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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이냐 보존이냐. 우리 사회에서 갈수록 잦아지고 갈등의 골도 깊어지고 있는 문제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환경보존이야말로 다른 모든 가치에 앞서야 할 것 같다. 하지만 하나의 가치를 내세우며 다른 모근 가치를 도외시하다 보면, 일종의 ‘가치의 독재’로 흐를 가능성이 없지 않다. 더욱 중요한 것은 충돌하는 거치기준들이 합리적으로 공정하게 소통할 수 있는 방식을 마련하는 게 아닐까? 요컨대 이 질문은 철학적 차원의 가치문제와 사회과학적 차원의 사회적 합의 문제도 함축한다. |
경제학(economy)과 생태학(ecology)은 같은 그리스어 어원에서 파생하였다. 19세기 중엽 이전까지 두 형제는 갈등 없이 지내왔다. 산업혁명의 완성과 더불어 법칙지배적인 경제가 끊임없이 산업주의의 확대를 추동하면서 에콜로지는 생태계 및 자연환경의 편에서 이코노미아의 행위를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나아가서 적극적인 반란을 시도하였다.
생태학의 반란
그러나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인식된 환경문제는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대지의 장엄함에 대한 경외를 주장한 리오폴드(Aldo Leopold)의 《사막마을 연보》(1949), 농약으로 인한 토양오염의 심각성을 일깨웠던 카슨(R. Carson)의《침묵하는 봄》(1962), 인간과 자연, 기술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코모너(B. Commoner)의《닫힌 원》(1971), 그리고 슈마허(E. F. Shumacher)의 에세이《작은 것이 아름답다》(1973), 시(詩)로써 대중의 환경적 관심을 보급한 스나이더(Gary Snyder)의《거북섬》(1974) 등은 환경오염에 대한 구체적인 보고이다.
환경문제에 대한 이러한 비학술적이고 감성적인 보고서들에 자극을 받아 반(半) 학술적인 논의가 이어졌다. 린 화이트(L. White)의 짧은 논문 <우리 생태계 위기의 역사적 뿌리>, 로마클럽 보고서로 출간된《성작의 한계》, 네스(Arne Naess)의 강연문 <피상적 생태학과 심층 생태학> 등이 그것이다. 1950~1970년대 사이에 일어난 이와 같은 환경적 자각은 곧바로 ‘환경보존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1970년대 이후 환경운동은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사회운동 세력이 되었다. (물론 한국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1990년대 까지도 여전히 반독재, 민주화투쟁 등 정치운동 중심이었다.)
환경문제가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충분히 무르익은 후에 학문적인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학문적인 연구는 세기말에 이르러 생태학적, 환경적 가치를 다른 어떤 가치보다도 우선하는 정언명령의 위치에 올려놓았으며, 철학(윤리학),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등 주요분과들은 각기 생태학적 친화성을 과시하면서 생태학의 반란이 있기 전, 자신들의 핵심적인 교의(doctrine)를 스스로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 환경문제는 과학탐구, 거래, 기업활동, 매체 등 모든 분야에서 ‘호황을 누리는 상품’으로 과소비되기에 이르렀다.
환경지상주의-진보를 가장한 반동
지금까지 사람들은 경제 ? 사회적 지표로서, 기술의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경험적 사태 ? 지표로서, 형이상학적 메시지와 존재론적 증거에 의지해서, 혹은 주술적 ? 신비적 경구와 잠언으로 ‘환경위기’의 원인을 규명하고 처방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결론은 언제나 같은 어조였다. ‘유대-기독교, 인간과 그들의 필요 및 욕망, 과학, 기술, 자본주의 경제제도와 성장, 심지어는 수십만 년에 걸쳐 이룩한 인류의 이성적 업적의 총체인 문명 전체가 문제’라는 식이었다.
인간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이런 암울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제시하는 인간다운 삶을 향유할 수 있는 생태효율적 비전은 각기 달랐다. 더러는 현존 경제 ? 사회질서 전반을 부인함으로써, 더러는 근대의 남성적 이성을 대신하는 협동, 감정이입, 감수성을 함축한 새로운 ‘생태학적 이성’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혹은 주술, 영성, 신비에 호소함으로써 생태적으로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인류의 미래가 보장된다는 비전이 그것이다. 이는 현재의 환경적 현실(무엇보다도 인간, 특히 현존 세대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현실)을 외면한 보수 ? 반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경향을 뭉뚱그려 나는 ‘환경주의 이데올로기’라 부른다.
환경주의 이데올로기는 과학과 기술, 그리고 그것들의 가치근거를 제공해 온 근세철학을 그 원흉으로 설정하고,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인간의 자연관과 세계관의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몰고 간다. 인간 삶의 자연적 조건으로서 환경에 대한 ‘순진한 걱정’을 감안하더라도 환경주의 이데올로기는 역사성, 생명권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연대와 결속이라는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 쇠퇴하게 만드는 역효과를 낳았다. 따라서 이 이데올로기는 반사회적일 뿐만 아니라, 전체주의, 에코-파시스트가 될 소지가 크다.
위기에 대한 반성적 성찰
환경문제가 대두하면서 ‘현대성의 기획(Projekt Moderne)’이 수난을 겪고 있다. 데카르트가 문제를 제기하고 칸트와 헤겔이 완성한 현대, 혹은 그냥 영어로 ‘모더니티’라 부르는 철학적 세계구상은 마르크스, 베버, 루카치, 그리고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회이론을 거치면서 ‘문명비판’의 형식으로 정형화되었다. 이는 서로 대립되는 두 경향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같은 근대성의 양면성(문명과 야만)에 대한 비판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성의 핵심적인 규준들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데리다(J. Derrida)류의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이는 근세철학의 주체중심 ? 이성중심적 세계관, 결정론적이고 환원주의적인 과학, 그리고 그런 과학이 낳은 기술문명의 불가역성, 자본주의 경제의 초월적 힘을 비판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더니티의 세계기획이 ‘환경위기’의 원인이라는 철학적 반성은 정당한가? 알고 있듯이 환경오염은 현대문명의 독특함이 아니다. 기록에 의하면 고대나 중세시대에도 환경오염은 있었다. 9세기의 경주에도,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의 문명에도 있었던 일이다. 고대 로마, 잉카나 마야 문명을 꽃피웠던 아메리카인디언의 생활양식이 ‘자연스럽’기는 했겠지만, 프리미티비스트(primitivists) 들이 상상하듯이 결코 환경적 낙원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환경문제를 주력상품으로 파는 철학자, 환경운동가, 문명비평가들은 산업혁명 이후에 나타난 환경오염은 과거의 그것과 다른, ‘근본적으로 다른 독특함’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과거의 오염은 생태계의 자기정화 능력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오염이었던 데 반해, 현재의 환경문제는 회복 불가능한 ‘최종적인 위기’라고 진단한다. 자신의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문제를 과장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환경론자들은 부존자원의 고갈, 인구증가와 식량고갈, 환경오염이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급격히 확산되어 미래에도 똑같은 추세로 계속되리라는 단순한 예측에 근거하여 ‘위기임’을 확증한다. 미국과 선진국을 중심으로 이런 비관적인 목소리가 커지면서, 지구는 인간을 감당할 만큼 무한한 태양 에너지와 중력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기술혁신을 통해 핵 에너지, 화석 에너지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든가, 인구증가의 한계, 식량생산 방법의 혁신, 낭비 없는 자원이용 등 근대 이후의 인간의 대(對) 자연활동과 기술을 합리적인 활용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은 감히 목소리를 내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아무리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예측기술(Technik des Voraussagens)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지구의 미래’가 어떨지에 대한 과학적 예측은 불가능하다. 현재의 기술발전 추세와 그것이 미래세계에 미칠 영향을 조망하기 위한 변수는 너무 많을 뿐만 아니라, 그 변수들이 시시각각 변화하기 때문에 불확정적일 수밖에 없다. 다만 최상을 근접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뿐이다.
물론 현대의 환경문제에 대한 논의가 지나치게 과장되었으며, 그래서 협박 혹은 부당한 ‘공포분위기 조성’이라는 말은 아니다. 오늘날의 이러한 비관적인 환경지상주의적 분위기에서 ‘지구의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목소리’에 주목함으로써 ‘환경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고, 장차 인류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재앙의 규모를 좀더 정확히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환경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위기’는 지구환경, 산업화, 기술수준, 인구, 식량생산 등 현재의 조건을 변화될 미래의 상황과는 무관하게 ‘단순투사’함으로써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만약 인구가 지금처럼 증가한다면’, ‘산업화가 지금처럼 지속된다면’ 이라는 가정에 근거해 있기 때문에 오직 이 가정에 충실하기만 할 뿐, 현재의 위기추세가 미래에도 똑같은 세력으로 지속될 것인지 아닐지에 대해서는 대답할 의무도 없고 알 수도 없다고 피해간다. 한마디로 환경위기에 대한 대부분의 예측은 과학적 토대가 부족한 추측이거나 추사일 뿐이다.
결론
오늘날 환경주의자의 메시지를 듣고 있노라면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아직도 희망은 끝나지 않았다. 문명화로 인한 환경파괴는 인류를 치명적인 조건으로 몰고 가고 있으며, 이는 초국가적, 초인종적, 초문화적(cross-cultural)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도덕적 도전’이다. 대규모 전쟁, 과학 ? 기술적 재앙 등 일시적인 퇴행이 있기는 하였지만, 휴머니티는 명백히 자유의 확대의 역사이고, 휴머니즘의 특징인 이성의 위대한 성취는 결코 퇴보한 적이 없으며, 인간은 인간중심적 사유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실존적 위상을 초월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인간 이외의 모든 존재를 책임져야 하는 이성적 존재다. 우리는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에 대한 합리적인 현실화를 추구해야 하며, 불합리하고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비판하는 도덕적 힘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며,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성의 긍지를 회복하기 위해, 오늘날 쇠퇴해버린 사회성을 강화하기 위해, 생태학적인 미래책임을 보증하기 위해 ‘이성적 권능을 강화’해야 한다.
■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환경문제는 국민국가 단위의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생태학적
지구공동체’ 건설에 대해 생각해보자.
2. 이데올로기 시대의 동 ? 서 대립은 환경의 세기에 와서 남 ? 북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환경적으로 풍요로운 세계와 빈곤한 세계 간의 갈등을 중일 방안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3. 심층생태론, 가이아이론 등 현대의 다양한 생태주의 사상과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등
이데올로기적 진보이념의 상관관계를 토론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