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안녕하셨어요? 천지님, 바다님, 참늑님, 붉은 악마님..
다른 분은 머리가 둔해서 갑자기 떠오르지 않네요
죄송합니다. (^^)(__)(^^)
제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동안 카페에 소홀했었습니다.
앞으로도 한 며칠 간은 더 소홀할 것 같네요^^
아마 12/20 전후면 짬이 날 것 같습니다.
일전에 제가 소개해드린 오종철 님 글의 그 마지막 완결 편입니다.
모두들 좋은 하루 되십시오
- 해명 올림 -
=========== 전 문 인 용 ===========
고구려는 우리나라이고 중국은 고구려에 예속되어 있었다.
중국은 고구려의 인가를 받아야 합법정부로 인정되든 때가 있었다.
중국은 우리의 곁가지이다
역사는 돌고 또 돈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조선반도에 위축된 상태로 존재하
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국조 단군께서 건립한 단군조선의 강역 중 지금 중국
의 북경과 만주벌판은 안마당에 해당했다. 이 단군조선을 이어받은 고구려가 차
지했던 만주벌판과 지금 중국이 수도로 사용하고 있는 북경은 당연히 우리 땅이
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그리고 준비하고 기다리는 자는 오는 기회를 놓
치지 않는다. 우리는 길을 예비하고 기다려야 한다. 저 만주벌판과 화북지방이
우리 손으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준비된 상태에서 기다려야한다. 이미 빼앗긴
세월이 1000년을 훨씬 넘었으니, 2000년을 기다리겠다는 자세로 기다려야한다.
역사를 재는 시간으로 1000년은 우리의 시간으로 10년 정도밖에 안 되는 시간이
다. 20년이라고 못 기다릴 이유가 없다. 다만 우리 땅이란 사실을 잊지 않는 것
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렇게 땀흘리면서 역사복원작업을 하는 것이다.
[고구려는 중국에 속한다] 라는 주장이 있다고 [해명]님이 바로사 계시판에 올
린 글이 있어서(서길수 교수의 글을 퍼온 글이라 전제하고
올린 글) 이에 대해 몇 차례로 나누어 논하려 한다.
위 주장의 핵심적 논거는 몇 가지로 요약된다.
1. 한나라가 조선반도의 북부를 침입하여 낙랑을 비롯한 군(郡)을 건립하였다.
2. 역사 속에서 고구려는 장기적으로 중국의 중앙정권에 예속되어 있었다.
3. 고구려의 후예들 대부분이 현재 중국의 소수민족(각 민족)에 속해 있다.
이상 3가지 요점에다 첨가하기를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으로 기자의 소봉지이고, 한·진시대 모두 그 곳에 군현을 설치했었다" 라는 수양제의 측근 배구가 한 말을 들고 있다.
1에서 말한 낙랑군을 조선반도 북부에 건립했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지금
까지 조선반도의 남·북학자 모두는 낙랑군이 평양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해석하
여 스스로 잘못을 저질렀다. 그리고 이와 같이 외국학자들이 이를 기초로 잘못
된 주장을 펼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해 주었다.
낙랑군은 조선반도 내에 있어본 적이 없다. 낙랑군은 천진부근에 있었다.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으로 기자의 소봉지' 라 한 고죽국의 위치는 지금 천진
부근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기자가 주무왕으로부터 위임받은 곳은 지금 천진부
근의 발해연안이었다. 그러므로 기자 자체가 우리의 단군조선과는 관계없는 인
물이다. 기자는 지금 중국 하남성 안양현을 중심으로 위치했던 은나라 사람이
다. 은나라 말기 세 현자 중의 한 사람인 기자는 주(紂)왕의 잘못을 지적하다
미움을 사 옥에 갇혀 있었다. 이 때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켰다. 무왕
은 감옥에 갇혀 있던 기자를 석방해 주었다. 이에 기자는 발해연안의 동이족 거
주지로 도망했다. 기자는 현자답게 주왕이 개과천선하여 석방되기를 기다렸으
나 이 때 적국인 주나라에 의해 은나라가 오히려 멸망당하고 자신도 적국 왕의
은사로 석방된 것을 비관하여 동족이 모여 사는 곳으로 도주한 것이다. 주무왕
은 기자의 도움 없이는 은나라 백성들을 진무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
에 발해연안의 은나라 강역 일부를 떼어 기자에게 주고 조선후로 봉했다. 무왕
은 기자를 단군조선과 주나라와의 완충지에 머물게 하여 단군조선에 대한 방패
로 삼은 것이다. 따라서 기자는 비록 주나라 왕실에 친견례를 하지 않아도 된다
는 조건을 허락 받았다 할지라도 은나라 강역 밖으로는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
므로 기자는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은나라 강역을 벗어날 수 없었다. 기자
조선 강역은 그래서 은나라 강역 내에서 찾아야 한다. 이것은 상식에 속한다.
기자는 자신이 무력으로 어느 지역을 점령해 기자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다. 주무왕이 은나라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한 방법으로 기자를 내세워 반
독립적인 제후국을 세워 준 것이다. 그러므로 기자조선은 주나라의 괴뢰정권이
었다. 그것을 지금 우리나라 평양부근에 있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단군조선 전
체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평양이 은나라 강역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기 때문이다. 기자조선은 주나라와 단군조선과의 완충지인 지금 중국 천진부근
에 있었다. 따라서 위만조선도 이 곳에 있었고, 한나라가 설치한 한4군 중 낙랑
군도 이 곳에 있었다.
단군조선은 비파형동검의 분포도로 알 수 있듯이 중국의 황하와 영정하의 중간
지역인 당하유역까지 통치영역을 넓혔던 때가 있었다. 이 곳은 단군조선의 서남
제후인 남국의 후신 연나라가 세력을 팽창했을 때 연나라 수중에 들어왔던 지역
들이다. 그런데 이 연나라를 중국은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
다. 이것은 연나라에 온 중국쪽 사신이 연왕을 설득하는 내용 등 잠깐씩 중국
의 사서가 연나라 왕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나 연
나라는 중국의 지방정권이 아니다. 연나라는 단군조선 세 개의 대제후국 중 하
나로 중국 중원정권에 도발적이었기 때문에 중국역사에 기록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때로는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북쪽지방의 적을 물리치는데 합동작전
을 펼치기도 했기 때문에 기록에 나타난 것일 뿐 중국의 지방정권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다.
이 연나라 강역은 부여(엘렌호투)·구려(북경)·한(적봉)·맥(조양)이라는 소
제후국으로 구성되어 있다가 부여가 북·동부여로 양분된 상태에서 주몽이 고구
려를 건국하게 되고 이들 연나라 강역 모두를 합병하게 된 것이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 논자는 동천왕이 왕기의 추적군에 쫓겨 남옥저 지방에
서 간신히 살아 종묘사직을 지킬 수 있었던 사실을 해설하면서 증명한바 있다.
동천왕이 유유의 구명작전에 힘입어 유유가 대방태수 궁준을 죽임으로서 혼란해
진 적을 향해 일격을 가하자 낙랑태수 유무가 도망하는 기사를 해설하면서
즉 "여기에서 오히려 주의 깊게 살펴볼 일은 낙랑태수 유무가 대방태수 궁준을
잃고 퇴군하는 기사, 즉 드디어 낙랑 땅으로부터 출발하여 물러갔다는 기사이
다. 낙랑태수 유무가 자기가 관장하는 낙랑 땅을 두고 어째서 어디로 물러갔을
까. 이것은 최리의 낙랑국이 있던 곳에서 한나라 낙랑군이 있던 지금 천진부근
을 향해 물러갔다는 사실을 확고부동하게 알려주는 기사이다. 따라서 최리의 낙
랑국과 한4군 중 하나인 낙랑군과는 천리 이상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이
글로 확실히 구분할 수 있다. 낙랑국과 낙랑군은 서로 다르며 다른 곳에 있었
다. 이 사실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고 한 것이 그것이다.
낙랑군이 있던 천진부근은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단군조선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를 두어야 할 인후지지(인체에 비유할 때 목구멍에 해당하는 지
역)였기 때문에 이 낙랑군지역이나 기자조선지역이 중국에서는 중요하게 인식되
어온 것이다. 그리고 그 곳이 곧 중국의 끝이요 변방으로 알고 살아왔다. 이 낙
랑군은 동쪽 먼 곳에 있는 군이란 뜻의 요동군 바깥에 있었다. 그래서 후일 이
지역의 바깥쪽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고구려왕을 [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이라 칭
했다. 그러다가 요동군 외방의 낙랑군이 가깝게 느껴진 고구려말 경에 신라왕
을 칭할 때에는 [낙랑군공신라왕]이란 칭호를 썼다.
자기 나라와 접경해서 존재하는 외국을 칭할 때 그 나라와 가장 가까운 거리
에 있는 자기 나라 군의 명칭을 넣고 호를 짓는 것이 중국의 관례였다. 외국의
왕이 고구려왕을 처음으로 서면 호칭한 것은 고국원왕 25년 전연왕 모용준이 효
시이다. 전연은 낙랑군 땅을 점유하여 왕조의 기틀을 잡은 나라이다. 모용준이
고국원왕에게 올린 호를 보면 [정동대장군 영주자사 낙랑공 고구려왕]이라 했
다. 이 봉호를 올릴 때 전연은 영주(북경주변지역)를 차지하고 있었고, 또한
옛 낙랑군지역도 차지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전연이 차지하고 있던 강역의
관직 이름을 먼저 말한 후 고구려왕이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용준
과 똑같은 위상을 고구려왕도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모용준
이 경영하고 있는 전연의 주군을 모두 통치하는 사람이 당신이요' 하는 식의 존
칭인 것이다.
중국의 여러 왕조에서 고구려왕에게 헌작하는 봉호는 모두 이와 같은 맥락을
갖고 있다. 혹은 자신이 가장 걱정하고 힘들어하는 주·군의 명칭만을 나열하
고 봉호를 올린 경우도 있다. 따라서 중국의 여러 왕국이 고구려왕에게 올린 봉
호는 [벼슬을 내렸다]고 생각해온 국내·외 학자 모두가 발상을 전환해야 한
다. 국가대 국가로 외교문서를 보내면서 벼슬을 주는 형식이란 존재하지 않는
다. 오늘날 미국의 대통령이 우리나라 대통령을 부를 때 [프레지던트]라하는 것
과 똑같이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봉호를 놓고 쓸데없는 패배주의
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
따라서 1에서 말한 '한나라가 조선반도의 북부를 침입하여 낙랑을 비롯한 군
(郡)을 건립하였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다음은 2에서 '역사 속에서 고구려는 장기적으로 중국의 중앙정권에 예속되어
있었다'는 말에 대하여 고찰해 보기로 한다.
고구려가 건국될 당시 중국은 몽고쪽의 분열상에 관여하면서 국력을 소모하고
있을 때였다. 심지어는 원제가 몽고의 호안야선우에게 애첩 왕소군을 빼앗길 정
도로 국력이 말이 아니었다. 몽고가 동서로 분열되고 질지와 호안야가 각축하
고 있음을 기회 삼아 주몽은 동부여(적봉)로부터 뛰쳐나와 요양(졸본)에서 고구
려를 건국했다. 그것이 BC 37년 전한 원제 건소 2년이다.
이 때로부터 고구려는 단군조선 강역을 할거하고 있던 제후국들을 하나하나 접
수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단군조선이 차지했던 강역대부분을 차지했
다.
고구려가 끊임없이 성장발전하고 있는 동안 중국 쪽에서는 전한이 망하고 신
이 일어났다가 다시 신이 망하고 후한이 일어났다. 그리고 후한은 장각이 이끈
황건의 난이 일어나 이를 토평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3대 세력 조조·유비·손권
의 세 제국으로 분열되었다가 사마염에 의해 진나라로 통일되는 과정을 겪었
다. 그것이 서기 265년, 고구려 중천왕 18년의 일이다.
고구려가 동북아시아의 대륙을 점유하고 그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 있을 때
중국 쪽의 진은 영가의 난을 시작으로 5호가 발호하여 드디어는 5호16국 시대
를 겪게 된다.
앞의 제2 논점에서 '역사 속에서 고구려는 장기적으로 중국의 중앙정권에 예속
되어 있었다' 라는 것은 아마도 중국의 여러 왕조가 고구려왕에게 봉호를 올린
것을 근거로 한 말인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 쪽에서 발흥한 국가 중 고구려왕에
게 최초로 봉호를 올린 왕국은 전연이다. 그 때는 전연 건국 7년차에 해당하고
고구려 건국 392년차에 해당한다.
이제 나라를 세운지 7년박에 안 된 전연이 근 400여 년이나 나라를 경영해온
고구려왕에게 봉호를 올린 사실을 놓고 '벼슬을 내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본·
말이 전도된 것이다. 전연은 고구려의 강역인 창려부근을 틀어잡았고 동진의 평
주지역 일부를 점유했을 뿐인데 그런 전연을 고구려보다 대국이라 말할 수는 없
다. 건국이 짧고 강역도 좁은 전연의 모용황이 고구려 고국원왕에게 올린 봉표
를 벼슬을 하사한 것으로 볼 수 없는 이유가 이렇다. 이후 중국에서 부·침한
다른 모든 왕조들이 고구려에 앞다투어 봉호를 올린 것은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
기 위한 것이지 고구려왕에게 벼슬을 내리는 행위가 아니었다. 안장왕이 죽고
안원왕이 즉위했을 때 양고조 소연이 국서를 보내 '전왕의 벼슬을 잇게 했다(下
詔襲爵)'는 기사가 고구려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사를 중국 측이나 우리나
라를 비하시키려는 부류의 학자들에게 힘을 준 듯한데 이에 대해 졸저 [고구려
본기 신주해]의 주해문을 인용해 보면,
"전왕의 벼슬을 잇게 했다고 해서 마치 양무제가 안원왕에게 벼슬을 내리는 것
같은 감을 느끼게 한다. 려기 찬자들이 '하조습작'이라 하므로써, 이런 번역이
된 것인데 이것도 역시 하나의 외교적 의전 중 하나일 뿐 양나라가 고구려에 벼
슬을 내린다거나 준다거나 한 것이 아님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이 때 고구려
는 건국시년으로부터 494년, 그러니까 근 500년의 역사를 가진 문화대국이었
다. 반면 양나라는 이제 겨우 나라를 개창한 지 29년 차에 당하는 때였다. 그러
므로 양무제가 고구려 안원왕에게 작위를 하사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따라서
조서란 국서를 말하고 '습작'이란 당연히 전왕과 대등한 위치에서 양과의 통교
를 원한다는 하나의 외교적 수사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수 없이 부·침을 계
속한 중국측의 여러 왕조가 고구려에 봉헌하고 있는 작위는 자기들 보다 한단
계 위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는 수 나라말경 8개군
벌 8주국 중 하나였던 당고조 이연이 당나라를 개창한 후 고구려 보장왕에게 올
린 작위가 '상주국'운운한 것으로 보아도, 8주국 보다 상위로 대우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하며, 지나친 사대주의 사고에서 벗어나
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 민족은 지금까지도 중국을 지배하는 지배민이 되어 있
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라고 되어 있다.
또 북위가 동·서위로 분국된 후 동위가 고구려왕에게 헌작한사실을 해설하면
서
"이 때 동위가 고구려왕에게 헌작한 외교적 행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다. 그것은 곧 동위만이 적법한 정권이라는 것을 고구려로부터 인가받게 되기
때문이다. 서위는 내내 고구려와 통교하지 못하고 멸망하여 북주가 되며, 동위
는 후일 북제가 되는데 이 북제 역시 재빨리 고구려왕에게 헌작하고 그 정통성
을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서위를 이은 북주는 고구려에 헌작하지도 못하고 또
인가 받지 못하고 있다가 북제를 멸하자마자 고구려에 재빨리 헌작하고 정통성
을 인정받게 된다. 이 북주는 다시 수나라로 이어진다. 따라서 중국측 왕조가
고구려왕에게 조서로써 헌작하는 행위는 그 정통성을 인정받느냐 못받느냐의 관
건이 되는 매우 중차대한 외교행사였다. 이것은 곧 고구려가 중국 왕조를 손아
귀에 쥐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라고 했다.
위 해설문을 종합해 보면 북조의 북위는 동위·서위로 갈라지고 동위는 다시
북제가 되었다가 북주에게 멸망당했고, 서위는 그대로 유지되다가 북주가 되고
이 북주를 이은 것이 수나라이다. 북주가 북제를 멸하여 북중국을 통일하고 이
북주가 수나라로 이어진다. 이런 맥으로 보아 북주가 북제를 멸하고 고구려왕에
게 헌작하지 않았으면 수나라가 그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할 뻔 했다. 수문제·
양제 부자는 북주를 지탱한 8주국·12장군가 중 후자인 12장군가 출신으로 상
위 그룹인 8주국을 추월해서 정권을 잡은 부담도 있었지만 이 정통성이 주어지
느냐 않느냐를 고구려가 쥐고 있는 것이 못마땅해서 무리한 정벌전쟁을 펼치다
가 자멸한 것이다.
이렇게 중국의 정통성을 좌·우 하는 막강했던 고구려를 무슨 이론으로 중국
의 중앙정권에 예속된 국가라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2의 논거 '역사 속에서
고구려는 장기적으로 중국의 중앙정권에 예속되어 있었다'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다음은 '3. 고구려의 후예들 대부분이 현재 중국의 소수민족(각 민족)에 속해
있다'는 논점에 대해서 논한다.
중국은 우리의 가지일 수밖에 없다.
중국은 다민족국가이다. 중국은 40여개의 소수민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많
은 소수민족 중에서 고구려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고구려족으로 분류
될 수 있는 고구려를 건국한 주체들이 소수민족이 아닌 중국의 지배민이 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고구려의) 5부 176성 69만여 호를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나누고 안동도호
부를 평양(환인)에 설치하여 (설인귀로 하여금) 이를 다스리게 했다. 고구려 장
수로서 공이 있는 자를 골라 도독·자사·현령을 삼아 중국사람과 함께 행정에
참여케 했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27년 10월조)
위의 인용문을 보아도 고구려의 인재들을 지배민으로 곧바로 썼다는 것을 증명
하고 있다. 이후의 기사에서도 고구려의 후예들이 중국의 중앙정권에 깊숙이 개
재하여 소왕국의 왕이 되고 있는 기록들이 보이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족은 중국의 지배민이 되어 중국민중을 길들이고 교화하면서 동
화의 길을 걸었을 뿐 변방 소수민족으로는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세 번째 논
점 '고구려의 후예들 대부분이 현재 중국의 소수민족에 속해 있다'는 말은 성립
되지 않는다.
오히려 본·말이 전도된 말이다. 고구려는 지금 중국이 수도로 사용하고 있는
북경을 외침을 막는 전방기지로 사용했으며 만주지방을 텃밭으로 삼아 생존했
던 왕조다. 지금 만주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을 만주족이라 분류한 것인데 이런
분류는 훨씬 후의 일이다. 따라서 지금 만주족을 고구려족이라 하면 안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꼭 짚어 보아야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인간 생존에 깊이 관
여하는 기후나 풍토의 영향으로 중국쪽으로 간 고구려의 후예들이 갑자기 그 수
가 많아져 본국보다 더 많은 인구가 되었을 경우에 대한 문제이다. 이런 경우
누가 종주국이냐를 놓고 싸운 것은 과거에도 있었다. 언제나 종주국이 아닌 지
파가 종주국을 멸하여 종주권을 확보하는 수순으로 역사는 전개되어 왔다. 그러
나 그것은 힘의 논리를 앞세워 일시적으로는 그렇게 되게 강제할 수 있었지만
종국에는 언제나 실패했다.
가지는 몸체가 될 수 없다. 가지 많은 나무의 몸체는 한 두 가지가 죽는다고
같이 죽지 않는다. 땅속에 뿌리를 깊이 박은 나무일수록 많은 가지를 내며 그
많은 가지는 위험으로부터 몸체를 보호하다 죽기도 하고 기형이 되어 더욱 더
자라는 수도 있다.
우리는 단군족이다. 단군족이 건립한 왕조는 수 없이 많다. 그들은 모두 제
할 일을 마치고 화석이 됐다. 그러나 단군족의 뿌리와 몸체는 비록 늙긴 했으
나 이렇게 건재하고 있다. 그 많은 가지 중 하나인 고구려의 인민대중이 중국
의 지배민이 되어 살아 있다해서 몸체인 우리가 중국이 된 것은 아니다. 고구려
라는 가지가 바위를 뚫고 저쪽으로 나서선 그쪽 토양에 맞게 생존해 가고 있을
뿐 그 활동은 몸체인 우리에게 많은 자양분을 아직도 주고 있는 것이다.
가지가 너무 커져서 몸체가 부러질까 걱정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
만 중국은 우리의 가지이다.
따라서 중국학자 손진기 선생이 주장한 '고구려는 중국에 속한다'는 이론은
본·말이 전도된 이론이라 가치 없다.
고구려역사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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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도 [고구려는 중국에 속한다]는 주장에 승복하겠는가-이제 물었든 사람이 답할 차례다 (오종철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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