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은, 서구 문명이 그 누구에게도 안전한 삶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고 생각해 뉴욕을 떠나 버몬트 시골로 들어간다. 자연 속에서 서로 돕고 기대며, 자유로운 시간을 실컷 누리면서 저마다 좋은 것을 생산하고 창조하는 삶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조화로운 삶을 살기 위한 원칙을 세운다. 먹고 사는 데 필요한 것들을 적어도 절반 넘게 자급자족한다. 스스로 땀 흘려 집을 짓고, 땅을 일구어 양식을 장만한다. 그럼으로써 이윤만 추구하는 경제에서 할 수 있는 한 벗어난다. 돈을 모으지 않는다. 따라서 한 해를 살기에 충분할 만큼 노동을 하고 양식을 모았다면 돈 버는 일을 하지 않는다. 되도록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쳐 일을 해낸다. 집짐승을 기르지 않으며, 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 책은 이러한 원칙대로 산 두사람이 버몬트에서 지낸 스무 해를 낱낱이 기록한 책이다.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서는 다 못 본 두 사람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손수 집을 짓고, 곡식을 가꾸고, 이웃과 함께 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그이들은 '삶은 만족감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원칙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땅에서 얻는다는 건강한 철학을 끝까지 잃지 않았다. 단순하면서 충족된 삶, 그것이 그이들이 평생토록 추구한 삶이었다. 그토록 철저한 삶의 방식에 경건한 기분마저 들었다."」 -류시화-
<시골로 가니 희망이 있었다> (pp.6-8)
「도시를 떠날 때 세가지 목표를 품고 있었다. 첫 번째는 독립된 경제를 꾸리는 것이었다. 우리는 불황을 타지 않는 삶을 살기로 했다. 할 수 있는 한 생필품이나 노동력을 시장에서 사고 팔지 않는 독립된 경제를 계획했다.」
「두번째 목표는 건강이었다.」
「세번째 목표는 사회를 생각하며 바르게 사는 것이었다. 우리는 되도록 많은 자유와 해방을 원했다.」
「스무 해의 체험 속에서, 이 가운데 어떤 것은 만족스러웠지만 어떤 것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 쓸모 없고 거칠기만 하던 산골짝의 땅뙈기를 개간해 기름진 밭으로 가꾸어 풍성하게 거두었다. 좋은 채소, 과일, 꽃이 다 거기서 났다.
둘, 집짐승이나 집짐승의 똥오줌, 화학 비료를 전혀 쓰지 않고도 농사일을 만족스럽게 해냈다.
셋, 몸을 누이고 쉴 집을 손수 지었고,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고 살았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을 만큼의 잉여 농산물도 있었다. 우리가 쓴 것들 가운데 4분의 3은 우리가 스스로 땀 흘려서 얻은 열매들이었다.
넷, 작은 사업을 시작하여 임금이 나올 만큼 제법 훌륭하게 꾸렸다.
다섯, 스무 해 동안 전혀 의사를 만나거나 찾아가지 않았을 만큼 건강을 지켰다.
여섯, 도시의 삶이 요구하는 복잡함 대신에 몹시 단순한 생활 양식이 자리잡았다.
일곱, 해마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시간을 여섯 달로 줄이고 나머지 여섯 달은 여가 시간으로 정했다. 여가는 연구, 여행, 글쓰기, 대화, 가르치기 들로 보냈다.
여덟, 우리 집은 늘 열려 있어서 누구나 찾아와 함께 먹고 잘 수 있었다. 사람들은 며칠 동안 묵기도 했고, 몇 주 또는 그보다 더 오래 머물기도 했다.」
<조화로운 삶을 찾아서> (pp.17-20)
「이 문명을 대신할 확실한 대안을 찾지 않고서는 우리가 바라는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럼 대안이 무엇일까? 우리는 다음 세 가지 방향에서 그 해답을 찾아 나갔다.
첫번째로, 우리는 점점 더 참을 수 없게 만드는 이 사회에서 탈출해 다른 나라로 망명해 살아갈 가능성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생각을 곧 마음 속에서 지워 버렸다.」
「우리는 삶으로부터 도피해 어딘가로 멀찌감치 달아나기를 꿈꾸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와 정반대로 삶에 더 열중할 수 있고, 삶에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찾으려 하고 있었다.」
「두번째 대안은 이 도시 문명 속에서 그냥 살아가는 일이었다. 도시에서 협동 공동체나 계획 공동체를 이루어 살 수 있을지 우리는 진지하게 따져 보았다. 하지만 그 때엔 그런 일이 눈앞에 펼쳐질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결국 우리는 세번째 대안을 선택했다. 그것은 시골에 내려가, 자급자족하며 사는 삶이었다.」
「우리가 조화로운 삶을 사는 데 기본이 될 만한 것이라고 여기는 최소한의 몇가지 가치들이 있었다. 바로 그것들을 마련해 줄 수 있는 환경과 일을 찾고 있었다. 그 기본 가치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단순한 생활,
긴장과 불안에서 벗어남,
무엇이든지 쓸모 있는 일을 할 기회,
그리고 조화롭게 살아갈 기회.
단순함, 고요한 생활, 가치 있는 일, 조화로움은 단순히 삶의 가치만이 아니다. 그것은 조화로운 삶을 살려는 사람이라면 만족스러운 자연 환경과 사회 환경에서 당연히 추구해야 할 중요한 이상이고 목표이다.」
「우리의 두번째 목표는, 일을 해서 삶의 기쁨을 키워 나갈 수 있는 환경을 찾는 일이었다. 허리를 굽혀 일을 함으로써 자기가 성장해 가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를 가치 있고 소중하게 여기는 일이었다. 스스로 땅을 일궈 먹고 살 수 있게 된다면, 사람을 가만 놔두지 않는 이 거대한 현대 문명의 손길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세번째 목표는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많은 부분을 자유시간으로 갖는 것이었다. 단지 먹고 사는 일에서 벗어나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일에 몰두하고, 이웃들과도 결실이 있는 진정한 관계를 맺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홀로 또는 집단의 한 사람으로 사회를 개선하는 일에 열정을 쏟을 수 있기를 꿈꾸었다.」
「먼저 어디로 가야만 할까? 갈 곳이 너무 많았다.
우리는 철이 여러 가지로 바뀌는 것을 좋아한다. 만일 다른 지방으로 갔다면, 뉴잉글랜드(미국 북동부 코네티컷, 매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버몬트, 뉴햄프셔, 메인 주를 통틀어 일컫는 말)의 기후가 내려 주는 끝없는 놀라움과 기쁨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삶의 원칙> (pp.31-60)
"해가 뜨면 일하러 가고
해가 지면 돌아와 쉰다.
우물을 파서 물을 얻고
땅을 일궈 곡식을 거둔다.
이처럼 우주의 창조에 동참하니,
왕이라 해도 이보다 나을 수 없다." -고대 중국, 기원전 2500년-
「살아가는 방편을 터득한 채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듯이, 농사짓는 기술을 터득한 채 태어나는 사람도 없다. 삶의 방편이 다 그렇듯이 농사짓는 기술도 배워야 한다. 아무렇게나 한 일에서 얻은 만족이 오래 가지 않듯이, 흙과 기후에 아랑곳하지 않고 뿌린 씨앗에서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없다. …정한 목표를 향해 흔들림 없이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루던(J. C. Loudon), <<농업백과사전 An Encyclopedia of Agriculture>>, 1825년-
「사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되는 대로 그냥저냥 살아가는 것, 아니면 인생에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더 나은 길을 찾아 성실히 사는 것이다. 더 나은 것을 이루며 살겠다는 생각은 자기 자신의 삶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 더 나아가 인류의 미래까지 더 나아지게 만든다.」 -헉슬리(Julian Huxley), <<생물학자의 생각 Essays of a Biologist>>, 1923년-
「우리 삶의 중심 원칙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하나, 우리는 먹고 사는 데 필요한 것을 절반쯤은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이윤 추구의 경제에서 할 수 있는 한은 벗어나기를 희망한다. …
우리는 다음과 같은 단계를 밟아서 자급자족 경제를 이루어 보려고 했다. 첫째, 우리 밥상에 올리기 위해 땅과 기후가 허락하는 한 곡식을 많이 가꾼다. 둘째, 거둔 곡식을, 우리 가 생산하지 않거나 생산할 수 없는 곡식이나 물건들과 바꾼다. 셋째, 연료로 나무를 때며, 나무는 우리 손으로 해 온다. 넷째, 농장에 있는 돌과 나무를 써서 필요한 건물을 짓되, 반드시 스스로 한다. 다섯째, 썰매, 짐수레, 모래 치는 망, 사다리 같은 장비들을 만든다. 여섯째, 돈을 주고 사야만 하는 장비, 연장, 부속품, 기계 같은 도구는 되도록이면 적게 쓴다. 일곱째, 만일 쟁기, 트랙터, 경운기, 불도저, 기계톱과 같은 장비들은 한 해에 몇 시간이나 며칠쯤만 써야 한다면 그 기계를 돈 주고 사 오는 대신 동네 사람들에게 잠시 빌리거나 다른 것과 바꿔 쓴다.
둘, 우리는 돈을 벌 생각이 없다. 또한 남이 주는 월급을 받거나 무언가를 팔아 이윤을 남기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바람은 필요한 것들을 될 수 있는 대로 손수 생산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하는 것이 일차 목적이다. 한 해를 살기에 충분할 만큼 노동을 하고 양식을 모았다면 그 다음 수확기까지 돈 버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은 <<사람과 책 Men and Books>>에서 이렇게 썼다.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돈은 우리가 사도 되고 안 사도 되는 상품의 하나이며, 우리가 마음껏 탐닉할 수도 있고 절제할 수도 있는 사치품이다. 세상에는 우리가 돈보다 더 탐닉할 수 있는 많은 사치품들이 있다. 그것은 고마워할 줄 아는 마음, 시골 생활, 마음이 끌리는 여성 같은 것이다."
시럽의 값을 말해 주고, 그것과 값이 같은 귤, 호도, 올리브 기름, 건포도 따위와 우리의 시럽을 맞바꾸자고 제안했다. 이런 거래를 해서 현금을 한 푼도 내지 않고 우리가 생산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것들을 구할 수 있었다. 사탕단풍나무 숲과 제당소에서 땀 흘려 일해서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를 좀 더 느긋하게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또 시럽과 설탕을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무언가를 팔 때는 정확히 원가를 계산해서 값을 매기고자 노력했다. 이 값은 시장에서 받을 수 있는 돈이 아니라 원가를 계산해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때의 하루 일당과 우리가 그 일에 얼만큼 시간을 쏟았는가를 계산해서 정한 값이다.
해마다 그 해에 필요한 양식을 생각해 밭에 심을 곡식의 양을 결정했듯이, 우리는 반드시 필요한 현금에 맞추어 돈을 벌려고 했다. 필요한 것이 마련되었다고 판단되면, 그 해의 남은 시간 동안에는 더 이상 농사를 짓지 않았고, 돈을 더 벌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먹고 사는 것만 해결하고자 했으며, 이렇게 일단 기본 생활 수단이 마련되면 다른 일들에 관심을 돌려 열중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진 것은 사회 활동, 그리고 독서와 글쓰기와 작곡 같은 취미 생활이었다. 또한 그 때 농장시설을 손보고 고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셋, 우리는 모든 일에 들어가는 비용을 우리가 가진 돈만으로 치를 것이다. 은행에서는 절대로 돈을 빌리지 않을 것이다. 땅이나 집을 담보로 넣어 융자를 얻은 뒤 이자를 갚느라 허덕이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넷, 우리는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수확물로 해마다 봄이면 단풍 시럽을 생산할 것이다. 그리고 될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쳐 이 일을 할 것이다.
다섯, 우리는 능률있게 시럽을 생산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이 땅을 판 호드 씨의 오래 된 제당소를 새 건물로 바꾸고 새로운 장비도 들여 놓을 것이다.
여섯, 단풍시럽과 설탕을 팔아서 번 돈으로 필요한 것을 충분히 살 수 있는 한, 우리 땅에서 아무것도 내다 팔지 않을 것이다. 밭에서 거둔 채소나 곡식이 남는다면 이웃과 친구들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줄 것이다.
일곱, 우리는 집짐승을 기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농부와 짐승을 똑같이 옭아매는 구속과 의존 상태에서 자유롭다. '노예를 두고 있는 사람은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는 옛날 속담을 이렇게 바꿔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집짐승을 기르는 사람은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쇼(Bernard Shaw)는 이렇게 말했다.
"집짐승이 살아 있는 동안 양치기에서 푸줏간 주인에 이르기까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집짐승의 하인일 뿐이며, 나중에는 집짐승의 사형 집행인이 된다."
우리는 모든 생명이 똑같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사람뿐 아니라 사람이 아닌 생명체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우리는 재미 삼아 사냥이나 낚시질을 하지 않으며, 고기를 먹지도 않는다. 더구나 생명에 대해 외경심을 품고 있기 때문에 함께 사는 동료 생명체들을 노예로 만들거나 착취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많은 농부들이 집짐승을 돌보는 자질구레한 일에 시간을 빼앗기며 살고 있고, 자기가 아니라 집짐승이 먹을 음식을 구하느라 애를 먹는다. 그이들이 만일 우리처럼 한다면 일하는 시간이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여덟, 우리는 낡은 집들을 고치느라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필요할 때까지는 그 집들을 그냥 쓸 것이고, 수리는 꼭 해야 할 때만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농장에 있는 집들 여러 채가 쓰러져 가고 있다는 것은 우리도 대충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만일 그 집들이 더 이상 쓸모가 없다면 첫 번째 선택은 그것들을 부수는 것이다. 쓸모 있고 꼭 필요한 경우에만 우리는 그 자리에 새 집을 지을 것이다.
몇몇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은 이렇게 항의하곤 했다. "이 낡은 집에 금 간 것 좀 봐요!"
그것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우리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훌륭한 조상들만큼 집을 잘 짓지는 못할 것이다. 둘째, 오래 된 집을 뜯어 고치는 일은 새 집을 짓는 것만큼 시간과 돈이 들어가며, 어떤 때는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갈 수도 있다. 미첼(D. G. Mitchell)은 <<에지우드의 우리 밭 My farm of Edgewood>>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골의 너저분한 곳을 새롭게 뜯어 고치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에게 주는 충고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얼핏 보면 그 일을 쉽게 해치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셋째, 비록 공을 많이 들여 오래 된 집을 훌륭하게 고쳤다 하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낡은 구조물을 갖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낡고 썩어들어 가기까지 한 문지방, 녹슨 장식 못과 양철판, 들보, 서까래가 그대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모서리나 집의 외곽선이 정확히 직각을 이루고 있을 리 없고, 건축 양식이나 설계는 사실 지금 사람들이 살기에 알맞지도 않다. 풀러(Thomas Fuller)의 말대로 "오래 된 집을 고친다 해도 원래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기가 힘들고, 결국은 처음 그 집을 지은 사람의 취향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아홉, 우리는 평생 살 집을 지을 땅과 생활에 필요한 건물들을 지을 장소를 신중하게 생각해서 정할 것이다. 그리고 밭은 우기에는 물이 잘 빠지고 건기에는 물을 대기 쉬운 자리에다 만들 것이다.
열, 우리는 자연에 있는 돌과 바위로 집을 지을 것이다. 일찌감치 서둘러서 집 지을 재료를 모아야 이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아 온 돌들을 모두 쓸모에 따라 하나하나 분류해 놓을 것이다. 벽을 쌓을 돌, 주춧돌, 굴뚝에 쓸 돌, 바닥에 깔 돌, 테라스 돌, 벽난로 돌 따위를 집 지을 때를 대비해 따로따로 모아 둘 것이다.」
「구어거스(J. M. Gourgas)는 <<뉴잉글랜드 농부 The New England Farmer>>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돌집을 짓는 비용의 많은 부분은 건축 재료를 모으는 데 들어간다. 만일 재료들을 겨울이나 한가한 때에 모을 수 있고 또 그것들을 집 지을 현장 가까운 곳에 쌓아 둘 수 있다면, 산뜻하고 멋진 집을 짓는 비용은 먼 곳에서 목재와 판자를 사다가 집을 짓는 것보다 훨씬 적게 먹힐 것이다."」
「투서(Thomas Tusser)가 <<좋은 농부가 되는 오백 가지 방법 Five Hundred Pointes of Good Husbandrie>>에서 한 충고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밭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는 반드시 돌을 들고 오라. 밭에 둘이 많으면 그만큼 농사짓기가 힘들다. 일꾼들도 손에 돌을 들고 집으로 오게 하라. 날마다 이렇게 하면 그대는 길에 깔기에도 멋지고 벽을 쌓기에도 좋은 돌을 많이 갖게 되리라."」
「90도로 각진 돌에는 '모서리돌', 평평하고 잘생긴 돌에는 '일등품', 거죽이 매끄럽고 얇고 넓적한 돌에는 '바닥돌', 그런 대로 모서리가 매끈한 보통돌에는 '굴뚝돌', 기초를 다지거나 다른 곳을 메우는 데 쓸 만한 평범한 크기와 모양을 가진 보통 돌에는 '못난 돌'.
열하나, 우리의 집 짓는 계획에 따라 가장 먼저 세울 새 집은 생나무를 저장해서 가장 좋은 상태에서 말릴 수 있는 목재 창고가 될 것이다. 집을 지을 때 이 창고에서 바짝 마른 목재들을 가져다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열둘, 콘크리트를 만들려면 모래와 자갈이 있어야 하므로, 좋은 모래와 자갈을 구할 수 있는 데를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농부들의 달력 The Farmer's Calendar>>에서 영(Arthur Young)은 농부들에게 이렇게 충고하고 있다.
"맑은 날이든 비 오는 날이든 다음 날 할 모든 일을 차례로 정리해 놓고 있어야 하며, 지난날에 거래한 내역을 낱낱이 기록한 농장 장부를 따로 만들어 놔야만 한다. 이 밖에도 자잘한 일들의 결과나 의문점, 나름의 생각, 계산 내용 따위를 적어 두기 위해, 그리고 다음 번에 같은 일을 할 때 여러 방법을 차례로 적용하고 서로 견주기 위해서도 또 다른 장부를 갖고 있어야 한다. 낱장으로 놔두면 잃어버리기 쉽다. 그래서 과거에 판단하고 토론한 일을검토하기 위해 서류철을 뒤져 보려면, 그 기록을 찾는데 드는 시간이 새로 너덧 장을 만드는 시간보다 더 걸릴 때가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책으로 해 놓는다면, 바라는 것을 손쉽게 찾을 것이고, 이전의 생각과 경험을 살려 당신의 지식은 뚜렷이 늘어만 갈 것이다."」
「마컴(Gervase Markham)은 1616년에 <<시골 농장 Country Farm>>에서 다음과 같은 습관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당신은 일꾼을 여럿 두듯이 철물점처럼 연장과 공구를 두 배로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이웃에게서 아무것도 빌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새 연장을 사러 돌아다니느라 하루의 중요한 일을 끝마치지 못하는 일이 생길 것이다."
대부분의 연장들은 한평생 쓸 수 있어야 한다. …
우리가 땅의 수평을 재거나 집을 지을 때 쓴 측량 기사용 수평자와 나침반은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구어거스(J. M. Gourgas)는 <<뉴잉글랜드 농부 The New England Farmer>>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농부는 여러 가지 조건상 철저하게 절약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이나 가릴 것 없이 낭비를 막으려고 노력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 70달러에 소달구지를 사고 45달러에 손수레를 샀다면, 이 수레들을 타는 듯한 태양 아래나 비 속에 내버려 둬서는 안 되며, 쓰지 않을 때는 창고에 잘 넣어 둬야 한다. 쟁기와 다른 도구들도 똑같은 방법으로 간수해야만 한다."
카펜터(Edward Carpenter)는 <<정부 없는 사회 Non-Governmental Society>>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삶의 중요한 요소가 짜증스럽다면, 무슨 살 맛이 나겠는가? 특히 언제나 중요한 요소로 있어야 하는 것이 그렇다면. 정말 그래서는 안 된다. 참된 경제 활동이란 당신이 날마다 하는 일 바로 그것에서 스스로 큰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집을 짓다> (pp.63-87)
「"내가 행복의 보금자리를 지으려 할 때, 자연만이 그 건축가가 될 수 있다. 자연은 웅장한 집보다는 편리한 집을 지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그 자리로 시골을 고를 것이다."
호라티우스(Horatius), <<첫 번째의 책 First Book>>, 기원전 20년
"사람이 집을 짓는 것은 새가 둥지를 트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만일 사람이 자기 손으로 집을 지어 단순하고 정직하게 식구들을 먹여 살린다면, 새가 그런 일을 하면서 언제나 노래하듯이, 사람도 시심이 깊어지지 않겠는가. 그러나 아! 우리는 찌르레기나 뻐꾸기처럼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고 산다."
소로(Henry Thoreau), <<월든 Walden>>, 1854년
"살면서 가장 큰 기쁨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자기가 살 집을 짓는 것이다. …집을 지을 때 사람들은 거기에만 골몰하게 된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방과 부엌을 어디에 꾸미는게 가장 좋을지 몇십 번도 더 계획을 고쳐 본다. 땅을 파기 시작하면 손수 삽을 들고 나선다. 그 때 흙은 정말 달라 보인다. 다른 흙보다 더 가깝고 살갑게 느껴진다. 기초 벽을 세우고, 들보며 기둥으로 대강 일층의 틀을 잡은 다음에는, 깊은 생각에 잠겨 아직 완성되지 않은 방을 들락날락한다. 또 달콤한 공상에 빠져서 들보 위에 하염없이 앉아 있는다."
버로스(John Burroughs), <<계시와 계절 Signs and Seasons>>, 1914년
"내 생각에, 자연은 사람이 삶을 이어 가도록 세 가지를 주었다. 먹을 거리를 기르는 땅, 세간살이를 만드는 나무, 집을 짓는데 쓰는 돌."
피터스(Frazier Peters), <<돌집 Houses of Stone>>, 1933년」
「집을 지을 때 따라야 하는 네가지 원칙에 대해 감히 말하고자 한다.
첫째, 모양과 기능을 모두 따져서 집의 구조를 결정해야 한다.
집의 안정감과 조화는 겉모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집의 가장 깊은 본질에서 우러나온다. 케이크에 장식을 하는 것처럼 집에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덧붙일 수는 없다. 집은 꼼꼼히 설계를 해서 쓸모에 맞도록 해야 하고, 나아가 필요 없는 재료와 노동을 들이지 않고서도 그렇게 될 수 있어야 한다. 반드시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나누어 따져 보고 집의 윤곽과 형태를 결정해야만 한다. 몇몇 예외가 있긴 하지만, 보통은 집 바깥에 무엇인가를 덧대고 치장하는 것은 집이 가진 본래의 아름다움을 떨어뜨릴 뿐이다. 라이트(Frank Lloyd Wright)는 <<집 짓기 On Architecture>>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떤 집이 정말로 쓸모에 따라 잘 설계되고 저마다의 공간이 제대로 배치되어 있다면, 그림 같은 모습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고 굳게 믿고 있다."
둘째, 집은 둘레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집은 마땅히 둘레 환경과 하나가 되고, 따로 뗄 수 없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 곳을 둘러보는 사람이 어디서 주변 경관이 끝나고 어디서부터 집이 시작되는지 구분하기 어려워 다시 한 번 쳐다볼 정도가 되어야 한다.」
「딕(Stewart Dick)은 <<잉글랜드의 시골집 The Cottage Homes of England>>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래 된 시골집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다. 시골집은 둘레 환경을 지배하지 않으며, 그 일부가 되는 것에 만족한다. 어떤 사람이 시골집이 가진 수수한 아름다움에 특별히 관심이 없이 무심히 지나쳐도 그만이다. 그러나 요새 집들은 우리 눈길을 막무가내로 끌어 당긴다. 대저택들은 높은 땅에 올라 앉아 시골의 넓은 땅을 호령하며, 멀리서도 눈에 뜨인다.
하지만 오래 된 시골집은 그늘진 골짜기에 아늑하게 자리잡기를 좋아한다. 나무가 집 가까이에 벗처럼 다정하게 자라고 있으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면 동그랗게 피어 오르는 연기만이 그 곳에 집이 있음을 알려 준다."」
「라이트의 말을 다시 들어 보라.
"자연 경관이 빼어난 곳이라면 집은 그 자리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자연의 일부로 자라난 것처럼 보여야 하고, 둘레 환경과 어울리는 모습을 가져야 한다. 만일 자연 경관이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기회로 생각해서 될 수 있는 한 편안하고, 튼튼하며, 쓸모 있게 집을 짓도록 노력해야 한다."
셋째, 집은 되도록 그 고장에서 나는 재료들을 써서 짓는 것이 좋다.
집이 마치 처음부터 그 곳에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둘레의 일부분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면 다른 곳에서 가져오기보다는 그 고장에서 나는 재료를 쓰는 것이 훨씬 좋다. 본타(Edwin Bonta)는 <<내 손으로 집 짓기 The Small House Primer>>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집을 지으려고 먼 곳으로 희귀한 대리석이나 화강암을 가지러 가는 사람은 십중팔구는 그 재료들 때문에 자기 집의 개성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 하지만 돈을 아끼려고 시골에 아무도 모르게 묻혀 있는 돌을 캐러 다니는 사람은 자기가 바라는 대로 개성 있는 집을 짓는다!"
그리고 미첼(D. G. Mitchell)은 <<에지우드의 우리 밭 My Farm of Edgewood>>에서 말했다.
"내가 특히 말하고 싶은 것은 둘레에 있는 하찮은 재료들을 써서 돈을 철저히 아끼면서도, 튼튼하고 그림 같은 집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넷째, 집의 생김새는 거기에 사는 사람을 표현해야 하고, 그 집으로 집 주인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의 성격은 그 사람이 사는 집의 모양으로 드러나며, 집을 정돈해 놓은 것으로도 집 주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고 위버(Richard Weaver)도 말한다. 한편<그 사람들 They>이라는 짧은 글에서 키플링(Rudyard Kipling)은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뒤늦게 핀 꽃들과 집 안 전체에 감도는 은은한 평화로움에 취해 조용히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때때로 무척이나 애를 써서 자기에 대해 그럴 듯한 거짓말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집은 그 곳에 사는 사람의 진실한 모습을 말해 준다."」
「오래 전에 출간된 미첼의 <<에지우드의 우리 밭>>을 보면 숲 속 우리 집과 아주 잘 어울리는 말이 나온다.
"처음에 이 초라한 집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던 사람들이 이제 이 집에 애정 어린 관심을 갖게 되다니 정말 기쁘다. 우리 집은 둘레의 자연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 그리고 스스로의 쓸모에도 잘 맞는다. 시골집은 절대로 뽐내지 않으며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아, 의심스럽게 지켜 보던 사람들이 이제 입을 다물게 되었다."」
「구어거스(J. M. Gourgas)는 <<뉴잉글랜드 농부 The New England Farmer>>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돌집이 너무 낯설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런 집을 짓는 것이 엄청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돈을 많이 들이지 않고, 어렵지 않게 돌집을 지을 수 있다. 공공 건물이나 대저택을 지을 때는 해머나 정으로 돌을 다듬어 쓰는데, 이렇게 하면 그야말로 돈이 많이 든다. 하지만 평범한 돌로도 편안하고 깔끔한 집을 지을 수 있다. 들판에 널린 평범한 돌로 훌륭한 벽을 쌓는 것만 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강력한 시멘트와 뒤섞은 이 돌들은 훌륭한 건축물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리고 집을 다 지은 뒤에는 목적에 맞게 벽면을 돌로 처리하거나, 아니면 거친 상태로 놔 둘 수도 있다."
플래그는 <<작은 집 Small Houses>>에서 네 가지를 주장했다.
첫째, 돌집은 낮게 지어야 한다. 왜냐 하면 높이가 1.5미터가 넘으면서부터는 그 위에 돌과 콘크리트를 쌓는 비용이 높이에 비례해 늘어나기 때문이다. 만일 2층을 짓고 싶다면 다락처럼 되도록 낮게 지어야 한다.
둘째, 지하실 공간은 할 수 있는 한 작게 하고, 모든 바닥은 되도록 콘크리트로 만들어야 한다. 만일 원하는 것이 따로 있다면 콘크리트 바닥 위에 다른 것을 또 깔면 된다. 난방 파이프나 전선은 전선관이나 도관 안에 넣어서 설치한다.
셋째, 집은 탁 트인 하나의 공간이 되어야 하며, 문틀과 창틀은 단단한 재료로 만든다. 돌과 콘크리트로 벽을 세우고 아무런 장신도 하지 않아야 한다.
넷째, 벽은 다시 쓸 수 있는 거푸집으로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다 우리가 겪은 것을 바탕으로 세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다섯째, 지붕 선을 되도록 단순하게 만든다. 지붕창을 만들거나 본래의 지붕 말고 따로 모양을 내는 일이 되도록 없게 한다.
여섯째, 될 수 있는 대로 모든 것을 표준형으로 하는 것이 좋다. 군더더기를 없애서 되도록이면 돈을 적게 들인다.
일곱째, 충분히 크게 만든다. 왜냐 하면 돌벽을 한 번 세우면 건물을 넓히려고 벽을 부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집전체를 지으면서 우리는 몇천 개의 돌을 썼는데, 거의 모든 돌이 버로스(John Burroughs)가 <<계시와 계절 Signs and Seasons>>에서 말했듯이 "망치와 정으로 길들이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돌"이었다. 에지우드의 농장에서 집을 짓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미첼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돌도 망치로 다듬어서는 안 되며, 되도록 이끼가 끼고 비바람에 시달린 모양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우리가 집 짓는 일을 마무리하고 가구를 들여 놓는 데 적용한 기준은 바로 단순함과 편리함이다. 주름 장식, 장식품, 칠이 된 목공예품, 벽지, 커튼, 회벽, 조각품 따위 복잡한 가구나 골동품이 없다면, 본래의 아름다움을 간직하는 동양풍의 단순함을 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 번 이상의 삶 More Lives Than One>>에서 브래그던(Claude Bragdon)은 말했다.
"건축이란 그것 자체가 장식이다. 방이 만들어지면 그 방은 이미 장식된 것이다"」
벽은 집 전체와 하나로 어울리는 일부분이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벽을 마무리할 때 나중에 회칠을 하거나 벽지를 바르지 않는다. 그 대신 필요한 곳에 소나무, 가문비나무, 또는 참피나무 판자를 댔다.
우리는 방에 있는 판자마다 다른 빛깔을 내도록 했다. 벽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부드러운 느낌이 더해 갔고, 빛깔들이 어우러지면서 몇백 권이나 되는 책에 훌륭한 배경이 돼 주었다.」
<농사짓기> (pp.93-114)
「"나는 농부들의 고된 노동에 따르는 기쁨을 얘기하고 싶다. 나 자신은 뭐라 표현하기 힘든 만큼 기쁘다. 노인들에게서도 기쁨이 샘 솟듯 흘러 나온다. 기쁨이란 것은 이 사람들, 진실로 지혜로운 사람들 가까이 있는 것 같다."
키케로(Cicero), <<노인에 대하여 De Senectute>>, 기원전 45년
"하늘이 내게 일과 일터를 스스로 고르도록 기회를 주셨다면, 나는 땅과 우물이 있는 곳, 곡식을 내다 팔 시장이 가까이 있는 곳을 골랐을 거라 생각하곤 하네. 땅을 가꾸는 것만큼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은 없다네. 그 가운데서도 밭 가꾸는 일을 최고로 꼽을 수 있지. 그 갖가지 채소들 하며, 어떤 것은 늘 잘 자라 주고, 하나가 잘 안 돼도 다른 게 잘 되어서 보상 받을 수 있지. 하나를 거두어들이고 나면 또 다른 걸 거두어들일 수 있다네. 한 해 내내 그렇지. 나는 큰 욕심 없이. 우리 집 밥상을 위해 오늘도 밭에 나가네."
제퍼슨(Thomas Jefferson), <찰스에게 보내는 편지 Letter to Charles E. Peale>, 1811년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손에 넣을 수 있는 음식을 먹는다. 다만 좋은 것을 먹는가, 나쁜 것을 먹는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자기 밭에서 나는 채소와 과일을 먹는 사람은 자기 밭을 갖고 있지 않은 부자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먹는다."
루던(J. C. Loudon), <<밭농사 백과 사전 An Encyclopedia of Gardening>>, 1826년」
「4백평도 안 되는 밭에서 쌀과 보리 따위의 곡식 말고도 여섯 사람이 먹기에 충분한 온갖 먹을 거리를 거둘 수 있었다.
우리는 퇴비 더미를 가로 세로 2미터로 네모나게 만들었다. 중요한 것은 보름쯤이면 퇴비 더미를 다 만들 수 있도록 작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퇴비 더미의 크기가 작을수록, 그 안에서 나는 열도 줄어든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퇴비 더미에서 나는 열은 잡초 씨앗을 파괴하고, 해로운 균을 없애며, 유기 물질을 빠르게 분해시키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
퇴비는 먼저 우리 둘레에서 나오는 것들로 만들 수 있다. 이는 고장과 계절에 따라 많이 다르다. 우리는 볏짚과 마른 풀, 가랑잎, 톱밥, 뗏장 죽은 것과 겉흙을 썼다. 이것들은 운반하기도 쉽다. 그것들이 눈에 뛸 때마다 우리는 한 곳에 모아 두었다. 마른 풀과 가랑잎은 한 해에 한 번씩만 넉넉하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듬해까지 쓸 수 있도록 미리 넉넉하게 모아 두려고 애를 썼다.
또 날마다 집에서 나오는 쓰레기, 밭에서 뽑아 낸 잡초, 둔덕에서 깎아낸 풀, 꽃밭에서 나온 잡동사니 따위가 있었다. 우리는 쓸 수 있는 유기 물질을 하나도 헛되이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종이는 퇴비 더미에 넣은 적이 없다.
적어도 열흘에서 보름은 걸려서, 조금씩 퇴비를 만드는 것이 좋다. 하루나 이틀 만에 다 만들어 버리면 퇴비 더미가 밑으로 너무 많이 주저 앉는다. 퇴비는 젖어 있지는 않더라도 습기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한동안 비가 안 오면 물을 조금씩 부어 줘야 한다. 제대로 만든 퇴비라면, 만든 뒤 며칠 안에 섭씨 70도쯤의 열이 날 것이고, 그래서 유기 물질은 더 빨리 분해되고 잡초 씨앗은 싹이 나서 자연히 없어질 것이다. 퇴비에서 열이 안 난다면, 잡초 씨앗은 살아남아 다시 밭으로 돌아갈 것이다. 퇴비에서 열이 식는다 싶으면, 지렁이들을 그 안에 집어 넣을 수도 있다. 퇴비에 습기가 넉넉하다면, 지렁이들은 퇴비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본래 하듯이 부지런히 유기 물질을 분해할 것이다. 지렁이를 쓸 수 없다면, 옆으로 쇠스랑이나 삽을 넣어 퇴비를 뒤집어 주면 될 것이다. 또한 보통은 퇴비를 만들고 나서 활성제를 조금 넣기도 하는데, 이 활성제는 분해를 촉진한다.」
「이제 지난날 밭일을 하면서 우리가 지킨 원칙들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한 해에 겨우 석 달만 서리를 피할 수 있는 밭에서 곡식을 가꾸어 한해 열두 달 먹는다.
가공하지 않은 신선한 음식만 먹는다.
완벽한 밥상을 차릴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채소와 곡식을 가꾼다.
땅에서 거둔 것을 통조림 따위로 만들어 보관하는 일을 되도록이면 줄인다.
제철이 아닌데도 시장에 나와 있는 아스파라거스, 딸기, 옥수수 같은 채소를 우리는 거의 사지 않는다. 그 대신 밭에서 제철에 거둔 것만을 즐겨 먹는다. 가장 먼저 방풍나물을 밭에서 캐 오면서 우리는 초봄을 시작했다. 눈이 사라지자마자 방풍나물을 캐러 나갔고, 한 달 남짓 동안 하루에 한 끼는 방풍나물을 먹었다. 그렇게 방풍나물을 먹으면서 녹말과 당분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었다. 방풍나물이 나오는 철이 지나가면 우엉, 파슬리 뿌리, 부추, 치커리도 함께 들어갔다.
그러고 나면 한 달 반이나 두 달 남짓 동안 골파, 양파와 함께 아스파라거스 철이 이어졌다. 아스파라거스 철이 끝나기도 전에 시금치, 무, 겨자, 양상추 철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완두콩, 강낭콩, 호박이 그 뒤를 이었다. 곡식 수확이 절정에 이르는 철에는 옥수수, 토마토, 콩, 브로콜리, 샐러리가 나왔다. 가을이 다가오면 양배추, 겨울 호박, 순무, 당근, 배추, 시금치가 나왔고 처음으로 감자와 마른 콩도 먹을 수 있었다. 우리는 딸기, 나무딸기, 월귤나무를 가꾸었기 때문에 철따라 나오는 여러 가지 딸기들을 먹을 수 있었다. 딸기류는 산버찌나무 열매나 검은 딸기와 함께 들에서도 많이 저절로 나고 있었다. 이 밖에도 배, 자두, 사과 같은 과일도 먹을 수 있었다.
눈이 내려 밭을 온통 하얗게 뒤덮고 땅이 얼면 지하에 있는 채소 저장소로 갔다. 그 곳에는 채소 뿌리, 양배추, 겨울 호박, 감자, 당근, 순무, 양파, 샐러리 뿌리, 파슬리 뿌리, 배, 사과가 저장되어 있었다. 추위에 강한 채소들은 늘 싱싱했고, 그래서 눈이 녹을 때까지 먹을 수 있었다. 눈이 녹을 때쯤 되면 우리는 다시 방풍나물을 캐다 먹었다.
이렇게 열두 달을 한 바퀴 돌면서, 우리는 정말 다양하고 신선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우리 밥상은 2월, 3월 처음 얼음이 녹을 때부터 12월에 폭설이 내릴 때까지 늘 밭에서 가져온 싱싱한 채소와 열매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지하 채소 저장소는 나머지 철에 먹을 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철이 바뀌면 그 때마다 새로운 음식을 얻었다. 그것도 그 음식이 가장 풍성한 철에, 차례로 그 음식들을 즐겼다. 우리는 어떤 음식에도 질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다가오는 철에 맛보게 될 음식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소로(Henry Thoreau)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오직 제철에만 얻을 수 있는 음식을 가장 좋아한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철에는 없다는 사실이 즐겁기까지 하다."
이웃 사람들은 5월에 밭을 일구었다. 8월 말이나 9월 초가 되면 사람들이 버려 둔 밭에서 풀이 우거지고 벌레가 들끓었다. 벌써 그 해 농사가 끝난 것이다. 서리가 들어닥치는 때, 보통 9월 초인 그 때에도 우리 채소밭에는 서리에 견딜 수 있는 곡식이 밭 구석까지 가득 차있었다. 우리는 초봄과 늦가을 밭이 여름철 밭보다 더 나았다고 지금도 믿고 있다.
초봄의 밭에는 겨울을 보낸 부추, 골파, 양파, 민들레, 파슬리, 치커리 들이 자라고 있었고, 된서리가 그치면서 태양이 채소에 햇빛을 비춰줄 무렵이면 밭을 덮었던 짚더미를 걷어 냈다. 밭에 씨를 뿌리기도 전에 우리는 다 자란 채소를 밭에서 얻었다.
가을 밭은 여름 밭에서 자라난다. 7월 1일께에 우리는 밭에 나가 무, 상추, 조생 비트, 시금치를 뽑고, 퇴비를 손가락 두께만큼 뿌린 뒤 흙과 섞고 나서, 양파, 비트, 브로콜리, 배추, 케일 따위를 심었다. 그리고 조금 지나서 오크 잎 상추와 코스 상추, 겨울 샐러리, 시금치를 심고, 끝으로 겨자와 무를 심었다. 그리고 9월 말이나 10월 초에 마지막으로 채소를 심었다. 오이, 호박, 고추, 토마토가 얼기 시작하면 우리는 이 채소들 대신에 상추, 브로콜린, 케일을 옮겨 심고 겨자와 무 씨를 뿌렸다. 10월 1일 우리 밭은 풍성한 결실을 보여 주었으며 8월보다도 더 푸르렀다. 이렇게 채소들이 푸른 이유는 가을 비, 밤 서리, 덥고 습기가 많고 안개 낀 날씨와 관련이 있었다. 해로운 벌레에 대해선 아직도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이 채소들은 상록수 가지를 듬성듬성 덮어 보호해 주거나 나뭇잎, 마른 풀, 짚으로 뿌리를 덮어 주면 폭설이 채소를 덮을 때까지 뜯어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첫눈이 아직 녹지 않았다면 언 양배추 싹, 배추, 케일, 파슬리 따위를 눈이불 밑에서 기쁜 손으로 파낼 수 있었다. 이처럼 맛있는 채소는 어느 철에도 먹어 보기 힘들었다.
우리는 작은 태양열 온실을 만들어 채소를 가꾸는 기간을 더 늘렸다. 이 온실에서 많은 채소가 겨울을 났고, 봄에 옮겨 심을 다른 것들도 이곳에서 자랐다. 연장 창고의 남쪽 벽 길이가 5미터가 넘었는데, 이것은 온실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연장 창고는 우리의 모든 건물들처럼 돌로 지어져 있었다. 이 남쪽 돌벽에 기대어 거의 수평으로 콘크리트와 나무로 된 구조물을 만들었다. 햇살이 눈부신 따뜻한 겨울날, 난로 같은 것을 따로 들여 놓지 않았어도 문을 열어 바깥 공기를 들이지 않는 한, 태양열 온실 안은 온도가 섭씨 40도까지 올라갔다.
이 곳에다 우리는 샐러리, 토마토, 상추, 그리고 밭에 옮겨 심을 모종들을 기르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10월 어느 날 오크 잎 상추를 한 뼘 간격으로 심으면서 온실 농사를 시작했다. 이 상추는 원래 9월 초에 밖에 심어 놓았던 것인데, 10월 초에 온실 구덩이로 옮겨 심었다. 따라서 이 상추는 일찍 내리는 서리에 길들어 있었다. 우리는 1월 초까지 줄곧 이 상추를 뜯어 먹었고, 흘린 땀에 대해 풍성한 보상을 받았다. 이런 식으로 해서 밭에서 싱싱한 채소를 얻지 못하는 겨울철에도 상추를 먹을 수 있었다. 낮은 기온에 난방도 안 되는 온실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상추가 버틸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지금까지 밭농사에 대해 토론한 것은 거의 채소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들 거의 모두가 꽃이나 과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꽃가꾸기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려면 채소와 마찬가지로 저마다의 꽃한테 필요한 것을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 하지만 밭일의 기본은 같다. 흙을 기름지게 해 주면 곡식, 채소, 과일, 꽃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식물의 질이 좋아진다. 다른 식물들처럼 꽃과 과일도 퇴비를 주고 뿌리를 덮어 주면 그것에 보답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실험삼아 나무딸기 농사를 지어서 크게 성공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언덕에 나무딸기를 심기로 하고 우리는 길이 2미터쯤 되는 말뚝을 1.8미터 간격으로 세웠다. 그리고 막대 옆에서 나무딸기 모종을 한두 개씩 심었다. 모종이 자라 줄기가 올라오자 적당히 쳐 주면서 삼끈으로 이 줄기들을 말뚝에 동여맸다. 봄이 오면 싹이 돋기 전에 줄기를 살펴보았고, 약한 줄기는 잘라 내서 줄기 수를 서너 개로 줄였으며, 가슴 높이로 줄기를 쳐 준 뒤 두세군데를 막대에 묶었다.
그 무렵 우리는 작은 과일을 기르는 농부라면 누구나 부딪치는 큰 문제에 맞닥뜨렸다. 밭에 한해살이 잡초와 풀들이 자라난 것이다. 잡초와 풀이 우거지도록 오랫동안 그대로 둔다면 마침내 딸기 모종이 시들어 버릴 것이다. 잡초를 뿌리 뽑으려고 우리는 딸기 모종의 뿌리를 두텁게 덮어 주고, 밭에 약 15센티미터 두께로 톱밥을 뿌리기로 했다. 그러자 마술 같은 결과가 나타났다. 대극, 야생 나팔꽃, 괭이밥, 뿌리로 번식하는 몇몇 가지를 빼고는 모든 잡초가 정말로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대부분의 한해살이 잡초는 톱밥 속에서 자랄 수 없다. 나무딸기 줄기는 잎을 죽죽 뻗으며 높이 자랐다. 농약을 치지도 않았는데 나무딸기가 입기 쉬운 병충해를 입지 않았다. 곰팡이와 벌레들이 입힌 피해도 별것 아니었다. 가을마다 밭에 15센티미터 두께로 톱밥을 더 뿌려 주었다. 이렇게 덮어 준 톱밥은 굳어지고, 비바람을 맞고, 지렁이의 활동 무대가 되면서 해마다 두께가 줄어든다. 그 다음 해에는 바닥의 흙과 더욱 잘 섞인다. 열여덟 해 동안 이렇게 톱밥을 뿌려 주고 나니, 우리의 나무딸기밭은 비료나 두엄 없이도 지력이 왕성하고 기름진 땅이 되었으며, 잡초도 거의 없이 주변 밭에 있는 딸기보다 더 높이 자랐다. 그렇게 해서 커다란 딸기가 주렁주렁 열렸는데, 아름다운 빛깔과 뛰어난 맛을 자랑했다.
나무딸기밭에서 처음으로 뿌리를 덮어 주는 실험을 한 뒤, 해가 가면서 다른 곡식들에게도 이런 방법을 썼더니 똑같이 성공할 수 있었다.
식물의 뿌리를 덮어 주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목적에서이다.
습기 지켜 주기, 잡초가 자라는 것 막기, 몇몇 작물은 흙을 서늘하게 해 주기, 물과 바람이 흙을 쓸고 내려가는 것 막기, 지표면과 그 둘레로 지렁이들을 끌어들이기, 덮은 것이 분해되면서 부엽토와 모종에 더 많은 영양분을 공급하기.
뿌리를 덮는 재료는 돌과 종이에서 시작해 마른 풀, 짚, 나뭇잎, 나뭇가지, 대팻밥, 톱밥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가 쓰인다.」
「딸기와 감자에 써 보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옥수수, 콩, 토마토 같은 것들은 뿌리 둘레로 따뜻한 햇볕을 받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이러한 것들의 뿌리를 덮어 주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본디 차가운 땅에서 번성하는 완두콩과 감자는 뿌리를 덮어 줄 때 아주 잘 자란다. 우리는 몇 해 동안 심는 순간부터 거둘 때까지 감자를 마른 풀을 두텁게 덮어서 가꾸었다. 그 동안에 풀도 뽑아 주지 않았고 농약도 치지 않았지만 밭에는 잡초도 벌레도 없었고, 감자를 캐낼 철이 되면 땅을 파지 않아도 마른 풀을 덮어 준 바로 아래로 감자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pp.117-122)
「"제대로 먹는 것이 가장 훌륭한 치료니,
충분히 신경 써서 건강을 지켜야 한다.
자기가 먹는 것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왕이
어찌 왕국을 평화롭고 안정되게 통치할 수 있겠는가."
<<섭생 Regimen Sanitatis Salernitanum>>, 11세기
"내 힘으로 할 수만 있다면, 세상을 되돌리고 싶다. 비록 원시 시대처럼 먹을 수는 없지만, 요즘보다 훨씬 건강에 이롭고 절제하는 식생활로 돌아가는 것이다."
애블린(John Evelyn), <<채식에 대한 짧은 글 Acetaria, A Discourse of Sallets>>, 1699년
"두 해에 걸친 실험으로, 나는 이런 외딴 곳에서도 사람에게 필요한 식량을 구하는 일이 놀랄만큼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동물처럼 간단하게 먹고서도 얼마든지 건강과 힘을 지킬 수 있다."
소로(Henry Thoreau), <<월든 Walden>>, 1854년」
「보기 드물게 훌륭한 책이 영국인 의사 렌치(G. T. Wrench)가 쓴 <<건강의 수레바퀴 The Wheel of Health>>라는 책이다. 병이라는 주제에 시간을 쏟는 대신 렌치는 이렇게 묻고 있다.
"건강은 무엇인가? 어떻게 해서 사람들은 건강할까? 연구 대상이 될 만한 가장 건강한 사람들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조사와 연구를 많이 한 끝에 렌치는 인도와 티벳 국경 지대의 작은 골짜기에 사는 훈자족(Hunzas)이 세계에서 가장 건강하다고 결론 지었다. 책의 많은 부분이 그 사람들이 건강한 까닭을 조사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렌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병이 오직 좋지 않은 환경에서 사는 사람과 좋지 않은 음식을 먹는 사람을 공격한다. 병을 예방하고 내쫓는 문제는 무엇보다도 먹는 것에 달려 있다. 그 다음으로는 좋은 환경에서 사는 것이다. 항생제, 약, 예방접종, 제거수술 따위는 진정한 문제를 피해 가고 있다. 병은 영양이 모자란 사람이나 동물, 식물에게 위험을 경고해 주는 감지기 노릇을 한다."
렌치가 이야기하는 건강의 수레바퀴란, 건강한 흙으로부터 건강한 식물과 동물로 이어지는 순환과, 다시 이러한 식물과 동물이 흙으로 돌아가는 순환을 말한다. 그리고 거기서 또다시 순환이 시작된다. 이 순환은 높은 차원에서 다시 시작될 수도 있고 낮은 차원에서 시작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순환하는 동안 땅이 기름진지 아니면 척박한지에 달려 있다. 」
「몸이 제대로 자라고 기능할 것인지 아닌지는 피가 돌면서 공급하는 영양소에 달려 있다. 소화기관으로부터 피의 흐름을 타고 세포, 조직, 각 기관까지 가는 영양소는 몸을 만들고 고치는 물질을 공급한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우리가 먹는 음식 바로 그것이다. 사람은 영양을 얻어 살아가려고 고체와 액체로 된 음식, 물, 공기, 햇빛, 그리고 무어라고 느끼기 어려운 물질과 에너지 같은 것에 의존한다.」
<살림 꾸리기> (pp.153-159)
「"장사를 해서 돈을 버는 것이 더 이로울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그렇게 위험한 일만 아니라면, 마찬가지로, 돈을 빌려 준 다음 이자를 받아 먹고 사는 것이 훨씬 이로울지도 모른다. 그게 정말 떳떳한 일이기만 하다면."
카토(Marcus Porcius Cato), <<농업에 대하여 De Agri Cultura>>, 기원전 149년
"시골살림은 검소하면서도 넉넉하다. 생필품을 꼭 가게에서 살 필요가 없다. 상에 올라오는 음식들도 시장에서 사 온 것이 아니다. 양식은 언제나 스스로 장만하며, 계절의 변화에 따라 제철 음식을 먹는다."
게비라(Don Antonio de Guevara), <<시골 생활 예찬 The Praise and Happiness of the Countrie-Life>>, 1539년
"만일 진지한 마음으로 시골에서 사는 삶을 꿈꾸고 그 생활이 자기에게 맞는가를 시험해 보고자 한다면, 멀리 떨어진 도시에 살면서 재미 삼아 한번 시도해 봐서는 안 된다. 자기 발로 이슬을 헤치며 걸어가야만 한다. 그 일에 등부터 들이미는 것이 아니라, 머리부터 들이밀어야 한다."
미첼(D. G. Mitchell), <<에지우드의 우리 밭 My Farm of Edgewood>>, 1863년」
「안정되고 안전한 생활을 최대한 보장할 수 있는 일곱 가지 원칙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첫째, 일할 수 있는 모든 어른은 일을 해 주고 돈을 벌어 자기들의 생계를 해결한다. 이렇게 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노동력을 주고받아 생계를 이어 가게 되고, 사회의 일부 계층이 불로 소득으로 먹고 사는 일이 없어진다. 따라서 계층간의 벽도 사라질 것이다.
둘째, 사람들의 위치에 따라 벌어 들이는 돈이 너무 차이가 나서는 안 된다.
셋째, 공동체의 경제 계획을 세우고 예산을 짠다.
넷째, 공동체의 회계장부를 기록하고, 그 내용을 누구나 조사할 수 있도록 공개한다.
다섯째, 돈을 쓰지 말고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물건으로 값을 치른다. 그러면 인플레이션을 피할 수 있다.
여섯째, 절약이 몸에 배게 하고, 자원을 보호하며,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고 소비한다.
일곱째, 전문성과 협동을 바탕으로 자기가 몸담고 사는 사회에 폭넓게 봉사한다.」
「여러 가지 한계가 있었긴 해도, 기꺼이 시간을 바쳐 일한 땀의 대가로 우리는 그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먹을 거리와 집, 땔감이나 생활 필수품들을 더 많이 얻으려고 우리가 도회지를 떠나 버몬트 산골짝으로 이산 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 몸에 활력을 주고, 그러면서도 바라는 활동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자유 시간을 얻기 위해서 갔다.
우리에게는 먹고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하는 것은 풍요롭고 보람있는 삶 속으로 들어가는 문간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삶에 제대로 꾸려 갈 수 있을 만큼만 생활 필수품을 얻는 일에 매달렸다. 그 수준에 이르고 나면 먹고 사는 문제에서 완전히 눈을 돌려 취미 생활과 사회활동에 관심과 정열을 쏟았다.」
「스티븐슨은 "적게 벌고, 그보다 더 적게 쓰라"고 말한다.
밭에서 난 채소, 숲에서 가져온 나무는 우리가 손에 흙을 묻히고 시간을 바쳐 얻은 것들이었다. 그 일을 하는 데 따로 돈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집은 우리 손으로 지었기 때문에 임대료를 낼 필요가 전혀 없었다. 세금은 우리 형편으로 내기에 버겁지 않았다. 사탕, 과자, 고기, 청량음료, 술, 차, 커피, 담배 따위는 전혀 사지 않았다. 이렇게 자잘해 보이는 물건들이 쌓이면 보통 집들이 쓰는 생활비의 큰 몫을 차지한다. 우리는 옷이나 치장에 거의 돈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열다섯 해 동안 기름과 초로 어둠을 밝혔다. 우리 집에는 전화기나 라디오가 없었다. 세간살이들은 거의 다 우리 손으로 만든 것이었다. 한 달에 두 번 넘게 시내에서 물건을 사는 일이 없었고, 따라서 우리가 돈 주고 산 물건은 한 해를 통틀어 얼마 되지 않았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말마따나,
"문명이란 사실 불필요한 생활 필수품을 끝없이 늘려 가는 것이다."」
<함께 사는 사람들> (p.169)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이익을 늘리는 목적 하나만 갖고 일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실제로야 어떻든 이를 수긍하기는 쉬울 것이다. 어떤 이는 어떤 곳에서 일하고, 다른 사람은 또 다른 곳에서 일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일하는 곳에서 열심히 지식을 쌓고 기술을 터득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다른 이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렇게 서로 돕고 조화를 이루어 살 때, 모든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다."
도널드슨(James Donaldson), <<행복의 지름길 The Undoubted Art of Thriving>>, 1700년
"서로 무관심한 이웃들이여, 우리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감탄할 만큼 뛰어난 능력을 베풀 수는 없어도, 우리는 서로에게 쓸모가 있다."
소로(Henry Thoreau), <<콩코드와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 A Week on the Concord and Merrimack Rivers>>, 1849년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넌다는 말이 있다. 사람을 잘못 만나 마음에 동요는 없는지, 평정을 잃지는 않았는지 돌다리를 두드리듯이 늘 되짚어 보아야 한다."
제이콥스(Herbert Jacobs), <<시골을 선택했다 We Chose the Country>>, 1948」
<버몬트에서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 (pp.195-209)
「"땅이 생산을 멈추고 농사일이 조금씩 줄어들면, 그 때부터 농부는 무엇이 지나갔고 무엇이 다가오는지 생각에 빠져드는 기쁨을 맛본다."
구어거스(J. M. Gourgas), <<뉴잉글랜드 농부 New England Farmer>>, 1828년
"물길을 찾은 사람은 돌로 우물을 쌓는다. 길가엔 나무를 여러 그루 심고, 과일 나무도 심는다. 오래도록 튼튼한 집을 짓고 늪지를 개간한다. 집 앞에는 돌 벤치를 놓고, 땅을 기름지게 가꾼다. 돈을 벌지만 돈에 빠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사람이 이룬 모든 것은 세월이 흘러도 그 마을에 보탬이 된다."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사회와 고독 Society and Solitude>>, 1870년
"거죽의 비순수함과 위선을 벗어 던지고 본래의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그리고 더없이 단순한 생각과 소박한 삶으로 되돌아가기 전에는 그 문명은 아직 완성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임어당, <<삶의 중요함 The Importance of Living>>, 1938년
"쫓기듯이 여기서 저기로 떠도는 삶이 지겨워질 때쯤에야, 권력을 가진 자가 더할 수 없을 만큼 약자를 박해하고 강자를 시기하는 약자가 더할 수 없을 만큼 강자를 방해했을 때쯤에야,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진실한 삶, 바람직한 삶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그 때 모든 사람은 이토록 단순한 지혜를 무시하고 살아 왔다는 데 새삼 놀랄 것이다."
리치(Louise Dickinson Rich), <<내 고향 My Neck of the Woods>>, 1950년」
「케인스(M. G. Kains)는 베스트셀러로 좋게 평가된 <<땅 6천평과 독립된 삶 Five Acres and Independence>>이라는 책에서 떠돌이 방문객들을 맞으면서 겪은 일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시골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뒤, 많은 부부들(특히 아낙들!)은 시골로 이사오고 나서 자기들이 인기인이 된 것을 알고 여러 가지 감정을 갖게 되었다. 기쁜 마음에서부터 시작해 만족스러움, 즐거움, 놀라움, 당황, 짜증, 혐오, 분노라는 감정의 여덟 단계를 차례로 밟아 갔다. 아주 친한 친구가 화창한 일요일마다 아무 연락도 없이 찾아올 뿐 아니라 사돈의 팔촌쯤 되는 사람들도 한때 우연히 이웃에 살았다는 것만으로 갑자기 들어닥친다. 이 사람들은 여러 차에 나눠 타고 와서 점심은 물론 저녁까지 얻어먹게 되기를 은근히 바란다. 여러분도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 같으므로 내가 답을 알려 주겠다. 일요일 점심과 저녁으로 아주 형편없는 음식을 밥상에 올려라! 그럼 행운이 있기를!"
사람들은 요일을 가리지 않고 찾아왔다.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양배추 잎사귀와 삶은 밀을 대접했다. 때로는 우리 삶의 방식에 따라 이런 음식을 함께 먹고 나서 자기가 살아 오며 먹은 것 가운데 가장 훌륭한 식사를 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가 찾아오는 손님들을 부담없이 맞이할 수 있었던 또 다른 까닭이 있다. "바쁜 사람에게 게으른 방문객은 거의 찾아오지 않는다. 끓는 주전자에 파리가 앉지 못하듯이." 우리에게는 날마다 해야 할 일들이 있었고, 누가 찾아오든 그 일을 했다. 방문객이 있어도 우리는 평소처럼 우리 일을 열심히 하면서, 손님들이 스스로 알아서 자기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이들이 바란다면 우리 일터에 와서 일을 도와 줄 수 있었다. 테라스에서 손님과 서로 인생사에 대한 얘기를 주고 받으면서 시원한 차를 대접하는 일은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성의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손님들에게 지나치게 잘 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우리는 일꾼과 게으름뱅이를 구별하는 법을 배웠다. 평상에 편안히 누워 있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휴가를 보내며 즐겁게 놀려고 이 곳에 온 것이었다. 그 사람들은 결코 오래 머무르는 법이 없었다. 우리 침대 매트리스는 스펀지 고무로 만든 훌륭한 제품이 아니었고, 커피 또한 고급 원두 커피가 아니었다.
사람은 좋지만 걸리적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사람들은 기꺼이 일을 도우려고 했지만 능력이 안 되거나 너무 허약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좋아했지만 떠나 보내야 했다. 그리고 스스로 마음에 무언가 뿌듯한 것이 없으면, 그 사람들 또한 알아서 바로 떠났다. 얼마 안 되는 사람만(사실 몇 안 되는 사람들) 우리가 사는 방식에 맞추어서 제대로 적응해 나갔다. 이 사람들은 보통 다른 데서도 원하는 사람들이어서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이 사람들이 다시 찾아올 때마다 우리는 따뜻하게 맞이했다.」
「우리는 또한 사람들이 이 곳에 도착하기 전에 우리의 숲 속 농장에서 즐기겠다는 잘못된 생각을 깨우쳐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며칠, 한 주, 한 달 또는 그보다 길게 와서 머물 수 있을지 편지로 묻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만들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우리가 바라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집은 자그마합니다. 우리는 오로지 그 목적을 위해서만 집을 지었으며, 여관이나 휴양시설은 운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하루에 네 시간은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을 합니다. 그리고 채식주의자들이 먹는 간단한 먹을 거리를 얻기 위해서도 일할 시간이 조금은 필요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규칙을 정해 놓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 곳에 잠시나마 들르는 손님들도 이 생활에 맞추기를 바랍니다. 이곳에서는 고기, 담배, 술이 금지됩니다. 우리의 생활은 단순하고 엄격합니다. 이런 생활이 힘들고 불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삶의 방식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기꺼이 당신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생활방식을 이해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언제나 즐거워하며 우리가 가진 것, 실천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기쁘게 나눌 마음이 되어 있습니다."
숲 속 농장을 방문한 수많은 사람 열 가운데 아홉은 다음과 같이 말하거나, 마음에 새기고 떠났다.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이것은 좋은 생활 방식이다. 이런 삶의 방식은 그이들에게는 훌륭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내가 그 생활을 참고 견뎌야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그이들보다 건강에도 좋고 값도 훨씬 덜 드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을 그 사람들도 인정했다. 우리가 자기들보다 훨씬 건강하고, 편안한 옷을 입고 만족스러운 집에서 살고 있으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여유를 누린다는 사실도 그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이들 스스로는 이런 생활에 따를 수 없었고, 그렇게 하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그 사람들은 문명이 주는 흥분, 분주함, 매혹, 편의시설, 마취제 없이는 살 수 없었다. 그 사람들이 이 곳에 눌러 살았다면, 생계만 겨우 해결할 뿐 새 물건을 살 여유가 거의 없다는 사실에 맞닥뜨리고는 괴로워할 것이다. 겉만 그럴듯하지 오래 못 가는 물건들을 늘 새로운 발명품이나 신제품이라고 둘러치고, 새로 광고하는 상품들과 바꿔야 한다고 부추기는 사회에서 살던 사람들이 우리같이 사는 삶을 어찌 견딜 수 있겠는가.」
「개인의 건강과 행복이라는 잣대로 본다면 우리 계획은 확실히 성공이었다. 하지만 사회로 보자면 특히 경제로 보아서도 아쉬운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우리 집은 얼마 안 되는 몇몇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많아야 어른 너덧 명이 고작이었다. 방문객들의 발걸음이 꾸준히 이어졌지만 그이들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따라서 어떤 계획을 세울 때 다양한 생각과 경험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아름다운 두 영혼의 삶과 기록> (pp.219-220)
「여기 스코트와 헬렌이 시골로 내려가 살기 시작하면서 자기들 생활의 기준으로 삼은 몇 가지 원칙이 있다. 그것은 이렇게 시작한다.
'채식주의를 지킨다.
하루를 오전과 오후 둘로 나누어, 빵을 벌기 위한 노동은 하루에 반나절만 하고 나머지 시간은 온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쓴다.
한 해의 양식이 마련되면 더 이상 일하지 않는다.'
그렇다.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느라 우리가 하루에 단 한 시간도 자기 자신을 위해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까닭이 없다. 우리는 어느 새 모든 것의 노예가 되었다. 흙을 밟는다거나 나무 아래 서성거려 보는 일들로부터 멀어졌다.
또 두 사람은 이런 규칙들을 정하고 살았다.
'방문객이 찾아와도 밭에 나가 일을 하면서 얘기를 나눈다.
누구든 자기가 먹은 그릇은 설거지하게 한다.
집짐승을 기르지 않는다. 집짐승을 돌보는 데 얽매여서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며, 또한 사람과 똑같은 생명을 가진 동물을 키워 내다 파는 일은 옳지 못하기 때문이다.
은행에서 절대로 돈을 빌리지 않는다. 할 수 있다면 모든 먹을 거리를 자급자족하며, 농사지을 수 없는 생필품은 농작물과 맞바꾼다.
기계에 의존하지 않으며, 할 수 있는 한 손일을 한다. 기계가 고장났을 때의 번거로움으로부터 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두뇌와 정신 건강에도 좋기 때문이다.
최저 생계비가 마련되면, 먹고 남는 채소와 과일은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 준다.
하루에 한 번씩은 철학, 삶과 죽음, 명상에 관심을 갖는다.'
그이들의 삶이 얼마나 올바르고 철저했는가를 보여 주는 원칙들이다.
그 밖에도 두 사람은 일 년에 한두 달은 여행을 할 것, 커피와 차를 멀리하고 간소한 식사를 하며 설탕과 소금을 삼갈 것, 그리고 깨끗한 양심과 깊은 호흡을 유지할 것을 삶의 대원칙으로 삼았다.」
「그이들은 '삶은 만족감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원칙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땅에서 얻는다는 건강한 철학을 끝까지 잃지 않았다.
단순하면서 충족된 삶, 그것이 그이들이 평생토록 추구한 삶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