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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에는 유독 룽다와 타르초가 펄럭인다. 길을 가득 채울 정도로 줄줄이 매달린 색색의 룽다를 보면서 정성을 내다 건 사람들의 마음이 느껴진다. 룽다와 타르초가 걸린 길 사이로 걸어가면서 바람과 내가 함께 경전을 읽는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룽다와 타르초를 많이 접한 것도 아닌데 어느 덧 친근한 느낌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한동안 먼지가 나는 길이더니만 이번에는 진흙탕길이 이어진다. 그냥 생각없이 걷기도 힘든데 골라서 발을 내디뎌야 하니 더 힘이 든다. 하루에 해발고도 1000m를 올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체력도 그렇지만 고산증에도 취약해질 수 있다. 계속 되는 오르막에 진이 다 빠져 死鬪를 벌이고 있는 것 같다. 발을 질질 끌다시피 해서 남중패스(해발 3700m)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고문님과 만났다. 내가 우리 팀에서 꼴찌를 했으니 한참 기다리셨겠지. 그러지 않아도 늦었는데 오래 쉴 수는 없어 잠깐 쉬고 바로 출발했다. 이제는 상위뻥까지 계속 내리막길이란다. 마음이 한결 느긋해졌다.
가다 보니 길 옆에 축사로 보이는 허름한 건물이 보인다. 이런 건물을 보면 박범신의 소설 '촐라체'에서 주인공이 겨우 몸을 의탁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가축의 우리가 생각난다. 히말라야 등반 후 하산시 크레바스에 빠져 목숨을 잃을 뻔한 상황에서 빠져나와 기다시피 몸을 기댔던 곳,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라서 그랬는지 무척이나 실감이 났던 기억이 난다. 소설 속 축사와 비슷한 건물을 보면 그 생각이 난다.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인 상위뻥(上雨崩, 해발 3200m) 마을이 발 아래에 납작 엎드려 있다. 아이고, 이걸로 오늘 고생 끝이로구나. 절절 매며 무거운 몸을 끌고 오르던 길이 금세 아스라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묵을 객잔은 '徒步者家' '걷는 자의 집'이라는 뜻이겠지. 우리에게 딱 맞는 이름 아닌가 싶다. 낯선 풍경과 문화를 접하고 자신을 낮추기 위해 떠난 길, 고통스럽더라도 그렇기에 더욱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신과 만나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객잔에 방을 정하고 짐을 푼다. 2층 첫번째 방을 정했는데 수도꼭지가 고장이 났고 무선주전자가 없다. 옆방에 가 보니 거기는 샤워기가 작동을 안 한다나. 화장실도 좌변기가 설치된 곳에 와변기가 있는 곳에 제각각이다. 방마다 하나씩 문제가 다 있구만. 나란히 지어진 건물인데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차이가 나는지... 정말 웃음이 나온다. 한번에 건축자재를 가져다 지은 것이 아니라 형편 되는 대로 하나씩 증축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이 되는 대목이다. 없는 것은 옆방에서 빌려 쓰고, 때로는 그냥 견디기도 하고... 여기까지 와서 모든 것을 도시에서 하던 대로 하려고 하면 안 되겠지.
조금 쉬고 나니 저녁을 먹으란다. 해가 지자 기온이 뚝 떨어지는지 오한이 나서 다운자켓을 챙겨입고 식당으로 향한다. 오늘은 또 어떤 음식이 나오려나 걱정이 앞선다. 다행히 오늘 저녁은 찹쌀을 섞은 밥에 김치찌개가 나왔다. 얼큰하고 칼칼한 맛에 국물 몇 숟가락만으로도 밥 한 공기를 모두 비울 것만 같다. 고문님 약주 좋아하시는 것은 며칠만에 소문이 났는지 미스터 엄이 이 집의 家釀酒인 '칭커주(?)'를 가져와 맛을 보시란다. 고량주인데 수수로 담근 것이 아니라 찹쌀로 빚었다나. 다른 고량주와 달리 구수한 맛이 나서 한 잔 마신 술기운에 오늘밤은 숙면을 취할 수 있기를 빌어 본다.
저녁 자리가 길어지자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간다. 그러던 중에 조과장이 여행을 가서 엽서를 보내는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연이어 비슷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고지점장은 에베레스트 트레킹을 갔을 적에 남체에서 부인과 아들들에게 엽서를 보낸 것이 본인 귀국 날짜에 배달이 되었단다. 그 엽서를 받은 사람이 감동을 받았겠지. 여행지의 풍광이 담긴 엽서를 골라 몇 글자일지언정 정성껏 손글씨를 써서 보내던 것이 먼 옛날 일로 여겨진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손글씨도 거의 안 쓰고, 여행지 엽서를 받아볼 사람도 없는 삭막한 삶이 바로 우리 모습이구나. 낭만을 잃어버린 내가 스스로도 안쓰럽다. 쓸쓸하다.
여행지 상점가에서
그림엽서 몇 장 고를 때면
별달리 이름 환한
사람 하나 있어야겠다고
각별히 절감한다
이국의 우표를 붙여
편지부터 띄우고
그를 위해 선물을 마련할 것을
이 지방 순모실로 짠
쉐타 하나, 목도리 하나,
수려한 강산이 순식간에 다가설
망원경 하나,
유년의 감격
하모니카 하나,
최소한 일년은 몸에 지닐
새해 수첩 하나,
특별한 꽃의 꽃씨 잔디씨,
여수(旅愁) 서린 해풍 한 주름도 넣어
소포를 꾸릴 텐데
여행지에서
그림엽서 몇 장 고를 때면
불켠 듯 환한 이름 하나의 축복이
모든 그 삶에 있어야 함을
천둥 울려 깨닫는다
김남조의 < 그림엽서 > 전문
밤이 깊었다. 각자 잠자리를 찾아가는데 또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그런 중에도 눈망울 큰 별 몇이 우리를 내려다본다. 가만히 입 속으로 윤동주의 시 한 구절을 중얼거린다.'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첫댓글 여기 글은 하나도 안보입니다
컴퓨터가 역시 사람보다 1%쯤 부족한 듯. 속을 썩여 다시 올렸습니다.
숨겨진 글속에 이리 반짝이는 얘기들이 들어있었네요. 글 하나에 사랑과 글 하나에 회장님 회장님....
제가 감사 감사!!!