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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책 읽고 마음에 남아서 남겨 둡니다. 하나의 문장이 사람을 살리기도 할 테지요. 저는 갈피갈피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제주도에서 <책방무사>를 운영하고 있는 가수 요조가 이 책 주인공 요조에서 이름을 가져왔다는 말을 듣고 어쩐지 그이를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된 듯한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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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인간 실격/다자이 오사무
<서문>
사람이란 주먹을 꽉 쥔 채 웃을 수는 없는 법이다.(10)
그러나 인간의 웃음이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걸린다. 피의 무게랄까 생명의 깊은 맛이랄까, 그런 충실감이 전혀 없는, 새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깃털처럼 가벼운, 그냥 하얀 종이 한 장처럼 그렇게 웃고 있다. 즉 하나부터 열까지 꾸민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겉멋이 잔뜩 들었다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경박하다고 하기도 그렇다. 교태를 부리고 있다고 하는 것도 부적절하다. 멋쟁이라고 하는 것도 물론 부적합하다. 게다가 자세히 뜯어보면 여자 같은 미모를 가진 이 학생한테서도 역시 어딘지 악몽 비슷한 섬뜩한 것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이상한 미남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10-11)
아무런 표정이 없다. 말하자면 쭈그리고 앉아 화로에 양손을 쪼이다가 그냥 그대로 죽어간 것 같은, 정말로 기분 나쁘고 불길한 냄새를 풍기는 사진이다.(11)
<첫 번째 수기>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13)
저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해서 자주 병치레를 했습니다(14)
또 저는 배고픔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14)
물론 저도 꽤 잘 먹었습니다. 그러나 배가 고파서 뭔가를 먹은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특별나다고 생각되는 것, 고급스럽다고 생각되는 것을 먹었습니다.(15)
식사하는 방은 어둠침침했고 점심 같은 때 열 명 남짓 되는 가족이 그저 묵묵히 밥을 먹는 모습은 저에게 언제나 으스스한 느낌이 들게 했습니다.(15)
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러니까 일해서 먹고살아야 한다, 라는 말만큼 저에게 난해하고 어렵고, 그리고 협박 비슷하게 울리는 말은 없었습니다.(16)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저는 그 불안 때문에 밤이면 밤마다 전전하고 신음하고, 거의 발광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저는 어릴 때부터 정말이지 자주 참 행운아다, 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언제나 지옥 가운데서 사는 느낌이었고, 오히려 저더러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 쪽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더 안락해 보였습니다.(16)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익살이었습니다(17)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익살이라는 가는 실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17)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제 가족에 대해서조차도 그들이 얼마나 힘들어하고 또 무엇을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고, 그저 두렵고 거북해서 그 어색함을 못이긴 나머지 일찍부터 숙달된 익살꾼이 되어 있었습니다. 즉 저는 어느 틈에 단 한마디도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 아이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18)
또 저는 가족한테 꾸중을 듣고 말대꾸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 사소한 꾸중은 저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아 저를 미칠 지경에 이르게 했기 때문에 말대꾸는커녕 그 꾸중이야말로 만세일계, 즉 고대로부터 단일 계통을 이어온 일본인의 ‘진리’임에 틀림없다, 나한테는 그 진리를 행할 능력이 없으니까 더 이상 인간과 더불어 살 수 없는 게 아닐까, 라고 확신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싸움도 자기변명도 하지 못했습니다. 남이 저에게 욕을 하면 그래 정말이야, 내가 엄청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그렇게 생각되어 언제나 그 공격을 잠자코 받아들이고 속으로는 미칠 듯한 공포를 느꼈던 것입니다.(18)
늘 인간에 대한 공포에 떨고 전율하고 또 인간으로서의 제 언동에 전혀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고뇌는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상자에 담아두고 그 우울함과 긴장감을 숨기고 또 숨긴 채 그저 천진난만한 낙천가인 척 가장하면서, 저는 익살스럽고 약간은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19)
뭐든 상관없으니까 웃게만 만들면 된다. 그러면 인간들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삶’이라는 것 밖에 내가 있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몰라. 어쨌든 인간들의 눈에 거슬려서는 안 돼. 나는 무야. 바람이야. 텅 비었어.(19)
싫은 것을 싫다고 하지도 못하고, 또 좋아하는 것도 쭈뼛쭈뼛 훔치듯이 전혀 즐기지 못하고, 그러고는 표현할 길 없는 공포에 몸부림쳤습니다.(21)
나는 아버지를 화나게 했다. 아버지의 복수는 틀림없이 끔직할 거야.(21)
그렇지만 저는 아버지가 그 사자 탈을 저한테 사주고 싶어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버지의 뜻을 따름으로써 아버지 기분을 좋게 해드리고 싶은 일념에 한밤중에 감히 손님방에 몰래 숨어드는 모험을 감행했던 것입니다.(22)
인간을 속여서 ‘존경 받는다’해도 누군가 한 사람은 알고 있다. 그리고 인간들도 그 사람한테서 듣고 차차 속은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 그때 인간들의 노여움이며 복수는 정말이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24)
저는 소위 장난꾸러기로 보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존경받는 걸 피하는 데 성공했습니다.(25)
그 당시 이미 저는 하녀와 머슴한테서 서글픈 일을 배웠고 순결을 잃었습니다. 어린아이한테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범죄 가운데서도 가장 추악하고 천박하고 잔인한 범죄라고 지금은 생각합니다.(25)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27)
저한테는 서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야말로 난해한 것입니다. 인간은 끝내 저한테 그 요령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터득했더라면 제가 인간을 이렇게 두려워하면서 필사적인 서비스 같은 것은 안 해도 됐을 텐데 말입니다.(27)
인간이 저 요조에게 신용이라는 껍질을 단단히 닫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조차도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면을 가끔 보이셨으니까요.(27)
<두 번째 수기>
인간에 대한 저의 공포는 예전 못지않게 격렬하게 가슴 밑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연기는 정말로 자연스럽고 활달해져서 교실에서는 늘 반 아이들을 웃겼고 선생님도 이 반은 오바*만 없으면 참 괜찮은 반인데, 라고 말로는 탄식하시면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셨습니다.(30)
“부러 그랬지?”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았습니다.(31)
무슨 짓을 하든 모두 다케이치가 낱낱이 간파하고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아침, 낮, 밤, 스물 네 시간 꼬박 다케이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그가 비밀을 퍼뜨리지 못하게 감시하고 싶었습니다.(32)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이 저를 죽여줬으면 하고 바란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남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일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32)
저한테는 인간 중에서 여성 쪽이 남성보다도 몇 배나 더 난해했습니다. 제 가족은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많았고 또 친척 중에도 계집애가 많았으며 예의 ‘범죄’를 저지른 하녀 등도 있어서 저는 어렸을 때부터 여자하고만 놀며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만, 저는 정말이지 살엄음을 밟는 느낌으로 그 여자들을 대해 왔던 것입니다...여자는 자기가 먼저 유인했다가도 내치고, 또 남이 있는 곳에서는 저를 경멸하고 함부로 대하다가도 아무도 없으면 꼭 끌어안고.(35)
“나도 이런 도깨비 그림을 그리고 싶어.”
인간을 너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무시무시한 요괴를 자기 눈으로 확실히 보기를 바라는 심리. 신경이 날카롭고 쉽게 겁먹는 사람일수록 폭풍우가 더 강하게 몰아치기를 바라는 심리. 아아, 이 일군의 화가들은 인간이라는 도깨비에게 상처 입고 위협받다 끝내는 환영을 믿게 되었고 대낮의 자연 속에서 생생하게 요괴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익살 따위로 얼버무리지 않고 본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다케이치가 말한 것처럼 과감하게 ‘도깨비 그림’을 그려낸 것입니다. 여기 장래 나의 동료가 있다고 저는 눈물이 날 정도로 흥분하여 “나도 그릴 거야. 도깨비 그림을 그릴 거야. 지옥의 말을 그릴 거야.”라고, 왜 그랬는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다케이치에게 말했던 것입니다.(40)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아름답게만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안이함과 어리석음. 대가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관에 의해 아름답게 창조하고, 혹은 추악한 것에 구토를 느끼면서도 그에 대한 흥미를 감추지 않고 표현하는 희열에 잠겼던 것입니다. 즉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조금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원초적인 비법을 다케이치한테서 전수 받은 저는 예의 여자 손님들 몰래 조금씩 자화상 제작에 착수했습니다.
제가 봐도 흠칫할 정도로 음산한 그림이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슴속에 꼭곡 눌러서 감추고 감추었던 내 정체다. 겉으로는 명랑하게 웃으며 남들을 웃기고 있지만 사실 나는 이렇게 음산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41)
사실 저는 혼자서 전차를 타면 차장이 무섭고, 가부키 극장에 가고 싶어도 붉은 카펫이 깔려 있는 현관 계단 양쪽에 죽 늘어서 있는 안내양들이 무섭고, 레스토랑에서는 등 뒤에 조용히 서서 접시가 비기를 기다리는 웨이터가 무섭고, 특히나 돈을 치를 때 아아, 그 어색한 손놀림. 저는 뭔가를 사고 나서 돈을 건넬 때면, 인색해서가 아니라 너무 긴장하고 너무 부끄럽고 너무 불안하고 너무 두려워서 어찔어찔 현기증이 나고 눈앞이 캄캄해지고 거의 반쯤 미친 것처럼 되어, 값을 깎기는커녕 거스름돈 받는 것을 잊어버릴뿐더러 산 물건을 갖고 오는 것을 잊은 적도 종종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도저히 혼자서는 도쿄 거리를 다닐 수가 없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온종일 집안에서 뒹굴거리며 보내던 그런 속사정도 있었던 것입니다.(46)
술, 담배, 창녀, 그런 것들이 인간에 대한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상당히 괜찮은 수단이라는 사실을 저도 이윽고 알게 되었습니다.(47)
아무런 타산도 없는 호의, 강요하지 않는 호의, 두 번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사람에 대한 호의. 저는 백치 아니면 미치광이 같은 그 창녀들한테서 마리아의 후광을 실제로 본 적도 있습니다.(48)
그러나 제가 인간에 대한 공포에서 도망쳐 조촐한 하룻밤의 안식을 찾아 그야말로 저와 ‘동류’인 창녀들하고 어울리는 동안, 어느 틈인지 저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종의 역겨운 기운이 저에게서 풍기게 된 모양입니다. 그것은 저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소위 ‘부록’이었습니다만(48)
뭔가 여자들로 하여금 꿈을 꾸게 만드는 분위기가 저의 어딘가에 달라붙어 있다는 사실(49쪽)
‘음지의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비참한 패자, 또는 악덕한 자를 지칭하는 말 같습니다만, 저는 태어날 때부터 음지의 존재였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 세상에서 떳떳하지 못한 놈으로 손가락질당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다정한 마음이 되곤 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그 ‘다정한 마음’은 저 자신도 황홀해질 정도로 정다운 마음이었던 것입니다.(51)
그 사람한테는 마음을 놓고 있었기 때문에 익살 따위를 연기할 마음도 안 나서, 저의 천성인 말없고 음산한 면모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면서 잠자코 술을 마셨습니다.(60)
그렇지만 그 사람은 말로 “쓸쓸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무언의 지독한 쓸쓸함을 몸 바깥에 한 폭 정도 되는 기류처럼 두르고 있어서, 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이쪽도 그 기류에 휩싸여 제가 지니고 있는 다소 가시 돋친 음산한 기류하고 적당히 섞여서 ‘물속 바위에 자리 잡은 낙엽’처럼 제 몸은 공포나 불안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62)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솜방망이에도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62)
“진짜야?”
조용한 미소였습니다. 진땀이 석 되 흘렀습니다. 아니, 지금 생각해도 콱 죽고 싶어집니다.(73)
<세 번째 수기>
넙치의 말투에는, 아니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말투에는 이처럼 까다롭고 어딘지 애매모호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듯한 미묘한 복잡함이 있어서(78)
넙치의 불필요한 경계심, 아니 이 세상 사람들의 불가사의한 허영과 체면 차리기에 말할 수 없이 암울해졌습니다.(78)
“공립이건 사립이건 어쨌든 4월부터 아무 학교에라도 들어가세요. 당신 생활비는 학교에 들어가고 나면 고향에서 좀 더 넉넉하게 보내주기로 되어 있습니다.”
훨씬 뒤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사실은 그랬던 것입니다. 그랬다면 저도 그 말을 따랐을 겁니다.(78)
돈은 고향에서 보내주기로 되어 있다고 왜 한마디 해주지 않았을까요. 그 한마디에 따라서 제 마음도 결정되었을텐데. 저는 그저 오리무중이었습니다.(79)
안과 밖을 딱 부러지게 나누어서 살고 있는 도쿄 사람들의 실체를 볼 수 있었습니다. 안팎 구별 없이, 그저 끊임없이 인간의 삶에서 도망쳐 다니는 바보 멍청이인 저 혼자만이 완전히 뒤에 처져 호리키한테조차 져버려진 것 같은 느낌에 당황했고, 칠 벗겨진 젓가락을 움직이면서 견딜 수 없는 쓸쓸함을 맛보았다는 사실을 기록해 두고 싶을 뿐입니다.(85)
“......당신을 보고 있으면, 대부분의 여자들은 뭔가 해주고 싶어서 견딜 수 없어져. ......언제나 쭈뼛쭈뼛 겁먹고, 그러면서도 익살스럽고. ......가끔 혼자 굉장히 침울해하고 있으면 그 모습이 더 여자의 마음을 흔들거든.”(89)
아아, 저에게 냉철한 의지를 주소서. ‘인간’의 본질을 알게 해주소서. 사람이 사람을 밀쳐내도 죄가 되지 않는 건가요. 저에게 화낼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90)
지옥은 믿을 수 있었지만 천국의 존재는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90)
‘시게코만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역시 이 아이도 ‘갑자기 쇠등에를 쳐 죽이는 소꼬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뒤로는 시게코한테조차도 쭈뼛거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91)
아아, 인간은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평생 믿고 지내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대방이 죽으면 울면서 조사 따위를 읽는 건 아닐까요.(92)
그 세상이란 것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무조건 강하고 준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여태껏 살아왔습니다만, 호리키가 그렇게 말하자 불현듯 “세상이라는 게 사실은 자네 아니야?”라는 말이 혀끝가지 나왔지만 호리키를 화나게 하는 게 싫어서 도로 삼켰습니다.(93)
세상이라는 것이 개인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저는 예전보다는 다소 제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즈코의 말을 빌리자면 저는 조금 멋대로 굴게 되었고 쭈뼛쭈뼛 겁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 호리키의 말을 빌리자면 이상하게 인색해졌습니다. 또 시게코의 말을 빌리자면 시게코를 별로 귀여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93-94)
행복한 거야, 이 사람들은. 나 같은 멍청이가 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면 이제 곧 두 사람을 망쳐놓을 거야. 조촐한 행복. 착한 모녀에게 행복을. 아아, 만일 하느님께서 나 같은 놈의 기도라도 들어주신다면 한 번만이라도, 평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좋아. 기도하겠어.
저는 거기에 쭈그리고 앉아 합장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저는 살그머니 문을 닫고 다시 긴자로 가서 다시는 그 아파트에 돌아가지 않았습니다.(97)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대양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다, 라며 세상이라는 넓은 바다의 환영에 겁먹는 데서 다소 해방되어 예전만큼 이것저것 한도 끝도 없이 신경 쓰는 일은 그만두고, 말하자면 필요에 따라 얼마간은 뻔뻔하게 행동하게 될 줄 알게 된 것입니다.(97)
저는 점차 세상을 조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세상이라는 곳이 그렇게 무서운 곳은 아니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즉 여태까지 저의 공포란, 봄바람에는 백일해를 일으키는 세균이 몇 십만 마리, 이발소에는 대머리로 만드는 병균이 몇 십만 마리, 전철 손잡이에는 옴벌레가 우글우글. 또 생선회, 덜 익힌 쇠고기와 돼지고기에는 촌충의 유충이나 디스토마나 뭔가의 알 따위가 틀림없이 숨어 있고, 또 맨발로 걸으면 발다닥에 작은 유리 파편이 박혀서 그게 온몸을 돌아다니다가 눈알에 박혀서 실명하는 일도 있다는 등의 소위 ‘과학적 미신’에 겁먹는 것이나 다름없는 얘기였던 겁니다.(98)
멀리서 울리는 북소리처럼(101)
그러나 요시코의 표정에서는 분명 아무에게도 더렵혀지지 않은 처녀 냄새가 났습니다.(103)
“어머, 장난치지 마요. 술 취한 척하고.”(104)
“그야 석양이 비치니까 그렇죠. 날 속이려 해도 안 될걸요? 어제 약속했는데 마실 리가 없잖아요? 손가락 걸고 약속한걸요. 술을 마셨다니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105)
저를 마음속으로부터 믿어주는 이 어린 신부가 하는 말을 듣고 그 행동을 바라보는 것이 즐거워서, 나도 어쩌면 차차 인간다운 것이 되어서 비참하게 죽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달콤한 생각이 희미하게 가슴속을 훈훈하게 덥혀주기 시작하던 참에(107)
흠칫했습니다. 호리키는 내심 저를 제대로 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것이다.(112)
죽인 게 아니야. 우려낸 게 아니야.(113)
“아무 짓도 안 한다고 하고는......”
“알았어. 아무 말도 하지 마. 너는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니까. 앉아. 콩 먹자.”(116-117)
요시코가 더렵혀졌다는 사실보다도 요시코의 신뢰가 더렵혀졌다는 사실이 그 뒤에도 오래오래, 저한테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큰 고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요시코는 그날 밤부터 제 일비일소에조차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117)
아아, 이 사람도 틀림없이 불행한 사람이다. 불행한 사람은 남의 불행에도 민감한 법이니까.(124)
그렇지만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는 싫어도 이 짓을 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 내가 요새 기운이 아주 왕성하지? 자, 일이다. 일, 일.“(128)
제 불행은 거절할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130)
호리키의 그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미소에 저는 울었고, 판단하는 것도 저항하는 것도 잊어버렸고, 자동차를 탔고, 여기에 끌려와서 정신 이상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여기에서 나가도 저는 여전히 광인, 아니 폐인이라는 낙인이 이마에 찍혀 있겠죠.(131)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131)
아버님이 이젠 안 계신다. 내 마음에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던 그 그립고도 무서운 존재가 이젠 안 계신다. 제 고뇌의 항아리가 텅 빈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제 고뇌의 항아리가 공연히 무거웠던 것은 아버지 탓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습니다.(132)
큰형은 저에게 한 약속을 정확하게 지켜주었습니다. 제가 태어나 자란 마을에서 기차로 너댓 시간 남쪽으로 내려간 곳에 동북 지방으로는 드물게 따뜻한 바닷가 온천지가 있는데, 그 마을 끝에 방은 다섯 개나 되지만 무척 오래된 집인 듯 벽은 허물어지고 기둥은 벌레 먹어 거의 수리할 수조차 없는 시골집을 사서 저에게 주고, 머리카락이 굉장히 붉은 예순 살 가까운 못생긴 식모를 한 사람 붙여주었습니다.(132-133)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쁜 거예요.”
마담이 무심하게 말했다.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눈치 빠르고......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하느님같이 착한 아이였어요.”(138)
첫댓글 와우~ 감사합니다...다시 읽은 기분이 드네요...요조가 그 요조였다니 요조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되네요
샘 발췌문 읽고 정말 오랜만에 전문을 다시 한번 읽었네요...온통 찌질함과 두려움과 실패투성이 인데도 다 읽고나니 위로가 되던데요
세상에 겁먹고, 익살꾼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다가 세상이라는 것은 단일한 실체가 없는 것이고 자기 앞에 있는 개인개인이 있을 뿐이라는 걸 알고 홀가분해하는 요조를 응원합니다. 너도 한 생명, 나도 한 생명. 그렇게 겁먹을 것도 없고, 인정받아야 할 대단한 것도 없다는 걸 알게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