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13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히브3,7-14 마르1,40-45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 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하시자
그는 곳 나병 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마르1,40-45)
오늘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김찬선신부님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날마다 서로 격려하여,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고해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십시오.”
오늘을 산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모두 오늘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상당히 많습니다.
처한 현실은 오늘이지만 여전히 옛날의 나인 사람이 있습니다.
몸뚱이는 오늘을 살지만 마음은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를 먹은 사람은 오늘을 따라가기도 벅차합니다.
요즘 세상이 얼마나 빨리 변합니까?
매일 새로운 제품이 나옵니다.
매일 새로운 기능이 등장합니다.
따라가기 힘듭니다.
그러나 정작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생각이고 마음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따라갈 마음은 아예 없습니다.
그래서 완고합니다.
옛것을 고집하는 완고함입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 가운데서 외톨입니다.
그러나 이 완고함은
새로운 상황과 젊은 사람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하느님이 하시는 말씀에 대해서도 완고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셔도 그것을 따를 생각은 별로 없지만
혹 따른다 해도 옛날 말씀만 고집합니다.
그러니 오늘 어떠한 말씀을 하셔도 귀담아 듣지도 않고
새로운 말씀이랄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을 사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옛날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지 않는 또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내일 때문에 오늘을 살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너무도 많은 계획으로 머리가 복잡합니다.
닥칠 일에 대한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께서 내 앞길에 무엇을 예비하셨는지 모르는 채
자기 혼자 이 계획, 저 계획으로 분주할 뿐이며
있지도 않을 일을 부정적으로 예상하며 오늘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
그러므로 영원한 현재이십니다.
그분은 ‘지금, 여기서’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 /박기호 신부님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셨습니다.
제아무리 영성의 대가요 말씀의 탈렌트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의 사람됨이
부족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강론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데 그와 함께
생활하거나 일하는 사람들은 고개를 흔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독선적이고
괴팍하고 손님에겐 친절하지만 가족에겐 짜증내고…. 그런 류의 사람은 참
힘듭니다. 인격이 ‘덜된 사람’입니다. 머리가 좋아서 ‘난 사람’은 되었지만
‘인간됨’은 멀었다는 뜻입니다. 예수살이가 ‘예수의 인간성 닮기’를 수덕생활의
방법론으로 삼는 것은 ‘좋은 품성을 가진 사람이 되자’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됨에 완전한 분이십니다. 더 이상 좋은 품성을 찾을 수 없기에 하느님이
아니고선 그런 인간성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인간이면서 하느님’
이십니다. 유학 사상에서는 ‘사람 됨’이 교육의 목적이었습니다. 예의염치를
아는 인의예지의 인간을 만드는 것이 교육입니다. 인의예지의 품성은 인간의
네 가지 본성, 즉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에서 나온다고 보았는데
그의 자양을 강조했습니다. 그중 품성론의 으뜸되는 것이 측은지심입니다.
타인의 불행한 처지를 자기 처지로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기적의
힘은 바로 이 측은히 여기며 손을 내미는 데서 온 것입니다. 인간의 좋은 품성은
하늘이 알아주는 덕이고, 긍휼한 마음은 기적을 이끌어내는 힘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사랑이 내게로 다가온 날 /양승국 신부님
오늘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활활 타오르는 사랑의 손길로
한 인생이 완전히 역전된
은총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냥 사랑, 그저 그런 사랑, 통속적인 사랑,
지나가는 사랑 말고 제대로 된 참 사랑의 결과는
놀랍게도 한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한 사람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환자 역시
참 사랑의 체험으로 인해
새 인생, 새 삶을 얻게 되었습니다.
참 사랑을 만나기 전
그의 인생은 너무나 암담했습니다.
비참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굴욕적으로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더 낫지 않겠냐며, 여러 차례 시도도 해봤습니다.
비관에 비관을 거듭하며 조금씩 조금씩
자신을 스스로 죽여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은혜롭게도 참 사랑이 다가온 것입니다.
전율과도 같은 그분의 손길이
그의 환부를 스치는 순간,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오랜 질병이 순식간에 치유되었습니다.
짧은 만남의 순간이었지만
참으로 의미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순백과 인간의 얼룩이 만났는데,
그분의 순수함이 얼마나 강했던지
인간의 얼룩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습니다.
뜨거운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냉담함이 만났는데,
그 사랑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인간의 냉담함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참 사랑과의 만남, 그리고 치유,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나병환자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사방을 뛰어다니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참 사랑이 내게로 다가왔습니다.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나서 저는 완전히 새로 태어났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하느님께서는
왜 날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을까?’
‘왜 사나’ 하며 의기소침해있습니다.
우리가 이분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해봅니다.
이분들에게 참 사랑을 만나게 해주는 일,
눈앞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일,
지금 당장은 아니라 할지라도 언젠가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하느님 사랑이
다가올 것임을 알려주는 일, 그분을 만나는 순간,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임을 알게 하는 일...
다툼과 분열, 비참과 혼란이
계속되는 우리의 현실이지만 이곳 역시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그래서 참으로 아름다운 장소이며,
언젠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말끔히
정화될 은총의 장소임을 알게 하는 일...
언젠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스치듯 지나가는 미풍처럼 다가오실 하느님 현존,
그분으로 인해 아름다운 세상을 그리며,
비록 현실이 암담해도
지속적으로 내 삶에 가치를 부여하고,
부단히 긍정하고 또 긍정하며
그렇게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일...
측은지심 /김동주 수사님
복음을 깊게 묵상하다 보면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실천의 발로는 늘 측은지심으로 나타납니다.
1년 전에 구안괘사(얼굴 신경 마비 증상)로 심하게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이전에는 슬픈 드라마를 봐도 울고, 전철역 주변의 걸인들을 보아도
마음이 아파 눈시울이 붉어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구안괘사가 온 후에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형제가 아파 고생해도, 슬픈 일이 생겨도
무감각해졌습니다. 냉동 인간처럼 말입니다.
겁이 났습니다. 이러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수도자가 될까 봐서요.
1년쯤 지난 어느 날 한쪽 눈에서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뛸 듯이 기뻤습니다. 살아 있는 것 같아 행복했습니다.
예수님의 측은지심이었을 겁니다.
저는 믿습니다. 아직은 제가 할 일이 많아서 건강을 돌려주신 것이라고.
이제 저는 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남을 위해 아파하고 눈으로 가슴으로 울겠습니다.
가까이 하기 쉬운 사람 - 가까이 하기 어려운 사람 /오기백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드러난 사건은 당시로써는 놀랄 만한 일이었습니다.
유다법에 의하면 나병 환자들은 일반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복음에서 이 나병 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가까이 하기 쉬운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특별히 어려운 사람들에게 편한 느낌을 주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리감 없이 그분께 다가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가까이 하기 쉬운 사람일까요? 아니면 가까이 하기
어려운 사람일까요? 이를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나를 찾아와 자신의 삶에 대한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나는 가까이 하기 쉬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남들이 가까이 하기 어려운 사람일
테지요. 그런 경우에는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믿고 있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가?’라고 자문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하느님을
어떻게 선포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 그렇게 해 줄께! /오상선신부님
내가 누구에게
무슨 부탁을 했을 때
그가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면서
<그래, 그렇게 해 주마!>해 준다면
얼마나 기쁘고 좋은가?
반대로
내가 누구에게
무슨 부탁을 했는데
그가 망설이면서
<글쎄, 한번 생각해 보지>
이렇게 말하면
좀 찜찜하겠지.
한걸음 더 나아가
내가 누구에게
무슨 부탁을 했는데
그가 일언지하에
<안돼, 딴 데 가서 알아봐!>
이렇게 말하면
욕나오겠지...
반대로 누가 나에게
부탁을 해 올 때
나는 어떻게 하고 있지???
흔쾌히
<그래, 그렇게 해 주마!>라고 하는가? 항상...
이렇게 생각하며
돌아보니
이렇게 흔쾌히
<그래, 그렇게 해 주마!> 한 적이 많지 않은 것 같구먼...
어떤 사람이,
그것도 인간 취급도 못받던 나병환자 한 사람이
예수에게와서
<저를 깨끗하게 좀 만들어 주소> 하고 청한다.
예수께서는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그래, 그렇게 해 주마!> 하신다.
예수의 이 자세를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든지
다른 이의 부탁,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든 무시하는 사람이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든
그 어떤 부탁에도
<그래, 그렇게 해 주마!>라고 답하자.
오늘
누가 나에게 부탁 좀 안 하나???
흔쾌히
<그래> 한번 해 보게 말이다...
사실
보잘것없는 나에게 도움이 되어달라고 부탁받는 자체가
감사할 일이 아닌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나인데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거 하나만으로도
내 인생은 충분히 살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차별을 없애신 예수님 /이중섭 신부님
이스라엘 백성은 나병을 천형(天刑)으로 생각했습니다. 나병환자는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따로 살았고, 성한 사람을 만나면 ‘부정한 사람이요’ 하고
소리치며 먼저 피하여 도망쳤습니다.
오늘 복음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그런 나병환자와 대화하고 손을 대시어 나병을 고치십니다.
이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은 상상도 못할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나병환자와 대화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에게 손을 대는 것은 더욱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약의 정결제도를
거부하셨습니다. 사람을 구별하고 차별하는 제도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보셨던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예수님 앞에서 정죄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볼 때 부정한 사람은 구별하고 분리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아파해야 할 자비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속성 중에서 거룩함보다는 자비하심을 보십니다.
그래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 6,36)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면
어떤 사람이 의로운지 아닌지 따지며 구분 짓는 것을 그만두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먼저 /문화순 수녀님
알래스카의 여름은 천국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온통 숲은 초록으로 빛나며 불어오는 바람도 초록바람이다.
호수가 300만 개가 넘는다 하니 물 또한 싱싱하고 어느 곳에서나 물소리가 정겹다.
지난 여름, 숲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배가 등가죽에 붙은 개 두 마리를 만났다.
나를 보고 흠칫 놀라면서도 애처롭게 쳐다보며 꼬리를 감춘다.
목줄이 끊어진 것으로 보아 도망쳐 나온 것 같았다.
나는 개를 무서워한다. 하지만 애원하는 눈빛을 외면할 수 없어
멀리 있는 수녀원까지 되돌아와서 먹을 것을 챙겨주었다. 개들은 맛있게 먹고
보답이라도 하듯 한 시간 내내 뒤를 따라오며 한적한 숲길에서 나를 보호해 주었다.
외진 숲길은 무스라는 큰 짐승과 곰이 나올 수 있어 조마조마한데
녀석들 덕분에 마음놓고 걸을 수 있어 무척 행복했다.
개들과 헤어지는데 아쉬움이 남았다. ‘부디 좋은 주인 만나 행복하기를….’
돌아오는 길에 개들의 눈빛이 지워지지 않았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자신을 비우고 겸허하게 낮출 때 구원이 온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는 떠돌이 신세로
가난한 동네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자,
병자와 죄인들 사이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붙잡혀 매질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분의 십자가는 오늘날 우리에게 구원의 상징이 되었고
내 구원이 이루어지는 곳이 되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저주했던 그 십자가가 인간을 구원하는 도구가 되었고,
매일의 삶에서 자신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자만이 구원의 길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오늘 저 나병환자처럼 겸손되이 무릎을 꿇어야 한다.
내가 먼저 고개 숙여야 하고 먼저 손을 내밀어 상대편 손을 잡아야 한다.
내가 양보하여 한걸음 물러섰을 때 그리고 내가 한 계단 내려섰을 때
화해와 용서와 사랑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모두들 위로 올라가기 바쁜 세상이다. 매일매일 바벨탑을 쌓기에 여념이 없는 이 시대에
나병환자는 자신의 구원을 진정으로 바란다면
먼저 겸손되이 무릎을 꿇는 것부터 배우라고 가르친다.
우리의 노력 /이철구신부님
살아가면서 누구나 맑고 순수한 영혼으로 살아가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 누가 악하고 타락한 영혼으로 살아가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은
우리가 마음먹은 것처럼 그렇게 쉽게 되는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맑고 깨끗한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신다 하더라도
우리의 노력이 없다면, 또 주님을 향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맑고 깨끗한
영혼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을 향한 믿음과 나의 원의는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것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주님을 향한 맑고 깨끗한 영혼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하시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으시지만
우리의 노력과 원의를 보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봉헌의 기도를 바치며
맑고 깨끗한 영혼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합시다.
마음이 짠해서... /이찬홍 신부님
예수님께서 지니신 마음 중에 저는 측은한 마음을 좋아합니다.
측은한 마음은 상대방이 느끼는 아픔, 고통을 똑같이 느끼게 하는 자세입니다.
그러한 자세에서 자신의 삶을 한 번 더 되돌아보게 하고, 회개로 이끄는 마음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늘 이런 측은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갔고, 우리들에게도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변에도 우리에게 측은한 마음.. 짠한 마음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측은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은 단순히,
지금 나보다 어렵다는 이유로... 고통과 아픔을 당한다는 그 이유만으로는 생기지 않습니다.
힘들고 아프지만.. 희망이 하나도 없어 막막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는 자세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이겨내려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측은한 마음이 생겨납니다.
측은한 마음은 단순한 동정이 아닙니다.
동정과는 분명하게 차이가 납니다.
동정은 ‘참 안 됐구나. 도와주어야겠다.’는 정도의 생각으로 그치지만,
측은한 마음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상대방은...‘저 사람도 저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데, 나는
무엇인가?’ ‘내 삶이 이래도 되는가?’ 라는 반성을 하게 합니다.
늘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여, 잃어버린 첫 마음을..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했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 바로 측은한 마음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다짐이 왜 지속되지 못하고 작심삼일 만에 그쳐버리는 것입니까?
왜, 회개가... 회개의 삶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지 못합니까?
바로, 쉽게 주어진 삶에... 환경에 안주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갖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버리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런 모습 속에서 예수님의 마음은..
예수님께 받은 측은한 마음은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측은한 마음을 간직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생활하는 것이요,
그 노력은 예수님께 함께 살아가는 노력입니다.
며칠 전에 오랜 만에 어렸을 적에 친구를 만났습니다.
자신이 아는 사람...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듯이,
저 역시 함께 들과 바다에서 뛰놀았던 친구들이 잘되기는 바랍니다.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힘들게, 어렵게
살아가는 것 보다는, 평범하고 소박하게 알콩달콩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친구를 만나 술 한 잔 기울이다보니, 참 많이 답답했고 안쓰러웠습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보증을 서준 것이 잘못되면서,
도망치듯이 모슬포를 떠나 제주시에 왔습니다.
도저히 감당이 안 되기에, 이제는 될 대로 대라는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여기서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다. 비록, 아버지 때문에, 집안이 이렇게 됐지만... 그 죄책감으로
술만 마시다가 쓰러져 이제는 교회에서 지내지만... 그 아버지께 따뜻한 아랫목,
밥 한 그릇 드릴 정도로 일어나리라. 부모가 된 지금에라도,
더 이상 천추의 한을 남기지 않으리라.’는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모습이 객기 일수도 있겠지만.. 월급에 50% 가까이가
빚을 갚는데 소요되어 버리지만.. 그런 모습이 참 대견스럽고 기뻤습니다.
‘이 모습이 진정, 그렇게 고삐 풀린 망나니 같던, 내 친구의
모습이란 말인가?’ 라는 생각에 측은한 마음이 들었고, 너무 미안했습니다.
‘그 친구는 내가 사제라고... 사제이기 때문에, 오랜 만에 찾아와
자신의 아픔과 허물을 꺼내놓고 있는데... 희망이 하나도 없지만,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하는데... 나는, 나의 삶은 왜 이런가?’ 라는 반성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삶은 치열하고, 간절해야 한다고 말을 잘
하면서도.. 실제 내 모습에는 간절함과 애절함이 없었습니다.
진정 주님의 사제로 살아가려는 노력이... 악습과
허물을 이겨내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친구에게 부끄러웠고, 하느님께 죄송스러웠습니다.
복음에 나병환자의 간절함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치유해 주십니다.
하느님은 간절하게 바라고 원하는 것을 들어주시는 분입니다.
이는 우리의 고백입니다.
저의 안일하고, 나태한 모습을 되돌아보게 해준 친구와
복음에 나병환자에게 감사를 드리며, 저 역시 주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주님께선 하고자만 하시면, 저의 삶에 중심이 되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해 주소서.
그리하면 제가 살 것입니다.” 아멘
서로를 가슴에 품고 /조정희 수녀님
부산에서 만난 백 루미네 수녀님이 생각난다. 6·25전쟁 후 우리나라에 와서
농사도 짓고 땀 흘려 일하시느라 거칠어진 손이 말씀보다 더 많은 말을 했던 수녀님,
가난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살며 엄마 노릇을 하던 푸른 눈의 수녀님을 만날 때면
‘무엇이 이분으로 하여금 익숙한 땅을 떠나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이며
가난한 우리의 이웃으로 살아가게 했을까?’`하는
생각이 들면서 하느님의 존재를 가슴으로 느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올해 네 분의 수녀님이 에콰도르로 파견받아 떠났다.
적도의 나라, 우리나라의 중복과 비슷한 날씨에 먹는 물, 씻는 물 한 방울이 귀하고
수술 중에도 정전이 되는 나라, 미사 시간에 성당 중앙에 개가 돌아다니고 새들이 유유히
날아다니는 가운데 신자들이 뜨겁게 박수치며 축제처럼 즐기는 나라.
가난하지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며 에콰도르 사람으로 강생하길 바라는 수녀님들이
스페인어 단어 하나하나를 배우며 어린 아기가 된 느낌이라는 소식을 전해 왔다.
수녀님들이 파견될 때 어떤 수녀님이 “우리 모두 함께 가는 것”이라고 했다.
수녀님들이 떠나면서 남은 분들이 일을 더 나누어 맡고,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으로 수도회가 다 함께 가는 거라고….
수녀님들이 우리를 가슴에 품고 에콰도르로 가시듯
우리도 수녀님들을 가슴에 품고 각자의 사도직을 열심히 하는 것이란 마음이 들었다.
주님의 손길이 닿아 구원되고 자유로워지는 기쁨을 누린 나병환자가
공동체에 통합되어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시는 님의 마음과,
당신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부르시는 사랑이 오늘 새롭게 다가온다.
"홀로 서야하는 사람들" /이수철신부님
함께하지만 결국은 홀로입니다.
군중 속의 고독, 어쩔 수 없는 인간 현실입니다.
하늘 향해 홀로 선 나무들이 숲을 이루듯,
하느님 향해 홀로 선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룹니다.
홀로 선다는 것, 이웃으로부터 고립 단절을 뜻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 앞에 지극히 진실하고 정직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늘 사람들과 함께했지만, 내적으로는 늘
하느님 향해 홀로 선 나무였고,
온전히 무소유의 삶을 사셨습니다.
사람들에 대한 기대나 집착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사람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1,40).”
무릎을 꿇고 도움을 청하는 나병 환자에게, 예수님이 줄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현존이신 예수님 자신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1,41).”
하시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 환자는 깨끗이 나았다 합니다.
예수님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과 ‘따뜻한 손’, 그리고 ‘능력의 말씀’이
삼위일체가 되어 환자에게 전달되고 이어 치유 기적이 발생한 것이지요.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르1,44b).”
그를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신 후, 표표히 떠나신 주님이셨습니다.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에 다니시지 않고 바깥 외딴 곳에 머무르셨지만,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에게 모여들었다 합니다(마르1,45).
대중의 인기에 참으로 초연하셨던 주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내 자신뿐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진실한 마음과
진실한 말이 위로와 힘이 되고 치유가 됩니다.
내 자신 하느님 안에 올바로 서지 못할 때,
나의 모든 소유물들은 쓰레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오늘 1독서의 이스라엘 백성들,
주님의 궤를 모셨지만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무참히 패배하여
주님의 궤도 빼앗겼다 합니다.
바로 하느님 앞에 올바로 서지 못할 때,
그 무엇도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진리를 배웁니다.
하느님만을 배경으로 한 진실한
삶만이 능력의 원천임을 깨답습니다.
이 은혜로운 성체성사 시간,
주님은 겸손히 도움을 청하는 우리들을
깨끗이 낫게 해 주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아멘.
사랑은 비밀스러운 것 /전삼용신부님
요 며칠 연예인 김혜수와 유해진의 열애 소식이 밝혀지자
많은 사람들의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이
3년 동안이나 몰래 사귀어 왔던 것입니다. 그 얼마 전에는 장동건과 고소영이 또한
몇 년 동안 사귀어 왔다는 것이 이야깃거리가 되었었습니다.
사실 이들이 몰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공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친구에게든 누구에게든
살짝 자랑을 하고 싶은 것이 보통 사람들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어떤 분이 저만 알고 있으라고 한 이야기를 가장 친한 친구에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주책없게 그 이야기를 해 준 분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해 버린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해 주신 분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야만 했지만
사실 그런 비난을 받아야 했던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관계란 것이 깊어질수록 서로간의 비밀도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 많을수록 둘은 남이 모르는 비밀의 방을 만들어 단 둘만이 머무르게 됩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어렸을 때에야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은근슬쩍 드러내고 싶지
사랑을 조금씩 알아갈수록 둘의 관계는 점점 비밀의 베일로 감싸이게 됩니다.
이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벌어집니다.
성당에서도 예수님을 만났다, 성모님을 만났다고 이야기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을 믿지 않습니다. 그렇게 쉽게 드러낸다면
100% 하느님과의 참 사랑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과의 사랑도 둘만의 장소에
숨어서 하고 싶다면 하느님과의 사랑은 더욱 비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어떤 것들은 세상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밝혀야 하는 것들이 있지만 그 사람을
위해서 비밀로 남겨두는 것들도 있습니다. 파티마의 세 가지 비밀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말해도 되지만 이 세 가지 비밀만은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절대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비밀을 왜 알려주셨을까요?
바로 비밀을 지키는 그 사람들의 성모님과의 더 비밀스런 관계를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성모님의 교리들은 매우 늦게 정립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모님께서
당신의 비밀들을 드러내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이들의 믿음을 위해서 꼭 필요한 비밀들은 드러내셨습니다.
예를 들면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한 것이나 엘리사벳을 방문하셨던 일,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실 때 벌어졌던 일들, 또 이집트로 피난 가셨던 일, 혹은
성전에서 예수님을 잃고 찾아 해맨 사건들은 성모님께서 설명해주시지 않았다면 알기 어려운
사건들입니다. 이 사건들은 후대의 그리스도를 이해하게 되는데 중요한 것들이기 때문에
성모님은 잘 기억하셨다가 후대의 복음사가들이나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이 우리에게 이야기 해 주시지 않은 것들이 사실은 더 많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성모님께 발현하셨다는 이야기는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께 먼저 발현하시지 않으셨을 리가 만무합니다.
또 당신과 하느님만이 가질 수 있었던 수많은 비밀들을 간직하고 계셨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심이라든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신비라든지, 평생 동정으로 사셨다든지,
승천하실 몸을 지니고 계셨던 것 등은 전혀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이런 교리들을
정하는데 거의 이천 년이란 세월을 숙고해야 했고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비밀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정배로서 하느님과의 사이에서만 숨겨져 있는 수많은 비밀들을
지니고 계십니다. 물론 그것들을 밝히셨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겠지만,
첫 번째는 그것을 이야기하면서 교만해질 것과 두 번째는 사랑의 비밀이 세상에
들추어지는 것이 죽기보다 싫으셨을 것입니다. 사랑은 비밀스럽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나병을 고쳐주신 사람에게 사제를 제외한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교만해 질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느님과의 귀중한 비밀을 잃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널리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닙니다. 그럼으로써 육체적 병은 고쳐졌지만
정신적으로는 더 교만해지고 하느님과는 더 멀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더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시키면 다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커다란 집의 침실은 가장 깊숙한 곳에 있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이루어지는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은
어떤 비밀들을 지니고 있는지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우리들만의 비밀 제스처 /양승국신부님
식당이나 운동장에서 마주치는 몇몇
아이들과 제가 만날 때마다 주고받는
우리들만의 비밀 제스처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동작이지만
아주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멀리서부터 얼굴을 확인한 우리는
손가락을 V자 모양으로, 또는 셋을 펴서
흔드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합니다.
손가락을 두 개를 편 V자 모양은 2년을
의미하고, 3개는 3년을 의미합니다.
2년은 어떤 의미에서 2년인가 하면
곧 다가올 6개월 만기기간을 끝내고도 2년간 더
살겠다고 다짐하는 의미에서의 2년입니다.
이곳 살레시오 근로청소년회관은 약간의 실수로,
또는 어쩔 수 없는 환경 때문에 한 때
방황을 했던 아이들이 6개월간 신부님 수사님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청소년시설입니다.
저를 가장 안타깝게 만드는 일이 가끔 생깁니다.
이곳에서 6개월을 무사히 채워 저희와 기쁜 얼굴로
작별인사를 나누고 떠나간 아이들이 몇 일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연락이 올 때입니다.
집에서가 아니라 경찰서나 법원에서 말입니다.
그 때 마다 "아! 그 녀석, 그때 나간다고 했을 때,
억지로라도 잡아둘 것인데..."
하는 아쉬움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만기가 다 되어 가는 저희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재계약을 체결하자"고 협박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조건을 내거는 아이들의 소원은 너무도 소박합니다.
"그럼 연장하는 보너스로 뭘 해주실래요?
PC방 10시간 알았죠?" 그게 아니면
"그럼 좋아요. 같이 멀리 낚시 한번 갔다와요" 등등의
조건을 내거는 아이들의 모습은 너무도 사랑스럽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저는 아이들이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하느님 자비의 손길을 정말 진하게 체험합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묻는 말에 전혀 대꾸도 않던 아이,
어떻게 하면 이곳을 뛰쳐나갈 수 있을까 눈이 반짝반짝하던 아이,
불안한 표정으로 힘겨워하던 아이들이 이곳
신부님들과 수사님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천천히
본래의 예쁜 모습들을 되찾아 가는 모습을
옆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 한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예수님의 손길은 생각할수록 놀라운 손길입니다.
그분의 손길이 닿는 곳은 그 누구든,
그 어디든 다시금 생명력을 회복합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슬픔과 통곡의 장소는
기쁨과 환희의 장소로 변화됩니다. 그분의 손길이
닿는 부위마다 그분 자비와 사랑에 힘입어
다시금 원래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게 됩니다.
"아이들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무엇일까?" 생각해봤을 때,
인간적인 노력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그 가장 밑바탕에는 하느님 자비,
하느님의 손길이 있었음을 오늘 다시금 확인합니다.
예수님께... 그대에게... /상지종신부님
선생님께
선생님을 귀찮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제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온통 당신에 대한 것 뿐이었습니다.
당신은 제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만나기 전에 저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어느 누구 하나 말상대가 되기는커녕 시선조차 주는 이 없었습니다.
그들을 결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제 팔자려니 생각했을 따름입니다.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 저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다가 그날 당신을 만났습니다.
낫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선생님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기특한 청원이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저를 낫게 해주십시오’라고 떼를 쓰고 싶었을텐데.
어쩌면 그것이 당신을 향한 소박한 믿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항상 외톨이로 당하면서 살아온 제가,
당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제가,
낯선 당신을 만나 드릴 수 있었던 말씀의 전부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은 달랐습니다.
썪어 문드러진 제 몸을 만져주셨지요.
저는 이미 그것으로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굳이 제 몸이 다시 깨끗해지지 않았더라도,
당신은 제가 분명 살아있는 한 사람이라는 잊혀졌던 사실을 일깨워주셨기에
저는 새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학대하며 살아온 제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저를 향한 쌀쌀맞은 시선과 공동체의 냉대가 얼마나 정의롭지 못한 것이었는지,
당신은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당신을 만난 이후,
제가 새롭게 태어난 이후,
저는 사람들을 떠올렸습니다.
저의 깨끗해진 몸을 보아야 할 제관이 아니라,
저처럼 자신을 학대하며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죽을 날만을 기다리던 벗들이,
공동체의 이름으로, 보잘것없는 이를
철저히 소외시키는 이들이 떠올랐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던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정말로 죄송합니다.
제 이야기 때문에 선생님께서 더욱 힘들어지셨다면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제가 원했던 것 단 하나는 제가 받은 새 삶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는 것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은 믿어주십시오.
어쩌면 제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선생님 이야기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아직까지도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이름없이 죽어가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참된 삶인지,
더불어 함께 하는 삶인지 모르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다수의 이름으로 가난한 이들, 못난 이들, 부족한 이들을
철저히 내리누르는 현실이
버젓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당신을 귀찮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당신의 엄하신 말씀을 어기려는 생각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구요.
더이상 무슨 말씀을 필요 하겠습니까.
언제 다시 선생님을 뵈올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저와 함께 계심을 믿기에,
오늘도 당신께서 주신 새 생명으로 기쁘게 나아갈 것입니다.
그럼 다시 뵈올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사랑하는 그대에게
그대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대를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용히 외딴 곳에 머물면서 이제까지 만난 이들을 떠올립니다.
물론 당신도 그 중에 하나이구요.
나는 그대들에게서 아름다운 생명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께서 곱게 곱게 넣어주신 그 생명을 말이지요.
그러나 너무나 안타깝게도 그 생명을 철저히 찢겨져 있었답니다.
찢는 이들, 찢기는 이들 모두가 고통스러운 현실이지요.
찢는 이들은 고통을 못 느끼고,
찢기는 이들은 자신의 고통을 당연하게 여기기에
나의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대가 자신의 고귀함을 되찾기를 바랬습니다.
그대는 나에게 너무나도 절절하게 말을 건넸습니다.
"선생님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대는 어느 누구보다도 내 뜻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대의 말을 들으면서
세상 어느 무엇도 갈라놓을 수 없는 완전한 일치를 느꼈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는지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시오."
나와 그대는 분명 그 순간 하나였습니다.
그대는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온 세상이 새롭게 태어날 그 날을 향한 소중한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새롭게 태어난 그대는 기쁨은 곧 나의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날의 기쁨이 퍼지고 퍼져 온 세상을 가득 메울 날을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내가 그대에게
왜 그날의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는지 알겠습니까.
행여 그대의 이야기를 듣고,
그날 그대와 내가 함께 나누었던 기쁨의 의미를
잘못 받아들이는 이들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거듭남이 지닌 깊은 뜻을 모르는 이들이
단지 겉으로만 변하려 할 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행여 나에 대한 그릇된 선입관이 생겨
나를 마치 현실적인 이익을 챙겨주는 이 정도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지금 이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다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이 조금은 아쉽습니다.
나는 삶을 통해 내 자신을 서서히 드러낼 것이고,
시간이 흐른 후에 나에 대한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내가 나의 편안함을 때문에 나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피하기 위해서,
그날 일이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언제 어디서나 그대가 함께 해주기를 바라는 그들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만나면서 나는 그대를 떠올릴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대가 지닌
그 아름다운 믿음과 희망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당신의 선하심을 노래하리라! /김찬선신부님
인간의 안타까운 한계를 잘 나타내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한데 오늘 나병환자의 말은 이런 우리 인간과는 다른
주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능력의 주님은 믿지만
듣기에 따라 善의 주님은 믿지 못하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왜냐 하면 ‘하실 수 있는데 과연 하시겠습니까?’,
‘당신은 善意가 있으십니까?’하고 묻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께 대한 믿음 중에서
능력의 주님께 대한 믿음보다
선의의 주님께 대한 믿음이 더 갖기 힘든 것 같습니다.
능력에 한계가 있다면 그것이 무슨 하느님이겠습니까?
全能, Omnipotence는 하느님의 본질이요 속성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살아가다 보면 악을 수없이 경험하게 되는데
이렇게 나에게 고통을 주시는 분이 과연 선하신 분이신지,
설사 선하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과연 나에게 선한 분이신지 의심이 갑니다.
사실 우리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할 때는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하듯
하느님 선하심을 믿으라고,
지금은 고통을 주시지만
더 좋은 선을 주시기 위한 것임을 믿으라고 말하지만
막상 내가 고통을 당하면 믿음이 한 없이 흔들립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가 믿음이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이보다 더 큰 고통이 닥쳐도 선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흔드시는 것일 수 있습니다.
편안할 때 하느님의 선하심을 찬미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고 큰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빼앗아 가실 때,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하느님께서 앗아 가실 때,
그때도 하느님은 좋으신 분이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우리는 진정 선하신 하느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욥을 생각해봅시다.
하느님께서 사탄을 통하여 차례로 소중한 것들을 빼앗으십니다.
처음에는 소유물들, 일꾼들과 소와 나귀를 앗아가시고,
이어서 양떼와 일꾼을 앗아가시고,
다음으로 낙타 떼와 일꾼을 앗아가시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유물이 아니라 자녀들을 앗아가십니다.
이때도 욥은 하느님을 다음과 같이 찬양합니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거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
이런 욥도 자신의 몸에 종기가 생겨 너무도 고통스럽자
하느님께 대한 찬미가 원망으로 바뀝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바로 이런 욥이었었습니다.
한 때 주님을 원망하던 사람이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 나아옵니다.
주님의 선하심을 믿지 않았으면,
아니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의심했으면 나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극심한 고통을 통과한 지금 주님의 선하심을 믿기에 나온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하느님 찬미를 다시 깊이 묵상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온갖 영적, 육적 고통을 다 겪고 난 뒤에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지어 레오 형제에게 줍니다.
“당신은 선 자체이시며 모든 선이시며 至上善이시나이다.”
찬미는 믿음의 꽃이 아니던가요?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깨어진 세상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 /양승국신부님
요즘, ‘세상이 험하다’ ‘사람들이 무섭다’
말들이 많지만, 복지시설을 운영해보면, 꼭 그렇지만
않다는 것을 즉시 깨닫게 됩니다.
남몰래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들,
소리 없이 조용히 왔다가는 사람들,
극구 손사래를 치며 황급히
돌아서서 뛰어가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가끔 봉사자들을 위한 피정이나
교육을 준비하면서 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곤 합니다.
이웃사랑의 실천, 그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봉사와 선행의 근본적인 동기가 무엇인가?
혹시라도 세상 사람들의 우러러봄을
유도하기 위함은 아닌가요?
봉사 끝에 얻게 되는 자기만족은 아닌지요?
적절한 품위 유지를 위한 하나의 몸짓인가요?
아니면 사회적 변혁을 이끌어내기 위한 바람의 표현인가요?
이런 것들이 전부라면 그런 이웃사랑의 실천은
절대로 오래 지속될 수가 없습니다.
이웃 사랑의 실천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한 개인이 하느님을 추구하는 삶의 표현입니다.
자비의 구현은 신앙인으로서 지녀야 할
자연스런 존재방식입니다. 봉사활동은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분이 보여주고 계신 사랑의 실천,
자비의 표현은 절대로 유별나지 않습니다.
요란스럽지도 않습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습니다.
그저 꼭 해야 될 일을 조용히 해내십니다.
반면 당대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을 보십시오.
환자 한 명 앞에 두고
뭔 사람들은 그리도 많이 끌어오는지?
준비물은 또 얼마나 많은지?
폼이란 폼은 있는 대로 다 잡습니다.
뭔 사설을 그리도 구구절절인지, 몇 시간이고
그렇게 푸닥거리를 해댑니다. 그 결과는?
증세가 더 악화될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행하는 이웃 사랑의 실천을
한번 곰곰이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그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웃 사랑 실천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 불치병 환자들, 이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그토록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늘 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솔직한 현실입니다.
늘 반복되는 가난과 불행, 거듭
되풀이되는 비참의 악순환 앞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들이 불행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더 나은 삶에로 나아가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꾸준히
행하는 사랑의 실천이 중요합니다.
가난하고 불행한 이웃들은
깨어진 세상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또 다른 얼굴임을 굳게 믿고,
한결 같은 마음으로 계속 사랑의
봉사를 해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자비심, 측은지심을
하느님으로부터 나누어받게 되면
새로운 삶의 방식이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내 안에 내가 줄어듭니다. 내가 줄어든
그 자리에 하느님의 영이 자리 잡습니다.
그렇게 될 때 이웃들의 시선이나 평가에 더 이상
연연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
하느님의 시선에 우선권을 둘 수 있습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
그저 예수님 때문에 이웃 봉사에 전념하는 사람들,
세상 가장 밑바닥에 현존해계시는 하느님 때문에
진흙탕 같은 세상 밑바닥으로 기꺼이
내려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토록 염원하던
하느님의 얼굴을 뵐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자신들이 행하는 사랑의 실천 그 한 가운데서.
이런 사람들에게 돌아가게 될 하느님의 선물은
마음 깊은 곳에서 샘솟는 기쁨이며 감사입니다.
진실한 사랑의 실천이 있는 곳에
참 기쁨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참 사랑의 실천, 그 한가운데
하느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2011.1.13 연중 제1주간 목요일
히브3,7-14 마르1,40-45
제자리, 제 궤도에 충실한 삶 /이수철 신부님
아침 성무일도 집회서 독서 시 다음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태양을 만드신 주님은 위대하시며
태양은 그분의 말씀을 따라서 제 궤도를 달린다.
달도 언제나 제 궤도에 충실하다.”
과연 제 궤도에 충실한 삶인지요?
제자리에서 제 궤도에 충실할 때 안정과 평화입니다.
제자리, 제 궤도를 벗어날 때 파생되는 온갖 문제들입니다.
우리의 제자리의 안식처에 자리 잡을 때
치유와 구원이요,
제자리의 안식처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제가 좋아하는 사제들을 위한 기도 첫 부분입니다.
“주의 성심(聖心) 속에 사제들의 안식처를 마련하시어
아무도 감히 그들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소서.”
사제들뿐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의
제자리의 안식처는 주의 성심뿐입니다.
그리스도 안, 제자리에 안식처에
머물 때 비로소 안정과 평화입니다.
시편 45장을 렉시오 디비나 한 히브리서 다음 말씀
역시 주님이 바로 안식처임을 말해줍니다.
“언제나 마음이 빗나간 자들, 그들은 내 길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말하였다.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저기 어딘가에 있는 안식처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제자리에서
제 궤도에 충실할 때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가 주님의 안식처입니다.
제 궤도에 충실할 때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저자 역시 우리 모두에게
‘오늘’ 지금 여기의 제자리에서의 삶을 강조합니다.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 여러분은 날마다 서로 격려하여,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완고해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동료가 된 사람들입니다.
처음의 결심을 끝까지 굳건히 지니는 한 그렇습니다.”
제자리의 안식처인 그리스도 안에서
제 궤도에 충실할 때
영적나병과도 같은 완고한 마음은 치유되어
그리스도를 닮아 겸손, 온유해지고
비로소 그리스도의 동료가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지만 사람마다 제 궤도는 다 다릅니다.
서로의 궤도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서로간의 평화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길을 상징하는 일과표의
궤도 따라 공동전례에 충실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초지일관 끝까지 일과표의 공동궤도에 충실할 때
각자의 궤도도 제자리 잡아 갑니다.
제자리의 주님의 안식처에 돌아올 때 치유요 구원입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도움을 청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는 깨끗하게 치유됩니다.
우리의 제자리인 주님의 안식처에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치유요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제자리의 안식처인 주님을 떠나 방황하기에
온갖 영육의 질병입니다.
치유 받은 나병환자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며 복음 선포의 일꾼이 됩니다.
우리의 ‘제자리의 안식처’는
주님 뿐이심을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복음의 말미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아무리 외딴 곳에 자리 잡은 수도원이라도
진정 주님의 제자리의 안식처가 될 때
사람들은 사방에서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마치 꽃향기를 찾아 사방에서 모여드는 벌들처럼,
사람들도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주님의 안식처가 된
사람이나 수도원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제자리의 안식처인
주님 안에 머물러
영육이 치유되는 복된 시간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아멘.
惻隱之心 /강영구 신부님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 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자 그는 곧 나병 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마르1,40-42)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마태22,39)고 가르치신 예수님,
당신은 나병환자의 불쌍하고 아픈 처지를 당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나병으로 몸이 문드러지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고통입니다.
자기 탓으로 나병을 앓는 것이 아닌데도
부정한 인간으로 낙인 찍혀
추방당하여 외톨이가 된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입니다.
그는 성전을 출입할 수도, 가족이나 형제들을 만날 수도 없는 처지입니다.
그는 하늘과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가족과 이웃과 형제들과의 관계도 단절된 체 지옥에 빠져있었습니다.
당신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은 그를 어루만져 병을 낫게 해주었습니다.
당신은 그의 고통을 당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치유 받아서
죽음과 같은 고통에서 벗어나서 새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누려는 당신의 惻隱之心이
그의 지옥을 천국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그렇게 해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하신 것은
“너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삼겠다.”하신 말씀입니다.
그 순간 나병환자는 새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예수님, 차돌처럼 딱딱하고 얼음처럼 차가워진 저희의 가슴을
당신의 가슴처럼 따뜻하고 부드럽게 만들어주십시오.
나와 상관이 없다면, 특별히 나의 이익과 무관하다면
어떤 일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저희들의 이기적이고 냉혹한 가슴을 惻隱之心으로 바꾸어주십시오.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보고도 외면하거나 무관심한
저희의 냉혹함이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불행은 돈이 없거나 기술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탐욕과 이기심에 사로잡혀
이웃의 불행을 외면하는데 불행의 근원이 있습니다.
당신이 허락하신 오늘 하루는
惻隱之心으로
이웃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 가지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一明)
♪ 바흐; "소리쳐 부르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여" BWV 6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