 다음에는 서로 간에 피터지게 싸우게 됩니다. 이들의 진짜 적은 진(秦)나라여서 힘을 합해 진나라에 대항했어야 하는데, 눈앞의 이익만을 보고 자기들끼리 어지럽게 싸우기만 하다가 결국 진나라에게 모두 멸망당하게 됩니다.
이번에도 한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전기와 손빈 콤비가 출전하게 됩니다. 이번에도 한나라가 아닌 위나라 대량으로 향합니다. 저번 전쟁에서 당한 바 있는 위나라의 방연은 이번에는 재빨리 위나라로 되돌아가서 제나라의 군대와 맞서게 됩니다. 손빈이 전기에게 "위나라 군대는 원래 사납고 용맹하지만, 제나라 군대를 겁쟁이라고 깔보고 있습니다. 제나라 군대를 후퇴시키면서 첫날에는 아궁이를 10만개로 만들었다가 다음날에는 5만개로 줄이고 그 다음날에는 아궁이를 3만개로 줄여 유인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방연이 제나라 군대를 쫓은지 3일째가 되자 크게 기뻐하면서 "내가 원래 제나라 군대가 겁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 땅에 들어온 지 3일만에 절반이 넘는 제나라 병사들이 도망갔구나."라고 하면서 보병은 남겨두고 정예기병만을 데리고 제나라 군대를 서둘러서 추격합니다.
손빈이 방연의 행군속도를 계산해보니 저녁때 마릉이라는 언덕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마릉은 길이 좁은데다가 길 양쪽이 몹시 험준해서 매복하기에 좋은 곳이어서 만명의 쇠뇌궁수를 숨겨두게 됩니다. 그리고 큰 나무의 껍질을 벗겨 "방연이 이 나무아래에서 죽다."라고 새겨두고 만병의 매복군에게는 "해가 저문 후에 나무아래에서 불빛이 보이면 그 곳을 향해 화살을 발사하라."고 명령합니다.
과연 밤중에 방연이 마릉에 도착해서 보니 큰 나무에 뭐라고 글씨가 새겨져 있어 불을 밝혀 나무를 비추자 만여발의 쇠뇌가 발사되어 위나라 군대가 우왕좌왕할 때 제나라 군대가 위나라 군대를 모조리 쳐부수고 위나라의 태자를 사로잡게 됩니다. 방연은 "드디어 애송이가 이름을 날리게 되었구나!"라고 말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게됩니다.
이때 손빈의 계략을 감조유적(減竈誘敵)이라고 합니다. 아궁이 수를 줄여 적을 유인했다는 뜻입니다. 삼국연의에서도 여러번 인용되는 고사입니다. 손빈의 병법은 기묘한 책략을 써서 상대를 제압합니다. 이후로 손빈의 이름이 세상에 떨치게 되고, 그의 병법이 대대로 전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원국의 <춘추전국이야기>에 따르면 손빈이 기이한 책략으로 여러번 전쟁에서 이겼지만 제나라가 강해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손빈은 정병(正兵)이 아닌 기병(奇兵)을 애호했지만 기병은 일시적이고 한계가 있어 꾸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강병이 되려면 정치와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야 하는데, 근본을 방치하고 말단의 책략으로 전쟁을 수행하니 오래가지 못한 것입니다.
위나라 방연을 채용한 왕이 위혜왕인데, <맹자>에 나오는 양혜왕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위나라의 수도가 원래 진나라와 가까운 안읍이었는데, 진나라가 계속 침범해오자 수도를 동쪽인 대량으로 옮기게 됩니다. 그래서 대량의 양을 따서 양혜왕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맹자>에 이 마릉전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양혜왕이 맹자에게 "위나라는 천하에 둘도 없는 강국이었는데, 동쪽으로는 제나라에 패하고 장남이 전사하였습니다. 서쪽으로는 진나라에 700여리의 땅을 잃었고, 남쪽으로는 초나라에 굴욕을 당하였습니다. 과인은 진실로 치욕으로 생각합니다. 죽은 동포들을 위하여 크게 설욕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물어봅니다. 혜왕의 말 중에서 "동쪽으로 제나라에 패하고 장남이 전사"한 전투가 마릉전투입니다. 이에 대한 맹자의 대답은 "왕도를 실천하여 형벌을 감면하고, 부세를 경감하며 백성들이 마음놓고 농사를 짓게하며 부모 형제를 잘 섬기게 하면 폭악한 다른 나라를 정벌할 수 있습니다. 인자무적(仁者無敵)이라 했으니 의심하지 마십시오."라고 합니다. 아마 혜왕은 '당장 군대를 끌고가서 통쾌하게 이기는 방법을 말해줘야지 인정(仁政)을 베풀라고 하니 어느 시절에 복수를 한단 말인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마천은 사기를 저술하면서 공정하게 기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자신의 행적보다 지나치게 비난받고 있던 소진에 대해서는 실상을 자세히 기록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였고, 여태후의 악행은 기록하면서도 여태후의 치하에서 백성들은 비교적 태평성세를 누렸다고 냉정하게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오기에 대해서는 오기를 비방하고 참소하는 말을 사실인 것처럼 기록해서 오기가 마치 싸이코 패스 또라이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사마천은 "오기가 각박하고 모질어서 은혜를 베푸는 데 인색하다"고 평가했지만 공원국의 <춘추전국이야기>에 의하면 오기는 전국시대 통틀어서 최고의 전략가, 정치가, 병법가, 개혁가입니다. 그가 10년만 더 서하를 맡아 위(魏)의 군대를 지휘했다면, 전국시대를 통일하는 나라는 진(秦)이 아니라 위(魏)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기는 겉으로는 강해보이지만 동정심이 많고 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군대의 최고 지휘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양식을 자기가 지고 다니던 사람이었고, 적진에 들어가서도 밭가운데에 들어가지 않고 곡식을 피해서 막사를 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오기를 따르다가 죽었는데 그 아들이 또 오기를 위하여 죽으려 했습니다. 이는 진심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중인격자의 위선으로 이런 충성심을 이끌어 내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공원국씨는 "필자는 오히려 태사공(사마천) 같은 안목을 지닌 이가 유독 오기가 한 일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그런 평을 내놓은 것이 슬프다."고 말합니다.
오기열전에서 사마천은 오기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기는 위(衛)나라 사람인데 용병에 뛰어났다. 일찍이 증자에게 배웠으며 노나라 군주를 섬겼다.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였는데, 노나라는 오기를 장군으로 삼고 싶었으나 오기의 부인이 제나라 여자였기 때문에 오기를 믿지 못하였다. 그러자 오기는 자기 아내를 죽여서 제나라와 같은 편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노나라가 마침내 오기를 장군으로 삼았고, 오기는 노나라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다.>
처음 소개부터 오기를 이름을 날리고 싶은 마음에 아내를 죽인 잔인한 인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오기가 아내를 죽였다는 말은 오기를 어떻게든 장군자리에서 끌어 내려고 참소한 사람들이 왜곡날조한 것이 거의 확실한 듯 합니다. 사마천의 사기보다 더 오래된 책인 한비의 <한비자>와 여불위의 <여씨춘추>에는 오기가 아내를 죽인 것이 아니라 이혼해서 집에서 내보낸 것으로 나옵니다. 그 이유도 오기의 아내가 옷감을 짜는데 계속 규정에 어긋나게 해서 먼저 변법을 실행하려고 하는 개혁가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이 내보냈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노나라 사람이 오기를 비방하는 말을 사실처럼 서술했습니다. <오기는 사람됨이 시기심이 강하고 잔인하다. 오기가 어렸을 때 벼슬을 얻으려 돌아다니다가 이루지 못해 고향으로 돌아오니, 마을사람들이 오기를 비웃었다. 오기는 자기를 비웃은 사람 삼십여 명을 죽이고 위(衛)나라를 떠났다. 그는 모친과 이별할 때에, 팔을 물어뜯으며 맹세하기를, "저는 경상의 벼슬을 못하면,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노나라에 가서 증자를 섬겼다. 그 얼마 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끝내 돌아가지 않았다. 이에 증자는 오기에게 냉담하게 대하다가 인연을 끊었다....>
이에 대해 공원국씨는 오기가 무슨 무협지의 고수도 아닌데 어떻게 삼십명이 넘는 사람을 죽일 수 있냐고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맹세하는 말도 지어낸 말이 확실합니다. 오기가 천하의 못된 불효자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오기를 스승인 증자가 절연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날조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증자는 공자의 가장 나이 어린 제자로 부모님께 지극한 효도를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심지어 증자는 효경을 저술한 사람입니다. 지극한 효도의 실천자인 증자와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불참한 불효자인 오기를 대비시켜 오기를 인간말종으로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찾아보니 증자가 죽었을 때, 아직 오기는 태어나지 않았거나 서너살에 불과한 나이였습니다. 증자와 오기는 만난 일 조차 없어서 절연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기에 대한 비방은 열전의 바로 아래 내용에서 이미 거짓으로 드러납니다. <오기는 위(魏)나라 문후가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섬기고자 하였다. 이에 위나라 문후는 그를 장군으로 삼아 , 진나라를 공격하여 다섯개의 성을 빼앗았다. 오기는 장군이 되었을 때, 가장 신분이 낮은 병사들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었다. 누워 잘 때 자리를 깔지 않았고, 행군할 때 말을 타지 않았으며, 자기의 식량을 직접 가지고 다니는 등, 병사들과 노고를 함께하였다. 오기는 등창이 난 병사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주었는데, 그 소문을 듣고 병사의 어머니가 소리내어 울었다. 사람들이 이유를 묻자 "예전에 오공이 그 애 아버지의 등창을 입으로 빨아주었는데, 이에 감동한 애 아버지가 전투에서 물러나지 않고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이번에 오공이 아들의 등창을 또 빨아 주었다 하니, 저는 아들이 어디서 죽을 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통곡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싸이코패스 인간말종이 이렇게 병사들과 노고를 같이하는 장군이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오기를 참소하기 위하여 그들끼리 논의하는 중에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 "오기는 사람됨이 절개가 굳고 청렴하며 자신의 명예를 중요시 합니다."> 이런 성품의 사람이 수십명의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아내를 죽이고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황하는 오르도스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다 다시 방향을 꺽어 동쪽으로 흘러 황해로 빠집니다. 동쪽으로 꺽이기 전에 남쪽으로 내려오는 황하를 사이에 두고 서쪽으로 진나라가 있고 동쪽으로 위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황하의 서쪽 지역을 하서 또는 서하라고 불렀는데, 이 지역은 진과 위가 서로 차지하려는 요지였습니다. 위가 차지하면 진은 관중에 갇혀 진의 수도까지 위협받게 됩니다. 진이 동쪽으로 나오려면 반드시 공략해야 하는 올가미 같은 지역이어서 진과 위는 이 서하를 차지하기 위해 격렬하게 싸우게 됩니다.
위나라 문후는 전국시대 초기의 명군으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공자의 제자인 자하를 스승으로 섬겼고, 뛰어난 인재들을 모아 위를 전국시대 초기에 가장 강력한 나라로 만듭니다. 문후는 소국에서 온 오기를 다른 많은 장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장으로 임명하여 진과 맞서게 합니다. 문후와 오기의 전략은 '동쪽과는 친하고 서쪽으로 진나라와 맞선다.'는 것입니다.
오기는 서하의 수(守)가 되어 5만의 병사를 지휘하여 진의 대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76번을 싸워 64승을 거뒀고, 12번은 승부가 나지 않았습니다. 불패의 신화를 쌓은 오기는 서하지역을 공고히 하기 위해 성을 쌓고 위의 백성들을 이주시키니 진에서는 두려움에 떨었다고 합니다.
전장에서 오기는 변화무쌍한 전술을 구사했지만 기본적으로 정면대결 능력을 키운 것이 승리의 열쇠였다고 합니다. 손빈은 정병을 육성하기 보다는 기병을 많이 활용했지만 오기는 기본적으로 정병을 추구한 병법가였습니다.
오기가 서하에서 진나라와 전투를 계속하고 있을 때, 문후가 죽고 그 아들인 무후가 군주가 됩니다. 무후가 못난 임금은 아니지만 문후와 오기가 세웠던 '동쪽의 조나라, 한나라와 친하고 서쪽으로 진나라와 대결한다.'는 전략원칙을 깨고 조나라와 한나라와 전쟁을 하기 시작하여 나라가 점점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위나라는 중국의 한 가운데에 있어서 사방이 진, 조, 한, 초, 제에 둘러싸인 나라입니다. 진나라는 급소를 막고있는 위나라와의 전쟁을 포기할 수 없어서, 위나라로서는 진나라와 전쟁하면서 다른 지역에서 또 전쟁을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위나라의 강병 5만을 가진 오기가 마음이 변하여 진나라 편을 들으면 위험하다."는 참소를 듣고 오기를 장군직에서 해임하니 이때부터 위가 결정적으로 약해집니다.
오기는 "군주께서 내 뜻을 알아 내 재주를 모두 펼치게 했으면, 서하를 기반으로 천하의 왕이 될 수 있었을텐데 이제 참소를 듣고 나를 물러나게 하니 서하가 진의 땅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고 눈물흘리면서 군대지휘권을 반납하게 됩니다. 서하에서 돌아왔지만, 일신의 안위까지 위협받는 처지가 된 오기는 초나라로 망명하게 됩니다.
그 때 초나라의 왕은 도왕이었는데, 오기가 현명하다는 것을 알고 재상으로 삼게됩니다. 도왕의 전적인 신임하에 오기는 초나라를 개혁하기 시작합니다. 법령을 명확하고 상세하게 했고, 긴급하지 않은 관직은 없애고, 왕의 먼 친척의 지위를 폐합니다. 전사들을 어루만지듯 보살펴서 강한 군사력으로 만들어, 남쪽으로 백월을 평정하고, 북쪽으로 진(陳)나라와 채나라를 병합하고, 삼진을 물리치고 서쪽으로 진(秦)나라를 공격하니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의 강성함을 근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득권을 잃게된 왕의 친족들과 귀족들은 어떻게든 오기를 해치려고 온 힘을 쏟게됩니다. 도왕이 살아있을 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불행하게 또 도왕이 일찍 죽게됩니다. 그러자 왕족과 대신들이 난을 일으켜 오기를 습격합니다. 오기는 도왕의 시신이 있는 곳으로 도망가서 그 위에 엎어지자, 오기를 습격하던 자들이 오기를 향해 화살을 쏘아 죽입니다. 그 와중에 화살이 도왕의 시신에도 맞게됩니다.
도왕의 장례가 끝나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자 오기에게 화살을 쏘다가 왕의 시신도 함께 맞춘 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도록 합니다. 이일에 연루된 일족이 70 집안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 일화는 자기 몸이 죽었지만 적에게 복수한 권모술수로 회자되는 사건입니다. 오기는 죽어서까지 병법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죽은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