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쥬신제국사30-3권의 편집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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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쥬신제국사] 제3권 편집을 마치며
-한 없이 부끄럽다-
우리 민족의 상고사(上古史) 대서사시(大敍事詩), 대쥬신제국사 3권의 편집도 드디어 마쳤다. 느끼는 심정은 그저 부끄럽다는 것뿐이다.
이번 3권 30회의 직전 29회로 올린, 저자 김산호 선생이 왜? 어떻게? 이 <대쥬신제국사>를 새로운 역사서 장르의 회화극본(繪畫劇本)으로 집필하고 제작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소회를 담은 ‘후기2의’ 글을 보면 이해될 것이다. 그 후기의 내용에 공감하고 감탄하고 존경하다 보면, 나 같은 수준의 이들은 다 그렇게 생각하게 될 것이라 본다. ♣
<대쥬신 제국사: 1,2,3 권>
크기: 가로38cm 세로27cm 두께3cm, 최대분량: 1권 252페이지, 지질: 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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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나도 좀 대견하다? 노년에, 대작의 역사서 내용과 그림을 타이핑과 접사촬영으로 컴퓨터에 입력하고, 그림이 지면바탕인 원본 회화극본의 기록과 대화를, 삽화를 곁들인 역사소설 형태로 재편집해 내 블로그에 올리고, 지인들 간의 인터넷카페와 폰 카카오 단톡방에 전파해 편히 보도록, 4개월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어왔다는 사실을 돌아보니 그렇다.
침침한 노안으로 그림책의 배색(配色)에 묻힌 깨알 같은 글자들을 읽어내고, 반사광이 부담되는 컴퓨터화면과 씨름하다보니, 늙어 원시안이라 잘 보일 먼 곳의 물체가 2중3중으로 아른 거린다. 이 정도로 눈을 더 피로하게 만든 걸 보니, 고생도 좀 한 듯싶다.
그래도 매일 이곳저곳에 적게는 십 수 명에서 많게는 100명 가까이 재미있다면서 읽어주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그렇구나! 늙어가며 걸릴 치매를 예방하거나 지연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잘 알려진 대로, 보고 읽고 쓰는 일을 매일 할 수 있었다는 것도 얼마나 영양가 있는 일인가? 앞으로도 계속할 이런 류(類)의 쓸 만한 소일거리를 찾았다는 것도. 또한 얼마나 다행인가? 이래저래 저자 김산호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
한편, 내가 가지고 있던 <대쥬신제국사>가 3권까지 뿐이었고, 이후의 책은 오리무중이었던 상고사가 아니라 생소하지 않을 것 같아, 속간(續刊)됐다는 4.5권의 편집은 그만 두려 했는데, 그 동안 이 연재를 지켜본 친구들이 4,5권은 어찌 되냐고 성화(?)를 하니, 생각이 달라진다. 앞으로도 사든지, 가까운 도서관에서 구해 읽어보든지 해서, 후속 연재 여부를 결정해 볼까 한다.♣
사실 <대쥬신제국사> 회화극본을 능동적으로 접하게 된 건, 1990년대 초반 중국이 소위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전초작업으로 북만주 일대 우리 상고사의 유적들을 말살시키려는 움직임이 포착된 당시, 이에 대한 맞불 작전의 중심내용을 찾으려는 과정에서 이뤄진 일이다.
이 책에서 수시로 나오는 표현대로, 북만주는 우리의 고토(故土)이니, 언젠간 우리가 다물(多勿:회복)해야 함이 우리의 사명이고 꿈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선 국제분쟁을 야기할 민감한 문제라 지리적 정치적으로는 어려우니, 경제와 문화 방면으로 우회하는 다물은 가능할 것이란 의지를 불태웠었다.
그래서 알음 알던 <대쥬신제국사>의 내용을 북만주 일대에 확산하려는 문화적 다물 작전의 시도를 했었고, 당시 같은 취지와 맥락의 경제적 다물 작전의 움직임들도 주목하고 있었다.
이를 테면, 장덕진씨 등이 추진하던 것으로, 만주 삼강평원에 한중 합작으로 대규모 농장을 건설하고, 현지 조선족을 중심으로 고용해 배달민족의 문화적공동체를 이루어 보려던 (숨은 의도?) 프로젝트를 말한다. 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기업들의 호응이 부족해 실기하고 좌절된 것은 두고두고 애석하다. ♣
우리 중에는 이 같은 꿈을 안고 언제가 실현하려는 내가 존경하는 이들이 많다. 일찍이 이병도 류 우리비하 일제식민사관에 맞서 강대했던 민족사를 찾아 나선 선각들이 많았었다, 1948년 조선상고사의 신채호 선생, 1963년 國史新論의 이기백, 1979년 한단고기의 이유립 선생, 이후 천관우, 안호상 선생들도 알려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특별히 감명 받은 인물들은 그 이후에 알게 되는데, 이 방면에 문외한인 나를 눈 뜨게 한 존경하던 선배와 막역했던 친구의 덕분인데, 지금은 너무 격조(隔阻)해 버린 게 미안하기만 하다.
1976년 특전사시절 전관 선배의 옥인동 자택을 방문해 처음 대면한 것이 한자(漢子)투성이의 ‘韓國의 再發見’(1970년판), ‘韓國學講義’(1975년판), ‘高麗重興會’(팸플릿)이었다.
그리고 1978년 직장 전재혁 선배와 함께 만난 재야 사학자란 분이 공교롭게도 앞의 책들 저자이신 복초(伏草) 최인(崔仁)선생이셨다.
종로2가 YMCA 옆 다방에서 만났을 때의 복초 선생은 이 책들을 쓰기 위해 체력의 소진은 물론, 가산을 탕진하고 아내로부터 버림까지 받아, 허리가 굽어져 완전 꼽추 같은 행색이었다. 선배와 함께 사정을 파악하고 정책적으로 도움을 주려다 여의치 못했던 점은 차라리 죄스럽기만 한다.
그분이 그 책들을 발간하기 이전의 연구 자료들은 당시 안oo 장관을 비롯한 유명인들이 발간과 지원을 약속하고 가로채 가, 저들의 이름만 높이고 말았다니. 개떡 같은 경우에 얼마나 분개했었던지 모른다.
또 1970년대 초, 전방 대대작전장교 시절에 연대파견 사단의 연락장교로 왔다가 첫 대면한 임관년도가 같은 학군 9기였던 친구 이태균은 나도 심취한 중국과 우리 무술에 흥미와 조예가 깊어 친해졌었다.
전역 후로도 만났는데,1990년대 초엔 우리의 상고사에 심취해 있다며 내게 소개해 준 것이 바로 <대쥬신제국사>이고, 그 저자 김산호 선생에 대한 존경과 칭송이었다. 더구나 김산호 선생을 직접 만나고 친해진 상황에서, 나에게 이 방면 첫 눈을 뜨게 해준 앞서의 전관 선배와 연을 맺어, 이 책을 당시 군(軍)의 정훈교재로 추천하는 일에 함께 했었다니,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더니, 이런 우연이 어디 있을까?
또 한사람 위와 같은 사관(史觀)을 가지고 나를 각성케 해준 이가 바로 태릉동기생 박정학 박사다. 사단법인 한배달(1986년)과 치우학회(1999년)의 회장으로서, 배달겨레 한민족으로서 우리민족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겨레얼 찾기에 나서 고군분투 해온 존경 대상의 친구다.
바로 이 한배달의 주관 3.1빌딩 세미나에서 이 대쥬신제국사의 저자 김산호 선생도 감격 속에 상면할 수 있었다. ♣
이참에 한 가지 더하면, 편집자의 필명 一鼓(일고)도 우리의 고토회복(古土回復) 염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북(鼓)이 내게 처음 다가온 것은, 기억에 희미한 오래전 텔레비전 드라마 <북소리?>이다. 작가? 기자? 학생? 이었던 여주인공 송옥숙이 만주 북방을 찾아다니며 우리 민족이 북(鼓)의 민족임을 확인하며, 가슴 깊이 때려오던 북소리의 근원이 민족사에 있음을 깨닫는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각성과 감동 속에 당시 송옥숙의 신비한 매력에도 풍덩 빠졌었다.
상고사에 나오는 민족 제전(祭典)의 시원(始原)이 영고(迎鼓)에 있음도 알게 되며 내 가슴 속에 고토회복의 꿈이 낭만처럼 담기게 되었었다. 그래! 우리가 언젠가는 치우천황 시대처럼 동북아를 호령하는 큰 북소리를 한 번 다시 울려야 되지 않겠는가? 그리 염원하며, 당시 이곳저곳 시사문제 독자투고를 하던 필명을 일고(一鼓)로 정하게 됐던 것이다.
이런 북에 대한 사랑이 나만이 아님을 계속확인하게 된다. TV교양프로의 법고(法鼓) 제작과정과 그 장인(匠人), 전국을 다니며 직접 목도한 큰 북(대고(大鼓)들[속리산 법주사 법고, 충북 영동 난계사 천고(天鼓):세계최대?] 등에서이고, 1985년 남북교류역사 최초의 서울예술단 방북공연에 간접 참여하면서 접촉한 ‘북의 제전’, 최고인기 대중공연 “난타‘도 지켜보면서 우리민족의 신명이자 흥이며 에너지의 원천일 수 있는 북에 참 연연하게 됐던 것이다.
그래서 一鼓는 스스로 사랑하는 필명인 것임을, 우리 상고사 편집에 즈음해 밝히게 되는 것이다. ♣
<자전거 라이딩으로 금강 종주(뜬봉샘~군산)하며 찾아본 2012년 10월8일의 난계사의 천고>
각설하고, 이 편집을 마치면서 기록의 위대함에 공명(共鳴)해, 내 자신 일생의 기록도 남겨볼까 하는 생각이 샘솟는다.
결코 내세울 게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일생이니 무슨 교훈이나 감명을 줄 리는 없겠지만, 그래서 무슨 수기나 자서전도 안 될 그런 글이 되겠지만, 한 번 시도해 보고 싶다.
최근 늙은이의 특징 그대로, 한 시간 전 일도 돌아서면 기억에서 새카맣게 사라지는데, 흘러간 옛일들은 왠지 더욱 또렷해지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때의 사실과는 전혀 다를 주관적 착각의 기록일 진 몰라도, 당시 소소한 일상들이, 오늘이나 후대에선, 고고학자들이 찾아 위대해지는 문화 문명적 발견으로 되는 숟가락 몽댕이 하나일 수도 있을지 않을까? 그리 된다면, 저자 김산호 선생 앞에서의 내 부끄러움이 좀 작아지지 않을까? 해서다.♣ §
2020.7.7
一鼓 김명수
첫댓글 대쥬신제국사 온라인 연재가 오늘 8월24일로 끝납니다. 지난 5월6일부터 총 116회가 (1편48회, 2편38회, 3편30회) 연재되는 111일 동안 애독해 주신 동기생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다음 기회에 다른 연재물로 다시 만나기를 기대하며, 내내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一鼓 김명수 합장!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간간히 읽어가면서 솟구치는 감정들이 일더군여.
긴얘기는 생략허구 다시한번 첨부터 시간을 내서 찬찬히 읽어 볼 생각임다.
근디 왜 존대말로 쓰게 되는감? ㅋ
그건 아마두 고생한 대가를 이렇게 나마 지불할려고~~ㅋ
다시한번 명수 동기의 수고에 깊은 감사를 드리네.
오~! 양배 친구! 뜻밖의 정성스러운? PC 카페 격려 댓글을 받아보고 감동했네! 오래전 당사모 놀러 갔다가 한번 본 후 오프라인 모임엔 못나가 보지 못했었는데, 그 동안 소생의 대쥬신제국사 온라인 편집 연재를 보아주었고, 다시 찬찬히 더 보겠다고 하니, 그저 고마울 뿐일세,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 독서가 폰의 카카오 단톡방 애용에 그치는데. 책상 앞의 PC를 마주하고 있다는 건, 그만큼 더 학구적이란? 뜻? ^^ 하여튼 고맙고 고맙네, 늘 건강하시게! 一鼓 명수 합장!
이 좋은 글을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다네. 역사 이야기를 왜 로그인하는 번거러움을 거쳐 들어갈 수 있게 했는지 알 수 없네. 동문 카페에 들어오면 로그인이 필요 없이 바로 볼 수 있는 글만 몇 개 읽어 버릇했더니 이런 글을 놓치게 되었네. 대쥬신제국사를 처음부터 찾아서 하나하나 빠짐 없이 읽어볼 생각이네. 그동안 정말 애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