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효상(韓孝祥)
[본관] 청주(淸州)
[생원] 선조(宣祖) 23년(1590) 경인(庚寅) 증광시(增廣試) (生員) 3등(三等) 54위(84/100)
[생졸년] 1565년(명종 20)~1605년(선조 38) / 향년 40세
[거주지] 한성([京])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이다. 公의 字는 경휴(景休)요. 호(號)는 협소재(협素齋)이니 참판공(參判公) 천뢰(天賚)의 三子요, 승지공(承旨公) 극공(克恭)의 손자로 문정공(文靖公)의 5대손이다. 일찍이 성균관(成均館)에 있을 때 소(疏)를 올려 우계(牛溪)가 무함(誣陷)받은 것을 변론하였다.
公이 1590년(宣祖 23)에 태어나 1605년(선조 38)에 세상을 떠났는데 유고(遺稿)가 있다. 公의 학행(學行)이 고매(高邁)하여 도암(陶庵) 이재(李縡)가 묘표(墓表)의 글을 지으면서 선생(先生)이라고 일컬었다. 公의 배위(配位)는 여산 송씨(礪山 宋氏)로 감찰 부흥(監察 復興)의 딸이다.
公이 몰후(沒後)엔 경기도 광주 세촌 탄동 선영 임좌(廣州 細村 炭洞 先塋 壬坐)에 초장(初葬) 하였으나 도시계획으로 기유(己酉 1969년)에 여주군 흥천면 계신리 입봉(驪州郡 興川面 桂信里 笠峰)아래 생원공(生員公) 墓 월편(越便) 축좌(丑坐)에 配位와 합조(合兆)로 이장(移葬)하였으며 구비(舊碑)가 있다.
묘 : 경기도 여주군 흥천면 계신리 세향일 : 음)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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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원 한공 묘표(生員韓公墓表)
우계(牛溪) 성 선생[成先生, 성혼(成渾)]의 문하에는 당대의 뛰어난 인물이 많았는데, 역학(易學)으로는 협소(愜素) 한효상(韓孝祥) 경휴(景休)라는 분이 있다. 선생이 한번은 시를 지어 “종왕(鍾王)의 글씨는 여사로 하였고,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에 마음을 쏟았네.”라고 하였으니, 얼마나 칭찬하고 허여했는지를 알 수 있다.
공은 가정(嘉靖) 을축년(乙丑年, 1565, 명종 20) 7월 9일 태어났다. 영특함을 타고나, 말을 배우면서 바로 글자를 알았다. 장성해서는 독서를 하고 행실에 힘썼으며, 천부적인 자질이 뛰어나 만력(萬曆) 경인년(庚寅年, 1590, 선조 23)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간신들에게 무함을 받아 그 이름이 죄안(罪案)에 오르자, 공이 분개하여 홀로 상소를 올려 원통함을 변론하였는데, 성상이 특별히 정거(停擧)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로부터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작은 집을 지어 ‘완오(玩五)’라고 편액을 하였으니, 하도낙서(河圖洛書)의 오수(五數)의 뜻에서 취한 것이다.
공은 성품이 침착하여 기쁨과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집안이 본래 가난하여 변변찮은 끼니도 잇지 못하였으나 태연하게 지내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직 의리(義理)를 맛있는 고기처럼 즐겼고, 부귀를 초개처럼 보았으며, 강학을 할 때에는 반드시 궁리(窮理)와 격물(格物)에 근본을 두었으며, 자신을 성찰할 때에는 반드시 기미를 삼갔다.
공의 탁월한 식견과 의론은 필시 전할 만한 것이 많았을 터인데, 병란을 겪고 난 뒤에 가승(家乘)이 흩어지고 일실되어 징험할 수 없으니, 더욱 애석하다. 공은 산수를 몹시 좋아하여 한가한 틈을 타 즐겨 원근을 유람하였다.
왜적들을 피하여 안음(安陰)에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정유년(丁酉年, 1597, 선조 30)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이 남원(南原)에서 큰 승리를 거두자 도원수 권율(權慄)이 기념비를 세우려고 하면서 공의 글씨 솜씨를 알고는 불러서 글씨를 쓰게 하였으니, 남원에 있는 유 총병(劉總兵)의 비석 글씨가 공의 필적이다.
만력 을사년(乙巳年, 1605, 선조 38) 7월 5일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41세였다. 광릉(廣陵 광주(廣州)) 음촌(蔭村)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한씨(韓氏)는 청주(淸州)에서 나왔는데, 고려 때 태위를 지낸 란(蘭)이 처음 족보에 보이며, 유항(柳巷) 휘 수(脩)가 가장 명성이 있었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휘 상경(尙敬)이 개국 공신으로 영의정에 올랐으니,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2대 후에 계희(繼禧)에 이르러서는 성종 때 좌리 공신에 올랐다. 증조 휘 윤창(胤昌)은 예조 참판을 역임하였다. 조부 휘 극공(克恭)은 별좌를 역임하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 천뢰(天賚)는 생원으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인 여산 송씨(礪山宋氏)는 감찰 복흥(復興)의 따님이다. 슬하에 4남을 두었으니, 도사 필진(必震), 필항(必恒), 필익(必益), 직장 필승(必升)이다. 여기(如琦)는 장남 소생인데, 정우(廷羽)가 그의 양자이며, 성시(聖時)와 성조(聖朝)가 그의 손자이다.
여회(如晦)는 차남 소생인데, 정구(廷矩), 선전관 정보(廷輔), 정주(廷柱), 정오(廷五), 정우(廷羽), 정로(廷老)가 그의 아들이다. 성윤(聖胤), 희조(煕朝), 성후(聖後), 성계(聖繼), 성서(聖緖), 성종(聖縱), 성적(聖績), 성유(聖維), 참봉 성휘(聖徽), 성집(聖緝), 성급(聖級), 진조(振朝), 사조(師朝), 임조(任朝)가 그의 손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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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생원 한공 묘표 :
이 글은 한효상(韓孝祥, 1565~1605)의 묘표이다. 한효상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경휴(景休), 호는 협소(愜素)이다.
[주02] 종왕(鍾王) :
위(魏)나라의 종요(鍾繇)와 진(晉)나라의 왕희지(王羲之)를 말하는데, 이 두 사람은 모두 서예에 능하였다.
[주03] 선천(先天)과 후천(後天) :
《주역》을 말한다. 북송의 소옹(邵雍)이 진단(陳摶)의 학문을 터득하여《주역》을 설명하면서 복희(伏羲)의 역(易)을 선천(先天),
문왕(文王)의 역을 후천(後天)이라 하였으며,〈복희선천괘위도(伏羲先天卦位圖)〉를 만들었다.
[주04] 오수(五數) :
오행(五行)과 음양 변화의 운수를 말한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